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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화성에서 온 왕자님

wagi |2004.06.07 18:21
조회 1,386 |추천 0

16. 감정 시뮬레이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윤은 급히 눈을 감고 자는 척 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잠든 윤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레 문을 닫는 오빠들이 고마웠다.

 

‘미안해, 오빠들... 근데 나도 내 맘을 모르겠어.’

 

윤은 길게 한숨을 쉬고 일어나 앉아 창에 턱을 괴었다.

골목 끝 나란히 서 있는 두 채의 집.

어렸을 때부터 익숙하게 보아 온 풍경인데 오늘은 낯설게만 느껴진다.

 

윤이 태어나기 전부터 어깨를 맞대고 살아온 집들은

각기 다른 사람을 품고 있지만 오랜 세월을 함께 해왔겠지.

 

“니들이 부러워. 속이야 어떻든 니들은 계속 같이 있을 거잖아.”

 

윤은 손을 올려 가슴에 댔다. 목걸이가 있던 자리다.

찾을 수 없었던 목걸이처럼 윤의 마음 또한 비어버린 것 같았다.

 

“버리지 말 걸. 난 하여튼 이 성질이 문제야.”

 

후회하고 또 후회해도 이미 사라져 버린 목걸이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진이는... 유진이가 그렇게 좋은 걸까? 어디가 좋지? 유진이를 잘 알지도 못 하잖아.”

 

유진의 볼에 입맞추던 미진을 생각하자

저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알아, 나쁜 건 네가 아니라 나란 거.

유진이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도 너였고 몇 번이나 나한테 물어보기도 했었지.

...남자들이 보는 눈은 있다. 예뻐서가 아니라 당당하고 솔직해서 널 좋아하나 봐.

그런데... 미진아... 나 왜 이렇게 네가 밉니? 네가 정말 미워.

너 미워하면 안 되는 거 아는데... 그래도 네가 참 밉다.”

 

다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솟았다.

이미 팅팅 부은 눈 위로 눈물이 흐르자 따갑고 쓰려서 또 눈물이 났다.

 

“그렇다고 김유진, 너 절대 내가 좋아하는 거 아니다.

그냥 같이 있으면 편하고... 너무 익숙해서 그래. 이것도 다 너 때문이야.

어렸을 때부터 나만 졸졸 쫓아다녔으니까 내가 길들어 버린 거야.

그러니까... 책임져. 나는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너만 먼저 가버리는 건 반칙이야. 나랑 같이 있어.”

 

억지를 쓴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억지가 아니라 그보다 더 한 것을 해서라도 유진을 붙들고 싶은 윤이었다.

 

유진과 보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같이 있으면 즐겁고 행복했다.

 

편하고 익숙해서 오래된 이불처럼 포근히 감싸이는 느낌.

유진과 있을 때면 억지로 자신을 꾸미지 않아도 되고 상대를 재 볼 필요도 없었다.

있는 그대로의 서로가 가장 편하기 때문에.

 

“알았어, 알았다고. 그래, 나 김유진 좋아한다. 됐냐?”

 

양심이 속삭이는 것을 끝내 무시하지 못하고 윤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라,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아냐, 절대 아니라고!”

 

‘이러다가 목걸이처럼 유진이도 사라지는 건가?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서?’

 

윤은 머리를 감싸쥐고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정말로 유진이가 가 버리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유진이가 없어지면...

찾을 수 없었던 목걸이처럼 유진이도 잃어버리게 되면... 유진이가 사라져?’

 

유진이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언제 어떤 상황을 떠올려도 유진은 늘 윤의 곁에 있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끔찍하다고, 지겹다고도 생각했지만...

그래도 유진이가 없으면 안 돼. 난 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윤은 벌떡 일어났다.

 

‘그래,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지금 말하러 가자.

가서 네가 필요하다고, 그러니까 곁에 있어달라고 말하는 거야.

절대 좋아해서가 아니야. 그냥... 그냥...’

 

“윤아? 아픈 애가 어딜 가는 거야?”

 

‘제길, 그래. 나 너 좋아해, 사랑이라는 게 어떤 건지는 잘 모르지만

네가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못 견딜 거 같으니까 이런 게 사랑인가 보지.’

 

한의 부름은 윤의 귀에 닿지 않았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윤은 유진의 집을 향해 뛰었다.

 

‘그래, 국경도 뛰어넘는 게 사랑이라는데 그깟 행성쯤이야... 젠장, 하고 만다!’

