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진실은 때로 상처가 된다
기차역으로 가는 길, 윤은 유진에게 계속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알았지? 절대! 절대로 내 친구들 앞에서 이상한 말 하면 안 돼.”
“그 이상한 말이라는 게 대체 뭘 말하는 거냐?”
‘그걸 몰라서 묻냐! 정말 생각같아선... 으휴.
하지만 얘도 인간이니 창피하다고 하면 상처받겠지?’
“그러니까... 말하자면... 으음...”
생각에 잠긴 윤은 잠시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뭐라고 해야 하나? 분명히 이상한데 막상 말하려니 생각이 안 나네.’
“일단 말을 꺼내면 똑바로 끝까지 해야하는 법이니라.”
“그거! 그거 말야. 보통 애들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지금 내 말투가 문제라는 거냐?”
“그렇다. 그러니 자중해 주길 바란다.”
윤이 일부러 유진의 말투를 흉내내어 말했지만
유진은 그닥 신경쓰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윤은 불안해졌다.
‘설마 거기까지 가서 사고치지는 않겠지? 왠지 느낌이 안 좋아.’
“이윤, 얼른 못 뛰어와? 늦은 주제에 여유부리며 걷는 거냐?”
윤과 유진이 도착하자마자 여자애들의 눈길이 유진에게로 쏠렸다.
“윤이 남자친구?”
“그렇게 미팅을 해대더니 결국 킹카를 물었구나.”
‘킹카? 킹카 좋아하네. 돌아가는 길에도 킹카소리가 나오면 니들을 존경해주마.
근데 왜 자꾸 사람들이 유진이를 보는 거지?
혹시... 유진이 이마에 사이코라고 씌여있나?’
“놔라. 왜 남의 얼굴을 잡고 돌리는 거냐?”
“혹시 뭔가 네 얼굴에 문제가 있나해서.”
“아유, 뜨겁네, 아주. 처음이라 불타오르나 보지?”
부러움 반 질투 반으로 윤을 놀리는 친구들이었지만 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얼마만에 기차 타 보는 거지?”
“그러게 말야. 역시 나오니까 좋다. 바람도 시원하고.
역시 서울이랑은 공기부터가 다르다니까.”
“고린 냄새가 좋은 게냐? 생긴 것만큼이나 특이한 취향이로군.”
윤은 화들짝 놀라 유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프다.”
“저기 좀 봐. 하늘이 엄청 파랗네. 호..호...”
“그, 그렇네...”
약간 어색해진 분위기였지만 윤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앞으로 삼박사일 이 짓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 앞이 캄캄했다.
‘있다가 한번 더 교육시켜야겠어. 역시 유진이를 데려온 게 잘못이었을까?
하지만 안 그러면 오빠들이 곱게 보내줬을 리는 없고...’
“유진아. 근데 의대는 엄청 바쁘다며? 이렇게 놀러와도 되는 거야?”
“의대생이었어?”
순간 여자애들의 눈빛이 빈짝 불을 뿜었다.
윤은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미진이 한발 빨랐다.
“그럼. 유진인 S대 의대 현역이야. 그것도 장학금 받고 들어갔대.”
‘조미진. 제발 유진일 화제의 중심으로 삼지 말아다오. 너도 얘가 어떤지 알잖냐.’
“대단하다. 참, 그러고보니 윤이 오빠도 거기 다니지 않아?”
“어머, 그럼 오빠가 소개시켜 준 거야?”
“얼굴도 잘 생겼고 머리까지 좋으니... 어쩌다가 윤이한테 걸렸대?”
“윤이 오빠를 생각해봐. 그렇게 동생 챙기더니 이런 남자친구 붙여줄려고 그랬나보지.”
여자애들은 아예 유진을 둘러싸고 수다를 떨어댔다.
졸지에 찬밥신세가 된 윤과 남자들은 멀뚱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씨. 조미진 저건 왜 쓸데없는 소릴 해가지고...
어이, 다들 자기 남자친구나 챙겨. 저봐, 째려보잖아.’
-김밥있어요, 김밥~
“아, 김밥이다. 배고프다.”
“윤이 네가 배 안 고플 때도 있었냐?”
“조미진...”
“아냐, 나도 배가 고프네. 호호, 우리 출출한데 요기나 좀 하자.”
‘조미진 저게 미쳤나? 왜 자꾸 시비야? 유진이는 끼고 돌면서, 씨잉.’
“맥주도 좀 주세요.”
‘아침부터 뭔 맥주?‘
불편한 심기를 팍팍 티내며 맥주를 사는 남자들을 보며 윤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난 커피. 유진인 뭐 마실래?”
