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내린 역에서.... 1화,2화
01부 : 이번역은....
(BGM: 신용재 – 오늘)
과거, 나는 어머니와 단둘이 지독하게 외로운 울타리 안에서 자란 외동이었다. 늘 마음 한구석에는 든든한 아버지와, 의지할 수 있는 형, 누나가 있는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을 격렬하게 동경하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거짓말처럼 내게도 그런 기적이 찾아왔다.
재혼을 통해 내게 생겨난 이들은, 내가 평소 꿈꿔왔고 갖고 싶었던 모든 이상적인 모습을 다 가진 완벽한 가족이었다. 마음이 넓고 훌륭하신 새아버지, 그리고 눈이 부실 정도로 멋있는 형과 누나까지.
하지만 너무 완벽한 울타리가 갑자기 쏟아진 탓이었을까. 막상 그 거대한 존재들 사이에 덩거리니 놓이자, 한동안 도무지 마음을 잡지 못했다.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대들고 싶어서 품은 반항심은 결코 아니었다. 그저 단둘이 사는 것에만 익숙했던 내가, 이 훌륭하고 멋진 가족들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내 자리는 어디인지 도무지 방향을 잡지 못해 혼자 겉돌았을 뿐이었다.
다행히 새아버지의 엄한 훈육을 받으며 올바르게 자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시절 내면의 질풍노도를 그냥 얌전히 넘길 수는 없었다. 그래도 집안에서는 나를 품어준 이들에게 예의는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늘 말을 잘 들으려 노력했다. 새아버지와 무서운 형이 버티고 있는 집에서는 긴장감을 유지하며 착한 아들, 착한 동생이 되려 애썼다.
하지만 내면의 혼란까지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었다. 진짜 방황은 집 밖에서 소심하게 터져 나왔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 보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충동이 일어 통금 시간을 어기기 일쑤였다. 나중에는 집에 들어가 더 혼나는 상황이 두렵고 무서워서, 조금이라도 위기를 모면해 보려고 뻔히 들통날 거짓말들을 늘어놓곤 했다. 그렇게 나는 안팎으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특히 중학교 시절은 내게 가장 짙은 어둠이었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나는 지독한 괴롭힘을 당했다. 매일이 지옥 같던 그 시기, 나를 절벽 끝에서 붙잡아 준 건 최재웅, 이현우, 김준수였다. 그 녀석들이 손을 내밀어 도와준 덕분에 암흑 같던 터널을 지나 어찌어찌 졸업장은 쥘 수 있었다. 하지만 친구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버텼을 뿐, 마음속 깊이 파인 상처는 전혀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곪아 터지기 직전인 위태로운 감정을 그대로 품은 채, 나는 두려움과 불신으로 가득 찬 고등학교 입학식장으로 향해야 했다.
그렇게 매 순간 허물어질 것 같던 위태로운 날들 속에서, 유일하게 내 숨통을 틔워주고 나를 위로해 준 것은 음악이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이어폰 너머로 흘러나오던 포맨의 애절한 목소리는 내 서러운 눈물을 대신 흘려주는 것 같았고, 가슴을 찢는 듯한 김경호의 강렬한 고음은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를 펑 뚫어주곤 했다. 세상에 내 편은 아무도 없다고 느껴질 때마다, 나는 그들의 노래 속으로 도망쳐 위안을 얻었다.
상처를 숨기기 위해 외려 밖으로 더 날을 세웠던 탓일까. 성적에 맞춰 대충 들어간 대학교에서는 아예 막장으로 살았다. 수업은 나가지도 않고, 일도 안 하며, 온통 술과 여전히 내 곁을 지키는 음악에만 빠져 살았다. 가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은 죄다 당시 여자친구에게만 쏟아부었다. 부모님 돈만 축내는 식충이. 한마디로 전형적인 ‘등골 브레이커’가 바로 나였다.
주변 친구들과도 점점 멀어지고, 이 엉망진창인 관계에 답이 없다고 느껴질 때쯤이었다.
