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대학에 입학한지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덧 4년이 지나 오늘 이렇게 졸업식을 하게 되었다.
굳이 오늘을 위해 마련한 것은 아니지만, 며칠 전에 백화점에서 거금을 들여 장만한 정장을
입고 친구들과의 약속 때문에 우선 나 홀로 학교로 향했다.
전날 친구들과 졸업식 행사는 참여하지 않기로 합의하에 일부러 집에서 늦게 나왔다만, 의
외로 학교로 향하는 버스 안은 상당히 붐볐다.
대략 2개월만에 학교를 가는 것이라 그런지 묘한 기분 속에 문득 걱정 아닌 걱정이 떠올랐
다.
가만, 오늘 어쩌면 헤어진 그와 마주칠지도 모르는데...
우연이라도 마주치면 어떡하지?
아무래도 인사정도는 해야겠지?
그런데 내가 인사를 했는데 만약 그가 날 불편하게 생각한 나머지 모른 척 하면 어떡하지?
차라리 처음부터 모른 척 해버릴까?
나 역시 그와 마주치는 것이 불편하긴 한데...
그래도 오늘이 아니면...
이런저런 상념이 나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물론 혼란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그 상념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 붐벼대는 버스 안에서 그리
지겹게 보내지는 않을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 학교정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역시 학교정문에도 졸업식을 맞이하여 그곳의 주변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꽃장수들과
정문으로 들어가는 많은 차들로 복잡했다.
"이렇게 복잡해서야 식구들이 제대로 들어올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
얼마 후에 차를 몰고 학교로 올 가족들의 걱정은 잠시 뒤로한 채 우선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학과사무실로 걸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학과사무실에 다다르기도 전에 주영이와 정혜를 비롯한 몇몇 친한 친구들을 만났다.
난 반갑다며 인사할 세도 없이 주영이는 나의 옷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오늘 위해서 거금 좀 썼겠어? 정말 잘 어울리는데? 예쁘다!"
이어 정혜를 비롯한 몇몇 친구들도 내가 입은 옷에 대한 평가를 하기 시작했다.
예쁘다... 어울린다 등 전부 칭찬이었지만.
난 갑작스런 칭찬들에 잔뜩 머쓱해하며 다시 친구들과 학과사무실에 가서 졸업장과 졸업앨
범을 받고 한구석에 정렬되어 있는 검정색의 학사모와 졸업가운을 사이즈에 맞게 가져다 입
었다.
아직 우리가 졸업을 했다는 사실이 와 닿지가 않는지 학사모를 쓰고 졸업가운을 입은 서로
의 모습이 어색한지 낄낄대며 푸념만 들어놨다.
그때 정혜는 핸드백에서 조그마한 디지털 카메라를 끄집어내며 말했다.
"각자 부모님들 오시기 전에 빨리 사진이나 많이 찍자고...!"
그녀의 말에 모두 동의하듯 친구들은 무작정 학과건물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걸어갔다.
나 역시 그들을 따라갔고, 그 가운데 이리저리 분주하게 시선을 옮겼다.
헤어진 그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미 헤어진 사람을 찾는 것이 우스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그 동안 잘 지내고는 있
었는지... 비록 헤어진지 아직은 반 연도 지나지 않았지만, 그 동안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단
순한 호기심으로 오늘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먼발치에서나마 보고 싶었다.
결단코 그에 대한 남은 미련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그에 대한 그리움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다만... 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그때 주영이가 말했다.
"야?!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니?"
갑작스런 주영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지만,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
"응?... 아니, 그냥. 근데..."
"근데, 뭐?"
솔직히 주영에게 오늘 혹시 헤어진 그를 보지 못했냐고 슬쩍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괜스레 말을 꺼냈다간 자칫 분위기만 어색해 질 수 있다는 생각에 금세 말을
거두었다.
"아냐..."
"싱겁긴."
다행이 주영은 피식거리며 그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평소에는 그렇게 추궁하고 따지길 좋아했던 친구가...
아니면 혹시 내가 하려던 말을 눈치라도 챈 것일까?
"우선 여기에서 한 장 찍자!"
몇 걸음 앞서있던 정혜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학과건물 앞에 펼쳐져 있는 잔디밭에 문득문득 심어져 있는 어느 커다란 나무 아래였다.