‘헛! 미진아, 너 왜 그러냐?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잠깐. 아니지, 미진이가 유진일 맡으면? 난 자유!
흑흑, 미진아... 내가 전에 너한테 여우같다고 한 말은 취소다.
너야말로 진정한 나의 친구이며 구세주란다.’
“유진아, 커피 마실래?”
“커피에는 카페인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
카페인은 중추신경을 자극하여 각성효과를 내므로
과다복용하면 불면증 등을 유발할 수 있다. 또한...”
“그럼 물 마셔. 자, 여기 물.”
“......쥬스다오. 단 걸로.”
“어머, 유진이 보기보다 귀엽네. 단 게 좋은가봐.”
‘잘한다, 조미진. 화이팅!’
유진이를 끼고 떨어지지 않는 여자들 때문에
밀려난 남자들을 거느린 윤은 그야말로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남자 셋을 독차지한데다가 금지됐던 술까지...
한시간 좀 넘게 걸리는 동안 얼마나 마셨는지 윤의 얼굴은 이미 벌개져 있었다.
“아, 윤이 술 잘 마시네. 하나 더?”
“좋아좋아. 차안에서 마시니까 기분조오타~”
“그런 의미에서 건배~!”
생전 처음 마시는 술에 취한 윤은 방방 뜨는 기분에 헤헤 웃었다.
풀어져서 배시시 웃음을 흘리는 윤을 본 남자들은 새삼스럽게 윤을 보았다.
‘얘 술마시니까 귀엽네. 평소랑은 다른데.’
“그만 마셔라. 너무 과하다.”
‘미진아, 얘 좀 데려가라. 응?’
“웁!”
미진에게 눈짓을 하느라 고개를 젖힌 윤의 목으로 맥주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갔다.
사레가 걸려 숨을 못 쉬게 된 윤의 얼굴이 더욱 새빨갛게 달라올랐다.
그러나 윤의 사정을 모르는 남자들은 낄낄거리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윤, 최고다!”
“멋져요, 누님~”
숨이 막혀서 거의 질식사하기 전 윤은 흐려진 눈으로 원망스럽게 그들을 노려보았다.
‘이렇게 죽는 건가? 안 돼, 술마신 거 알면 오빠들이 가만 안 있을 건데...
신문에 [놀러가던 대학생 맥주에 목걸려서 질식사] 같은 표제로는 나고 싶지 않다고!’
순간 등을 두드리는 강력한 손길.
팡팡 소리가 나도록 쳐대는 힘에 가슴이 트이면서 콜록콜록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만 때려! 아프잖아!”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았지만
유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윤을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라. 내려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 좀 나을거다.
숙소까지 가는 동안에는 깨겠지.”
만취 상태로 유진에게 끌려 기차에서 내린 윤은
비몽사몽 간에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 꼭 달라붙었다.
‘아아, 따뜻하다. 이불인가? 아니, 좀 딱딱한데...’
순간 속이 울렁거렸다.
‘뭐야, 비포장도로야? 왜 이렇게 덜컹거려? 차 안인가?’
머리는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은데 도저히 눈이 뜨이질 않는다.
윤은 그 와중에도 손으로 입을 막으며 열심히 참아보려고 했다.
“웁, 웁...”
“꺄악, 윤이 토하려나봐. 어떡해?”
“아저씨, 봉지없어요?”
“여학생이 아침부터 술이 과했구만. 차안에 토하면 안 되는데...”
“여기, 여기 있어!”
“그건 흰봉지잖아!”
“아무 거나 빨리 줘, 지금 색깔이 문제냐?”
‘왜 이렇게 시끄러워? 그나저나 속이 왜 이렇게 안 좋지?’
“토하고 싶으면 토해라. 억지로 참으면 더 안 좋다.”
입가에 와닿은 선뜩한 느낌에 윤은 도리질을 쳤다.
그러나 억센 힘은 윤의 입가를 강제로 덮고 떨어지지 않았다.
윤은 숨을 쉬려고 입을 벌렸다가 차가 한번 크게 튀어오른 순간
목까지 치밀어 왔던 걸 밖으로 뿜어냈다.
“우웩~”
“꺄악, 어떡해! 쟤 토해!”
“학생들, 도저히 안 되겠네. 여기서 그만 내려야겠어.”
“아니, 아저씨, 그런 법이 어딨어요?”
“봉지 더 줘봐. 부족할 거 같아!”
“넘치기 전에 얼른 내려!”
‘아아, 시원하다. 욱, 또 넘어오네...’
