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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의 차용증을 발견한 썰.

쓰니 |2026.05.29 14:58
조회 1,056 |추천 1
시어머니의 차용증을 발견한 썰.
  시어머니의 옷장에서 30년 전 종이 한 장을 발견한 건 칠순 잔치를 일주일 앞둔 날이었다.
  12월 초의 오후 세 시. 햇빛이 옷방 창으로 비스듬히 들어와 자줏빛 두루마기 자락에 걸렸다. 나는 무릎을 꿇은 채 옷장 가장  아래 칸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복이 일곱 벌 걸려 있었다. 시어머니가 평생 모은 것들이라고 들었다. 가장 앞에는 분홍 저고리에 옥색 치마. 그 다음 줄은  연두색에 자색. 뒤로 갈수록 색이 어두워져, 가장 안쪽엔 검은 자줏빛 두루마기 한 벌이 걸려 있었다. 금실로 수놓은 매화가  햇빛에 한 번씩 반짝였다.
  옷방엔 한약재 냄새가 옅게 배어 있었다. 어디서 나는 냄새인지는 모르겠지만 7년 동안 시댁 문을 열 때마다 맡았던 냄새였다.
  칠순 잔치 옷은 이미 시어머니가 골라두셨다고 했다.
  "분홍 저고리. 다른 건 손대지 마라."
  박옥례 여사의 지시는 어제 아침 식탁에서 들었다. 내 앞에 놓인 흰 밥그릇 너머로 떨어진 문장이었다. 다른 건 손대지 마라.  그러니까 정리는 해도 된다는 뜻이었고, 청소는 하라는 뜻이었다.
  "네, 어머니."
  7년 동안 한 번도 무너진 적 없는 존댓말이었다. 시어머니 앞에서 내가 가장 먼저 갈고닦은 것은 발음이었다. 정확히 받침을  굴려, 한 글자도 흘리지 않는 존댓말. 그 존댓말 안에서 내 목소리는 늘 한 톤 낮았다.
  7년이라는 게 그런 것이었다.
  옷방 청소를 자처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칠순 잔치를 사흘 앞두고 시어머니가 갑자기 안방 정리를 하시겠다고 했다. 안방, 거실, 부엌은 가사도우미 이모님이 맡고  옷방은 내가 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시누이가 옆에서 거들었다.
  "올케가 자처하네. 어머니, 좋아하시겠어."
  시어머니가 잠시 나를 봤다.
  "너는 손이 야무지지."
  그것이 허락이었다.
  손이 야무지다. 7년 동안 내가 들은 시어머니의 칭찬 중에 가장 긴 문장이었다. 보통은 한 단어였다. "그렇지." "됐다."  "둬라." 가끔 한 음절. "음."
  내가 옷방을 자처한 진짜 이유는 단순했다. 그 방엔 내가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7년 동안 한 번도. 시어머니가 늘  잠가두던 방이었다.
  칠순 잔치를 핑계로 그 문이 열린다는 건, 7년 동안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옷장 가장 아래 칸엔 종이 상자가 세 개 있었다.
  첫 번째 상자엔 빛바랜 사진들. 두 번째 상자엔 시어머니의 결혼식 청첩장과 시아버지의 부고장이 같이 들어 있었다. 두  종이가 같은 상자에 누워 있는 게 묘했다. 결혼식과 장례식이 한 인생의 양 끝이었다.
  세 번째 상자엔 한약재 봉지가 빼곡했다. 옷방의 옅은 한약 냄새는 거기서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봉지마다 한자로 약재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당귀, 천궁, 숙지황.
  봉지를 한쪽으로 들어 올리는데 손끝에 종이 한 장이 잡혔다.
  봉지 사이가 아니라 봉지 아래. 상자 바닥에 깔린 종이였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 한 장이 신문지처럼 펴진 채 깔려 있었다.  한약재 무게로 30년쯤 눌려 있던 것 같았다.
  나는 한약재 봉지들을 옆으로 옮기고 그 종이를 꺼냈다.
  A4보다 한 뼘 큰 종이였다. 손에 닿는 감촉이 까칠했다. 위쪽엔 큰 글씨로 한 단어가 적혀 있었다.
  차용증(借用證).
  손가락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심장이 어떻게 뛰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종이가 손에서 살짝 떨리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차용증.
  내가 차용증이라는 단어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결혼 전 다니던 회사 인사 서류에서? 친구가 전세 보증을 부탁할 때?  어쨌든 시댁 옷장에서 볼 단어는 아니었다.
  종이를 천천히 다시 읽었다.
  일금 일억 오천만 원. 1996년 12월 23일.
