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선도 끝나고... 날씨도 좋고... 이래저래... 심숭생숭... **
CHAPTER 4. 소문이 몸부림칠 때
“아잉, 자기 아~”
입에 넣어주는 사과를 받아 먹으면서 야기는 피어오르는 닭살을 열심히 문질렀다.
억지로 만든 웃는 얼굴로 괴로운 처지였지만 절대 내색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맞은 편에 앉은 준원이 흐뭇한 얼굴로 -조금 불편해 보이기는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끔찍한 애교에 멀쩡할 사람이 존재할 리 없기 때문!- 닭 털을 날리다 못해 아예 질색시키려고 작정한 추태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기는 ‘왜 하필 이런 녀석을 소개시켜 준 거야!’ 라고 효윤에게 당장 전화라도 때려 화풀이를 하고 싶었지만 절대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기에 도저히 먹을 마음이 나지 않는 사과를 꿀꺽 삼켰다.
하긴, 처음부터 이 녀석이 이랬던 것은 아니다.
효윤이가 불러내서 나왔을 때 이 녀석, 우진은 멀쩡하다 못해 조금 사나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던 우진이 야기의 이야기를 다 듣고 애인행세를 해달라는 부탁에 얼마나 웃어댔던지 앞에 앉아있던 야기는 민망해서 쥐구멍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한 십분간을 미친듯 웃고 난 후 그는 최고의 애인을 연기해 줄 테니, 라면서 아르바이트비까지 받아 챙겼다.
“아잉, 야기씨, 왜 날 그렇게 봐아? 우진이 부끄럽잖아~ 몰라몰라~”
팡팡 소리가 나도록 가슴을 쳐대며 몰라몰라라니… 몰라몰라에 맞아 죽겠다는 무서운 예감이 들어도 그저 식은땀 흘리며 호탕하게 웃는 수 밖에.
“우진씨 많이 먹어.”
준원이 밀어주는 과일접시를 보면서 우진은 눈을 크게 치켜 뜨고 생글생글 웃었다.
“엄머머, 언니 고마워요오~. 근데 언니, 정말 이쁘다아~ 피부도 좋고 머리결도 좋네에~ 부러워라앙.”
“고마워. 야기씨랑 만난지는 얼마나 됐어?”
“일년,”
“삼 개월,”
“?”
동시에 튀어나온 말에 준원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굳어버린 야기를 대신해서 우진이 나섰다.
“사실은 요오, 전 야기씨 일년 전에 봤거든 요오. 그때부터 한눈에 반해서어 계속 쫓아다녔어요오~. 그러다가 삼개월전에 야기씨랑 사랑에 고올이인~ 그러니까 전 일년, 야기씬 삼개월인 거지요오~”
앙증맞게 하트까지 그려가면서 수줍은 척 하는 우진의 연기에 야기는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계속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더니 안면근육이 당겨서 아플 지경이었지만 우진의 오버연기에 맞추기 위해서는 계속 팔푼이 행세라도 해야 한다.
야기는 힐끗 시계를 봤다가 아직 두시간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한번 절망했다.
“키스는 해봤어?”
뭐가 그렇게 궁금한건지 준원은 아예 우진을 상대로 이것저것 질문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남자친구 없는 여자가 친구를 상대로 캐묻듯이 짖궂으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빛이었다.
빨리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아 야기는 여전히 아픈 근육을 당겨 팔 안에 안긴 우진에게 사랑스러워 못견디겠다는 듯한 미소를 날려주었다. 그 모습에 더욱 오버하며 몰라몰라를 연발하는 우진과 흐뭇한 얼굴로 둘을 바라보는 준원. 야기는 한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잉, 몰라몰라~ 언니 응큼해에~”
“아직, 인 거야?”
“그럴 리가아~ 우리 야기씨한테 도장도 쾅 찍어 놨는데에~”
“어머나, 정말?”
“으응, 우리 야기씨가 쬐에끔 부끄러워해서어~ 그건 아직이지마안~ 내거라고 도장은 찍어놨지이~ ”
완전히 수다모드로 돌입한 둘은 야기는 젖혀두고 뭔가 알 수 없는 용어들을 사용해가며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렸다. 가끔 묻는 질문에 놀라면 우진이 알아서 다 처리해 주었다.
그때마다 야기는 우진을 안은 팔에 힘을 주어 가까이로 당겨야 했지만.
준원은 우진이 해주는 이야기들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청 중이었고 야기는 왠지 정신건강에 안 좋을 이야기 같아서 딴청을 피웠다. 그렇게 악몽 같던 저녁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끝이 오지 않을 것처럼 더디게 가던 시간도 결국은 종말을 맞이하고 마는 법.
우진과 야기의 급조된 사랑이야기에서부터 화장품, 다이어트법, 반신욕에까지 화제를 넓혔던 두 사람은 그러고도 부족한지 여전히 아쉬운 얼굴이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준원이 12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고 원망스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나아, 시간이 참 빠르기도 하지이~”
“데려다 줄게, 나가자.”