친구들은 자연스레 그곳에 몰려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나도 친구들과 어울려 다정한 여러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이어 학과건물을 배경으로... 그리고 따뜻한 봄날과 서늘한 가을날에 수업과 수업 사이에 시
간이 남으면 여차 없이 수다를 떨었던 벤치와 다시 학과건물로 들어서서는 추위와 비를 피
해 수다를 떨었던 어느 빈 강의실에서도 수 차례 사진을 찍었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이렇게 졸업함으로써 각자의 길을 위해... 각자의 꿈을 위해 예전처럼
잘 어울릴 수 없는 것이 현실일 것이다.
그럼 우리가 함께 했던 날들을 기억하고 간직할 수 있도록... 오늘 졸업식의 이 사진들은 좋
은 흔적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좀처럼 사진 찍는 데에는 열중할 수 없었다.
헤어진 그에 대한 괜한 호기심 때문인지... 쓸데없는 미련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자꾸 헤어진
그가 눈에 밟혔다.
오늘 그의 모습을... 아니, 그의 옷자락이라도 봤으면 이렇지 않았을 터인데 아직 그의 그림
자조차 보지 못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친구들과 돌아다니는 틈틈이 주위를 살펴보긴 했지만, 졸업생 대부분이
학사모와 졸업가운을 착용하고 있었기에 서울에서 김 서방을 찾는 꼴이었다.
"너도 봐봐. 사진이 전부 괜찮게 나온 것 같아."
정혜가 문득 디지털 카메라를 건네주었다.
찍은 사진들이 담겨있는 LCD화면으로 차례차례 보지만 썩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허나 정혜를 위해 애써 유심히 보는 척이라도 하며 친구들을 따라 다시 어느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길 찰나였다.
"안녕? 오랜만이네?"
낯익은 목소리가 들여왔다.
남자 목소리였지만 헤어진 그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난 LCD화면에서 잠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리니 헤어진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상필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그의 연인인 듯한 여자가 내게 가볍게 목례로 인사했다.
나도 가벼운 목례로 그녀의 인사에 답했고 다시 상필에서 고개를 돌렸다.
"응... 그렇네..."
당연히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상필은 다시 말했다.
"졸업 축하해!"
"그래... 고마워... 아! 너도 졸업 축하해..."
"그래.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응...? 응..."
그리고 그는 그렇게 횅하니 가버렸다.
헤어진 그의 친구라면 그의 근황이라든지... 아니면 최소한 오늘 어디서 봤다며 귀뜸이라도
해줄 줄 알았는데...
아니면 내가 곤란해 할까봐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일까?
하지만 어찌됐건, 괜스레 상필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그런 심정이 내 얼굴에라도 들어 났는지 친구들의 시선이 내게로 모여졌다.
그때 주영이가 슬쩍 내 눈치를 보고는 행여나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될 세라 다급히 말했다.
"얘들아! 우리 사진이라도 몇 장 더 찍을까?"
아마... 아니, 분명 주영이는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듯 했다.
한편 정혜는 내가 가지고 있던 디지털 카메라를 가져가서는 LCD화면을 유심히 보며 말했
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메모리가 꽉 차버렸네."
정혜가 멋쩍은 웃음을 짓는 가운데 다른 친구들은 꽤 아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우리 식구를 포함해 다른 친구들의 식구들이 하나 둘 씩 도착했다며 울려대
는 휴대폰을 받았으니 그것으로나마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우린 서로 인사를 나누고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각자의 식구에게로 돌아갔다.
나도 학과건물 앞에 기다리고 있는 식구, 엄마와 언니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에도 나의 머릿속에는 헤어진 그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했지만 애서 밝은 웃음을 지
었다.
"졸업 축하한단다!"
먼저 엄마가 미리 준비하신 꽃다발을 건네주며 축하해줬다.
"나도 졸업 축하해!"
연이어 언니의 축하인사도 받았다.
"응, 엄마도 고맙고 언니도 정말 고마워. 근데 언니는 용케 왔네? 아마 회사 때문에 못 올
것 같다고 했으면서..."
언니는 괜한 나의 트집에 질세라 바로 우스갯소리로 대답했다.
"왜 자기 졸업식에 와서 축하해주지 않았냐, 동생보다 회사 일이 더 중요하냐 등 오늘 일
갖고 며칠 동안 시달리기보다 하루 회사 결근하는 게 낮지.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한 번 삐
치면 얼마나 무서운데."
"그렇게 잘 알면서 아빠는 왜 안보여?"
이리저리 둘러봐도 헤어진 그의 모습처럼 아빠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엔 엄마가 답했다.