그토록 매달리던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그쪽의 ‘바람’ 때문이었다. 배신감에 치가 떨렸지만 오히려 그 일이 정신을 차리는 계기가 됐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다고 해서 무너진 일상이 당장 마법처럼 회복되는 것은 아니였다. 여전히 목적지 없이 표류하는 나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던 아빠 역시 이제는 정말 답이 없다고 느끼신 모양이었다. 매일 밤낮이 바뀌어 폐인처럼 지내는 내 방 문을 와락 열어젖힌 아빠가 서슬 퍼런 호통을 내질렀다.
“너 언제까지 그렇게 한심하게 썩어 자빠져 있을 거냐! 남들 다 가는 군대라도 가서 사람 새끼가 되어 오든지, 그럴 자신도 없으면 당장 이 집에서 나가!”
평소 퉁명스럽긴 해도 자식에게 쉽게 상처를 주지 않던 아빠의 입에서 나온, 뼛속을 찌르는 직설적인 일침이었다.
더는 도망칠 곳도, 비벼볼 언덕도 없다는 비참한 현실이 온몸으로 체감되었다. 나는 가슴속을 무겁게 짓누르는 패배감을 삼키며, 그날 밤 컴퓨터 앞에 앉아 홀린 듯이 일반 입대든 가리지 않고 가장 빠른 날짜로 군대 영장을 신청했다. 그렇게 나는 도피하듯 훈련소로 향했다.
무엇보다 군대라는 공간은 내게 또 다른 새로운 절망을 안겨주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주변 녀석들이 다 고만고만해 보였는데, 전국 각지에서 모인 동기들과 후임들을 보니 세상이 달랐다. 군복을 입혀놓아 겉모습은 다 똑같아 보였지만, 대화를 나눠보면 그 안의 알맹이들은 나와 차원이 다른 궤도를 달리고 있었다.
이미 사회에서 번듯하게 제 밥벌이를 하며 취업을 한 녀석. 소위 말하는 명문대에 다니며 미래를 탄탄하게 설계해 둔 녀석. 미래를 위해 군대에서도 책을 붙잡고 공부하는 녀석들……. 그 빛나는 이들 사이에 서 있자니, 아무것도 이뤄놓은 게 없는 내 인생이 더욱더 처참한 바닥처럼 느껴졌다. 지독한 열등감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절망은 나를 갉아먹는 대신, 내 눈을 뜨게 만들었다. 뼈아픈 비교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내 미래에 대한 냉정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지금처럼 살면 정말 끝이다.’
라는 위기감과 함께, 앞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성실하게 채워나가야 할지에 대해 밤마다 불침번을 서며 깊고 깊은 사색에 잠겼다. 군대는 내게 열등감의 지옥이기도 했지만, 인생의 침로를 재설정하는 가장 치열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래도 내 성격 자체가 본질적으로 선한 건지, 아니면 미련할 정도로 곰 같은 구석이 있었던 건지 모나게 굴지 않고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킨 덕에 나름대로 동기들이 챙겨준 전역모를 받아 들고 무사히 전역하긴 했다.
전역 후 대학교에 복학할 때까지 다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군대를 다녀와서인지 이제는 나 자신에게 엄격해지자는 강박이 마음 한구석에 생겨났다. 주위 친구들은 그런 나를 보며 비웃었다.
“병신아, 인생은 지금부터 즐겨야지! 왜 사서 고생이냐?”
생각해 보니 친구들 말이 맞는 것도 같았고, 스스로가 유별나게 구는 것 같아 덜컥 겁이 났다. 결국 친구들의 말에 휩쓸려 다시 술을 마시고 여자를 만나는 방탕한 하루하루를 반복했다.
그러다 지금의 아내, 이경진을 만났다.