“우웩~”
“... 쟤 아침부터 뭘 그렇게 많이 먹은 거야?”
“끝이 없다, 정말.”
“나 못 살아... 이게 뭐야?”
“숙소까지는 차로 가도 20분이라고...”
망연자실 먼지를 날리며 멀어져가는 택시를 보는 친구들.
그러나 윤은 그런 사정도 모른 채 속을 깨끗이 비워낸 후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음, 이제야 좀 편안하군. 헤헤, 따뜻하고 부들부들, 기분좋다.’
윤을 업은 유진은 한팔에 하나씩 배낭을 걸고 묵묵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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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보니 벌써 주위는 어둑어둑했다.
윤은 잠깐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몰라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어디야?”
뭔가 찝찝한 기분에 윤은 인상을 찡그렸다.
“일어났냐? 얼른 나가서 씻고나 와. 방안에 술냄새가 진동을 한다.”
“뭔일이 있었던 거야? 나 왜 이러고 있냐?”
“너 지금 설마 기억이 안 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
“아니, 그게...”
순간 미진의 눈이 여우가 무색할 정도로 홱 치켜올라갔다.
“너땜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기나 해?
여기까지 자그마치 1시간을 걸어왔어!
택시로 오면 20분이면 되는데 네가 토하는 바람에 쫓겨났단 말야!
산길에 차도 없고 오는 길도 모르고 우린 죽을 뻔 했는데
저는 편하게 자고 일어나서 이제 기억이 안 난다고?”
무시무시한 미진의 눈빛 아래 윤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최악이다... 쪽팔려서 어떻게 얼굴들고 삼박사일을 보내냐...’
“약 가져왔다.”
“어머, 유진아. 약국까지 한시간이나 걸린다는데 어떻게 갔다 온 거야?”
“주인 아저씨한테 얻었다. 손님들 때문에 상비하고 있다더구나.”
“참 내. 놀러오는 길에 술마시고 뻗은 인간은 네가 최초일거다. 이윤.”
윤은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채 멍하니 약을 먹었다.
‘얼른 나가긴 해야겠는데... 가다가 다른 애들을 보면 어떡하지?
할 수 없다. 얼른 튀어나가 욕실로 틀어박히는 거야.’
결심을 굳힌 윤은 뻣뻣한 걸음걸이로 방문을 빼꼼히 열고 슬쩍 밖을 내다보았다.
다행히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윤은 문틈으로 욕실의 위치를 가늠했다.
‘그래, 저기 입구쪽 문이 욕실이구나.
순간이동이 절실한 시점이다. 넌 할 수 있어, 이윤.’
윤은 문을 열자마자 휑하니 달려 목적지로 뛰어들었다.
“야호, 성공이...”
열린 문 안에서 고스톱을 치고 있던 친구들이 황당한 얼굴로 윤을 올려다 보았다.
커플전인지 옹기종기 모여앉은 두쌍과 남자 하나의 시선이 윤에게로 날아와 꽂혔다.
“미, 미안...”
로봇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 뒤로 휙 돌던 윤은 순간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이건 악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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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못 견디고 숙소에서 도망쳐 나온 윤은 하릴없이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젠장, 배고프다. 저녁은 닭도리탕 사먹으러 간댔는데... 먹고는 싶지만 쪽팔리고...
아아, 속도 쓰리고 머리도 아파. 그냥 눈 딱 감고 돌아갈까? 언제까지 피할 수도 없고...
그치만 아무리 생각해도 쪽팔려. 힝, 넘어지지만 않았어도 그냥 들어갈텐데.’
“그놈의 술이 웬수야. 누가 술의 ㅅ자만 말해봐라, 그 자리에서 죽여줄테니.”
윤은 눈에 띄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아악! 대체 누가 술같은 걸 만든 거야?
술이 싫어! 유진이보다, 오빠들보다 더 싫다고!”
“진이가 술래다~”
“술? 어떤 인간이야!”
벌떡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는 윤의 눈은 활활 불타고 있었다.
저만치서 빙빙 돌아가면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깜짝 놀라 윤을 바라보았다.
윤은 한달음에 뛰어가 아이의 목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왜 하필 술래잡기 같은 걸 하고 그래?
‘얼음땡’도 있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도 있잖아! 술래잡기 하지 마, 알았어?”
씩씩 숨을 몰아쉬는 윤의 앞으로 스윽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엄마... 우에엥~”
‘헉! 고릴라다!’
“이봐, 학생. 왜 잘 놀고 있는 애들한테 겁을 주고 그래?”
“그, 그게...”
“아유, 요즘 젊은 것들은 정말.”