“우진씨, 조심해서 가고… 나중엔 술이라도 한잔 해. 이렇게 헤어지려니까 섭섭하네.”
“그래요오~ 언니,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오~”
인사를 하는데도 십분은 걸렸다. 준원은 정말로 섭섭한 얼굴로 현관까지 배웅을 나왔다.
말리지 않으면 차까지 따라나올 기세였다. 대체 우진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든 것인지 야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우진은 변치 않는 말투로 작별인사를 하고 여전히 야기의 품에 안겨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아, 재밌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우진의 표정이 급변했다. 말투도 처음 만났을 때의 시니컬로 대변신.
너무 놀란 야기가 입을 떡 벌리자 우진이 씨익 웃었다.
“왜?”
“아, 아니… 상당히 유연하다 싶어서…”
“뭐, 그야 돈을 받았으니까 일은 제대로 해야지.”
불량기 마저 있어 보이는 얼굴로 돌변한 그는 아까와는 인상 자체가 달랐다.
그 엄청난 갭에 야기는 눈이라도 비비고 싶은 심정이었다.
“형씨도 사람을 속이려면 더 치밀하게 굴어야지. 이런 식으로 허술하게 나가다간 얼마 못 가겠던걸.”
뻐끔뻐끔.
“충고 하나 하자면 말야, 남을 속이려면 자기부터 그걸 믿어야 돼. 아침마다 거울보고 마인드컨트롤이라도 하라고.”
씨익 웃는 우진에게서 이미 조금전까지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여기야.”
효윤은 자신을 부르는 우진에게 다가가며 미안한 웃음을 지었다. 우진에게 그런 일을 부탁하는 것이 면목없다 싶었지만 우진은 의외로 흔쾌히 승락해 주었다. 아르바이트비를 좀 두둑히 뜯긴 했지만.
“일은 어떻게? 잘 됐어?”
“앉아서 숨이나 좀 돌려.”
우진은 느긋하게 말하면서 커피를 홀짝였다. 성격 급하기로 소문난 효윤으로서는 답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우진의 입을 열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오직 하나, 바로 자신뿐이었다. 효윤은 타는 속을 달래기 위해 차가운 주스를 시키고 단번에 들이켰다.
“쯧쯔… 그러니까 그 녀석한테 여자로 안 보이는 거야.”
“감질나게 홀짝거리기? 체질적으로 그런짓 못 해.”
“못해도 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여자들 속마음 까지 봐주는 건 게이들밖에 없어.”
“흥, 그래 봤자 게이는 여자들의 경쟁자야.”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나한테 들을 이야기도 없겠다.”
“앗, 너무 솔직해 버렸다.”
“……넌 어쩌면 그런 동작도 귀여워 보이질 않냐.”
한숨과 함께 고개를 설레설레 젖는 우진에게 효윤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난, 역시 여자로 안 보이나?”
“얼굴은 꽤 예쁜 편인데 도대체 왜 여자라는 느낌이 안 드는 걸까.”
“대못을 박아라, 아주.”
“뭐, 대못은 따로 준비돼 있다.”
우진의 시큰둥한 말에 효윤의 얼굴이 굳었다. 야기의 일을 도와주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사람보는 눈으로 정평이 난 우진을 굳이 들이민 것은 야기의 첫사랑이며 현재 진행형 사랑이라는 준원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보고 싶어서였다.
우진은 사람보는 눈이 아주 날카로워서 몇 년 겪어본 효윤은 사람에 관해서라면 우진을 무조건 믿었다. 어린 시절부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탓이라면 슬픈 일이지만 조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 점이 또 신뢰가 간다.
“그렇게 괜찮아?”
침을 꿀꺽 삼킨 효윤이 조심스럽게 묻자 안쓰러운 눈을 한다.
우진이 저럴 정도면 정말로 괜찮은 사람인 거다.
효윤은 문득 자신이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당하게 나서지도 못하고 이렇게 뒤로 탐색전이나 벌이다니. 스스로에게 혐오감마저 들었다.
“말해줘, 괜찮으니까.”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처럼 씩씩하게 말하려 했지만 효윤의 목소리는 떨려 나왔다.
우진은 모르는 척 각설탕을 손가락으로 굴렸다.
“발견하긴 어렵지만 일단 한번 보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 어리버리한 그 녀석이 어떻게 찾았나 싶을 정도. 뭐, 좀 까다롭고 자기방어적이긴 해도 충분히 끌릴 만 하지.”
“네 입에서 나온 말들 중 최고의 칭찬이네.”
“비슷한 클래스라고 인정해.”
“헤에~ 엄청난 사람인가 봐. 야기형 눈이 상당히 높았구나.”
효윤의 말에 우진이 한심한 얼굴로 효윤을 바라보았다.
“바보야 거기서 핀트가 안 맞는 감탄을 하면 어쩌자는 거야?”
“그렇네. 하하”
“정들어, 웃지마.”
튕기듯이 핀잔을 준 우진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효윤을 보고 무슨 말을 할듯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이내 포기했는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오늘, 같이 있어줄까?”
