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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임게이(i'm gay) - #12,13

夜記(야기) |2004.04.29 18:18
조회 393 |추천 1

** 날씨 조쵸?  ^^; **

 

 

 

 

CHAPTER 12. 에필로그- 며칠 후, 야기를 만나다

 

 

그리고 며칠 동안 정신없이 바빴다. 바로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외국에서의 생활을 준비하는 데는 의외로 시간이 걸려서 이번 학기는 포기해야했다.

휴학문제로 학교에 불려다니고 또 연수 준비로 여기저기 알아보러 다니느라 하루가 서른 여섯 시간이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나면 야기 생각을 안 하고 잠들 수 있게 됐다.

문득 그 사실을 깨달았다. 실연의 특효약은 일이라고 하더니 정말로 그런가보다.

다른 생각 할 틈을 주지 않고 몸을 몰아붙이니 상념 따위에 낼 시간이 없어졌다.

 

효윤은 그 사실을 알고부터 더욱 생활에 몰두했다.

조금이라도 틈이 나지 않도록 학원을 몇 개씩 다니고 시간 날때마다 스케치북을 펼쳤다.

프랑스에 가기전에 한국의 이런저런 면을 기억해두고 싶었다.

사실 대학에 붙기만 하면 한달이고 두달이고 전국의 아름다운 풍경을 돌아다니며 스케치 여행을 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대신 보이는 것 모두를 그림으로 남긴다.

어학연수가 끝나면 그대로 프랑스에 눌러앉아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든 이후 생긴 버릇이었다.

 

“효윤아.”

 

막 스케치북을 덮으려던 효윤은 그대로 굳었다.

들려서는 안 되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순간 많이 가라앉았다 생각했던 감정의 급류가 둑을 깨고 나오듯 순식간에 끓어올랐다.

괜찮아진 게 아니었다.

억지로 눌러 봉인해 두었을 뿐 정말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도 그 밑에선 세차게 소용돌이치는 어두운 감정들이 섞여 들어갔다가 치솟고 있었다.

뚜껑을 덮고 보지 않았을뿐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효윤아…”

 

안타까운 듯 조심스레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언제나 그 목소리로 자신을 불러주길 바랬었다.

안타까움과 그리움, 애틋함을 담아 부르는 자신의 이름은 너무 예쁠 거라고 상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예쁘지 않았다. 그저 한없는 눈물을 부르는 슬픔뿐이었다.

 

“오…랜만…이네.”

 

효윤은 주책없이 흐르려는 눈물을 어금니로 물어 참고 간신히 인사를 건넸다.

사실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보고 싶지 않다.

보게 되면 분명히 자신은 그에게 다시 끌리고 말 거니까, 이번에야말로 붙들고 놓아주지 않을 거니까.

왜 온 것일까.

왜 와서 이렇게 자신을 혼란스럽게 할까.

그냥 이대로 서로 안 보고 조용히 세월이 지나가길 기다리면 될 것을, 왜 찾아와서 겨우 제대로 서려는 자신을 흔들어 놓는 것일까.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묘한 오기가 생겼다.

그렇게 잔인하게 자신을 차버리고 이렇게 다시 찾아와 얼굴을 내미는 뻔뻔함에 화가 치밀었다.

효윤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흔들리는 모습 따위 보여주고 싶지 않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다.

야기 때문에 아파한 흔적같은 건 보여주지 않을 테다.

 

‘당신이 없어도 난 잘 살고 있노라고, 그렇게 태연하게 대해 줄거야!’

 

대상없는 분노가 일었다가 야기에게로 향했다.

모든 원망, 모든 슬픔을 분노로 바꿔 겨우 에너지를 얻는다. 야기를 대면하기 위해서는 그런 정도의 강한 힘이 필요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눈을 깜빡거려 눈물을 지운다.

빈틈없이 마음의 무장을 한 뒤 효윤은 뒤돌아서며 생긋 웃었다.

 

“이런데서 만나다니 참, 세상 좁네.”

