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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임게이(i'm gay) - #7

夜記(야기) |2004.04.23 13:16
조회 269 |추천 1

 

 

CHAPTER 7.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하이스쿨

 

 

 

고향이라는 말은 자체만으로 미묘한 포근함이 있는 것 같다.

집에서 차로 한 시간이 안 걸리는 곳에 조용한 바다가 있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만이 아는 한적하고 작은 해변은 어렸을 때부터 준원이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즐겨 찾는 곳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딸이 우울해 보이자 걱정하는 부모님에게 웃어보이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다. 잘못 눈치라도 채이면 꼬치꼬치 캐물으실 것이 분명하기에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지금은… 야기의 이야기는 꺼내고 싶지도 않았다.

잊고 싶은데 잊혀지지도 않는다.

 

간혹 정말로 야기가 하고 싶은 말이 뭐였는지, 그 말을 들었어야 했는지로 고민이 되기도 했다.

준원은 그럴 때마다 고개를 흔들어 그런 생각을 지워버렸다.

듣는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무슨 이유를 대더라도 준원은 이해해 줄 수 없고 용서는 더더구나 어려웠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대로 모르는 것으로 하고 싶었다.

 

준원은 해변에 주저앉아 석양을 바라보았다.

긴 머리카락을 날리는 바닷바람은 짭짤하게 소금기가 배어 있어 가끔 간지러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친숙한 향기가 난다. 준원은 바다를 좋아했다.

탁 트인 넓은 바다의 초록빛도 좋지만 이렇게 조용한 숨은 바다의 묘미는 각별하다.

준원은 해가 다 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생각으로 편하게 앉아 무릎에 턱을 괴었다.

 

“이준원? 언제 내려왔냐?”

 

낯익은 목소리에 준원이 돌아보니 훤칠한 청년 하나가 무거워 보이는 커메라를 짋어지고 담배를 물고 있었다.

 

“한... 민영?”

 

못 본지 겨우 이년인데 민영은 완연한 남자의 얼굴을 하고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웃고 있었다.

 

“이야, 너를 여기서 만나네.”

“그러게. 학교 들어가고 연락도 딱 끊은 인간을 말야.”

 

날카로운 준원의 대답에 민영이 피식 웃었다.

저 성질머리는 무덤에 가도 못 고칠 거라고 장담하던 자신이 옳았다.

어쩌면 반가워한다는 인사를 그렇게 하냐.

태어날 때부터 붙어 있었던 친구라 준원의 그런 퉁명스런 말이 사실은 반가워하는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 망정이지,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시비거는 줄 안다.

 

“야, 넌 어떻게 우리 윗대가리랑 말하는 법이 그렇게 똑같냐. 곱게 말하다 죽은 귀신 붙었어?”

 

“나말고도 네 본성을 알아챈 사람이 또 있다니 그거 다행이다.”

 

“내 본성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냐? 나처럼 착하고 친절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야, 생각해 봐라. 너 학교 다닐 때 나 아니었으면 진짜 왕따 됐었어, 임마.”

 

“나 왕따였던 기억은 난다만 너한테 도움 받은 기억은 없다. 노트 빌려주거나 수학문제 풀어준 기억은 있지만.”

 

“이구, 한 마디를 안 져요.”

 

“너한테 말로 지면 그거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됐다 됐어. 내가 이준원을 이기면 그거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일이지.”

 

“야, 누가 들으면 내가 쌈닭인줄 알아.”

 

“연전연승의 무적 쌈닭여왕이니까 오해할까봐 걱정 말아.

 

시덥지 않은 농담을 나누면서 둘은 그 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특이한 방법이지만 둘은 늘 이런 식으로 서로를 헐뜯으며 우정을 확인하곤 했다.

해가 지기 직전은 숨을 죽인 채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침묵을 지키는 버릇도 똑같았다.

 

“아아, 다 져버렸네.”

 

“응, 어린 왕자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아.”

 

“걔가 누구냐?”

 

“……너, 우리나라에서 학교 다닌 애 맞아?”

 

“아, 그 장미랑 종을 초월한 사랑을 지껄이다가 안 받아주니까 가출하는 애?”

 

“어린 왕자가 네 기억에는 그렇게 남아 있냐.”

 

“맞잖아. 꼴에 왕자라고 여기저기 염문뿌리다 죽는 녀석.”

 

“너랑 말하다가 나까지 이상하게 될 것 같아.”

 

“너 원래 이상하니까 괜찮아. 근데 그 조그만 자식이 뭐?”

