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적응의 시간들
하연은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났다.
유령이나 귀신이 전혀 나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꿈.
꿈속에서 하연은 계속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뒤에 누군가가 쫓아오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냥 숨이 턱에 찰 정도로 헉헉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불빛을 향해 달려가던 하연은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멈추었다.
들어가야 하는데.
하연의 손에는 열쇠가 없었고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열쇠가 없어서
하연은 울었다.
그런데, 꿈속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울었나보다.
배갯머리가 축축하게 젖어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찾고 싶은 게 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찾을 수 없는 꿈은
떠오를 듯 말 듯 하면서 숨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현실에서의 기억과 같았다.
괴로움. 답답함.
깔깔해진 입술을 핥아 침으로 축이면서 하연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일종의 유니폼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
어차피 도련님 지시사항에 따르기로 결정하셨다면 고민하실 이유는 없다고 생각 되는데요.]
문득, 하연은 오후에 조비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결정이라.
처음부터 자신의 선택 따위는 철저히 무시되지 않았던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정한 목표대로 따르게끔 만드는 사람.
그것이 이민혁이라는 남자에 대해 처음으로 내려진 하연의 분석이었다.
옷장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옷들은 결국 하연의 몸을 감싸게 될 것이다.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첼로의 선율은
감정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민혁이라는 남자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 사람은 도대체 왜 그렇게 된 걸까?
태어날 때부터 무감각한 사람은 없다.
단지, 삶의 어떤 경험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 뿐.
흔히 그렇듯 불구가 되어 버렸다는 좌절감 때문에 인간의 감정을 지니길 포기한 걸까?
하연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이유라고 하기엔 왠지 부족했다.
하연의 눈에 들어 온 그 사람의 뒷모습은
결코 좌절감에 무릎 꿇을 사람이 지닐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끊임없이 생각하던 하연은 순간적으로 놀라움에 휩싸였다.
한밤중에 깨어나서 이민혁이라는 남자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도대체 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음에 당황하던 하연은
때르르릉― 때르르릉― 하는 소리에 또 한 번 놀랐다.
민혁의 호출.
자신을 노려보던 냉랭한 민혁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하연은 조심스레 수화기를 들었다.
“…산책을 하고 싶어. 잠깐 내 방으로 오지. 옷 갈아입을 시간이 필요하겠군. 5분 뒤.”
달깍.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민혁의 호출은 이제 적응이 끝났다.
당황스러울 것도 놀라울 것도 없었다.
하연은 조용히 일어나 옷장 문을 열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얇고 부드러운 원피스로 갈아입은 하연은 그냥 나가려다
밤공기가 찰 것 같아 숄 하나를 꺼내 어깨에 둘렀다.
어느 정도의 여유분을 두고 편안한 옷을 입던 하연은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4분 32초. 내가 정한 시간을 넘지 않아 기쁘군. 잠을 깨운 건 아닌가?”
“아닙니다.”
“옷장에서 스웨터 좀 꺼내 줘. 그 정도는 시킬 권리가 있는 거겠지?”
“…여기 있습니다.”
하연은 기계적으로 옷장에서 짙은 곤색 스웨터를 꺼내 민혁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익숙한 손길로 민혁이 타고 있는 휠체어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휠체어를 미는 것도 요령이 있어야 한다.
너무 세게 밀어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성의 없이 밀어도 불편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하연은 손잡이를 잡은 손에 적당이 힘을 실어 천천히 밀기 시작했다.
문턱을 넘거나 현관으로 내려갈 땐 걸리거나 덜컹거림 없이 훌륭히 해냈다.
능숙하게 해냈지만 하연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긴장의 연속.
심장을 바짝바짝 조이는 순간들에도 어서 빨리 적응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휠체어를 잠시 멈췄다.
“…왼쪽으로 가지.”
축축한 습기에 젖어든 풀잎이 발에 밟히며 사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불어오는 밤바람과 나뭇잎들 사이로 걸린 고즈넉한 어둠은 오히려 상쾌했다.
집 안에 깔린 음울한 어둠 보다는
자연이 만들어 낸 어둠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며 하연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작은 철문을 열고 나가자 부드러운 흙으로 이루어진 오솔길이 나타났다.
“꼭 늦은 밤에만 봐야 좋은 곳이 있지. 여기가 바로 그곳이고.
낮에는 오히려 황량함만 있을 뿐이거든. 내 의견에 동의하나?”
“모르겠습니다. 낮에는 이곳에 와 본 적이 없어서.”
“…옷은 빈틈없이 입는 게 좋아. 좋아 보이는 군.”
“…밤산책은 건강에 해롭습니다.”
“참견인가?”
“제 일입니다. 그것까지 금지시킬 생각인가요?”
“그럼 내가 좀 참도록 하지. 내가…무섭지 않나?”