 

흠칫 멈춰서는 야기의 모습을 효윤은 필사적으로 태연하게 맞았다.

그러나 야기를 눈에 담은 순간 찌르듯 아픈 가슴에 자기도 모르게 손을 올렸다.

한달이 좀 지났을 뿐인데 야기는 형편없이 말라있었다.

힘들게 채워 넣었던 분노가 바람빠진 풍선처럼 쭈그러들고 동시에 안스러움과 연민이 그 자리를 채운다.

퀭한 눈동자, 말라서 뼈가 드러난 손등, 무엇보다도 효윤을 아프게 한 것은 빛을 잃어버린 눈동자였다.

아직 야기에 대한 마음은 하나도 덜어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효윤은 인정해야만 했다.

아직도 이렇게 애틋하고 아프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쁜가 하면 반대로 또 화가 치민다.

효윤은 복잡다단하게 밀려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야기만을 바라보았다.

 

“말랐구나…”

 

야기의 말에 효윤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는 전혀 모르는 거야? 그렇게 여위어서는, 불쌍하게 내 앞에 나타나다니… 나한테 그런 모습을 보여주다니… 형 진짜 나쁜 놈이야.’

 

당장이라도 퍼붓고 싶은 외침을 간신히 눌러참는다.

대신 효윤은 스케치북을 챙기는 척 시선을 돌렸다. 더 보고 있다가는 정말로 고래고래 소리치고 말 것 같았다.

그런 효윤의 행동에 당황했는지 야기가 다가왔다.

조심스럽게 다가와 두걸음 뒤에서 주저하듯이 멈췄다.

 

‘두 걸음… 형과 나는 이제 그 거리를 유지하게 되겠지. 둘 중 누구도 더 이상은 다가갈 수 없어. 평행선 위에 선 채로 두 걸음 거리에서 바라보아만 해. 그게 내 어리석은 행동의 대가인거야.’

 

어느 쪽이 좋은지 알 수 없었다.

야기에게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보여주고 이런 결말을 맞는 것이 곁에서 마음을 숨기고 같이 웃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곁에 있고 싶다.

같이 웃고 떠들며 한 걸음 안에 어울리는 사이로 남아 있고 싶었다.

언제든 원하면 볼 수 있는 한 장소에 있고 싶다.

야기의 얼굴을 본 순간에서야 효윤은 자신이 얼마나 야기를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바보같고 병신같게도 아직도 효윤은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렇게 마른 야기를 보고 눈물이 날 정도로, 그렇게나 다짐해왔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져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위로해주고 싶을 만큼.

 

“효윤아… 잠깐만 나한테 시간내주면 안 될까?”

 

어렵게 결심하고 나왔는지 야기는 두려운 눈으로도 똑바로 효윤을 보았다.

단호한 의지 같은 것이 서려 있어서 야기를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늘 사람좋은 웃음을 띄고 공기처럼 부유하던 야기가 처음으로 땅에 발을 딛은 사람처럼 단단해 보였다.

효윤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역시 야기를 더 보고 싶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이겼다.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효윤은 이런 것이 바로 반한 사람의 약점이라고 중얼거렸다.

하긴, 지금의 야기는 뭐라고 해도 기어이 효윤을 붙잡고 말 사람같았다.

체질적으로 계산이나 밀고 당기기 따위는 인연이 없는 효윤이다.

어차피 그렇게 될 거라면 빨리 해치우는 편이 낫다.

 

“…근처에 맛있는 소바집이 있어.”

 

  

날짜상으로는 여름이 지났다지만 아직 낮에는 땀이 흐를 정도로 더웠다. 근처에선 숨은 맛집으로 소문난 소바전문점 ‘세이류’는 점심시간이 지나서인지 한산했다.

 

“아줌마, 여기 모리소바 두개요.”

 

야기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효윤은 주문을 넣었다.

말라 비틀어진 몸에 다른 것을 먹여봤자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더운 날에 먹는 소바로 조금이라도 입맛을 되찾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야기는 효윤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음식이 나와 야기의 앞에 놓여질 때까지도 야기는 뭔가 고민하는 중이었다.

