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은 산골마을로 50여 가구 주로 이씨 일가들이
평화스럽게 양반임을 자부하고 살아갔으며 길 하나를 경계로 비슷한 규모의 조씨
일가가 살았는데 가끔 처녀총각이 혼인을 하기도 하며 정답게 살아갔다.
우리집은 마을에서 비교적 윗쪽에 위치하였으며 안채 사랑채 창고가 있는 아랫채와
헛간이 두채 그리고 안채 맞은 편에 스레트 지붕을 얹은 나락뒤주가 우뚝 서 있어
우리집을 처음 오는 사람들은 그 뒤주의 크기를 보고 놀라곤 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우리집 주위 넓은 땅은 전부 우리 논과 밭으로 요즘 같은 여름날 무공해 가지 오이 등
야채를 밭에서 바로 따다 나물도 무치고 풋고추를 따다 생된장에 푹 찍어 찬밥이랑
먹어도 한공기 거뜬히 먹었으며 후식으로 토마토를 따서 설탕에 버물려 먹곤 했다.
우리집 맞은편에 있는 할아버지 산을 우리형제들은 놀이터 삼아 뛰어 다니며 꽃피는
봄에는 진달래를 따다 먹고 여름이면 깨묵을 따서 껍질을 벗겨 먹으면 고소하기가 요즘
백화점에서 파는 고급 과자랑은 비교할 수 없는 맛이었다.
어릴적 무공해 채소와 과일 자연산 간식을 먹고 산을 뛰어다니며 자란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성인이 될때까지 병원이 어디있는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모를 정도로
건강하게 성장했다.
당시 시골에는 책이 귀했지만 우리집엔 그만그만한 삼촌 고모가 있어 골방 한켠엔
다양한 책들이 가득 있어 우리형제들은 친구들과 놀기보다 책 읽기를 좋아했다.
다섯 자매들끼리 친구처럼 지내며 닷새마다 돌아오는 시장에 어머니께서 가시고 집을
비운 사이 우리는 어머니께서 아껴쓰는 화장품도 찍어 발라보고 고운 한복도 살짜기
꺼내 입어보고 놀다 해질 무렵 흔적을 남기지 않고 원상복귀 시켜놓지만 어머니는 금방
아시고는 우리는 벌을 서곤 했다.
아버지께서 체력이 약해 혼자 힘으로 농사를 다 지을 수가 없어 머슴이 두명 있었는데
촌수로 집안 할아버지 되시는 분과 강씨 성을 가진분으로 우리는 '아재'라고 불렀고
그분들은 우리자매를 '아씨'라고 불렀다.
머슴들은 일년동안 우리집 농사를 돕고 가을에 새경으로 나락을 몇가마 가지고 갔는데
인심이 후한 어머니는 땅이 없는 그댁에 항시 먹을 수 있도록 야채며 과일을 넉넉하게
한바구니씩 담아 가지고 가게 하셨다.
가을이 되면 나락이 한뒤주 가득했지만 그것은 큰돈이 되지 않아 결국 넓은 집과 전답을
등지고 마산으로 이사를 오며 농사는 우리집 머슴을 하셨던 할아버지가 지어 나누고
강씨 아저씨는 건설회사 다녔던 작은 아버지께서 사우디로 보내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줬다.
마산으로 이사와 나의 부모님도 오랫동안 직장을 다녔으니 그 옛날 우리집의 머슴과
같은 입장이 되어 자녀들을 키워야 했다. 하지만 시청에 직장을 얻은 아버지 덕분에 우리
형제들 등록금이 제공되고 나락이 아닌 월급을 현금으로 받으니 힘겨운 가운데 살기는
한결 나아졌다.
그때 이사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적지않는 빚이 있을텐데 고향사람들은 지금 우리
부모님을 부러워 하며 나는 왠지 내가 어린시절을 보냈던 그 고향이 아름답게만 생각
되어지지 않는다. 많은 땅으로 말미암이 밤낮 머슴보다 더 많은 일을 하시며 고생하시던
부모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며 제일 행복했던 시절은 시골에서 넓은 집도 지금 사는 전망좋은 집도 아닌 가난하게 살았던 마산 저층아파트였다. 그집은 꿈이 있었고 우리자매들의 행복한 웃음이 가득했던 양지바른 남향집이었으며 또 하나의 나의 고향이다.
(저는 이상하게 유년을 보낸 고향이 싫었는데 요즘 우연히님 블로그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이야기를 접하며 제 마음이 변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고향이 싫은 이유는 부모님께서 너무 많은 고생을 하셨던 곳이라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