“그런 게 아니예요!”
윤은 달렸다.
“헥헥, 이 정도면 못 쫓아오겠지. 아아, 힘들다. 오늘 일진이 왜 이러냐.
이게 다 술 때문이야. 술은 이제 나의 최대의 적이야.”
“우웅, 자기 입술은 너무 섹시해.”
“수울? 이번엔 또 누구야!”
무작정 숲속으로 뛰어들어간 윤의 눈에 비치는 남녀의 진한 키스 장면.
눈이 마주친 세사람은 그대로 얼어붙어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 순간 윤은 남자의 눈에서 번뜩이는 살기에 후다닥 물러나 나무를 잘 여며주었다.
‘고릴라를 피해 도망친 곳이 늑대굴이라니...’
“죄송합니다~!”
윤은 또 달렸다.
“역시 술때문이야! 이 웬수!!! 무조건 다 술때문이라고!”
결국 두시간을 헤메다 돌아온 윤은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린 채
테이블 구석에 앉아 밥을 퍼먹고 있었다.
‘좀 불편하긴 하지만 진짜 맛있다. 역시 오길 잘했어. 최대한 눈에 안 띄게 많이 먹자.’
윤의 속마음은 모르고 미진은 그저 윤이 안 돼 보였다.
‘아이구, 저걸 진짜... 안 그러던 기집애가 저러니까 신경쓰이네.’
“윤아, 여기 닭도리탕 맛있다, 그치?”
“응? 으, 응...”
닭다리로 슬쩍 뻗어나가려던 윤의 손이 멈칫 도로 들어갔다.
“왜, 전에 갔던 남대문 시장 안에 있던 닭집...
우리 일부러 찾아가서 먹은데 있잖아. 거기랑 좀 비슷하지?”
“응...”
‘아씨, 말 좀 하지마. 말할 때마다 다들 쳐다보잖냐.’
“많이 먹어. 너 닭 좋아하잖아.”
“응...”
‘왜 자꾸 말을 시키고 그래? 저 다리 먹어야 되는데 가져 올 수가 없잖아.
아, 안 돼! 그거 내거야! 손대면 죽어.’
“얼굴이 빨갛다. 아직 술이 덜 깬 게냐?”
‘김유진, 이 웬수야. 꼭 그 이야기를 해야겠냐, 지금 이 자리에서?
저 닭다리 누가 집어가면 니가 책임질거야?
그래, 차라리 한이오빠를 데려왔어야 했어.
폭탄이 터지는 것보다야 비가 오는 게 낫지...
자유도 좋지만 왜 하필 옵션이 너냔 말이다.’
“오호호호호~ 유진인 참. 윤이 민망하게... 그나저나 밥 먹고 우리 뭐할까?”
“뭐하긴, 술이나 한...”
“안 돼!”
순간 윤이 고개를 휙 들였다.
반사적으로 노려보는 윤의 눈과 마주친 신형, 미진의 남자친구는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닭다리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자, 자. 너무 그러지 말고... 사람이 살다보면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지.
다 털어버리고 편하게 놀아. 이런 데까지 와서 못 놀고 가면 후회할거야.”
“...리...”
“뭐라고? 윤아, 괜찮으니까 그냥 말해. 네가 무슨 죽을죄졌니? 놀러와서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내 닭다리... 흑...”
******************
“자, 대답 못했으니까 벌주 세 잔.”
“으, 쓰다...”
여행지의 백미, 진실게임을 하느라 그런대로 흥겨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벌주 먹이는 재미에 사람들은 곤란한 질문들을 잇달아 던졌고
그때마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술을 나눠 마시는 커플도 눈에 띄었다.
“앗, 유진이 걸렸다! 와아, 유진이 처음 걸린 거지?”
“나! 나 할래. 유진아, 나랑 우리 연욱이랑 어때? 잘 어울려 보여?”
“고목나무에 매미.”
‘터졌다.’
윤은 눈을 감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키가 작은 것이 콤플렉스인 혜원이는 잔뜩 부은 얼굴로 유진을 노려보았다.
‘헉, 또 유진이다. 머리도 좋다면서 이런 게임 하나 못 하냐?
제발 좀 걸리지 말아주라. 부탁이다.’
“내가 또 할래. 유진인 윤이 어디가 좋았어? 왜 사귀기로 한 거야?”
‘혜, 혜원아... 화난 건 알지만 왜 나를 끌고 들어가냐?
왜 내가 유진이랑 같이 표적이 돼야 하는 거야?’
“윤이가 꼬셨다. 원하는 건 다 해주기로.”
“김유진...”