 

“모리소바 나왔습니다.”

“에?”

 

자기 앞에 놓여진 음식에 야기가 그제서야 놀란듯 눈을 든다.

 

“먹어. 이 집 소바, 신문에 날 정도로 맛있어. 아줌마, 있다가 가져가게 2인분 포장해 주세요.”

“응, 그럼 30분 뒤에 준비할게.”

 

편안하게 웃으면서도 뭔가 탐색하는 눈이다.

효윤은 어릴 때부터 친했던 집에 야기를 데려온 것을 조금 후회했다.

분명히 엄마 귀에 들어갈텐데…

아무튼 야기만 관련되면 제정신을 못 차리는 자신이었다.

 

“맛있다…”

 

젓가락을 문 채 야기가 중얼거렸다.

그 놀란 눈에 효윤은 금세 데려오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많이 먹어. 입맛 별로 없는 모양인데… 형 진짜 많이 말랐어.”

“그, 그랬나?”

 

어색하게 웃으면서 소바를 먹는 모습에 효윤도 묵묵히 식사를 했다.

아닌게 아니라 더운 날 먹는 소바는 적당히 깔깔하고 시원해서 없던 입맛도 되살려줄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식사를 했다.

야기가 남기지 않고 다 먹은 것을 확인하고 효윤은 젓가락을 놓았다.

 

“맛있었어. 오랜만에 제대로 식사를 한 기분이야. 고맙다.”

“그래.”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갈피를 못 잡고 망설이는 야기가 몇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효윤은 조용히 야기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재촉한다고 나올 말도 아니고 그렇게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윽고 야기가 탁자에 이마를 댔다.

 

“미안하다… 그날일, 정말 잘못했어.”

 

갑자기 효윤의 머리 속에서 끈이 끊어졌다.

눈앞이 새빨갛게 변하고 목 어딘가에서부터 피맛이 확 끼쳤다.

이래서는 안 됐다. 이렇게 사과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렇게… 그날의 일을 잘못됐다고 하면 안 됐다.

 

아름답게 간직하려던 자신의 마음이 한 순간 짓밟힌 기분이었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결심을 야기가 더럽히고 말았다. 그날의 일을… 추하고 잘못된 것으로 만들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

 

“잘못해?… 그날… 그랬던 거…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었어?”

“뭐라고 해도 할말이 없어. 그래선 안 됐었는데… 너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내가 정말 잘못했어.”

 

효윤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달려들어 죽여버리고 싶다.

이런 식으로 철저하게 자신을 부정하는 저 사람을, 당장 죽이고 싶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뿌애진 눈을 부릅뜨고 효윤은 상위에 있던 것들을 잡히는 대로 내던졌다.

 

“잘못해? 미안해? 네가 뭔데! 네가 뭐라고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네가 잘못했으면 나는? 나도 잘못 된거야? 너한테 이런 말 듣고 싶대? 왜 겨우 마음잡은 사람한테 와서 속을 뒤집어놔? 나쁜 자식! 나쁜 놈!”

 

남은 국물이며 면, 젓가락, 냅킨까지 고스란히 뒤집어 쓰고도 야기는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말없는 그 등에 더욱 분노가 치민다. 효윤은 달려들어 주먹으로 그 등을 때리기 시작했다.

 

“나쁜 자식아! 내가 널 좋아했다고 그렇게 우스워 보여? 너한테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난 후회 안 해. 충분히 각오하고 한 일이야. 그런데 네가 뭐라고! 뭐라고 그런 날 더럽게 만들어? 내 눈에 보이지 않게 살지! 이런 소리 해서 날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어디 처박혀서 나오지 말지, 왜 날 이렇게 만들어, 왜?”

 

통곡에 가까운 수준이 되어서도 효윤은 야기의 등을 두들겼다.

그 동안 가슴에 쌓아뒀던 울분과 서운함이 한없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야기는 그대로 효윤이 하는 대로 조용히 당해주었다.

