오(吳)나라의 삼부자 손견 손책 손권
3명의 일대기만 알아도 삼국지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삼국지속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들이다.
그들 한명한명의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어떠하였는지 살펴보자.
<진삼국무쌍의 삼부자>
손견(156년 ~ 192년)은 중국 후한 말의 장수이자 오군 부춘현 출신이다.
자는 문대(文臺)이며, 손책, 손권의 아버지이다. 춘추 시대의 명장 손자의 후손으로 오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기도 하다.
184년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군사를 이끌고 참전, 반란이 끝나자 별부사마를 제수받았다. 이 때 손견은 장온의 부장이 되어 참전했는데 동탁의 됨됨이를 일찌감치 간파하고 장온에게 "동탁은 군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됨됨이도 엉망입니다. 지금 군율을 물어 죽이지 않으시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조언하기까지 했지만 장온은 동탁과 이민족들과의 관계를 들어 거절했는데 나중에 장온은 동탁이 보낸 자객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동탁이 베푸는 잔치를 진행하는 도중 여포가 장온을 끌고가서 죽였다고 한다. 뒤이어 장사에서 구성이란 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단 23일 만에 진압하여(연의에서는 50일이라 한다.) 장사태수 겸 오정후로 승진하였다.
190년에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선봉으로 나서 사수관으로 진군하였는데, 그곳을 지키던 동탁군의 도위 화웅과 맞붙어 양인이라는 곳에서 일기토로서 참살한다. 손견의 무예는 여포와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 손견은 여포를 제외하고 동탁의 진영에서 가장 무예가 뛰어난 화웅을 일기토로서 척살했는데 화웅은 손견을 맞이하여 몇합 못 버티고 손견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에 동탁은 여포를 출진시켰지만 여포 조차 손견을 쓰러뜨리지 못했다. 반동탁 연합군에서는 손견이 잘싸운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못한 채 동탁의 군사력이 별것 아니라고 판단하여 공융은 무안국을 보냈으나 무안국은 여포를 상대로 얼마 못버티고 한쪽 팔이 잘려 도망쳤고 제북상 포신은 동생 포충을 출진시켰지만 살해되었다. 동탁군은 손견이 이끄는 반동탁연합군의 선봉군에 계속 고전했고 급기야 동탁은 손견을 무서워한 나머지 당시 한의 수도인 낙양을 포기하고 장안으로 도주하게 된다. 이때 동탁의 참모 이유는 그냥 도망치치 말고 낙양에 불을 지르라고 조언했고 이는 바로 채택되었다.
동탁이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할 때, 손견은 불타는 낙양성의 화재를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낙양 재건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때 손견은 낙양 궁전인 건장전 근처 우물가에서 궁녀의 시체를 끌어올려 황실의 가장 소중한 보물인 전국옥새를 찾아냈다. 그러나 《정사 주석》을 단 배송지는 〈어찌 손견과 같이 충의로운 사람이 전국옥새를 찾고 도망치겠는가〉라며 손견을 비하하려는 잘못된 기록이라고 부정하고 있다.
원술은 유표가 자기 말을 듣지 않자 손견에게 유표를 치라고 요청한다. 손견은 동생 손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표의 영지를 공격하여 두 개의 성을 점령하였으나 유표의 양양성을 공략하던 도중에 그 참모 괴량의 계략에 빠져 계곡에서 바위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7세였다.
<만화 창천항로의 삼부자>
손책(175년 ~ 200년 4월)은 자가 백부(伯符)로 중국 후한 말의 군웅이다. 손견의 장남이자 오 대제 손권의 형이다.
손책이 17세 때, 손견 사후 손책은 원술(袁術)의 휘하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수하들과 함께 모의, 손견이 낙양에서 얻었던 옥새를 원술에게 헌상하는 대신 군사를 빌렸다. 손책은 이 군대로 양저우에 근거하던 왕랑, 엄백호, 유요 등을 공격, 강남을 평정하였다. 젊은 시절, 이와 같은 손책의 용맹은 그를 소패왕(小覇王)이라 불리게 하였다. 손책이 양주를 평정한 후, 원술이 손책에게 받은 옥새를 이용하여 제위에 오르려 하자 이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결국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고 성(成)을 건국하자, 조조는 손책의 원술 제위 등극 반대를 알고 손책과 손을 잡는 편이 이롭다 하여 그를 오후(吳侯)에 봉하고 혼인관계를 맺었다. 그래서 손책의 동생과 조인의 딸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사마를 요구하는 손책의 청을 조조가 거절하여, 두 세력의 사이는 냉소적으로 변하였다.
200년 조조와 원소(袁紹)가 관도에서 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손책은 허창을 기습, 헌제(獻帝)를 옹립하려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기 전에 죽었다.
<창천온라인의 삼부자>
손권(孫權, 182년 음력 5월 18일 ~ 252년 음력 4월 16일)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자는 중모(仲謀),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대황제(大皇帝)이다.
200년, 형 손책이 급사하자, 오후(吳侯)의 자리에 올라, 강동을 다스렸다. 수성(守成)의 명수로 평가되고 있다.
손책은 후사를 19살의 손권에게 부탁했다. 손권은 형의 죽음을 슬퍼해 울음을 그치지 않았는데, 손책의 장사(長史)였던 장소는 그를 격려해 상복을 벗게 하고 말에 태워 진영을 시찰하도록 했다.
조조는 손책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손권을 공격하려 했지만, 오나라의 사자로 허도에 머물고 있던 장굉은 오히려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며 조조를 설득했다. 그래서 조조는 손권을 토로장군에 임명하고 회계태수를 겸임시켰다.