경진이와의 연애는 입대 전 감정만 앞서던 철부지 연애가 아니었다. 서로 깊은 감정을 나누는 진짜 연애였다. 입대 전의 나와 달라진 게 있다면, 적어도 내가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질 줄 알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놀고먹는 데 쓰는 돈만큼은 무조건 내 힘으로 벌어서 썼다는 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내가 버텨낼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상관없었다. 처음에는 자칫하면 감전되거나 추락할 수 있는, 매 순간 긴장감이 흐르는 험난한 전기 건설현장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거친 노가다 판에서 온몸으로 땀을 흘리며 돈을 벌었다.
하지만 전기 현장은 일감을 따라 자꾸만 집과 멀어진다는 게 문제였다. 사랑하는 아내 경진이와 가정을 이루고 늘 곁을 지키고 싶었던 나에게, 전국을 떠돌아야 하는 현장 생활은 맞지 않았다. 결국 나는 가족을 위해 과감히 현장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새로 선택한 것이, 매일같이 누군가의 마지막을 엄숙하게 배웅하는 장례지도사의 길이었다. 타인의 무겁고 깊은 슬픔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집 근처 장례식장을 본업 삼아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장례지도사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더 지독하고 잔인했다. 어느 날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처참하게 훼손된 시신을 수습해야 하는 날도 있었다. 그 살벌한 현장 속에서, 나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내 아내 경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따르릉, 딸깍.
– 어, 여보? 이 시간에 웬일이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경진이의 맑고 다정한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지옥 같던 현장의 공기가 기적처럼 걷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눈앞의 참혹한 광경을 애써 외면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최대한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냥, 보고 싶어서 전화했다…….”
– 뭐야 뜬금없이~ ㅎㅎ
“경진아. 너는 살면서 예쁜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봐. 그런 건 너만 해. 알았지?”
–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일도 없어. 퇴근하고 얼른 갈게. 사랑해.”
전화를 끊고 전신을 감싸는 불쾌한 떨림을 억누르며 다시 시신 앞으로 다가섰다. 세상의 온갖 더럽고, 무섭고, 참혹한 것들은 내가 전부 마주하고 짊어지면 그만이었다. 내 아내와 내 아이에게는 오직 따뜻하고 눈부신 세상만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의 각오만으로 현실의 피로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미래에 내 가게를 꼭 차리겠다는 일념으로, 좋은 매형 박진태를 만나 가게 하나 맡아보라고 기회를 얻었다. 나는 퇴근 후 밤낮없이 고깃집으로 향해 무급으로 장사 일을 부업처럼 배우기 시작했다.
마침내 사랑하는 아들까지 태어나자, 고깃집 주방에서 나를 지켜보던 매형이 땀을 닦으며 묵직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이제 아들까지 태어났으니 가장으로서 어깨가 더 무겁겠지? 남의 돈 먹고 장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식 생각해서라도 이제는 이전보다 더 독하게, 더 열심히 살아야 해. 정신 바짝 차려라.”
“네, 걱정 마십시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매형의 그 무거운 현실 조언은 내 심장을 강하게 내리쳤다.
‘그래, 이제 내 아이가 생겼다. 나는 한 가정의 가장이다. 이제는 진짜 물러설 곳도 없고, 힘들다고 징징댈 여유도 없다. 죽기 살기로 버텨서 내 가족을 책임져야지.’
장례지도사 본업에, 퇴근 후 고깃집 무급 부업까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란 거친 노동이었지만 나는 매형의 말대로 더 독하게 버텨냈다. 그렇게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온 어깨를 무겁게 짓눌러, 피로에 완전히 쩔어있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침대에 거의 쓰러지듯 누웠다. 내 옆에서 세상모르고 새근새근 잠든 아들과 아내 경진이의 얼굴이 보였다.
‘조금만 더 버티자. 내가 가장이니까.’
영혼까지 탈탈 털린 깊은 피로감 속에서 겨우 잠을 청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나는 난데없이 달리는 기차 안에 서 있었다.
“어……?! 이게 뭐야?!”