 

“하루에 해가 지는 걸 마흔 세번이나 봤다고 말해. 어린왕자의 별은 몹시 작아서 해가 지는 걸 보고 나서 의자를 조금 물리면 또 볼 수 있거든.”

 

“해지는 건 하루 한번으로 충분해.”

 

“몹시 슬픈 날이면 노을지는 걸 보고 싶어진다고 했으니까… 역시 하루에 한번이 좋을 것 같네.”

 

이상한 데서 의기투합하는 것도 친구사이의 특징일까.

준원은 문득 다른 사람들이 민영과 자신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다.

한번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민영은 보다시피 이런 녀석이고 자신 또한 평범하지는 않은 것 같으니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자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하다.

 

“그런데 정말 왜 2년동안이나 안 보였던 거야?”

 

준원은 자연스럽게 민영과 함께 조그만 횟집으로 자리를 잡았다.

작고 낡았지만 깨끗이 손질되어 있는 이 곳은 고등학교 시절 민영과 함께 종종 왔었다.

백일주를 마신 것도 이곳에서 민영과 함께였다.

사람에 까다롭고 다른 사람을 품에 들이기 싫어하는 자신이 어떻게 민영과는 그렇게 편하게 지냈었는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학창시절의 추억은 전부 다 민영과 함께였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낀 적도 있었지만 변함없이 자리를 지킨 것은 민영뿐이었다.

단지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 편해서라기 보다는 어딘가 붕 떠 있는 것 같은 이 녀석의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민영은 학교에서 인기도 많았었고 공부는 안 했어도 선생님들한테도 평이 좋았었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똑같이 대하는 겉모습만의 친절함을 다른 사람들은 착각했는지 모르지만 준원은 그것이 무관심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아마도 그래서였던 것 같다.

사람한테 이 정도로 관심이 없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걸 알아서 준원이 민영을 편하게 생각했었을 거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딱 질색이었으니까.

이 녀석하고는 절대 그럴 일이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르바이트로 스튜디오에 들어갔는데 거기 대빵이, 아, 우리 대빵 앞에서는 선생이라고 부르지만 얼굴보면 나보다 더 어려보여. 도저히 그 소리가 안 나온다니까. 암튼 그 녀석이 자기 아프리카로 촬영 간다면서 묻지도 않고 날 스탭에 끌어넣은 바람에 그렇게 됐지 뭐.”

 

“학교는 어쩌고? 그렇게 맘대로 해도 되는 거야?”

 

“말도 마라. 입상한 사진전 직속선배시고 학교선배시다. 사진계에서 그 정도면 잘못 보였다간 그대로 이 생활 종쳐야 돼. 그 스튜디오 합격했을 때 우리 과에서 난리가 났었다. 절대 학생은 안 쓰는 사람이 무슨 일이냐고 혹시 원래 친분이 있냐고 교수들까지 와서 묻고 난리 났었어. 만만한 나만 엄청 들볶였다.”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지 민영은 거칠게 잔을 들어 한잔을 쭉 들이켰다.

고등학교 때도 그랬지만 민영은 무얼 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교복을 입고 오토바이를 몰아도 담배를 물어도 어딘지 자연스러워 보였다.

언제부터 사진기를 들고 다녔는지 처음 찍은 사진이 뭐였는지도 기억이 난다.

 

“그래서 아무 말 못하고 끌려간거야?”

 

“끌려가긴, 아무리 인간이 미워도 아프리카에 갈 수 있는데 그 기회를 놓치면 바보지. 침대시중을 들라고 해도 감지덕지 따라붙었을 거다.”

 

“아프리카… 그렇게 좋아?”

 

“응, 정말로 경이 그 자체야. 평생 거기서 사진 찍고 싶더라. 학교 졸업하고 나면 다시 갈 생각이야.”

 

“그래… 세상은 그렇게 넓은데 말이야.”

 

“나 처음에 아프리카 도착해서 밤에 별보러 나갔다가 울었다. 우리 나라 별들이 너무 불쌍하고 내가 별이라고 믿었던 게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막 나더라니까.”

 

민영의 아프리카 여행기, 아니 사진여행기를 들으면서 준원은 오랜만에 마음 편히 시간을 즐겼다.

원래 말도 잘 하는 녀석인데다 엉뚱하고 솔직하기까지 해서 이야기는 생생하고 재미있었다.

초원의 광할함, 그 안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치열한 전쟁, 그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순박한 사람들… 그런 그들을 모두 다 감싸안는 넉넉한 자연의 모습까지 민영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준원은 자연스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멋지다… 이야기 들으니까 나도 가고 싶어져.”