우진의 퉁명스러운 말에 효윤은 배싯 웃고는 머리를 저었다.
지금은 그 어떤 다정함도 독이 된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그런 것으로 위로하려 들면 끝이 없다는 사실을 효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화난듯 찌푸린 우진이 실은 자신을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도. 아직은 걱정을 끼칠 때가 아니야. 다정한 위로는 지금보다 더 힘들때를 위해 남겨두자.
“됐어. 맨날 바쁘다고 죽는 소리하면서. 나중에 보자.”
우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효윤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렸다. 그 손에 깃든 온기에 효윤은 정말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연락해.”
“응. 시간 내줘서 고마워.”
“축 처져 있는 거 안 어울려.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죽상이냐. 뺐으면 되지.”
과연 강우진은 존대한 인간이었다. 그런 자신만만함이 어디서 오는지 이해하는 효윤은 우진에게 미안함을 담아 웃어 보였다. 우진이한테 위로를 받다니 아직 백년은 빠르다.
이제야 조금 자신이 아는 박효윤이다 싶어 우진은 자리를 비켜주었다.
때로는 혼자서 고민해야 할 일도 있는 법이다.
처음 야기를 만난 날이 생각나 효윤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거렸다. 두살이나 많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리숙한 모습. 직원이 나가버렸다며 고민하던 그때의 그가 어제처럼 생생하다. 그리고 인사를 했을 때 활짝 웃어 보이던 아이 같은 얼굴도.
“아아, 어서 와요. 효윤씨 라고 했지요?”
사실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따윈 조금도 없었다. 삼촌이 하도 성화를 부려 일단 갔지만 너무 많은 시간을 뺐기는 건 곤란하다고 거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효윤을 보고 구세주라도 만난 듯 단번에 밝아지는 그 사람 때문에 잘라 거절하기가 미안해졌다.
“대학생이라고요?”
곤란한 듯 찌푸려지는 인상. 정말 아이처럼 솔직했다. 얼굴에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보이는 타입. 효윤은 이미 그런 순수함을 간직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알 정도로는 성숙했었다. 변해가는 변화무쌍한 표정을 더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십분내에 정중히 거절하고 나가야지 결심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효윤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야기의 곤란해 하는 얼굴을 보고 있었다.
“저기, 최대한 맞춰는 보겠지만 우리는 기본적으로 런치나 디너 시간 중 하나는 풀로 뛰어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 말을 하면서 새파랗게 질리던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거절하려고 마음먹고 마지못해 들른 줄은 전혀 모르고 당황해 하던 순진한 사람.
도저히 사장을 잘 해낼 것 같지 않아 상관도 없는 자신이 걱정될 정도였다.
그냥 ‘아아, 그러면 안 되겠네요’ 라고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으면 됐는데 왜 계속 거기에 있었을까. 아이처럼 시시각각 마음을 비추는 그 눈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그냥 뿌리쳐 버리고 가기엔 꺼림칙한, 어쩔줄 몰라하는 아이를 내버리고 가는 것 같은 망설임이 들어서였다.
“와아, 정말요? 고마워요, 효윤씨. 정말 고마워요.”
당장 손이라도 잡고 흔들듯이 기뻐하던 얼굴. 자기도 모를 충동으로 디너라면… 이라고 말해버린 뒤 그가 보여주었던 환한 미소. 그전까지의 평범하고 조용한 인상이 단번에 바뀌어서 효윤은 잠시 멍해졌다.
그 한순간이었다. 그 순간의 밝은 미소에 반해버린 게 잘못이다. 지금 와서는 자신이 잘못본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여전히 멍청하고 우물쭈물대지만 그 때 씐 콩깍지가 아직도 떨어지지 않았는지 가끔 귀여워 보이기도 한다.
“그게 문제라니까.”
효윤은 오늘 몇번째일지 모르는 한숨을 다시 한번 내쉬었다. 사람마음이라는게 왜 이렇게 복잡할까. 자신을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있는 사람한테 마음을 빼앗기고 그것도 모자라 그가 전혀 알아주지도 않을 고민이나 하고 있다니. 친구를 시켜 그의 곁을 탐색하고 그가 좋아한다는 사람을 질투하고. 효윤은 잠깐 자신이 아주 모자란게 아닌가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좋은걸. 좋아서 다른 사람한테 보낼 수가 없으니까 고민하고 질투하는 건 어쩔 수 없잖아.
놓치면 후회할 것 같고 많이 아플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효윤은 결심을 굳히고 주먹을 움켜줘었다.
“미안하지만 이야기, 당신은 내거야. 누구한테도 못 준다고. 어차피 자네나 나나 짝사랑인건 마찬가지니까 어디 한번 잘 해보자고. 아무리 그 여자가 좋아도 마음으로 치자면 나도 만만치 않아.”
부활한 전사 효윤은 그렇게 카페에서 전의를 불태웠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돌아볼 정도의 큰소리로 말하고 있다는 자각이 전혀 없다는 점이 바로 박효윤 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