  1996년. 30년 전.
  채무자 박옥례. 시어머니 이름이 거기 있었다. 그 옆에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인주의 붉은 자국은 30년이 지났는데도 선명했다.  시어머니가 시집을 때 들고 오셨다는 그 가문 도장이었다.
  그 아래 한 줄.
  채권자 한태규.
  내 친정 아버지의 이름을 종이에서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내 결혼식 청첩장? 아니, 그건 인쇄된 활자였다. 손글씨로 적힌 친정 아버지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본 게 — 떠오르지 않았다.  아주 오래된 일이었다.
  지금, 시어머니의 옷방 옷장 안쪽 깊은 곳에서, 30년 묵은 한약재 봉지 아래 30년 전 종이 위에서, 내 친정 아버지의 이름이  채권자 칸에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옆에 인주 자국 하나가 더 있었다. 친정 아버지 도장의 자국이었다. 한태규 세 글자가 인주 안에서 분명했다.
  일억 오천만 원.
  1996년 12월의 일억 오천만 원이 어느 정도였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7년 동안 시어머니가 자랑하던 강남 아파트의 매입 시점이 1997년 1월이었다. 시어머니는 명절마다 그 얘기를 했다.
  "그 시절에 강남이 어떻게 일억 오천이었는지 너희는 모를 거야."
  지난 추석에도 그 말씀을 하셨다. 시누이는 옆에서 "어머니 정말 대단하셨네"라고 받았고, 남편은 식탁 끝에서 사과를 깎고  있었고, 나는 그 옆에서 배를 깎고 있었다.
  그 식탁의 칼날 같은 단어가 지금 손 안에 종이 한 장으로 들려 있었다.
  전화기를 꺼냈다.
  친정 아버지의 번호는 즐겨찾기 첫 줄에 있었다. 신호가 다섯 번쯤 갔다. 일주일에 두 번 통화하는 사이였다. 아버지는 늘 두  번째 신호에 받으셨다. 다섯 번이면 약을 드시고 계실 때거나, 옥상에서 화분을 보고 계실 때였다.
  "여보세요."
  낮고 천천히. 한 음절씩 끊어서. 아버지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
  "…그래."
  "지금 어디세요."
  "집이다."
  "여쭤볼 게 있어서요."
  아버지가 잠시 가만히 있었다. TV 소리가 옅게 들렸다. 7시 뉴스도 아니고 8시 드라마도 아니고 오후 세 시의 알 수 없는  프로그램이었다.
  "천천히 말해라."
  "1996년 12월에요."
  아버지의 호흡이 한 번 짧게 들어왔다.
  "…그래."
  "일억 오천만 원을, 누군가에게 빌려주신 적 있으세요."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TV 소리가 갑자기 거기 없는 것처럼 사라졌다. 아버지가 리모컨을 들어 음소거를 누르는 소리가  짧게 들렸다.
  침묵이 길었다.
  내가 다시 물으려는데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종이를 어디서 봤냐."
  내가 어디 있는지를 묻는 게 아니라 종이를 어디서 봤냐고 물으셨다. 종이가 있다는 걸 이미 알고 계셨다는 뜻이었다.
  "시어머니 옷장 안쪽에서요."
  또 한 번 침묵이 길어졌다. 이번엔 더 길었다. 아버지가 숨을 한 번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30년 동안 가다듬어 온 한  호흡 같았다.
  "…박옥례, 그 사람한테, 평생 받지 말라고 내가 말해뒀다."
  수화기에서 더 이상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호흡이 일정하게 들어오고 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평생 받지 말라고 말해뒀다.
  나는 그 문장을 머릿속에서 한 번 더 되감았다.
  받지 말라고 — 누구한테? 박옥례한테. 받지 말라고. 누가? 내 아버지가, 본인이 본인한테 결정하신 게 아니라, 박옥례라는  채무자한테 직접 통보를 하셨다는 뜻이었다.
  30년 동안.
  30년 동안 우리 친정에 시어머니가 사돈 자격으로 인사 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결혼식 폐백을 받을 때 시어머니는 친정 부모님 쪽으로 단 한 번도 고개를 깊이 숙이지 않았다. 친정 어머니가 그날 한복  매무새를 두 번 고치셨고, 시어머니는 그걸 옆눈으로 한 번 봤다.
  칠순 잔치 초청장은 우리 친정에 가지 않았다. 시누이가 내게 "올케 친정엔 안 보내. 어머니가 그러라고 하셔서"라고 짧게  말한 게 사흘 전이었다.
