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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점기 일제 가장 두려워한 무장 단체 의열단

ooooooooo |2021.11.19 13:04
조회 107 |추천 1

 

의열단에 대한 소개

 

의열단. 1919년 김원봉이 조직한 독립단체이다.

철저하게 자신들을 어둠속에 감추고 일본의 고관들을 암살한 후 유유히 사라져가던 그들.

그들은 자신들의 행적을 단 한줄도 스스로 남기지 않았으며 같은 단원끼리도 되도록 사적인 이름이나 무슨 작전을 펼치는지 숨겼다고 한다.

서로 무언가를 알 수 있는 상황이 와도 절대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잡히면 여러사람의 정보가 새어나갈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열단은 당시 식민지 조선 청년들의 희망이자 별이였으며 일본에게는 공포이자 절망이었다.

그 예로 임시정부는 몰라도 의열단은 안다는 민중의 기록이 있다.

 

 

의열단의 의의

 

국제적으로 소외 받고 일본의 문화정책으로인해 조선의 민족주의가 점점 말살되고 있을 때

그들은 친일인사를 한명이라도 더 암살하려고 노력했다.

이는 실로 놀라운 효과를 가졌으며 단원들은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민족을 위해 바쳐  이를 계기로 국제 사회의 관심도 받았고 민족주의를 조선인들에게 다시 한번 심어 주어 광복의 희망을 다시 살릴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다.

 

 

의열단의 단원들

 

김원봉(金元鳳)·  윤세주(尹世胄)·  이성우(李成宇)·  곽경(郭敬)·  강세우(姜世宇)·

이종암(李鐘岩)·  한봉근(韓鳳根)·  한봉인(韓鳳仁)·  김상윤(金相潤)·  신철휴(申喆休)·

배동선(裵東宣)·  서상락(徐相洛)·  권준(權俊)

 

의열단의 단장은 김원봉이 맡았고 파괴 대상으로는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의 중요기관을 선정하고 이 시설에 대한 폭파를 의도했다.

이를 위해 의열단은 폭탄 제조법을 배웠지만 사제 폭탄이라 그런지 불발탄이 많았다.

일본이 독립투사들을 잡아다 고문을 자행하고 강제로 감옥에 가두는 암울했던 시대에도 단원 13명은 의열단 조직 이후 광복의 그날까지 단 한명도 조국을 배신하지 않았다.

 

 

의열단의 행동강령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키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키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하처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하처에서나 조회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團義)에 진함

⑨ 일(一)이 구(九)를 위하여 구(九)가 일(一)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함

 

의열단의 주요 행적

 

이 행적 부분은 앞에서 말했듯이 의열단 단원이 스스로 밝힌 공식적인 기록이 없다.

그래서 단편적인 기록들 뿐이므로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조선총독부 폭파사건, 다나카 기이치 저격사건, 종로경찰서 폭파사건, 밀양경찰서 폭파사건, 도쿄 이중교 폭탄사건,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김달하, 박용만 등 친일파 암살, 그 외 많은 친일인사들을 폭사, 암살시켰으며 유유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의열단의 한계

 

의열단의 한계점은 무정부주의를 기반으로 했다는 것이며 무정부주의가 모든 기구는 일체 거부했다는 것이다.

의열단의 행동은 지극히 개인적 이어서 대규모로 활동할 수가 없었다.

반면 한인애국단은 자금 부족과 인재 부족으로 인해 개인 전술을 사용했지만 조직체계가 있어 체계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으나 문제는 국제적으로는 의열단이 테러 단체로 보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비운의 남북 분단이 일어났으니.

 

 

의열단의 비참한 최후

 

매국노는 3대가 재벌이고 애국자는 3대가 어렵다.

한국에서만 통하는 특이한 이 공식은 의열단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방 후, 의열단의 단장 김원봉은 임시정부 요인의 자격으로 귀국한다.

그는 새로운 나라를 꿈꾸고 있었으나 현실은 달랐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없었고 좌파우파가 나뉘어져 싸우고 있었다.