같은해 형주목 유표가 죽자 조조는 형주를 침공하고, 유표의 후계자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한다. 남쪽으로 도망온 유비는 제갈량을 손권에게 사자로 보냈다. 손권은 개전과 항복을 놓고 결단하지 못했는데, 제갈량에게 설득당해 유비와 동맹을 체결하여 조조와 싸우기로 결정하였다. 그 무렵 조조로부터 “이번에 수군 80만의 군세를 정비하여 그대와 오나라 지역에서 사냥을 하고 싶다”라는 편지가 당도했다. 군신들은 항복하지 않으면 토벌하겠다는 조조의 최후통첩으로 알고 두려워했다. 장소 등이 항복을 주장하며 신료들 간에 논의가 길어지자 손권도 차츰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항전파 주유의 한마디로 개전을 결의, 손권은 책상 모서리를 칼로 자르며 “앞으로 항복을 입에 담는 자는 이 책상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이라며 단호한 의지를 표명했다. 전황은 조조 진영에서 역병이 돌고 황개의 거짓항복이 조조에게 통해서 싸움이 우세하게 전개되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적벽에서 조조군을 완전히 격파하였다.
213년 조조가 유수를 침공하자, 손권은 이를 저지하며 1개월 넘게 서로 대치하였다. 당시 손권은 몸소 배에 올라타 조조의 진영을 시찰하러 나섰다고 한다. 손권의 시찰단은 무기나 대오 등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 없이 완벽히 정돈된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본 조조는 “자식을 낳는다면 손권과 같은 자를 원한다”라고 칭찬하며 군사를 퇴각시켰다고 한다.
214년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자 손권은 형주 반환을 요구했다. 이에 유비는 양주를 손에 넣으면 돌려주겠노라 답한다. 이에 화가 난 손권은 여몽을 파견해 장사, 영릉, 계양 세 군을 무력으로 탈취해 형주를 지키는 관우와 대립하게 된다. 그러나 조조가 한중을 침공해 왔으므로 유비는 익주를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손권과 화해하였다. 이리하여 형주를 동서로 분할해 동쪽을 손권이, 서쪽을 유비가 다스리게 되었다.
그후 손권은 합비를 10만 군세로 포위했는데,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하다가 장료에게 기습당했다. 손권의 군사는 뿔뿔이 흩어지지만, 능통의 분전으로 겨우 궁지에서 벗어났다.
217년 손권은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이는 형주를 둘러싼 유비와의 불화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219년 관우는 조인이 지키는 양양을 포위했다. 구원에 나선 우금마저 패하고 투항하여 조조가 곤경에 처하게 되자, 이때 손권이 충성의 증거로 관우를 치겠다고 조조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리하여 손권은 관우의 배후를 쳐 형주를 평정하고 그를 사로잡아 처형했다.
220년 조조가 죽자 그의 아들 조비가 헌제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문제)로 즉위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촉한의 유비도 제위에 올랐다. 손권은 계속하여 위나라에 신하의 예를 갖춰 문제로부터 오왕으로 봉해진다. 같은 해 7월, 유비가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를 침공하자 손권은 육손을 총지휘관에 임명해 방어케 하였다. 그리고 이 틈에 위나라로부터 침략 받지 않도록 자주 사자를 파견했다. 이때 문제가 상아, 진주, 공작 등 귀한 진상품만을 헌상할 것을 요구하자 가신들이 일제히 분개하며 거절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손권은 “백성들의 목숨이 나 한 사람의 결단에 달려 있다”라며 이를 물리치고 바라는 물품을 모두 보내줬다고 한다.
222년(황초 3년) 육손이 화공으로 유비군을 격퇴시켰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위나라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문제가 손권의 자식을 조정 관직에 취임시켜주겠다는 명분으로 인질을 요구했고, 손권이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나라는 오나라를 침공하고, 오나라는 촉한에 사자를 파견해 다시 우호관계를 수복하였다. 229년(황룡 원년) 손권은 여러 신하들의 권고로 마침내 황제에 즉위하였다.
<만화 삼국전투기에서 삼부자>
233년 요동의 공손연이 사자를 파견해 손권에게 번국의 예를 갖추었다. 손권은 답례로 병사 1만 명을 이끌고 금은보화를 공손연에게 보내도록 하고 배를 타고 요동으로 향했다. 승상 고옹 등은 아직 공손연이 신뢰할 만한 인물인지 알 수 없다며 반대했지만, 손권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사자를 파견했다. 과연 공손연은 손권의 사자를 죽여 그 목을 위나라로 보내고, 오나라의 군대와 재물을 탈취했다. 손권은 격노하며 공손연을 토벌하려고 했지만 주위의 만류로 겨우 제지된다.
241년에 황태자 손등이 죽자 후계 선정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손권은 처음에는 손화를 다음 황태자로 삼았지만, 손패도 아껴 그를 노왕에 봉하고 황태자와 동등하게 대했다. 그래서 신하들은 손화파와 손패파로 분열되었다. 고옹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된 육손은 “적자와 서자의 대우에는 차별을 두어야 한다”라고 자주 상소했다. 그래서 손패파에게 죄가 날조되어 유형에 처해지고 만다. 손권이 문책 사자를 보내 추궁했으므로 육손은 분을 이기지 못해 죽게 된다. 그래서 후계 싸움은 더욱 격화되어갔다.
250년 손권은 양쪽 모두 벌하는 형식으로 손화를 황태자에서 폐하고, 손패에게는 자결을 명한 뒤 그 일당을 모조리 처형했다. 그리고 막내 손량을 황태자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손화 폐위를 간언한 신하 수십 명을 처형하거나 유배보냈다.
252년 4월, 제갈각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71살의 나이로 서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