 

“왜… 끝까지 날 힘들게 해… 왜…”

 

울음이 잦아들면서 한순간에 감정을 다 쏟아버린 효윤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몸을 일으킬 힘조차 없이 누워 딸꾹질을 하면서도 계속 흐느꼈다.

그제서야 야기가 일어나 효윤을 무릎에 뉘였다.

자기 몸의 오물이 묻을까봐 벗어두었던 겉옷으로 효윤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여전히 분명하지 않은 시야에 멍한 머리라 효윤은 그대로 야기의 무릎에 누워 시중을 받았다. 어깨를 쓸어내리는 야기의 손이 너무 다정해서 눈물이 끊이지 않고 흘러내렸다.

 

“미안해… 효윤아, 미안하다…”

“미…안…시러… 시…”

 

얼마나 울면서 소리를 쳤던지 목이 완전히 쉬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데다 한번 무너진 마음은 더할 나위없이 약해서 효윤은 야기에게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하다는 말, 싫어. 왜 그렇게 말해? 내가 왜 화내는지 몰라? 그래서 이래? 나, 그 소리 정말 싫단 말야. 너무 싫어. 꼭 내가 해선 안 되는 짓을 한 것 같잖아. 난 아니야. 나 그날 제정신이었어. 형이 미안한게 아니라 내가 미안한 상황이란 말야… 형이 그러면 나는 뭐가 돼? 그러니까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마. 제발.’

 

“쉬이,”

 

야기의 손이 부드럽게 효윤의 부은 눈을 덮었다.

찾아온 어둠이 편안해서 효윤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한손으로는 효윤의 눈을 가리고 다른 한손으로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야기가 느즉하게 말했다.

 

“그게 아냐… 그래서 미안하다는 게 아니야. 내가 미안한 건, 널 내버려두고 잊어버린 것에 대해서야. 아무리 준…원이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고는 해도… 너한테 내가 너무 잘못했어. 너무 미안해. 내 자신이 혐오스러울 정도로 너한테 면목이 없어. 네가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 알면서도 모른척 한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 그래서 미안한 거야. 모르는 척 너의 위로에 기대서 널 이용했던게 얼굴에서 불이 날만큼 부끄러워.”

 

다시 눈물이 흘렀다.

손 아래로 느껴지는 습기를 야기의 손가락이 슬쩍 닦아준다.

효윤은 야기에게 매달렸다.

차마 말로 못하는 고백을 대신하는 효윤의 몸짓이었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야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누운 채로 끌어안긴 이상한 형태가 되어서도 효윤은 웃었다.

지금 닿아있는 온기를 의심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야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여전히 준원이고 야기의 마음이 거기에 쏠려 있다고 해도… 여기에, 자신에게도 조금은 있을 테니까.

 

화려한 고백도, 앞날에 대한 약속도 필요 없다.

효윤이 갖고 싶은 건 우물쭈물하면서도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이 사람이고, 이 사람은 지금 자신의 곁에 있었다.

앞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야기는 끝내 준원을 사랑할지도 모르고 효윤 역시 언제까지나 야기에게만 향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효윤과 야기는 함께 있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곁에 있으면 된다고, 자신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때까지 함께 있으면 언젠가는 확신하리라고 생각한다.

뭐라고 해도 효윤은, 지금도 이 바보 같은 남자가 너무 좋으니까.

이제 겨우 시작이다.

조금씩 길들여서 언젠가는 손에 넣고 말 테다.

 

‘옆에 있는 쪽이 유리한 거라고요. 언젠가 당신이 이 남자를 찾아도 그때는 이미 늦었을지도 몰라요. 준원 언니.’

 

안긴 채로 효윤은 씨익 웃었다.

 

 

 

 

 

CHAPTER 13.  에필로그- 사귀는 중, 우진을 만나다

 

 

“바보같이… 자존심이 밥먹여주냐.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비굴할 줄도 알아야 되는 거야. 일단 가지고 나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걸, 지금 잠깐 참아주는 거지. 내거가 되고 나면 그때 갚아주면 돼.”

