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틴 파워"는 1990년대 후반에 만들어졌던 B급 영화입니다.
007 제임스 본드식의 영국 스파이 영화지만 곳곳에 난무하는 저질 코미디가 사람 배꼽잡게 만들기도 하지요.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었는데, 악역인 닥터 이블이 악당이 되고자 하는 아들 스캇에게 실망하는 장면입니다.
"You are semi evil. You're quasi evil. You're the margarine of evil. You're the diet coke of evil. Just one calorie. Not evil enough. (너는 반쪽짜리 악당이야. 너는 모조품 악당이라구. 악당계의 마가린이지. 너는 악당계의 다이어트 콜라라구. 일 칼로리짜리. 충분히 악하지 않아.)"
당시만 해도 간단하게 끼니 때울 때면 마가린 한 숟갈을 밥에 비벼서 잘 먹고 있었기 때문에 '마가린이 뭐가 잘못되었다는 건가'라며 공감을 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버터를 주로 사용하다가 다시 마가린을 맛보곤 그 끔찍한 역체감에 치를 떨며 그제서야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요.
그리고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아예 프랑스산 에쉬레 명품 버터가 아니면 모두 가짜 취급하는 사람도 있으니, 바로 소설 "버터(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이봄출판사, 2021)"에 등장하는 연쇄살인마 가지이 마나코입니다.
"먼저 당신 집 냉장고에 무엇이 있는지 가르쳐주지 않을래요?"
"아, 저기, 야채주스하고 비타민 음료하고 마가린 정도일까요. 가지이 씨처럼 요리를 잘하지 못해서......"
"저기, 지금, 마가린이라고 했어요?"
"네, 버터보다 칼로리도 낮고... 아, 콜레스테롤이 낮아서 몸에도 좋지 않나요? 게다가 요즘 버터 구하기가 힘들기도 하고요."
"문제는 버터 맛도 모르면서 버터는 좋지 않다고 단정 짓는 거예요. 마가린이 훨씬 몸에 안 좋은데. 그런 모조품... 트랜스지방 덩어리라고요. 알겠어요? (중략)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한테 여자는 누구에게나 너그러워야 한다고 배우며 자랐어요. 그러나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어요. 페미니스트와 마가린."
* * *
이 소설의 주인공, 리카는 주간지 기자로 성공하기 위해 간신히 감옥에 수감된 가지이 마나코와 인터뷰 약속을 잡습니다.
하지만 냉장고 안의 내용물로 사람을 판단하는 연쇄살인마는 마가린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화부터 버럭 냅니다.
여자는 남자를 뒷바라지 하는 것에서 보람과 자부심을 느껴야 하고, 자신의 외모나 몸매가 뛰어나지 않은데도 여러 남자를 유혹할 수 있었던 것은 맛있는 요리를 해주며 따뜻하게 보살펴주었던 것이 비결이라고 자랑하는 가지이 마나코.
그래서인지 화학합성물인 마가린과 페미니스트를 연결시키며 '인위적이고 용납할 수 없는 대상'으로 정의내립니다.
그러더니 '나는 진짜를 아는 사람하고만 만나고 싶다'며 리카에게 '에쉬레' 버터를 먹어보라고 요구합니다.
* * *
얼버무리고 넘어가지 못할 만큼, 그녀는 엄숙하게 말했다.
"버터는 에쉬레라는 브랜드의 가염 타입을 써요. 마루노우치에 전문점이 있으니 거기에서 손에 들어보고 잘 확인해서 사면 돼요. 맛있는 버터를 먹으면, 난 뭔가 이렇게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엘리베이터에서 한 층 아래로 쑥 떨어지는 느낌. 혀 끝에서 몸이 깊이 가라앉아요."
그녀의 황홀한 듯 멍한 시선은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향해 있다.
* * *
겨우 버터 하나 가지고 너무 허풍떠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모님들이 모이는 프라이빗 요리 교실에서 프랑스 요리를 배운 사람이니 그럴만도 하다 싶은 생각도 듭니다. 버터는 프랑스 요리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영화 "줄리 앤 줄리아(2009)"에서는 초보 요리사이자 요리 블로거인 줄리가 프랑스 요리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냉장고 안에 큼지막한 버터 블록을 꽉꽉 채워넣는 것으로 묘사했을 정도지요.
당연히 프랑스에는 버터에 진심인 사람들이 많고, 프랑스산 고급 버터는 단지 뛰어난 맛 뿐 아니라 고유의 풍미를 만들어내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즈니, 프레지덩, 보르디에 등 여러 브랜드가 '프랑스산 명품 버터'라는 광고와 함께 판매되고 있습니다.