당황스러운 마음에 당연히 꿈일 거라 생각했다. 눈을 비비며 천천히 앞 칸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데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내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며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은 기차에 타고 있는 게 아닌가.
02부 : 내린역에서
(BGM: 포맨 – 안녕나야)
정말 당황한 나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운데, 기차 안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이제 막 새 학기가 시작된 지 두 달 남짓 된 4월. 아직 서로 완벽하게 친해지지는 못해 묘한 서먹함과, 어떻게든 무리를 지어 친해져 보려는 학기 초 특유의 붕 뜬 공기가 기차 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빳빳한 새 교복을 입은 애들은 지들끼리 뭉쳐 과자를 나눠 먹다가, 통로를 지나가는 나를 보고 괜히 아는 척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어? 김선우! 너 맞지?!”
“너…… 표정이 왜 그래? 어디 아프냐?”
수많은 인연의 무리들이 스쳐 지나가며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새로 올라온 고등학교에서는 애들이 딱히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오히려 겉돌던 나를 먼저 챙겨주려 다가왔다. 친구도 좀 생겼고, 중학교 때처럼 나를 건드리는 일진 녀석도 없어서 나름 지낼 만했으니까.
하지만 그 수많은 무리가 던지는 인사는 내 눈에 전혀 보이지도, 내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은 그저 웅웅거리는 소음 파편이 되어 귓가를 튕겨 나갈 뿐이었다. 내 시야는 기괴할 정도로 좁혀져 있었고, 내 신경은 오직 단 하나의 목적으로 완전히 미쳐 있었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을 유령 취급하며 오직 지독한 집착으로 '한 무리'만을 쫓는 내 발걸음엔 자비가 없었다.
먼 미래에 만날 대학교, 심지어 군대 시절의 얼굴들까지 수많은 인연이 사방에 유령처럼 깔려 있었지만, 내 발걸음은 유독 피가 마를 정도로 지난 3년 내내 지독하게 괴롭힘을 당했던 중학교 시절 동창들이 모여 있는 좌석으로만 향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뼈가 시려 오는 지옥 같던 중학교 시절. 그리고 그 끔찍한 나날 속에서,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찌질했던 나를 숨 쉬게 해주었던 유일한 구원.
‘임현정…… 분명 이 근처에 중학교 애들이 같이 타고 있었어.’
지나가는 애들이 “야, 김선우! 어디 가?” 하고 소리치며 내 어깨를 붙잡아도, 나는 그 손길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듯 거칠게 쳐내며 눈에 불을 켜고 중학교 녀석들을 찾아 헤맸다. 다른 기억은 다 안개처럼 희미해도, 내 가장 아픈 트라우마이자 미련 그 자체였던 현정이의 기억만큼은 뇌리에 문신처럼 박혀 있었다. 제3자가 봤다면 무언가에 완전히 홀린 집착 그 자체로 보였을 터였다.
마침내 저 멀리, 중학교 내내 나를 괴롭혔던 주동자 녀석들의 낯익은 얼굴과 함께 그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그녀가 보이기 시작하자,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찾았다.”
그 무리의 중심. 멀리서 지켜만 봐도 내 어두웠던 학창 시절을 환하게 밝히던 그 아이, 현정이가 앉아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기 전, 과거의 내 모습을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꿈이라면, 엉망이었던 내 과거를 마주하고 잠시나마 위로받는 시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과거를 바꿀 순 없겠지만, 한 번쯤 부딪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긴장을 하면 왼손 주먹을 쓸어내리는 오랜 습관이 있는데, 손가락 끝에 딱딱한 무언가 걸렸다. 결혼반지였다.