"진작 너한테 말했어야 했는데 이 엄마가 그만 깜빡했지, 뭐니. 오늘은 아빠 대학교에서도
졸업식이라서 오실 수가 없다고 하더라."
하긴, 아빠는 교수이기에 오늘 같은 날에는 이리저리 인사차 오는 학생들이 많다는 것을 알
고는 있지만, 행여나 나의 복잡한 마음을 들킬까봐 괜스레 투정 어린 말투로 말했다.
"언니는 회사 결근까지 하면서 왔는데... 아빠는 자기 딸의 졸업보다 제자들의 졸업이 더 중
요하다는 거지? 아빠한테 실망이야."
언니는 나의 이런 투정이 우스운지 히죽거리며 말했다.
"네가 이렇게 투정부릴 줄 알고 좀 전에 아빠가 오늘 널 위해 근사한 선물은 물론 근사한
점심을 위해 P호텔 레스토랑까지 예약했으니 좀 봐달라며 전화 왔었어."
평소 같았으면 선물과 간만의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라면 어린애처럼 좋아했지만, 오늘
은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그러나 애써 기쁜 척 했다.
물론 아직까지도 그의 모습은커녕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
언니는 들고 있던 카메라를 내게 비추며 말했다.
"사진 찍어줄 테니깐 엄마랑 같이 서봐."
여느 사람들처럼 엄마에게 학사모를 씌우고도 찍었고 잠시 엄마가 사진사로 둔갑해 언니와
나란히 찍기도 했다.
셋이 나란히 찍을 때는 때마침 우리 식구들에게 인사차 다가왔던 주영이가 찍어주었다.
물론 그때까지도 헤어진 그에 대한 상념들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속으로 파고든 듯... 그에 대한 그리움과 간절함만 점차 더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 어쩌면 헤어진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의 마지막 발악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금 내 마음속에 어딘 가에는 그와 헤어진 사실을 후회하거나 그 사실 자체를 인정
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닐까?
더 나아가 나는 아직 그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했다.
느닷없이 불어난 그에 대한 상념은 나의 머릿속은 물론 가슴까지 답답했다.
그럴 차에 언니는 자신의 팔에 걸친 시계를 보더니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이제 슬슬 출발해야 되지 않을까?"
"너무 이르지 않겠니?"
"여유 있게 출발하는 게 낫지 않겠어? 여기 올 때도 차가 막혀서 늦을 뻔했는데 나갈 때도
차가 많을 것 같은데..."
엄마는 언니의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럴 편이 낫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말대로 하는 게 낫겠어. 근데 차는 어디에 주차했어?"
"너희 학과건물 뒤 주차장에..."
"알았어. 엄마랑 언니랑 먼저 가있어. 난 학사모랑 졸업가운 좀 학과사무실에 돌려주고 그곳
으로 갈게."
꽃다발과 졸업장, 그리고 묵직한 졸업앨범을 잠시 엄마와 언니에게 맡겼다.
그리고 학사모와 졸업가운을 벗어 가지런히 개어 학과사무실에 돌려주곤 학과건물 뒤편 주
차장으로 향했다.
도중 몇몇 학과친구들을 만났지만,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기에 짤막하고 상투적인 축하인
사정도만 건넬 뿐이었다.
물론 그때까지도 기어코 헤어진 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의 옷자락은 물론 그림자조차도...
그런데 문득 학과건물 옆으로 나있는 산책로가 보였다.
몇 걸음만 하면 주차장에 이를텐데 잠시 걸음을 멈췄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아직은 겨울이라 그런지 대부분 짙은 녹색의 침엽수림으로 진을 치고 있었지만, 우리 대학
교에서 유일하게 헤어진 그와의 추억이 가장 많이 묻어난 곳이기에 나의 그런 행동은 자연
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내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당연하듯 나의 걸음걸이는 산책로로 들어
섰다.
한발한발 내딛을 때마다 이곳에서 만들었던 헤어진 그와의 아기자기한 추억들이 새록새록
나의 머릿속에서... 나의 가슴속에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어느덧 산책로 안쪽의 어느 익숙한 벤치에 달하자 그런 추억들은 절정에 달함과 동시에 나
의 걸음은 그곳에서 멈추어 버렸다.
어쩌면 이 벤치야말로 우리 대학교에서 헤어진 그와의 진정한 추억장소였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그와의 첫 키스...
아니, 잠깐...!
옛 추억에 잠기는 것을 잠시 미루기로 했다.