 

찻잔을 잡은 채 일장연설을 하는 우진의 말에 효윤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연애를 해 본 놈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는 효윤이 싫지는 않은듯 우진은 꽤 기분좋은 얼굴이었다.

효윤은 그런 우진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처음 우진을 보았을 때가 생각난다.

 

고등학교 1학년때 화실을 옮겼다.

그 전까지는 그냥 사촌오빠네 아틀리에에 놀러다니는 수준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서양화로는 최고로 쳐주는 대학을 나와 파리에 유학까지 갔다가 1년반만에 바로 돌아와서 아틀리에에 틀어박힌 사람이었다.

 

고모는 하나뿐인 아들이 혹시라도 잘못될까 두려워해서 감시인 겸으로 그때 아직 어린애였던 효윤을 슬쩍 들여보낸 것이다. 까다롭기로 치자면 세상에 단연 우뚝 서는 존재인 오빠는 그나마 어린 효윤에게는 상냥한 편이었다.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개방해주지 않는 아틀리에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효윤뿐이라서 고모는 효윤을 무슨 구실을 붙여서라도 아틀리에로 출근시켰다.

 

효윤은 효윤대로 넓고 물감냄새로 가득한 그 곳을 좋아했다.

좀 심심하긴 했지만 널린 종이에 낙서를 하고 그림을 그리다보면 어느새 하루해가 금방 지곤 했다.

오빠는 효윤에게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다.

둘은 같은 장소를 공유하는 다른 동물처럼 자기 생활을 영위했다. 효윤은 그렇게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고 자연스럽게 미술을 전공하기로 했다. 막상 그 이야기를 하자 오빠는 화실을 소개해 주었다. 입시용 그림은 전문학원에서 배우는 것이 좋다는 말에 효윤은 화실로 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진을 만났다.

 

우진은 상당히 얌전한 아이였다.

지금의 모습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우진을 처음으로 눈여겨 보았던 건 그애의 구성을 보고 난 후였다.

거기에는 현란한 색채가 펼쳐져 있었다. 도무지 생각하지 못했던 색의 배합으로 채워진 구성표를 보고 효윤은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우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렇게 얌전한 외관을 하고 있지만 사실 가슴속은 흘러넘치는 졍열로 가득하리라.

그 사이의 갭이 너무나 불안해서 효윤은 계속 우진을 바라보았다.

 

“기분나빠.”

 

화실에 온지 1년이 다 되어가는 날이었다. 학기초라 어수선한 틈을 타서 애들이 죄다 놀러나가고 마침 화실에는 우진과 효윤만이 남아있었다. 갑자기 들리는 말에 효윤은 놀라 우진을 바라보았다.

 

“기분 나쁘다고. 너 계속 나 보고 있었지?”

 

공격적으로 물어오는 우진에게 효윤은 너무 놀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우진이 신경질적으로 연필을 내동댕이쳤다.

 

“그렇게 보지 말라고! 사람을 감시하는 눈으로. 기분 나쁘단 말야!”

“바보냐?”

“뭐?”

 

잠깐 어이가 없어 넋을 놓은 사이 계속된는 우진의 질책에 화가 났다.

뭐라고 해도 효윤은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 주의다.

특히나 이렇게 무례한 녀석의 트집은 참을 수가 없었다.

 

“너 무슨 대단한 인물이냐? 너를 감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어? 내가 왜 널 감시한다고 생각해? 너야말로 날 의식하고 있었던 거 아니야?”

“계속 보고 있었잖아. 계속… 그런거 숨이 막힌단 말이야.”

“그래, 널 본 건 인정해. 하지만 그건 네가 아니라 네 그림에 흥미가 있어서였어. 그러니까 과민반응은 그만 둬. 더 이상 신경 안 쓸 테니까.”

“내 그림?”

“그래, 나 처음 이 화실 와서 네 구성표 봤었어. 나는 생각도 못해본 색배합이어서 궁금했던 거야. 다음은 어떤 색을 쓸까. 하지만 그런 소리까지 들을 줄은 몰랐다.”