 

 


*******************************

 

 


“이 사람들은 문 열어 놓고 나가는 게 취민가?

대문까지 활짝 열어놓고 어딜 간 거야? 애써 용기를 내서 왔더니만...

늦게 오면 무효다, 김유진. 사실 나도 헷갈린단 말야. 네가 무슨 생각인지도 궁금하고.

너는 사랑을 모르니까 내가 이런다고 덥썩 좋다고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미리 찜해놓지 않으면 불안해. 차라리 미리 기정사실로 만들어 놓고 하나씩 가르치는 게 낫겠어.”

 

-뭘 비맞은 중처럼 중얼거립니까?

 

“에이피, 넌 어째 볼 때마다 시비다.”

 

-첫인상이 나빳던 탓인가 보지요.

 

그새 에이피와 많이 친해진 윤이었다.

유진이 에이피의 사용을 허가한 이후 윤은 리포트가 있을 때마다 에이피에게 신세를 졌다. 

 

“그나저나 문도 열어놓고 이 사람들은 어딜 간 거야?”

 

-이 집의 보안장치는 완벽합니다. 에이피가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으니까요.

 

“너 믿고 이러는 거였어?”

 

-침입자가 들어오면 자동으로 경찰서에 통보하고 문을 잠그게 프로그램되어 있습니다.

 

“세콤같은 거구나. 좋겠다. 그거 비싸다는데.”

 

-세콤? 그런 저차원적인 장비와 비교하다니 불쾌합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럼 나는 그냥 들어와도 되는 거야?”

 

-이윤, 에이피의 검색과 출입이 허가되었습니다.

 

“헤, 좋구나. 참, 에이피, 네가 보기엔 유진이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 같아?”

 

‘기계한테 이런 걸 물어야 한다니 내 신세도 참 처량하구나. 그치만 알고 싶은걸.

유진이 녀석은 워낙에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최종 자료를 출력합니다. 이윤, 2004/ 06/ 04

 

“자료라니?”

 

-유진님으로부터 에이피에 전송, 이윤에 관한 자료입니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윤은 경악에 찬 눈으로 에이피가 화면에 쏟아내는 자신의 자료를 바라보았다.

어제 자신이 했던 행동과 말이 죽 나열되고 끝에 유진의 코멘트가 덧붙여져 있었다.

 

-이해 불가

 

“이게 다 뭐야?”

 

떨리는 목소리로 윤이 물었다.

 

-유진님은 이윤의 행동을 통해 사랑을 연구하고 계십니다.

이윤의 행동과 말을 리플레이해서 감정을 유추해 내는 방식이지요.

행동을 통해 동기를 추리하고 감정을 시뮬레이션합니다.

 

‘그런 거였어? 그 모든 일들이 다...

나한테 그렇게 잘 해 준 것도 내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였다고? 이건 너무하잖아.’

 

윤은 뚝뚝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이 얼마나 처량했는지 습기는 질색이라는 에이피마저 타박을 주지 못할 정도였다.

한동안 그렇게 서 있던 윤은 돌아섰다.

 

‘그런 것도 모르고 난 내가 너한테 뭐나 되는 줄 알았어.

자신있게 고백하러 온 내 꼴이 정말 우습다.

마음 속 어딘가에선 네가 날 거절할 리 없다고 믿고 있었나 봐.

너한테 뭐라도 되는 듯 구는 내가 얼마나 우스웠겠어?

아니, 넌 그런 것도 모르지. 넌 감정도 없고 타인과의 관계도 모르는 화성인이니까.

내가 아픈지 슬픈지도 상관없겠지. 내 데이터만 있으면.

그게 제일 슬프다, 유진아... 그게 날 너무 아프게 해.’

 

축 어깨를 늘어뜨린 윤은 터벅터벅 집을 향해 걸었다.

 

-유진님께서 곧 돌아오실 겁니다.

 

“나 여기 왔던 거, 유진이한테 말하지 말아줄래?”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 넌 거짓말을 못 하지... 상관없어, 이제.”

 

‘난 단지 실험대상이었을 뿐이니까.’

 

“윤아?”

 

막 대문을 들어서던 유진은 초점없는 눈을 보고 놀라 윤의 팔을 잡았다.

그 순간 윤이 팔을 홱 뿌리쳤다.

 

“무슨 일이냐?”

 

그러나 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갔다.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이 비틀거리는 걸음이었다.

 

“윤님이 왜 저러시죠?”