그 중 에쉬레 버터는 일본에서 워낙 명품 버터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는 바람에 우리나라에도 그 이름을 알린 케이스입니다.
"죽기 전에 꼭 먹어야 할 세계 음식 재료 1001(프랜시스 케이스 지음, 박누리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9)"이라는 책에 실리면서 그 유명세를 더하기도 했지요. 사실 그 책에 실린 재료들은 꼭 고급이라기보다는 지역 문화를 잘 보여주는 특색있는 음식이라는 느낌이 강하지만요.
그 맛과 가격에 거품이 얼마나 껴있는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루아르 지역의 좋은 우유만 골라서 티크나무 교반기에 넣고 돌려서 만든 버터인 만큼 그 풍미와 질감이 뛰어난 것은 분명합니다.
포플러 나무로 만든 양동이 모양의 상자에 넣어서 팔리는 것이 특징인데, 그램당 가격으로 계산하면 네모난 블럭이 가장 저렴하기 때문에 추천하기는 힘듭니다.
다만 인스타그램 갬성 사진용 분위기를 낸다거나, 손님을 초대한다거나, 에쉬레 버터에 대한 강연을 할 일이 있다면 한 번 정도 구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훌륭한 버터로 어떤 대단한 요리를 해먹을까 궁금한 것도 잠시.
가지이 마나코가 제안한 요리는 얼핏 보기엔 실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추천 메뉴라는 게 갓 지은 밥에 버터를 한 숟갈 올리고 간장을 살짝 떨어트린 게 전부인 '간장버터밥'이니까요.
하지만 정말 좋은 재료라면, 그 본연의 맛을 잘 느끼기 위해서는 최대한 단순한 요리를 만들어 먹는 게 좋은 것도 사실입니다.
송로버섯이나 캐비어의 맛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요리는 심플한 달걀 요리인 것처럼 말이죠.
* * *
버터를 한 조각 밥에 올렸다. 금세 쌓이기 십상인 편의점 도시락의 1회용 간장 봉지를 뜯어서 한 방울 떨어뜨렸다.
지시대로 버터가 녹기 전에 밥과 함께 입에 넣었다. 리카의 목 안에서 신기한 바람이 새어나왔다.
차가운 버터가 먼저 입천장에 서늘하게 부딪혔다. 갓 지은 밥과 버터의 대비가 질감, 온도와 함께 선명해졌다.
차가운 버터가 이에 닿았다. 부드럽게, 잇몸에까지 스며들 것 같은 식감이다.
정말로 황금빛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맛이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소하고 향기로운 큰 파도가 밥에 엉키며, 리카의 몸을 저 너머로 흘러가게 했다.
* * *
평소에는 집에서 밥도 해먹질 않아서 밥솥도 새로 사야 했던 리카. 간장 역시 1회용 간장을 뜯어서 사용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평소에는 요리에 관심도 없었던 사람조차도 감동시키는 새로운 경험.
그중에서도 특히 온도의 대비를 맛보는 장면은 작가가 미식가로서의 경험을 살려서 이 글을 썼음을 잘 보여줍니다.
마치 차가운 아이스크림 위에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붓고 둘이 완전히 섞이기 전에 그 뜨거움과 차가움을 동시에 느끼는 기분입니다.
평소에 자주 먹던 것일수록 진짜 맛있는 것을 먹었을 때의 감동은 크다는 말처럼, 간단하게 끼니나 때우며 먹던 간장버터밥도 애쉬레 버터를 사용하며 집중해서 먹으니 또 다른 감동을 안겨줍니다.
하지만 버터간장밥을 먹다 보니 갑자기 "심야식당(아베 야로 지음, 조은정 옮김. 미우 출판사, 2014)"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거리의 유랑악사 고로씨가 가끔 심야식당에 들러 먹곤 하는 버터간장밥.
차가운 버터를 그대로 음미하는 가지이 마나코의 방식과는 달리, 그는 밥을 젓가락으로 눌러 공간을 만든 다음 버터 한 조각을 넣고 다시 덮습니다.
그리고 "간장을 치고 가볍게 섞은 후, 여기서 30초 정도 뜸을 들여 버터를 녹이는" 방식을 고집합니다.
굳이 질감이나 미묘한 풍미를 살릴 필요가 없다면, 바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지금 당장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선 이쪽이 더 적절해보입니다.