  지난 7년 동안 시어머니는 우리 친정 부모님의 이름을 단 한 번도 부른 적이 없었다. "사돈"이라는 호칭도 안 썼다.  "그쪽"이라고 했다.
  "그쪽 일은 그쪽이 알아서."
  명절에 친정에 못 가는 이유를 물었을 때 시어머니가 한 말씀이었다. 그쪽. 그 두 음절이 7년이었다.
  그리고 내 아버지는 그 30년 동안 시댁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내 결혼식 전날 밤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한 문장만 말씀하셨다.
  "그 집안에서 네가 무거운 짐을 들지 않게 해야 한다."
  나는 그 말씀을 결혼 7년 동안 잘못 해석하고 있었다. 시댁 일이 힘들 거라는 평범한 아버지의 걱정으로 들었다. 그게  아니었다.
  받지 말라고 했다.
  그 한 줄에 30년이 있었다.
  "아버지."
  "…응."
  "왜 안 받으셨어요."
  아버지가 답을 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한 호흡, 두 호흡.
  "네가 그 집 며느리가 됐으니까."
  전화를 끊었다.
  옷방 한가운데 무릎을 꿇은 채로 한참 그대로 있었다. 햇빛이 두루마기 자락에서 한 뼘쯤 옆으로 옮겨가 있었다. 자수 금실이  다른 각도로 빛을 받았다.
  나는 차용증을 천천히 접었다. 가로로 한 번, 세로로 한 번. 종이가 30년 동안 같은 자세로 누워 있어서 접히는 자리가  분명했다. 한 번 접을 때마다 종이가 작게 부스럭거렸다.
  한복 안주머니에 종이를 넣었다.
  옷장 안 한약재 봉지들을 다시 원래 자리로 옮겼다. 어떤 봉지가 어느 자리에 있었는지 들어 올릴 때 머릿속으로 기억해  두었다. 당귀가 왼쪽 끝, 천궁이 가운데, 숙지황이 오른쪽 끝.
  상자를 닫고, 옷장 문을 닫고, 무릎을 펴고, 옷방을 나왔다.
  거실에서 시어머니가 TV를 보고 계셨다.
  칠순 잔치 식순을 점검하는 중이라고 하셨다. 시누이가 옆에서 자리 배치도를 펴놓고 손가락으로 짚고 있었다. 식탁엔 사과 한  접시가 놓여 있었고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 색이 한 톤 누렇게 변하고 있었다.
  내가 옷방에서 나오는 걸 보고 시어머니가 잠깐 고개를 들었다.
  "끝났냐."
  "네, 어머니. 분홍 저고리만 손질해서 가장 앞쪽에 걸어두었습니다. 다른 옷은 손대지 않았습니다."
  "수고했다."
  수고했다.
  7년 만에 처음 들어본 두 음절짜리 인사였다.
  나는 두 손을 모아 짧게 목례하고 거실을 나왔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한복 안주머니에서 종이가 살짝 부스럭거렸다.
  일억 오천만 원. 1996년 12월. 30년치 이자.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들은 외환위기 직전의 연이율은 두 자릿수였다. 그 이후로도 한국의 시중금리 평균이 6%에서 8%  사이로 움직였다. 30년 동안 단리로만 잡아도 — 머릿속에서 숫자가 한 줄씩 떨어졌다.
  원금 일억 오천. 단리 6%로 30년이면 이자만 이억 칠천. 단리 8%로 잡으면 삼억 육천. 복리로 계산하면 다섯 배. 일곱 배. 더.
  거기에 시어머니가 그 돈으로 1997년 1월에 산 강남 아파트의 30년치 시세 상승분.
  명절 식탁의 "강남이 그때 얼마였는지 너희는 모를 거야"의 그 강남. 1997년 일억 오천이었던 그 아파트가 2026년에 몇 배가  됐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50배.
  아버지는 30년 동안 받지 않으셨다.
  나는 받기로 했다.
  칠순 잔치까지는 7일 남아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시댁을 나섰다. 12월의 찬바람이 한복 자락을 한 번 부풀렸다 가라앉혔다. 안주머니의 종이가 가슴 쪽으로 다시  가라앉았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 친정 아버지에게 문자를 한 줄 보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답장은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닿기 전에 왔다.
  [그래.]
  한 글자였다. 그 한 글자에 허락과 양해와 사과가 다 들어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1층 로비의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한복 차림에 검은 코트, 그리고 가슴 안주머니가 종이 한  장만큼 살짝 부풀어 있었다.
  12월의 강남 거리는 빛이 차가웠다.
  7일 후. 그 거실 식탁 위에. 30년치 계산서를 한 장 올려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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