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샹그리아에 사용할 민트 수확하면서 살짝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제가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이 음식문화 특화 도서관이다보니 도서관에 텃밭도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직접 운영한다기보다 건물 옥상에 조성된 도심 텃밭 영역 중 일부를 할당받아서 이용자들에게 신청 받아 문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활용하고 있지요.
정말 오만잡다한 책이 다 있다보니 원예 관련 서적 뿐 아니라 작물의 역사, 분포, 이에 얽힌 이야기와 문학 작품까지 엮으려면 못 엮을 게 없는게 도서관 문화 프로그램의 장점입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직할(?)로 운영하는 텃밭 상자도 두 개 있습니다. 사서들이 돌아가며 물을 주고 관리하지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업무 시간에 잠깐 나가서 물 뿌리고, 눈에 띄는 잡초 제거하는 정도인지라 그렇게 육체적으로 큰 노동은 아닌 반면에
정신적으로는 쑥쑥 자라는 식물들을 보며 바깥바람 쐰다는 측면에서 굉장히 좋은 영향을 주는 업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늦봄까지는 '얘네들이 언제 자라나' 싶었는데 무더위가 시작되면서부터는 그야말로 미칠듯한 속도로 자라기 시작하네요.
그렇게 해서 첫 수확은 상추를 비롯한 각종 쌈채소. 상추, 치커리와 케일이 메인입니다.
예전에 실내 스마트팜 돌리면서 느낀 거지만, 소규모로 직접 재배한 잎채소는 확실히 더 부드럽고 연한 느낌입니다.
한 봉지 가져온 흙 묻은 채소를 물로 깨끗하게 씻어줍니다.
그리고 고기를 굽습니다.
삼겹살을 소금과 후추만 뿌리고 구워서 다른 소스나 부재료 없이 쌈채소 몇 장 위에 고기만 서너점 얹어 한 입에 집어넣고 우걱우걱 씹어 삼킵니다.
쌈장이나 마늘, 밥 없이도 엄청나게 맛있는 한 끼입니다.
직접 기른 채소라서 더 각별한 기분 탓일까요.
도서관 문화 프로그램 중에 '밥, 김밥, 비빔밥'이라는 주제로 진행을 했는데 이 때도 도서관표 쌈채소가 활약을 합니다.
밥에 날치알, 참치통조림, 직접 볶고 무친 당근채와 콩나물, 그리고 가늘게 썬 채소를 올려줍니다.
달걀 후라이 한 개 하고 밥가루 뿌린 다음 참기름과 국간장 살짝 둘러서 비벼먹습니다.
비빔밥 싫어한다던 아이들이 너무나 맛있다며 집에 가서 또 먹어야겠다고 춤추며 돌아가는 모습에 보람을 느낍니다.
상추를 직접 길러본 사람만 아는 사실 한 가지는, 이놈이 엄청나게 잘 자란다는 겁니다.
이파리를 한웅큼씩 뜯어내고 먹어도 며칠 지나보면 잎사귀 뜯긴 줄기 위로 또 다시 그만큼이 자라있습니다.
고기 쌈싸먹고 비빔밥 만들어 먹어도 생산량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을 정도지요.
그래서 오이미역냉국 만들면서 썰어서 넣어봤습니다.
상추가 찬 성질을 갖고있다고 하니 더운 여름에 시원한 냉국 먹을 때 넣어 먹는 것도 좋네요.
그렇게 상추를 먹고 있노라면 어느덧 감자의 알이 굵어집니다. 제법 주먹만한 녀석부터 조그만 달걀 크기까지 각양각색입니다.
항상 마트에서 일정한 크기의 감자만 보다가 이렇게 밭에서 갓 캐낸 감자를 보니 기분이 새롭네요.
어디선가 "느 집엔 이거 없지?"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역시나 처음으로 맛볼 때는 재료 본연의 맛을 즐기는 식으로.
감자를 쪄서 소금만 조금 찍어먹고, 그러다가 심심하면 버터 얹어서 녹여 먹으면 꿀맛입니다.
포슬포슬하면서도 고소한게 강원도 지역화폐 5천원권은 될 듯 합니다.
아침에 한바구니 해놓고 나갔는데 돌아와보니 애들이 다 먹어치운 건 안자랑.
예전에 도깨비 시장에서 구입했던 콘비프 통조림과 함께 볶아서 콘비프해시를 만들기도 합니다.
양파를 볶다가, 깍둑썰기한 감자도 볶다가, 콘비프도 넣고 함께 볶다가, 달걀 후라이 하나 얹으면 끝인 간단한 요리지요.
우리나라 감자와 미국 감자의 종이 달라서 완전 똑같은 맛은 아니지만, 이건 또 이거대로 맛있습니다.
다음에는 장조림 캔을 넣어서 한국식 콘비프해시를 만들어봐도 재밌겠네요.
당근, 양파, 감자가 모이면 할 수 있는 게 무진장 많습니다. 심지어는 이 세가지 재료를 중심으로 하는 요리책이 있을 정도지요.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친숙한 건 역시 카레입니다.
물을 거의 붓지 않고 채소의 자체 수분을 활용하는 저수분 카레.
여기에 강황 좀 더 넣고, 토마토 케첩 한 바퀴 둘러서 '인스턴트지만 완전히 인스턴트는 아닌' 요리를 합니다.
감자 요리 몇 번 하는 동안에도 상추는 끝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래서 상추를 끝장내는 최종병기, 상추 장아찌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간장, 식초, 설탕 등을 끓여서 식힌 다음 상추에 부어주기만 하면 완성입니다.
하루나 이틀 정도 기다려서 먹으면 짭짤새콤하면서도 잎부분은 깻잎 장아찌 먹는 느낌에 줄기 부분은 아삭한 식감이 살아있는 맛있는 장아찌를 먹을 수 있습니다.
상추를 아무리 많이 넣어도 숨이 죽으면 부피가 확 줄어버리고, 무엇보다도 오래 두고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남아도는 상추를 처리하는데 제격입니다.
원래는 2일, 5일, 10일 째에 간장 걸러내어 따로 끓여서 식힌 후 다시 붓는 식으로 보존기간을 늘리는데 워낙 맛있다보니 5일차까지는 가지도 않네요. 이거 한 장을 밥에 싸서 먹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없거든요.
이렇게 감자와 상추로 전반전을 끝내는 동안 토마토가 점점 익어갑니다.
토마토 수프와 샐러드를 먹다보면 토란 수확시기가 다가올테고, 토란대 무침과 토란찜을 먹노라면 어느덧 가을이 찾아오겠지요.
이렇게 말하니 일년 내내 먹는 생각만 가득한 사람 같네요.
오 헨리 역시 그의 단편 "식탁에 찾아온 봄"에서 "더 이상 굴 요리를 즐길 수 없다는, 다소 천박한 방법으로만 그 무딘 가슴속에 봄을 맞이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썼으니까요.
하지만 어떻게 보면 식탁 위의 제철 음식이 바뀌는 것이야말로 계절의 바뀜을 온 몸으로 체감하는 방법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눈으로, 코로, 혀로, 그리고 음식이 끄집어내는 기억 속의 계절에 대한 추억으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