그 벤치 위에 꽃다발, 그것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상큼한 노란 빛깔의 후리지아로 가득한...
그리고 빨간 봉투로 동봉된 카드가 있었다.
일순 헤어진 그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혹시 헤어진 그가 다녀간 것은 아닐까?
물론 그 벤치 위에 놓여진 후리지아 꽃다발과 카드는 헤어진 그가 두고 가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높긴 했다.
그러나 문득 작년 이맘... 절친하게 지냈던 어느 선배의 졸업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 안
에서 그가 내게 했던 말들이... 약속 때문이라도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었다.
"넌 무슨 꽃을 제일 좋아해?"
갑작스런 그의 물음에 난 대답하기보다 오히려 반문했었다.
"꽃? 그건 갑자기 왜?"
"아니, 그냥. 알고 싶어서..."
"음... 난 후리지아 제일 좋더라."
"그래? 그럼 내가 내년에 네가 졸업할 때에는 후리지아로 가득한 꽃다발을 안겨다 줄게...!"
그가 했던 말이... 그가 했던 약속이, 이 벤치 위에 있는 후리지아 꽃다발과 카드가 헤어진
그가 두고 왔을 거란 추측을 자꾸 확신으로만 몰고 갔다.
난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도저히 억제하지 못할 의문에 동봉되어 있는 빨간 봉투를 슬쩍 열었다.
역시 새하얀 카드가 가지런히 넣어져 있었다.
행여나 흠집이나 자국이라도 날까봐 조심스레 카드를 꺼내어 펼쳐 보았다.
[졸업 축하해...]
단지, 그 말뿐이었지만, 그 글씨체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이 꽃다발과 카드는 헤어진 그가 두고 간 것이며... 틀림없이 헤어진 그 역시 이곳에 다녀갔
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차마 아직은 버리지 못한... 헤어진 그가 내게 보내왔던 100여 통의 편지를 받았었기에 그의
글씨체 정도는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확신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글씨체는 남자치고는... 아니, 여자인 내가 질투할 정도로 글씨를 참 예쁘게 썼다.
끝내 헤어진 그의 모습은 물론 그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지만 헤어진 그의 흔적이라도 느
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어느새 좀 전의 그토록 그렇게 헤어진 그에 대한 그리움... 미련 따위에 벗어나고자 했던 의
지는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오히려 이제 졸업을 했으니 학교에서 볼일도 없으며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마주할 가능성도
너무나 희박할 것이란 사실에 씁쓸함마저 느꼈다.
난 아직 고스란히 벤치 위에 놓여있는 후리지아 꽃다발을 들곤 코끝에 살짝 가져갔다.
그 후리지아의 향기가 진하게 전해져 왔다.
헤어진 그의 대한 그리움마저도... 아직 버리지 못한 미련, 그리고 그에 대한 사랑까지도...
이미 늦었지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토록 헤어진 그에 대한 상념에서 벗어나고자 발악은 했지만, 난 아직도... 여전히 그를 사
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 난 아직도 널 잊지 못하고... 사랑하고 있었나봐...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러기엔 이미
늦었는데..."
후리지아 꽃다발을 가슴 깊숙이 품고는 쓰라린 후회와 그에 대한 미련으로 아파했다.
그리고...
차마 깨닫지 못했던 나를 향한 헤어진 그의 진한 사랑에...
[He...]

요즘 들어 부쩍 정연과 만나는 횟수가 잦았다.
물론 내가 이별의 아픔을 달래려 만나자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비록 상대가 정연이 아니더라도 다른 이성과의 만남으로 헤어진 그녀
를 억지로나마 잊고 싶긴 했다.
별 다른 일없이 집에만 있으면 쓸데없는 지난 사랑에 사로잡혀 가슴앓이만 할뿐이었다.
물론 막무가내로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하면서 바쁜 척도 해봤지만, 그저 몸만 피곤할 뿐
이었다.
오늘은 정연과 함께 시내에 있는 어느 칵테일 바를 찾아 난 사이드카(Side Car)를 그녀는
맨하탄(Manhattan)을 마셨다.
내 잔에는 아직도 반쯤이나 남아있는 반면 그녀의 잔은 거의 바닥을 들어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잔을 모조리 비우곤 웨이터에게 다시 주문했다.
"너무 급하게 마시는 거 아니니? 술도 제대로 못 마시면서..."
"고작 한 잔만 마셨을 뿐이야. 그보다 내일 너 졸업식인데 정말 가지 않을 거니?"