“피부 망친다. 각오하고 가.”

“뭐야, 그거. 가지 말라는 소리보다 더 무섭네.”

“선택이지. 피부냐, 감동이냐.”

“그래… 세상은 다 이거 아니면 저거지. 늘 급부가 따라다니니까 섣불리 고를 수가 없어.”

 

길게 한숨을 쉬는 준원을 민영이 힐끔 곁눈질하고는 준원의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라주었다.

 

“마셔라. 한숨 쉬느니 차라리 한잔 마시는 게 더 시원해.”

“그럴지도 모르겠네.”

 

다시 한잔을 마시고 준원은 더운 얼굴에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기로에 서 있는 거야?”

“아니, 이미 끝난 일인데. 그런데 자꾸만 자신이 없어져서. 이야기 정도는 들어줄걸 하는 바보 같은 미련이 남아서.”

“오, 무슨 일이야? 연애냐?”

“그런 건 아니고…”

 

준원은 생전 처음으로 망설임이라는 감정을 깨닫는 중이었다.

디저트로 차를 마실까, 아이스크림을 마실까 하는 차원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단호하게 끊어 내놓고 후회하는 이런 미련스런 감정이 망설임이라니…

그래서 준원은 자기도 모르게 민영에게 야기와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이런 경우에 너 같으면 그 이유를 듣겠냐, 안 듣겠냐 하는 거지. 이를테면.”

“흐음… 어렵네.”

 

민영은 이마를 긁적였다.

 

“그래서 그 이유에 따라 네 태도가 결정되는 거야?”

 

“아니, 그럴 것 같지는 않아. 무슨 이유라고 해도 난 용서 못 할 테니까.”

 

“그럼 고민할 거 없잖아. 바뀔 것도 아니면서 이유는 왜 들어?”

 

“그러니까 고민인 거야. 분명히 난 달라지지 않을 걸 아는데 그런데도 그 이유를 들어야 하는가.”

 

“필요없을 것 같은데. 너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들어봤자 괴롭기만 할 거 같아. 누가 들어도 납득이 되는 이유를 자신만이 받아들일 수 없다면 말야.”

 

“그렇지? 그런데 말하는 입장의 사람으로 보면 용서해 주지 않더라도 이유라도 들어주었으면 하지 않을까? 결국 난 상처 받았다는 대의명분이 있으니까 묵살할 권리도 있다고 마음대로 믿어버린 건지도 모르지.”

 

“타인한테 그렇게 신경 써주는 거 처음 보는데. 이 오빠는 기쁘구나. 드디어 너도 당당한 한 사람의 성인이 된 거냐?”

 

감격한 얼굴로 손을 부여잡은 민영을 한심한 눈으로 보다가 준원은 에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관두자. 너랑 이런 이야기한들 결론도 안 날 테고… 이미 끝난 일인데 내가 고민해봤자지 뭐.”

 

준원은 세꼬시를 초장에 찍어 오물거리며 당면한 문제부터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기로 했다. 일단은 집 문제다.

 

“그나저나 야기집을 나오면 다시 집을 구해야 하는데… 이번엔 그냥 원룸으로 구할까봐.  너 우리 학교 근처 살지? 그 쪽은 시세가 어때? 너 사는 집은 괜찮냐?”

 

“잠깐만, 잠깐만.”

 

“왜?”

 

민영이 손을 들어 준원의 말을 가로막았다.

 

“너 아까 뭐라고 했어? 야기? 혹시 이야기 말이야?”

“네가 야기를 어떻게 알아?”

“…… 너 이야기 모르냐?”

“무슨 소리야?”

 

머리를 감싸쥔 민영이 준원을 보다가 곧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에효, 그래, 내가 말해 무엇하냐. 니가 이런 줄 몰랐던 것도 아니고.”

 

“왜 그래? 야기를 어떻게 아는 거야?”

 

“수학공식보다 더 중요한 게 인간관계다. 넌 진짜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

 

“빨리 불어. 뭐야?”

 

“이야기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이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이야기 들어보니까 내가 아는 이야기와 네가 아는 이야기가 동일인물 같다.”

 

“장난 그만 쳐.”

 

“진짜 몰라? 우리 고3때 한반이었잖아! 담임이 처음 걔 이름 불렀을 때 반이 뒤집어지게 웃었다. 그래도 기억 안 나?”

