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 화
-엄살 아니야 자기?
정교수가 과일 바구니를 내려 놓으며 말한다.
-작업실 갔더니 문이 잠겼더라구. 박교수한테 물었더니 자기 여기 있다구 그러대.. 난
자기가 간호사로 취직한 줄 알았지...
-가벼운 몸살이에요. 오실 거까진 없었는데...
-자기, 울었니?
-네?
-눈이 팅팅 부었네...싸웠어?
-아뇨...잠을 많이 자서 그런가...
-어이그...원래 싸우면서 연애하는 거야. 잠깐 있어봐 과일 좀 씻어 올게.
정교수가 나간 사이 휴대폰으로 준하에게 전화를 건다. 한참후에야 받는다.
목소리가 잠긴 것 같다.
-나야...
-네...
-괜찮니...
-네...선배는요?
-난 괜찮아....어디야?
-밖에 잠깐 나왔어요...밥은 먹었어요?
-어...
-굶지 말구 꼭 먹어요...아프지 말아요.
-그래...
준하 목소리만 들으면 왜 이렇게 눈물이 나려 하는 걸까. 아우...싫다 증말.
-내일쯤 갈게요.
-아니...오지마...낼 퇴원할거야.
-왜요, 며칠 더 있지.
-답답해서 싫어...중환자도 아닌데 병실 차지하고 있는 것두 그렇구...
-그럼...작업실루 갈게요.
-괜...찮어?
-네...
-준하야....
-네
-미안하다...
아무 런 말을 하지 않는다.
-나중에 연락할게...
-네...아무 생각 하지 마요.
-그래...
전화를 끊고 나니 마음이 시리다. 내 마음이 이렇게 시린데....넌....많이두 힘들겠다.
문을 열고 정교수가 들어온다. 눈치채지 못하게 눈물을 닦는다.
앞에 앉아 과일을 깍는 정교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언제 결혼할거야?
-네?
-박교수랑 말야. 결혼할 거 아니었어?
-아직...거기까진 생각 안했어요.
-왜, 박교수가 영 맘에 그래?
-아뇨...그런 게 아니라...
-자기, 박교수...사랑 안하지? 자기랑 박교수랑 함께 있는 걸 보면 자긴..하나두 즐거워
하지 않더라. 박교수만 들떠서 난리지...맘에 둔 사람 따로 있는 거야 뭐야...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당황스러워 하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가 하은이다.
나는 망설인다. 안절부절 못하는 내가 마치 정말 불륜이라도 저질러 들통난 여자 같단
생각을 한다. 비참해진다...그리고 서글퍼진다.
-안 받어?
정교수의 말에 전화를 받는다. 내가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들고 있자 하은이 먼저
말을 꺼낸다.
-잘...지냈어요?
-응...
-뭐해요 지금?
-그냥....
-작업은...잘 되구요?
-어....
한참 또 말이 없다. 침묵이 잠시 흐른다. 정교수는 힐끔 나를 본다.
-선배...나, 선배한테 할 말 있는데...언제 시간 좀 내줄래요?
두렵다...그 앨 보는 것이 두렵고...창피하고...부끄럽다.
-바빠요?...아님...나 만나기 싫어요?
-아니....그런게..아니라...
-이번주...토요일 오후 시간이면 좋겠는데..괜찮아요?
-어...
-그때 전화 할게요 그럼...
전화를 끊고 나서도 심장이 한참동안 뛴다. 손이 떨리고....다리가 후들거린다.
-왜 그래?
-네?....
-무슨 전화를 그렇게 받어? 반갑지 않은 사람이었나 보네....얼굴까지 하얗게 질려서는...
자기, 일 저질렀니?
아무 말 없이 과일을 먹는다. 무슨 맛인지...도통 알 수가 없다.
-내 말이 맞는가 보네. 뭔진 몰라두....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마. 어차피 풀리지 않는
일이라면 고민을 백 번, 만 번 한다구 풀리나....그냥 저절로 풀리게 놔둬. 시간이
지나면 그것두 풀리게 되어 있더라구.
준하가 얘길 했을까....하은일 어떻게 보나...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하나...이렇게 두려워할
거면서 꼭 이래야 했을까...하루에도 수십번씩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한다.
***
-우리 태연이 잘 있었어?
현관에 들어서자 마자 태연이 이모 하며 달려 온다.
-이모 보고 싶었지?
-네.
-뽀뽀해줄래 그럼?
볼에다 뽀뽀를 해주는 태연이 너무 사랑스럽다. 언니가 쥬스를 내온다.
-그거 비싸다. 아무한테나 해주는 거 아냐...지 맘에 들어야 하지 나한테두 잘 안해주려구
그래. 누가 지 엄만지 모르겠어. 태연이 너..이모 무릎에서 내려와 앉어. 이모 다리 아퍼.
-괜찮아...그냥 있어두 돼 태연아.
태연이 머리를 만져준다. 이렇게 이쁜 아들 하나 있었음 얼마나 좋을까.
-요즘 준하 얼굴 보기 힘들다...별 일 없지?
-응...잘 지내.
-근데 얼굴이 많이 상한 것 같다...어디 아프니?
-아니...요즘 좀 피곤하더니...그런가.
답답해서 언닐 찾아 왔지만 결국 나는 아무 말도 못한다.
-아랫층 집 나간 여자 말야...다시 들어왔다.
-왜?
-너두 결혼해서 살지만....부부의 정이란 게 그리 쉽게 버릴 수 없는 거잖니...자식들도
불쌍하고...그 집 남자 바람 피우다 그렇게 걸렸는데도...가정은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그랬대잖니....원래 그런거야. 결혼해서 가정이란 울타리를 만들기까지 그 정이 얼마나
쌓였겠니...미운 정, 고운 정...다 들어서 쉽게 버리긴 힘들지.