그는 미국의 신탁통치를 거부하며 좌파를 선택했고 당연히 의열단도 좌파로 흡수되었다.(사실 자세한 자료가 없다.)

10월 항쟁과 전평 총파업으로 검거되었던 김원봉은 친일경찰이었던 노덕술에게 조사 과정에서 뺨을 맞는 수모까지 당하게 된다.

일제 하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이러한 상황 속에 김원봉은 분노하고 좌절했다.


 (↓이 내용은 인물 현대사라는 프로그램에서 퍼온 부분)

결국 그는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참석한 뒤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

북한 정부 수립에 참여한 김원봉은 1958년 숙청 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2001년 2월, 김원봉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씨가 남북 이산가족 찾기를 신청하면서 그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집안 내력을 공개했다.

오빠의 월북으로 인해 ‘빨갱이 집안’으로 낙인찍혀 받아야 했던 고통, 김원봉에 얽힌 기억 등을 김학봉씨의 증언을 통해 들어본다.

 

 

이승만 정권시절부터 묻혀진 좌파 독립가들

 

의열단도 예외는 아니었다.

좌파를 선택한 의열단은 우파에서 철저하게 은폐했고 또 자신들이 선택했던 좌파에 대해서도 숙청을 당하게 되었다.

조직 설립 때부터 독립의 그날까지 단 한명도 배신하지 않았던 위대한 의열단원 13인.

이것이 그들의 최후였다.

 

 

의열단은 테러리스트였는가?

 

가끔 지식인에서 알카에다 테러 집단 같은 국제 테러범들과 의열단의 공통점을 묻는 걸 보았다.

그런데 다소 충격적이게도 답변자들은 의열단을 테러리스트로 몰고 가고 있었다.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의열단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독립 단체였다.

 

첫째로 의열단과 알카에다는 현재 처한 상황과 목적이 다르다.

의열단은 일본에 의해 국권이 침탈 당했을 때, 나라를 빼앗겼을 때 활동을 한 것이었고 알케에다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활동 중이다.

그들은 나라를 뺏겼다고 보긴 어렵고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이 이슬람 세력들에게는 눈엣 가시이자 적으로 보일 것이다.

 

둘째로 테러의 대상이 다르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의열단은 일본 고위층이나 친일파, 즉 나라를 팔아먹은 주범만을 암살한데 비해 알카에다같은 국제 테러집단은 민간인들의 피해가 엄청나다.

그 예로 빈 라덴의 주도 하에 미국 대사관이 폭파 당한 사건이 있었고 민간인 희생이 컸다.

역시 민간인들의 희생이 가장 큰 테러는 역시 9.11 테러.

9.11테러는 세계 경제까지 뒤흔든 엄청난 대사건이었다.

반면 의열단은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줬다는 기록은 단 한줄도 남겨져 있지 않으며, 위쪽의 의열단의 주요 행적을 보더라도 일제의 기관과 친일파를 처단한 것이지 일본의 민간인을 죽이지는 않았다.

이것이 국제테러집단과 의열단의 차이점이다.

의열단은 테러리스트가 절대 아니다.

 

 

의열단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

 

그들은 3.1운동을 주도했던 민족주의자 33인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들은 정작 3.1운동에 직접 참여하여 만세를 부른 사람들이 별로 없으며, 후에 친일파로 돌아선 자들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3.1운동을 주도햇던 민족주의자 33인이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 될 이유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의열단은 단 한명도 배신하지 않았으며, 철저한 비밀 관리를 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작전 수행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행적은 그들이 친일 인사를 암살한 후, 폭탄을 투하한 후 그 때 당시의 신문기사나, 혹은 역사 기록가가 남긴 기록에 만족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 의열단의 행적에 대해 논란이 많은 것이다.

그들이 직접 남긴 기록은 존재하지 않기에.

지금이라도 의열단이나 기타 독립단체에 대해 조직적인 연구를 통해 그들의 위대한 투쟁을 우리의 자라나는 대한의 건아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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