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평범한 20대 여자입니다. 고민이 있는데 주변에 상의할 어른이 없어 여기에 글을 올립니다. 판은 처음이라 혹시라도 규칙을 어긴 점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저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둘째입니다. 어머니는 50대 초반이신데 50대 이야기 카테고리는 그다지 활성화되지 않아서 여기 쓰는 거고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아주 현명한 여성이셨습니다. IMF를 직접 겪으셔서 절약 습관이 투철하시고 인망도 넓으셨어요. 저와 언니에게 늘 다른사람의 장점을 보라고 가르쳐주신 분입니다. 저에겐 어머니가 아주 큰 사람이었어요.
전 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헛된 생각을 품어선 안되며, 자식으로서 그분들의 흠집을 외면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저에게 부모님은 종교였고 신앙이었어요. 덕분에 저는 만화책에서나 나올법한, 이성에 전혀 관심이 없고 독서와 음악을 즐기며 공부잘하는 유교걸로 컸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대학교에 가면서 상황이 변했습니다. 원래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가 나쁜 편인데, 전 늘 중재하고 두 분이 싸울만한 상황을 재빨리 무마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두 분이 받는 스트레스를 저에게 풀 수 있도록 수다를 들어드리고 가끔 저를 혼내도록 유도했어요.
근데 제가 수능을 망쳤어요. 어머니는 이 세상을 저로 인해 겨우 버티고 있었는데(언니랑 데면데면하세요) 제가 별볼일없는 대학교에 간다고 난리가 나셨습니다. 대학교 기숙사 들어가기 전 몇 달간 볕이 잘 드는 거실 바닥에 꿇어앉아 어머니 설교를 계속 들었습니다. 저에 대한 원망, 너희 언니는 다 잘했는데 넌 왜 이러냐는 뉘앙스, 밖에서 얼굴을 어떻게 들고다니냐는 한탄 등등. 그래도 제가 잘못한 것이니 참았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돈을 풍족하게 대주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 아니잖아요. 투자를 해줬는데 그 주가가 확 떨어졌으니 황망해하는 것도 이해가 갔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자 저는 신세계를 맛보았습니다. 제가 사고싶은 것을 사고, 온전한 제 공간을 보장받는 게 그렇게 큰 줄 몰랐어요. 정말이지 차원이 다르더라고요. 저는 제 대학생활에 완벽하게 만족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매일 전화하셔서 제가 반수를 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님 편입을 하거나요. 저는 그때까지도 어머니께 반항할 줄을 몰라서 알겠다고 했습니다. 강요하는 게 아닌데 너무너무 길고 집요하게 설명해서 상대방이 결국 '응'이라고 대답하게 하는 화법 아시나요? 저희 어머니가 딱 그러세요. 반수를 승낙했더니 매일매일 공부를 체크하시더군요. 무슨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독서실은 몇 시에 나왔는지, 유튜브에 요즘 수능 성향같은 건 틈틈이 살피고 있는지 등등. 사람이 미치겠더라고요.
저는 이때까지 어머니가 세세하게 챙겨주시는 게 좋았습니다. 제가 워낙 무던하고 둔해서 평소 놓치는 게 많아요. 그래서 저 대신 신경써주시는 게 다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대학 가서 제가 변했는지, 그게 너무 못 견디겠는 거예요. 제가 영화 하나를 봤다고 하면 '그 시간에 영화를 봤다고? 너무 해이해진 거 아니니?', 제가 친구와 신기한 카페에 갔다고 하면 '그 친구는 대학생인데 자기 할 거 안해?' 등등.
그리고 어느날, 어머니가 또 잔소리를 하시며 '그럴거면 그냥 때려쳐!'라고 하셨어요. 근데 어리숙한 저는 또 '아, 알겠어... 그냥 그만할게...'라며 꼬리를 내렸어요. 사실 어머니 화법은 그게 아니었는데 제가 그걸 눈치못채고 항복한 거죠.
종내에 저는 어머니 전화를 피하기 시작했어요. 이틀에 한 번꼴로 받았죠. 그랬더니 어머니가 분기탱천하셔서 후레자식이냐고 소리를 지르시더라고요. 학과 선배들과 과방에서 밤늦게까지 놀다가 전화를 받았더니 창녀냐고 쏘아붙이고, 제가 인생 처음으로 사본 짧은 치마를 보며 네 코끼리 다리로 그걸 입고 다니냐며 압수하셨어요.