‘설마 아내 경진이도 여기 있는 건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급히 반지를 빼내어 옷 안쪽 주머니에 밀어 넣으려는데, 왼손 새끼손가락에 아내의 결혼반지까지 함께 끼워져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허겁지겁 아내의 반지까지 안쪽 주머니에 깊숙이 쑤셔 넣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의 얼굴을 더 자세히, 샅샅이 살폈다. 유심히 보니 내가 아는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낯선 얼굴들도 섞여 있었다. 그렇게 긴장감 속에 집중하며 걷던 중, 마침내 아내 경진이를 발견했다. 그곳에 있는 경진이는 지금보다 훨씬 젊고 앳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대로 화장실로 뛰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
거울 속에는 피로에 찌들어 칙칙했던 피부도, 세월과 함께 겹겹이 쌓였던 나잇살과 지방도 없었다. 그 대신 뽀얗고 투명한 피부를 가진, 열다섯 살 시절의 내가 서 있었다. 몸집은 왜소했지만 눈빛만큼은 온갖 풍파를 겪어낸 인생 2회차의 깊이가 담겨 있었다.
지금의 결혼을 후회하는 건 결코 아니었지만, 거울 속 달라진 내 모습을 보니 본능적으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와…… 대박인데……?’
마치 맹수가 숨겨왔던 이빨을 슬그머니 드러내듯, 나는 거울을 보며 교복 매무새를 단정히 가다듬었다. 이 꿈속에서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이제는 명확히 알 것 같았다. 나는 위풍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힘차게 화장실을 나섰다.
내가 향한 곳은 그토록 친해지고 싶어 했던 현정이가 앉아 있는 좌석이었다. 멀리서 지켜만 보아도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그 아이의 웃음이 내 얼굴에도 미소를 띠게 만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말을 걸고 싶어 심장이 뛰었다.
내가 다가가자 현정이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 선우야, 무슨 일이야??”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한층 여유가 생긴 나는 젠틀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안녕?”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다행히 현정이 주위에 앉아 있는 친구들은 내가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어차피 꿈인데 뭐 어때.’
배짱이 생기자 약간의 무리수를 던져보기로 했다. 다행히 주변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더욱 자신감 넘치고 신뢰감 있는 목소리로 현정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기차역에서 내리면, 같이 집에 가자.”
과거에 따돌림을 당하고, 기가 죽어 맞고 다니던 시절을 상상하면 부끄러워서 말 한마디도 못 걸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내 안에는 세상을 먼저 겪어본 자의 바이브와 여유가 있었다.
내 당돌한 멘트가 기차 칸에 떨어지는 순간, 왁자지껄하던 주위 친구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말소리가 뚝 끊겼다.
“…….”
“……너, 너 미쳤어? 갑자기 왜 이래??”
주변의 시선에 안절부절못하며 현정이가 낮고 다급한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나는 그저 나직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변의 기차 소음을 단숨에 지워버릴 만큼, 덤덤하고 선명한 목소리로 현정이의 눈을 보며 툭 던졌다.
“너 좋아해서.”
말해버렸다. 과거의 나였다면 평생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을, 마음속에 꾹꾹 담아두었던 그 비밀을. 15살의 빳빳한 교복을 입고 마주한 첫사랑 앞에서, 어른스러운 뻔뻔함이 만든 지독하리만치 무모한 직진이었다.
그 순간, 소란스럽던 기차 칸이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환호성 같은 건 터지지 않았다. 교실 구석에서 숨죽여 살던 김선우가, 그것도 일진들이 눈을 서슬 퍼렇게 뜨고 있는 이 공간에서 대놓고 고백을 내뱉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쳤다’, ‘저 새끼 진짜 제정신인가’ 하는 경악 섞인 시선들이 사방에서 날아와 꽂혔다.
언제 내 뒤로 왔는지, 옆에 있던 재웅이와 현우마저도 대번에 얼굴을 굳히며 내 교복 소매를 다급하게 잡아당겼다. 야, 김선우 너 미쳤냐는 당황스러운 무언의 압박이었다.
현정이는 정말 머리가 하얘진 듯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녀석의 입술이 무언가 반박하려는 듯 바르르 떨렸지만, 기차 칸 전체를 짓누르는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이내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바로 그때였다. 기분 나쁜 걸음 소리와 함께, 그 무거운 침묵을 깨며 어두운 그림자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