 

“그, 글쎄…”

 

“그래그래. 됐다. 기억 안 난다는데 내가 청문회하는 것도 아니고 추궁해서 뭐 하냐.”

 

“우리 반이었다고?”

 

“그러고보니… 왜 걔가 그랬는지 난 알 거 같다.”

 

“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일이 있었지. 그때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그 새끼 생각보다 집요하네 거. 난 말걸 용기도 없는 놈이라 그냥 그렇게 잊을 줄 알았는데.”

 

“혼자 중얼거리지 말고 알아듣게 설명을 해.”

 

“그게… 말하면 목숨 보존하는데 좀 지장이 올 것 같아서 고민중이다.”

 

“뭐야? 무슨 짓을 한 거냐? 얼른 불어, 말로 할 때.”

 

“니가 이러니까 말을 못 한다니까.”

 

 

민영은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별로 특이할 것도 없는 일이었는데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마도 그때 그 녀석이 선뜻 부르는대로 값을 치뤘기 때문이리라.

여름날이었다. 방학이 시작되는 날이었던가. 본격적인 수험전쟁은 여름방학에 시작된다. 아마도 그 전에 스트레스나 풀라는 담임의 뜻으로 물청소를 한 적이 있었다.

고3이라고 해도 아직은 애나 마찬가지인 시기. 다들 한껏 들떠서 즐겁게 놀았다. 그리고 마침 필름도 남았고 해서 민영은 아르바이트 겸으로 반 애들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질색인 준원의 사진도 몇장 찍어서 럭키, 라고 생각했었다.

 

‘제법 좋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 이 녀석.’

 

그리고 그날 하교길에 그 녀석이 따라왔었다. 사진도 나오기 전인데 잔뜩 긴장한 얼굴로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이준원 사진 사고 싶은데…

-안 팔아, 다른데 가서 알아봐.

 

그 사진 가져다가 무슨 짓을 하려고? 민영은 몹시 불쾌했다.

친구로서 준원이 걱정되어서라기보단 자신이 찍은 사진을 모욕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준원과 민영은 이런 관계의 친구인 것이다.-

그러나 그 녀석은 겁먹은 눈을 하고서도 제법 강단있게 덤볐다.

 

-왜 안 판다는 거야? 한 장이면 돼. 팔아줘.

-준원이한테 허락은 받았냐? 남의 사진을 마음대로 팔라고 하면 안 되지.

-……너도 허락 안 받고 찍었잖아.

-그거랑 이거랑 같냐?

-부탁해. 한 장만 팔아.

 

너무 절실하게 달려드는 모습에 조금 호기심이 동했다. 보아하니 민영이 생각하는 데로 쓸거 같지는 않고 해서 슬쩍 찔러보았었다.

 

-얼마나 줄건데? 알다시피 이거 불법이다. 그리고 난 준원이랑은 태어날 때부터 아는 사이라 발각되면 걔한테 맞아 죽던가 집에서 쫓겨 날거야. 알아들어?

-위험부담금을 내라는 뜻이야?

-머리 좋은데.

-얼마나 원하는데?

-음… 마침 렌즈가 깨져서 갈아야 되는데… 그거 5만원이거든. 돈으로 받기는 나도 뭐하고, 그냥 그거 하나 사주라.

-좋아. 대신 내가 사진을 샀다는 건 비밀이야. 옵션으로 비밀엄수까지 끼워준다면 5만원 줄게.

-좋을대로.

 

사실 그 옵션은 민영이 붙이고 싶었던 거였다. 이 녀석은 흘려 들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정말로 준원에게 들키는 날이면 어디 한군데 단단히 부러질 거다.

 

‘물론 너도 함께니까 우리 같이 협력하자고.’

 

5만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사진 한 장을 산 이야기… 늘 사람들 사이에 끼어 보이지 않던 야기를 주목한 것은 이런 이유였다. 아마도 그때 평생의 용기를 다 그러모아 왔던 거겠지. 즐거운 마음으로 이후의 전개를 기다렸지만 야기라는 놈은 그저 바라만 볼뿐이어서 얼마가 지난 후엔 민영도 관심을 끊었다.

 

 

 

“계속 그렇게 입다물고 있을 거야?”

 

아예 팔짱을 끼고 노려보는 준원의 눈길에 민영은 뜨끔 상념에서 깨어났다.

 

“험, 험… 공소시효 지났다고 약속하면 말해줄 수 있는데…”

“범죄였어?”

 

상큼하게 치켜올린 이마 아래로 한망이 가득한 눈이 번쩍 빛난다. 민영은 때아닌 식은땀을 흘리며 마지못해 웃었다.