어릴적 가장 먼저 '혼자' 해 먹은 요리가 버터간장밥이었기에 추억 보정이 들어가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부모님 안 계실 때, 처음으로 밥솥에서 밥을 뜨고 버터 한 숟가락에 간장 약간을 슥슥 비벼 먹으며 '나도 이제 혼자 밥을 해먹다니, 어른이 되었나보다'라며 자랑스러웠던 적이 있으니까요.
당시에는 버터의 질감이니 향이니 따질 생각도 없었으니 미식보다는 간편식으로서의 버터간장밥이 더 와닿는 이유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세상 모든 것이 다 자신만의 쓰임새가 있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프랑스산 고급 버터는 차가운 질감을 느끼며 먹고, 국산 버터는 밥과 섞어 고소함을 느끼며 먹고, 저렴한 마가린은 지하철 역 입구의 포장마차에서 토스트 굽는데 사용하면 되니까요.
남은 버터는 오랫동안 아껴먹기 위해 소분해서 냉동실에 얼려둡니다.
마가린은 냉동실에 얼리면 유지가 분해되면서 난장판이 되는 반면, 버터는 얼려두면 1~2년까지도 보관이 가능합니다.
비록 소설에서는 버터간장밥을 추천하지면, 개인적인 취향에는 역시 바게트 한 조각 썰어서 딸기잼 한 스푼과 함께 얹어먹는 편을 선호합니다.
약간은 차가운 기운이 남아있는 버터와 바삭한 빵과 달콤한 잼이 입 속에서 섞이며 만드는 하모니는 애니메이션 '라따뚜이'의 레미가 딸기와 치즈를 함께 먹으며 머릿 속에서 불꽃놀이 터뜨리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거든요.
다만 버터는 기본적으로는 딱딱한 주제에 워낙에 금방 녹으면서 미끌거리기 때문에 자를 때 조심해야 하는 식재료 1순위입니다.
한 번 호되게 베이고 나서 얻은 교훈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버터에 대한 장광설을 푸는 것으로 도서관의 음식문화 특강 준비를 마쳤습니다.
가지이 마나코는 남자를 세 명이나 죽였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남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여자의 본분이자 매력'이라고 외칩니다.
마치다 리카는 기자로서 인정받기 위해 한편으로는 연쇄살인마와의 인터뷰를 해치울 정도로 남성적인 면모를 보여줘야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예쁜 외모와 멋진 몸매를 강요하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성을 어필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사로잡힙니다.
이러한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버터는 굉장히 다양하게 해석됩니다. 남자를 위해 맛있는 요리를 하고 싶어? 버터를 사용하세요. 남자 눈치 보지 않고 내 행복을 찾고 싶어? 버터를 드세요. 여자는 자연적으로 모성애가 있는, 남을 보살펴주는 생물이예요. 천연재료로만 만들어지는 버터처럼요. 여자는 가부장적 사회의 부속품이 아니라 스스로 성장하며 행복할 권리가 있는 삶의 주체예요. '시녀 이야기'에서 자유와 해방을 상징하는 버터처럼요.
소설에서 음식이 어떤 소재로 사용되고, 또 작가가 굳이 그러한 음식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살펴보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 견본이었지요.
코로나 때문에 교실에서 시식할 수는 없으니 집에 가서 가족들과 함게 맛볼 수 있게 견본으로 조그만 애쉬레 버터와 서울우유 버터, 그리고 마가린도 샘플로 준비해서 나눠줍니다.
어디서 어떤 제품을 구입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마가린은 그램당 3.3원, 버터는 그램당 20원, 그리고 애쉬레 버터는 그램당 72원 가량 합니다.
그 경악할만한 가격 차이를 감수하고서라도 국산 버터 대신 프랑스산 버터를 사용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대다수의 사람은 고개를 저을 겁니다.
하지만 그 맛의 차이를 한 번이라도 경험하고 나서 '그 정도의 값어치는 없는 것 같다'고 판단하는 것은, 먹어보지도 않고 '뭐하러 굳이 그런 비싼 버터를 사냐?'고 단정짓는 것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열 명중의 한 두명 정도는 "나는 그래도 가끔씩이라도 그 비싼 돈 주고 먹고싶다"는 사람도 나오고, 그렇게 음식과 책으로 세상을 넓혀가는 사람들을 보며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는 저같은 사람도 있는 거지요.
"시중에서 파는 버터라는 이름이 붙은 물건 중에 상당수는 식물성 유지를 섞어 넣은 모조품이니 우유 크림만 사용한 버터를 구입하시라"는 조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수업 후기가 많은 걸 보며 현실의 벽이 높다는 걸 실감하기는 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