친구들의 불쌍하다는 눈길을 한몸에 받은 윤은 부들거리는 주먹을 눈앞으로 들어보였다.
‘이걸 쳐, 말어? 그래, 내가 쪽팔려서 넘어간다. 너 운좋은 줄 알아.’
“윤아, 참아라...”
유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른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간파한 사람들은
맥이 풀려 말없이 술을 마셨다.
그러나 젊은 혈기들이 침묵을 오래 지키기는 힘든 법.
잠시 시간이 지나자 하나둘 입을 열었다가 이내 본격적인 수다떨기가 시작됐다.
“점을 봤더니 우리 둘은 천생연분이라는 거 있지?
어디서 이런 짝을 찾아왔냐고, 일부러 갖다대려고 해도 힘들겠다고 그러는 거야, 글쎄.”
“응, 척 보기에도 지연이랑 진호오빠는 세트로 보이는걸.
처음에 네가 진호오빠 소개시킬때 정말 잘 어울린다 생각했었어.”
“그래? 하긴 우린 어디를 가도 다 상생이라고 나오더라.
부부연도 좋고 자식운도 좋대.”
“기집애, 별걸 다 보러 다녔네.”
“자식운이 좋다고? 것 참 이상한 일일세.”
“김유진! 빨딱 일어나. 호호, 우린 이만 피곤해서...”
“내가 아는대로 말하는 것 뿐이다.”
“놔둬봐. 뭐라고 하는지 보자.”
“보아하니 상체가 실하고 허리가 부실한 데다 걷는 자세가 불안하니 태양인인 듯 하다. 태양인 여자들은 불임일 가능성이 있는데 자궁이 상대적으로 위축되기 때문이다. 물론 태양인 여자들이 모두 불임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지금 같은 경우 자궁이 태아를 기를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한 것 같지는 않아서 하는 말이다. 생리불순이나 반위, 즉 토하는 버릇이 있는 듯 한데 불임일 가능성이 높다. 맥을...”
“어쩜 그런 말을... 너무해!”
지연이 울면서 뛰어가버린 후에도 사람들은 꼼짝도 못 하고 그대로 앉아있었다.
미진이가 지연이를 따라 간 후로도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진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유진을 노려보았다.
“너, 이 자식!”
순간 진호는 유진을 향해 주먹을 날렸고 윤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리며 소리쳤다.
“유진아! 피해!”
“왜 인간들은 걸핏하면 폭력을 사용하려는 것이냐?
그 폭력성은 내재되어 있는 거냐, 아니면 진화과정에서 다 없어지지 않은 야만성의 산물이냐?”
멀쩡한 유진의 목소리에 윤은 눈을 가린 손가락을 약간 벌렸다.
진호는 유진에게 팔을 붙잡힌 채 분노로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어라, 멀쩡하네? 유진이가 싸움도 할 줄 알았던가?’
“너 이 새끼, 진짜 가만 안 둔다.”
유진에게 회심의 일격이 가로막혀 더 화가 난 진호가 두 번째 펀치를 날리려는데
신형이 끼어들어 말렸다.
“그만 둬요, 형. 이런 자식이랑 이야기해 봤자 말이 안 돼요. 나가서 술이나 한잔 합시다.”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한 존재야. 왜 진실을 이야기해 주면 화를 내는 것이냐?”
철썩~!
갑자기 울린 경쾌한 타격음에 장내에 정적이 감돌았다.
사람들은 유진을 때린 사람이 윤이라는 사실에 놀라서 숨을 멈췄다.
“너 정말 최하야.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있어?”
잔뜩 화가 난 윤은 유진을 남겨두고 돌아섰다.
‘젠장, 힘껏 쳤더니 손이 얼얼하네.
저건 맞아도 싸. 저 자식은 평생 저럴 거다. 아, 질려. 대체 어떻게 돼먹은 애야?
주위에 있는 사람들만 안 됐지.’
문득 윤은 걸음을 멈췄다.
“그럼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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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대마왕님, bluesakwa님, 권신형님, 감사합니다.
유에프오님, 기다렸잖아요~ ^^
다른 분들은 3편 리플에 감사말씀 드렸구요.
5편이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ㅠ.ㅠ
제 컴이 아무래도 돌아가시려나 봐요. 안 되는데...ㅠ.ㅠ
자, 이제부터 다시 하루한편 성실작가로 돌아오겠습니다. ^^
다음 편도 많이 기대해 주세요.
참, 며칠 못 본 사이에 제가 핫을 달았어요. *_*
다 여러분들 덕택입니다.
말로는 다 할 수 없을 만큼 감사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