“토혈(吐血)을 하거나 간질발작을 일으키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피고름을 닦아내는 것도 이제껏 해왔던 일입니다. 그 점은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의외군. 하지만 그렇게 겁을 내지 않는 사람은 드물지.
조금만 더 걸어가면 당신이 쉴 만한 곳이 나오지.”
민혁은 눈을 감았다.
등을 기대고 있는 등받이를 통해 움찔하며 놀라는 하연의 반응을 감지했다.
그때 그 때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하연의 생생함이 깊은 곳에 감추어 둔 감정들을 일깨웠다.
민혁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작은 벤치가 있는 곳까지 다다라 있었다.
벤치의 틀을 이루고 있는 청동 골격은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하연은 벤치를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살짝 걸터앉았다.
나무가 머금고 있는 습기가 옷을 통해 전해졌다.
민혁은 어둠과 달빛이 적절히 조화되어 만들어내고 있는 나무 그림자 밑에 숨어서
가만히 하연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자신의 휠체어를 일정한 속도로 밀면서
꽤나 먼 거리를 걸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하연은 힘든 내색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앉아서 쉬고 싶은 생각이 들지.
달빛이 참 좋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이라도 저런 달을 본 적이 있나?”
하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마치 짜 맞춘 듯, 하연의 시야에 들어오는 하늘면적의 한가운데에
둥근 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달빛은 푸르스름한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블루문(Blue moon).
푸른 달빛은 서글픈 듯 하연의 얼굴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서양에서는 한 달에 보름달이 두 번 뜰 때, 두 번째 보름달을 블루문이라 하지.
이런 달빛을 맞아본 적 있나?”
“…아니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저 블루문이지.
이 곳에만 오면 언제나 블루문을 볼 수 있거든. 이유는 모르지만….”
하연은 민혁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달빛으로 벌어진 입술을 꼬옥 다물었다.
달빛에 대해 말하고 있는 남자와 유리잔을 벽에 내던지던 남자.
동일인물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이나 달랐다.
그리고 자신이 어째서 달빛에 젖어들 수 있었는지.
그것도 감정이라고는 하나 없이 바싹 말라버린 것 같은 남자와 함께 있는데 말이다.
입을 꾹 다문 채 일언반구 말 한 마디 없는 하연을 쳐다보며
민혁은 전해지는 감정을 읽어내기 위해 집중했다.
불규칙한 숨소리.
그리고 간간이 움직이는 그녀의 손가락.
하연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는 것을 읽어내기는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만 가지.”
민혁은 하연이 손잡이를 쉽게 잡을 수 있도록
정확한 방향으로 휠체어를 빙그르르 돌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손잡이를 잡는 하연은
당연히 민혁의 그런 배려를 눈치 챌 리가 없었다.
하연은 휠체어를 밀면서 달빛에 반사 된 민혁의 덥수룩한 머리에 시선이 갔다.
왜 자꾸만 마음 쓰지 않으려하면 할수록 이민혁이라는 남자에게 신경이 쓰이는 건지.
아마 습관적으로 몸에 밴 직업병 때문이겠지.
두 사람은 거실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서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밤하늘에 총총 떠 있는 별무리들만 알 수 있을 것 같은 고요한 밤이었다.
“내일은 오전 일찍부터 비가 내릴 것 같군.”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미안.”
“예? 방금 뭐라고…?”
“호되게 굴었던 거…사과하지. 미안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벙찐 표정으로 굳어 있는 하연을
머리카락 너머로 슬쩍 살펴보며 민혁은
유유히 휠체어를 끌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과를 받아 내야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아예 하지도 않았다.
다만, 하연은 민혁이 자신의 공간으로 초대한 이상
낯선 사람 명단에서 제외시켜 주었으면 하는 바램 뿐 이었다.
하연은 민혁이 방 안으로 사라진 후에도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밤바람에 나뭇잎들이 오소소소 몸을 떨었다.
바람이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를 들은 후에야 하연은 풀썩 주저앉았다.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사과 같은 건 하지 않을 것 같은 남자.
사과를 하느니 죽음을 선택하고도 남을 거라고 생각했더랬다.
상상조차 못했던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이 정도로 커다란 충격일 줄이야.
단 한 마디의 진심어린 말이었지만 그 단어가 주는 효과는 무척이나 컸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
하연은 푸르스름한 달빛이 반사된 민혁의 얼굴을 떠올리며 조용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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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한 대로 글 한 편 더 들고 왔습니다. ^^
원래 금요일날 제시간에 올렸어야 하는데 올리지 못해서 \
스페셜로 한 편 더 올리는 거랍니다. ㅎㅎ
리플에 대한 댓글은 이번 이야기까지 한꺼번에 하려구 해요~
고즈넉한 여름밤, 제 글을 읽으실 님들께...
달콤한 휴일, 제 글을 읽으실 님들께...
행복한 주말 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태풍 피해가 크지 않기를 바랍니다...미강이는 이만 물러갈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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