 

“허…허… 그게 말이야…”

 

될대로 되라,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 하는 마음에 그날의 일을 주르륵 풀어놓고야 말았다. 이야기를 다 들은 준원은 화를 내기는커녕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불안한 얼굴로 민영이 준원의 눈치를 살폈지만 준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무슨 말인지 알겠어.”

“기분이 어떠냐?”

“글쎄… 잘 모르겠어.”

“잘 모르다니, 그런게 어딨어? 자기 기분인데.”

“처음엔 좀 놀랐어. 야기가 동창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었으니까. 사실 지금도 기억은 안 나. 하지만 왜 그랬는지는 알 것 같아.”

“조금도 마음이 안 흔들려? 아주 조금도?”

“설마. 나도 사람인데 그럴 리가 있어? 안쓰럽고 안 됐다 싶어. 그런데 그래도 왜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는지 모르겠어. 결국 둘 다 상처만 받은 결과가 되고 말았는데. 너무 독창적인 거짓말이라서 좀 허탈하기는 하다. 대체 좋아하는 여자한테 게이라고 거짓말을 하다니…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와.”

“응, 마음은 이해하지만 처음부터 불가능의 길을 걸은 거지.”

 

민영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 오랜 시간 바라보았던 사람에게 완벽하게 밀쳐내진 결과가 돼버린 야기에게 동정심이 우러난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민영이었다. 그리고 민영의 몫 역시 잊혀지지는 않았다.

 

“그보다 한민영군. 내 사진을 몰래 팔았었다고? 그것도 거금을 받고?”

“으악, 잘못했어. 자수하여 광명 찾자는 대외선전용이었던 거야?”

“우매한 국민들을 속여넘기는 당의정 같은 거지. 믿으면 곤란해요.”

“그런 사기를 애들한테 주입 시키다니… 우리나라는 너무 무서워…”

“선거법 위반은 50배. 선거법대로 처벌할까?”

“… 차라리 때려 죽여라.”

“현대 형법상 가능한 처벌은 사형, 징역, 금고와 구류, 자격상실과 정지, 과료와 벌금, 몰수에 한해. 어떤 걸로 고를래? 특별히 선택권을 주지.”

“으악! 살려줘, 잘못했다니까!”

 

듣기만 해도 머리가 띵해지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준원에게 민영은 두손 두발 다 들고 항복을 선언을 선언했다.

처절한 외침에 준원이 입을 가리고 살짝 웃었다.

 

 

그 무렵 야기는 최악의 결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준원과 그런 식으로 끝이 났다고 인생도 끝인 건 아니다.

준원이가 없어도 해가 뜨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든데 정작 문제는 끊이질 않고 일어났다. 가게의 문을 들어서자마자 달려온 희정씨의 보고에 이마를 감싸쥐고 그제서야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에 대해 새로운 고민을 시작해야 했다.

 

준원이 집을 나가고 이틀 밤낮을 끙끙 앓고 난 후에 일어난 야기는 뭔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어디까지나 감정상의 문제였고 눈앞에 놓인 현실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아프고 나서 겨우 인정한 준원과의 이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야기는 아예 그 기억을 봉인해 마음 맨 밑바닥에 던져 놓았다. 물론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 같이 살았던 집 곳곳에 남은 준원과의 추억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거실, 주방, 준원의 방… 어디 한 군데 준원의 모습이 겹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차라리 집안을 몽땅 뒤집어 버릴까.

그것도 안 된다면 이사를 해버릴까.

온종일 준원의 자취를 찾는 자신을 보는 것이 너무 끔찍했다.

그러나 막상 머리와 가슴에서 준원을 지울 자신이 없었기에 야기는 참담한 심정으로 그래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 기계적으로 가게에 나갈 준비를 했다.

사흘전까지만 해도 떠올리는 자체만으로 불구덩이에 던져진듯한 고통을 느꼈건만 이제는 아주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런 생각으로 씁쓸하게 웃으며 출근했던 야기를 기다리는 것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어딘지 초조한 얼굴로 야기를 맞은 희정씨는 대뜸 물어왔다.

 

“효윤이, 아니 박효윤씨 그만 두는 거 알고 계셨어요? 효윤이 말로는 매니저님한테 미리 말씀드렸다고 하던데…”

“네?”

 

놀란 야기에게 희정씨가 얼굴을 찌푸려 보였다.