 

두 손 가득 비닐봉지를 든 세진이 유진에게 물었다.

한참 윤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유진은 퍼뜩 떠오른 생각에 집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에이피!”


 

 

*****************************

 

 


“윤이가 널 만나고 싶지 않다는구나.”

 

미안한 얼굴로 윤의 전언을 전한 한은 풀죽은 얼굴의 유진을 살폈다.

 

“무슨 일 있는 거냐, 니들?”

 

답답한 마음에 어찌 할 바를 모르던 유진은 한에게 솔직히 다 털어놨다.

 

“뭐? 정말?”

 

늘 침착하던 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정말이야?”

 

“여기가,”

 

말하면서 유진은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무겁습니다. 갑자기 심장 한 쪽에 납덩이를 매단 것 같은 느낌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하아...”

 

한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유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건 꺼림칙하다라는 거야.”

 

“꺼림칙하다? 하지만 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만.”

 

“네 기준으로는 그렇지만 윤이 기준으로 보면 배신감이 들 수도 있겠지.

원래 일반인들은 감정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데는 거부반응을 일으키니까.

너도 그런 걸 느꼈으니 이렇게 당황해서 달려온 거 아니냐?”

 

“빨리 윤이와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바로 네가 윤이한테 잘못했다고 느끼는 증거야.”

 

한은 고개를 숙인 유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어쩌면 이제 다시 너를 못 볼지도 모르겠구나.”

 

“무슨 뜻입니까?”

 

“윤이 자존심을 그렇게 긁어놨으니 이제 너랑 엮기는 영 틀린 것 같다.”

 

“그게 그렇게 치명적입니까?”

 

“당연하지. 인간들은 말이야, 누군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고 느끼면 굉장히 상처를 받아.

상대가 자신을 믿지 못하거나 감정을 떠보려 했다는 것에 배신감을 가지고 분노하게 되지.”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잘 생각해 봐. 너도 윤이를 잘 알잖아. 어떻게 해야 윤이가 화를 풀지.

그 동안 윤이를 연구하면서 얻은 게 있을 거 아니야?

...아아, 외계인이라 시댁도 멀고 해서 데릴사위로 들으면 딱이겠다 했는데...”

 

한탄하는 한에게 유진이 가만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놓았다.

 

“윤이한테 전해 주십시오.”

 

“어, 이 목걸이... 어제 윤이가 밤새 찾던 건데...”

 

말없이 돌아서는 축 쳐진 어깨가 쓸쓸해 보여서 한은 혀를 끌끌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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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램님, 그렇게까지 기다려 주시다니... 황송이어요. ^^

오늘은 좀 늦었으니 회사에서 안 보시려나요? ^^

집에서 편하게 보시라고 배려를 ^^;;;;;;;;;;;

 

봄꽃님, 사람사는 데가 어디라고 별다른 게 있겠습니까? ^^

정신으로만 치우치는 사람들이니 그런 일이 일어나도 무관심할듯...

생각하니 좀 무섭네요. ^^;;

 

바다님, 아름다운 마음씨 *_*

엑스트라에게 그렇게 관심을 가져주시다니...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니 소년도 좋은 날이 오겠지요. ^^

 

닐리리님, 목걸이 찾으시면 저한테 연락주세용. -_-;;;

요즘 곤궁의 극치를 달리는지라...ㅠ.ㅠ (5 :5 어때요? ;;;)

 

요가님, 화성의 상황은... 흐음... 역시 지도자가 바뀐 걸로는

눈 하나 깜작 하지 않을 화성인들이란 생각이 드네요. -_-;;;;

 

보갱짱님, 아아, 어떻게 아셨습니까? *_*

네, 바로 그거죠. 유진이는 돌아가면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듯... 합니다. ㅠ.ㅠ

데, 데모는 제 심장에 부담을 준답니다. -_-;;

 

bklove님,  이야기가 전반적으로 좀 칙칙하죠?

지금 윤이가 코미디할 기분이 아니라고..ㅠ.ㅠ

하지만 금방 좋아질 거예요. 괜히 윤단순이겠어요?

 

wcat님, 헤헤... 제가 워낙에 좋아하는 영화라...

그냥 생각난 대로 써봤어요. ^^;;

mib 이름은 고대로 쓰면 걸릴까봐 살짝 바꿨지요. ^^;;

 

자갸님, 이제 더 이상 튈 데가 어디 있겠어요? 화성밖에...;;

윤이랑 유진이를 생각하면 저도 한숨만 나온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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