-정말 그럴까?
-그럼, 바람은 정말 바람으로 끝나는 거야. 가정 버리는 남자 못 봤다. 결국 지 자리로
돌아오더라구.
언니의 말이 위로가 되었을까.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다. 그래....이건 다른 남자들두
한 번쯤 피우는 바람 같은 것일 거야....준하는 지금 잠깐 바람을 피우는 거야.
***
하은일 기다리는 동안 담배를 하나 피워 문다. 밖에서 얘길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외식하자고 했다. 오랫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머리가 어지럽다.
그래...이왕 할거면 미루지 말고...말하자. 나중에 흘린 눈물, 오늘 다 흘리자....
하은이 들어오는 걸 본다. 담배를 비벼 끄고 하은일 본다. 그렇게 마음을 잡았다가도
하은이만 보면 또 다시 흔들린다.
-일찍 왔네.
-어...
재떨이에 구겨진 담배 꽁초를 하은이 보고는 못 본 척 한다. 식사를 주문하고 나오는 동안
하은은 아무 일 없었듯이 평소와 마찬가지로 학원 얘길 하고...사소한 일상을 얘기한다.
이런 것들이 정말...한순간이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식사가 끝나고 커피가 나온다.
하은은 꼭 설탕 커피를 마신다. 설탕을 한스푼 반 넣어 휘 저어 하은 앞에 놓아 준다.
하은이 물끄러미 나를 본다. 그러다 시선을 돌려 창 밖을 본다.
-하은아...
대답이 없다. 나는 하은이 내게 시선을 주기까지 기다린다.
-밥을 먹는 내내...내가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했는지...아니?
그래서...아주 천천히...천천히 먹었어.
나는 아무말도 못한다.
-꼭 해야겠다면...말해. 도저히 말하지 않고서는 죽을 것 같으면....말해.
하은이 붉어진 눈으로 나를 본다.
-이제...미안하단 말도 더 이상 못하겠다...나, 용서 하지마.
-하, 증말...이게 꿈이었음 좋겠다. 어떻게...어떻게...내게...이런일이...
하은이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문다. 하은일 볼 수가 없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가....평생 너에게 죄를 짓고 사는 기분이겠지.
-기어이...날 떠날 거란 말이지....지니선밸....사랑하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시울만 뜨거워진다.
-정말...안되겠니?....내가 널....보내줘야 하는 거야?....만약에...내가 그래도 싫다구 그러면
너 어떻게 할거니?....도망이라두 갈 거니? 말해봐...준하야...
-미안해...정말....미안해 하은아.
하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널...어떻게 만났는데....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틸 작정이야. 이렇게...널, 뺏기긴 싫어.
하은이 가방을 들고 나간다. 나는 조금씩 지쳐간다. 시작도 안했는데...이 순간이
그냥 빨리 끝나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자꾸 하은일 괴롭히고 싶진 않다.
***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 병원 밖을 나간다. 눈이라도 금새 쏟아낼 것 같은 흐린
하늘을 본다. 바람은 이제 차갑다. 코끝이 시리다. 박교수의 차가 앞에 와서 선다.
망설이다 차에 탄다. 박하향이 코를 찌른다. 안전벨트를 매고 그를 본다.
-오지 않아두 된다니까...
-하루만 더 있자니까...
박교수가 나의 말투를 흉내낸다.
-당신두 참 고집 불통이야...단 한 번도 나한테 져주지 않아. 당신 때문에 나만 바빠졌잖아.
-무슨 말이에요?
-갈 때가 있어. 가보면 안다구...
달리는 차안에서 밖을 본다. 겨울이 싫다....어린 나이엔 겨울이 참 좋았는데...막상 서른을
막 넘기고 나니까 봄이 좋아지더라....겨울은....너무 외롭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도착한 곳은 작업실과 불과 500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는 00빌라 주차장이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는 박교수를 쳐다 본다.
-내리시죠.
차에서 내려 그를 따라 빌라 안으로 들어간다. 익숙한 솜씨로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를 따라 들어간 실내는 이미 누군가 살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준비 되어
있었다. 실내화를 신고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실내를 돌아 본다.
-여기가 당신, 집이야.
-언제..이걸 다...
-당신이 하도 고집 피워서 퇴원한다니까 내가 서두를 수 밖에 없었어....내일쯤 집이 비워질
거라 그랬는데 하루 앞당겼더라구, 다행이...어때 맘에 들어?
-네...맘에 들어요. 비용이 얼마나 들었어요?
-무슨 뜻으로 묻는 거야?
-이걸...그냥 받으란 말은 아니죠 설마?
-그럼, 토해내시겠다?
-그냥 받을 순 없어요.
그의 표정이 굳어진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받을 수는 없다.
-당신, 김새게 만드는군...이유가 뭐야? 받을 수 없는 이유를 말해봐.
-받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야 당신 맘이 편할 것 같다면...할 말이 없군. 하지만 이건 내 성의고
내가 당신한테 해주고 싶은 마음이야. 그것마저 거절하진 말아줘.
-부담...스러워요.
-왜, 서준하가 당신에게 기회를 준다고 하던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런거야?....내가 장담하는데 서준하는...당신한테 오지 않아.
-그래도....기다려 볼래요.
-기어이 서준하를 차지하겠다?
-나두...욕심 내고 싶어요. 그럼 안되요? 왜...참아야 하는데요, 왜 자꾸 참으라고만,
안된다라고만 그래요...나두...그 앨 사랑하고 싶은데...
눈물이 솟는다. 버럭버럭 소리 지르고 싶다. 내 가슴도 이미 새카맣게 타 버렸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왜 내가 양보해야 하냐고...나두 이기적이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