 

“모르셨던 거예요? 효윤이 말로는 매니저님이랑 이야기가 됐다고 그래서 그런 줄 알았는데요.”

 

야기는 필사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효윤이의 이름을 듣는 순간 준원에 가려 미처 생각지 못했던 효윤과의 사건이 떠올랐다. 준원이 떠난 것만큼이나 쇼크가 밀려왔다.

아무리 준원이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고 해도 어떻게 효윤이를 잊을 수 가 있지? 더구나 그 날은…

야기는 자신의 한심함에 넋을 잃었다.

자신은 효윤이를 최악의 방법으로 절망시킨 것이다. 안색이 새파래져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야기에게 희정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레 물어왔다.

 

“매니저님, 아직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괘, 괜찮아요. 박효윤씨 일은 사전에 들었으니 걱정말고요. 결원 보충때까지 여러분이 좀 더 수고해 주세요.”

 

되는대로 지껄이면서 야기는 빨리 희정씨가 나가주길 바랬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몸을 책상에 의지하고 겨우 평정을 가장했다.

희정씨는 잠깐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 곧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희정씨?”

 

깜짝 놀란 야기의 물음에 희정씨가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을 꺼냈다.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매니저님.”

 

놀라 바라보는 야기를 뒤로 한 채 희정씨는 얼른 문을 닫고 나갔다.

귀 언저리가 붉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야기는 멍한 상태로 희정씨가 나간 문만을 계속 바라보았다. 이런 건 무슨 기분일까. 계속해서 터지는 일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효윤이의 일로 그나마 남아있던 이성마저 끊어지려는 찰나였다.

자책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으로 정말로 머리 소의 퓨즈가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저런 말을 하는 걸까? 기쁘면서도 야기는 불안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효윤이…”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그날 효윤이는 무슨 심정으로 혼자 문을 나섰을까. 자신의 존재마저 잊어버린 사람을 남기고 떠나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지.

희미하게 기억하는 효윤이의 목소리… 아프게 눈을 찔러오던 서글픈 얼굴의 효윤이에게, 그 조그맣고 여린 애에게 자신은 무슨 마음이었던가.

 

-형을 좋아해. 날 봐주지 않아도… 그래도 좋아하니까…

 

바르르 떨면서도 당차게 마주 안아오던 팔을 떠올렸다.

괜찮다고 웃으면서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던 땀방울, 고통에 일그러지면서도 웃어보이던 효윤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예감이 없었다면 거짓이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효윤을 이용했던 것은 비겁한 자신이었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효윤이 그 순간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고 하면 일말의 변명은 될까. 준원 때문에 아프고 사람들의 배척에 상처받은 마음에 한줄기 구원으로 다가온 것이 그날의 효윤이었다고 말한다면 지금보다는 덜 아플까.

미워하길 바란다.

늘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던 사람에게 지독한 방법으로 상처입은 마음을 증오로라도 달래길 바랬다.

그러기 위해서 야기는 효윤을 찾아내야 한다. 가게까지 그만 두고 나간 이상 야기를 보고 싶지 않다는 의사표시는 분명히 한 셈이지만 야기는 보내서는 안 되었다.

 

“제발… 내가 그 원망 다 들을 테니까… 아프지 말고 있어라. 내가 찾아 낼 거니까… 너마저 이런 식으로 잃을 수는 없어. 너 없으면 누가 깡통로봇을 상대해 주냐. 안 그래, 변신마녀?”

 

중얼거리며 야기는 직원들의 신상명세서를 뒤졌다. 아르바이트라도 받는 것이 관례이니까 효윤의 것도 분명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야기는 곧 효윤의 동글동글한 귀여운 글씨를 찾아낼 수 있었다.

 

“미안하다, 효윤아. 정말 미안해. 내가 갈게. 네가 어떤 원망을 퍼부어도, 무슨 욕을 해도 물러나지 않을거야. 니가 용서해주는 날까지 포기하지 않을거야. 내 목숨을 달래도 줄테니까… 효윤아… 제발…”

 

효윤의 서류를 손에 쥔 채 야기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사람의 몸 속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있는걸까. 이틀내내 울고 또 울어서 이제 몸 속의 수분이 다 말라버릴 지경인데 그래도 눈물은 또 나왔다. 얼마나 울면 눈물이 마를까.

수분이 부족하면 피가 눈물이 되는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울고나면 몸안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야기는 잠깐 자신이 말라비틀어진 스폰지가 된 모습을 상상하다가 몸서리를 쳤다.

 

계속~ 휘리릭~

추천수1
반대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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