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뚜렷하게 모든 것이 기억나는 날이면서, 부분적으로 기억이 끊겨있는 모순적인 날이다.
나를 향해 아무 감정없이 말하던 너의 표정, 눈빛을 기억한다.
나를 향해 뱉었던 말, 내 옷을 강제로 벗기던 순간, 나를 제압하던 몸짓
지금도 똑같이 묘사할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다.
하지만 그 이후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이 흐려진건지, 내가 지워버린건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리니 어느 길거리의 횡단보도에 서있었다.
어떻게 그 곳을 나왔는지, 옷은 내가 스스로 입은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나는 모르는 길목 횡단보도였고, 어떤 아저씨가 나에게 괜찮냐며 얼굴을 살피며 다가왔다.
그 순간 하늘과 땅이 뒤섞이며 울렁거리더니 앞이 캄캄해졌고,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또다시 기억이 끊겼다.
정신이 희미하게 돌아올 쯤 누군가 나를 계속 부르는게 들렸다.
구급차 안이었다.
구급대원이 내 이름을 계속 부르고 있었다.
내 가방에서 신분증을 꺼내서 확인했으며 응급실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최근 통화 기록에 남자친구로 보이는 연락처가 있어서 전화했는데, 오지 못할 것 같다고 해서 부모님께 전화를 했다고 했다.
의식이 완전히 돌아온 걸 확인할 즘 병원에 도착했다.
이런 저런 검사를 해봤으나 이상이 없었으므로 병원에서는 링거를 맞고 보내줬다.
부모님은 다행히 멀리 여행중이셔서 오지 못하셨고, 나는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도망치듯 나왔다.
여기까지가 아마 너가 알고 있는 너와 함께한 시간들이다.
그렇게 우리의 두 번째 연애가 끝이 났다.
지금부터는 너가 모르는 나의 이야기
이미 지나온 시간들에, 더군다나 내가 선택한 일들에 만약을 따질 순 없지만
만약 그때 우리가 20살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한동안 나는 정상적으로 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인과응보인가 싶다.
정상적이고 평범한 인생을 살기위해 이기적인 선택을 했으니, 그런 내가 미워 그 아이들이 정상적이고 평범하게 살지 못하도록 주문을 걸었을까.
그 이후 일주일동안 학교에서 두 번을 더 쓰러졌다.
수업을 듣다가 갑자기 미친 듯이 어지럽고 잉- 하는 소리가 들려서 강의실을 나가려고 걸어가는 중 한번.
수업 듣기 전 사물함에서 수업자료를 찾다가 또 한번.
뇌 CT까지 찍어봤지만 병원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다며 검사결과는 정상이라며 돌려보냈다.
그 후 학교를 갈 수 없었다.
아니 집밖을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휴학을 하고 몇 달 동안 자취방을 나가지 않았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고, 아무리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잠을 일주일에 5시간도 자지 못했다.
그저 멍하게 하루를 계속 보냈다.
그래서 죽음을 준비했다.
하지만 줄이 끊어져서 그마저도 실패했다.
너와 헤어지기 전에는 원망을 너에게라도 돌릴 수 있었는데,
너가 없어지니 모든게 내 탓이었다.
너에게 헤어지자 하지 말걸.
너가 밉다고 하지 말걸.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와도 웃으며 반겨줄걸.
참아볼걸.
이번에는 같은 선택을 하지 말걸.
아니, 처음부터 그 선택을 하지 말걸.
그렇게 나를 끊임없이 미워하며 자해했다.
1년 동안 휴학을 했고, 시간이 모든 것을 치유해준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일부는 인정한다.
살기는 싫었지만 몇 번의 시도로도 죽어지지도 않았던 나는
끝내 살아보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