“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조금 멍한 얼굴로 물어오는 녀석이 순간 너무 여려 보여서 효윤은 피식 웃어버렸다.

 

“동갑인 꼬맹이한테는 관심없어.”

 

순간 발끈한 얼굴로 우진이 소리쳤다.

 

“누가 꼬맹이라는 거야?”

“남자는 여자에 비해 정신연령이 낮아. 넌 그 중에서도 하위 같은걸.”

“뭐야?”

 

한동안 노려보던 우진은 새빨개진 얼굴로 픽 고개를 돌렸다.

그 날을 계기로 우진과 효윤은 점점 가까워졌다.

화실에서는 둘이 사귀는 사이라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효윤과 우진은 딱히 그 소문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실기시험날, 같은 학교를 지망한 두 사람은 시험을 마치고 느긋한 기분으로 걷고 있었다. 뭐,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최선을 다하고 나니 홀가분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해서 자연히 걸음이 느려졌다.

 

“효윤아…”

 

뒤에서 부르는 우진의 목소리에 효윤은 몸을 돌렸다.

감색 더플 코트 속으로 우진의 하얀 얼굴이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효윤은 잠자코 우진이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몇번인가 침을 삼키던 우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나, 게이야.”

“알아.”

 

너무도 쉽게 나온 효윤의 대답에 우진이 눈을 크게 떴다.

 

“네 그림 처음 봤을 때, 우리 오빠한테 물어봤었어. 그랬더니 오빠가 그건 게이들의 감각이라고 하던걸.”

 

너무 맥이 풀려서 우진은 그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아, 우리 오빠, 이 학교 나왔어. 그림에 대해서는 엄청 예리한 사람이라서… 믿어버렸어. 아니었으면 큰일일뻔 했네, 그러고보니.”

 

그때의 기억이 몰려와서 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정말 그때 얼마나 허탈했던지…

스스로는 몇 년을 죽어라 고민하다가 마음을 정했는데 이미 그런 식으로 결정되어 잇었다는 생각을 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

우진은 방긋 웃으며 애인, 사실 현재 짝사랑 상대지만, 자랑에 여념이 없는 효윤을 한번 째려봐주었다.

그날 얼마나 고민하고 고백한 건데…

이 녀석은 완전히 그 순간을 코미디로 만들어 놨었다.

 

“형이랑 첫데이트 했을 때는 정말 긴장되더라. 뭐랄까, 그… 여자와 남자로 만난다는 게 생각보다 쑥스럽더라고.”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효윤이 녀석을 보자니 속이 조금 뒤틀린다.

행복의 절정에 서 있는 것도 좋고 친구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지만…

역시 별로 마음에 안 든다.

우진이 아는 효윤이는 훨씬 더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란 말이다.

 

“흥, 그 사람은 그게 데이트인 줄이나 아냐?”

“정, 우, 진… 네 정녕 오늘 단매에 죽고싶은 것이더냐?”

“소인은 바른 말한 죄밖에 없사온데 이리 하시오면 다른 이들이 어찌 처신하겠사옵니까?”

“이것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요망한 소리를 지껄이는도다.”

“사극 놀이냐?”

“형!”

 

반색을 하는 효윤이의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우진은 이제 그만 심술궂은 오빠 행세를 그만 두기로 했다.

심정으로야 효윤이를 힘들게 한 야기가 밉기는 하지만 본인이 저렇게 좋다는데 뭐.

 

“서방님 오셨으니 난 이만 간다.”

“밥 먹고 가. 맛있는 거 사줄게.”

 

만류하는 야기에게 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나 여기 앉아 있다가 누구한테 맞아 죽으라고. 밥은 나중에 사줘.”

 

난처한 얼굴로 웃는 야기와 죽일듯이 눈을 부릅뜬 효윤을 남겨두고 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유리로 된 카페의 바깥에서 내다본 두 사람은 참 다정해 보였다. 우진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행복해야 한다, 효윤아.”

 

 

내일~ 아마 마지막 에필로그가 될듯~ 내일 봐요 여러분~ ^^

추천수1
반대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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