처음에는 어머니니까, 날 사랑해서 하시는 말씀이니까, 라고 생각하며 참았어요. 제가 빌미를 제공했으니까 비난받는 게 당연하잖아요. 게다가 저 위에 쓴 글도 다 제 관점이지 어머니 관점으로 보면 제가 석고대죄해야 할 죄인일 수도 있고요.
그렇지만 사람은 환경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더군요. 주변 사람들이 자꾸 저보고 왜 그렇게 사냐고, 미련하다고 하는 거예요. 아무리 어머니라지만 그렇게 절대적인 공경은 할 필요가 없다고요. 저도 짜증나면 짜증내고, 가끔 분풀이도 할 수 있는 거래요. 다른 애들은 다 그렇게 한대요. 밖에서 스트레스 받으면 어머니한테 소리지르고 화내고, 나중에 사과드린대요.
네, 그래서 결국 저도 변했어요. 물론 아직도 어머니한테 싫은소리는 못 합니다. 그렇지만 전화를 받으면 상처받기 싫어서 그냥 대충 흘려듣고 하고싶은 게 있으면 어머니가 안 좋아하실 게 분명한데도 그냥 해버려요. 어머니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마음은 몇 년 전 눈녹듯이 사라져버렸어요.
저는 이렇게 변한 제 모습이 만족스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물론 저야 행복하죠. 그렇지만 어머니는 제가 집을 떠나자 우울증에 걸리셨고, 나이가 나이인지라 갱년기도 오셨고, 건강도 좋지 않으세요. 성격도 많이 변하셔서 자주 울고 툭하면 화를 내세요. 감정 조절을 못하시는 것 같아요. 저보다 심적으로 약자가 되신 셈이죠. 제가 마음이 조금만 더 여유로운 큰 사람이었으면 어머니를 계속 포용할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쉽게 포기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어머니와 전화하면... 그 마음이 또 흔들립니다. 통화할 때마다 저를 비난하고 제 앞날을 과하게 걱정하고(사실 저주처럼 들립니다) 저로 인해 무너진 체면과 자존감을 한탄하며 우시는데... 그걸 들을 때마다 '남을 통해 세운 자존감이면 그냥 무너지는 게 낫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너무 지긋지긋하고 질려요.
요즘은 제 진로에 대해서 참 많은 말씀을 하시는데, 마음같아선 신경을 꺼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너 알아서 해라. 네가 망해도 네 인생, 네가 흥해도 네 인생' 이렇게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근데 그 말을 자식으로서 어떻게 하나요... 용돈과 제 생활비로 협박하시기도 하는데, 그 돈 정말 감사히 받고있지만 부모로서 용돈도 아니고 생활비로 왈가왈부하시는 게 조금 비겁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근데 또 투자받는 입장에서 주주 의견도 들어줘야하는 세상 이치에 따라 어머니 잔소리도 일부 반영해드리는 것이 맞긴 하거든요. 성인 되면서 모든 생활을 자기 스스로 해결하는 떳떳하고 멋진 사람들이 참 많은데 돈은 돈대로 받고 제 뜻은 제 뜻대로 펼치고 싶어하는 저도 참 애송이고 생각이 어린 거죠. 아무리 제가 알바하고 있고 그 돈은 취준하는 데 들어가고 있다지만 어쨌든 받는 건 받는 거니까요.
장성한 아들딸이 있는 부모님들께 묻고 싶습니다. 저는 변할만했나요? 남은 평생 이런 마음가짐으로 어머니를 봐도 되는 걸까요? 아니면 제가 옳지는 않지만 이해는 되시나요? 그냥 제가 너무 철이 없어서, 어머니 마음을 너무 몰라주고 버릇없는 또래에게 휩쓸린 건가요?
저는 아직 애를 가져본 적이 없어서 부모님 마음을 너무 모르겠습니다. 특히 어미된 입장에서 자식을 볼 때의 마음을요. 조금 한심하고 바보같은 짓을 하더라도 지켜봐주실 수는 없나요? 자식이 넘어지고 다치고 스스로 일어나는 그 시간이 영겁처럼 길게 느껴져서 도저히 두고보실 수가 없나요? 자식이 평생 할만한 일이 뭔지 찾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때로는 시원하게 그만두는 것이 다 시간낭비로 느껴지고 거기에 들어간 돈이 너무 아까우신가요?
글이 너무 길어졌군요.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부디 현명한 답변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