"응..."
정연은 다시 새롭게 나온 맨하탄(Manhattan)을 조금 마시고는 다시 말했다.
"왜 안가는 거니? 혹시 소심하게 헤어진 그 여자 애 때문이니? 마주칠까봐 불편해서...?"
물론 그녀의 그런 짐작도 이유이긴 했다.
"그것도 그렇지만, 졸업장이랑 졸업앨범만 받으면 되는데 굳이 북적거리는 졸업식 당일에
가서 꼭 받을 필요는 없잖아."
"어머니는 서운해하시지 않아? 그래도 어머니한테 학사모도 씌어주고 사진도 찍어야지?"
더 이상 대꾸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남은 칵테일을 단숨에 비웠다.
그녀의 말은 계속 되었다.
"나도 그렇지만 다른 친구들도 상당히 서운해하더라. 너 졸업축하 해주려고 애들 나름대로
많이 준비한 것 같던데..."
"남들 다하는 대학교 졸업이 무슨 벼슬이니? 수석졸업이라면 모를까...?"
우리는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에서야 그 칵테일 바에서 나왔다.
상당히 늦은 시간이기에 먼저 그녀를 택시를 태워 집으로 돌려보냈다.
물론 그녀가 타고 간 택시의 번호를 휴대폰에 저장시켜 놓았다.
그것은 헤어진 그녀와 사랑하면서 자연스레 생긴 버릇중의 하나였다.
아무튼 나도 얼른 택시를 차고 집에 도착하자 어느덧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두터운 외투를 벗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끄집어내었다.
휴대폰에는 문자 한 통과 부재중인 전화가 다섯 통이나 있었다.
옷을 두텁게 입었고 약한 진동으로 해서인지 느끼지 못한 것 같다.
우선 문자를 먼저 확인했다.
[집에 무사히 도착!!! 오늘 너무 즐거웠고 졸업 축하해!!!^0^∼♥]
정연의 메시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잘 도착했는지 확인 문자를 보낼 생각이었는데 수고 아닌 수고를 들 수 있었
다.
이번엔 부재중인 전화를 확인해보니 대학시절 거의 붙어 다니다시피 친하게 지냈던 상필이
었다.
상필도 나처럼 졸업식에 참여하지 않고 며칠 후에 같이 학교에 가서 졸업장과 졸업앨범을
받기로 했는데 부재중인 다섯 통의 전화가 웬지 꺼림칙했다.
순간 갑자기 전화가 왔다.
휴대폰 외부 LCD화면으로 발신자 이름을 확인하니 다름 아닌 상필이었다.
"어이∼! 전화를 몇 번이나 했는데 왜이리 전화를 안 받아?"
"진동으로 했더니만... 근데 무슨 일이 길래 그렇게 전화를 많이 했어?"
"그게 사실은 말이지..."
상필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말했다.
"우리 그냥 내일... 아니, 오늘 졸업식에 가자."
며칠 후에 가자고 합의했는데 갑작스런 상필의 돌변에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뭐 때문에 마음이 바뀌었어?"
"나도 북적거리는 졸업식에 가고 싶은 마음은 쥐꼬리만큼 없는데... 그래도 내가 유리랑
C.C(Campus Couple)잖아. 근데 유리는 졸업식에 간다는데 남자친구인 내가 가지 않을 수는
없잖아. 게다가 부모님, 특히 엄마도 내가 안 간다고 하니깐 좀 섭섭해하시는 것 같아서...
원래 엄마들이야 자식들 대학 졸업식 때 학사모 한 번 써보시는 게 낙(樂)이라잖아."
"그럼 너 혼자 가면 되잖아. 난 며칠 후에 혼자가면 되고."
상필은 다소 서운한 목소리로 내 마음을 돌려보려는지 보채기 시작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임마! 내일 아니면 졸업하고 나서 언제 또 보냐? 그렇지 않아도 나
가기 싫어하는 놈이... 아니면 혹시 걔 때문에 그런 거니?"
헤어진 그녀를 뜻하는 것이었다.
상필은 정연과는 달리 내가 헤어진 그녀와 어떻게 사랑을 시작했고 거의 4년 동안이나 붙어
다녔기에 나의 마음쯤은 훤히 알 수 있었으니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그래, 맞아."
"짜식, 누가 소심한 A형 아니랄까봐. 그냥 졸업장이랑 졸업앨범만 받고 바로 가면 되잖아.
그리고 내가 너와는 달리 학과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혼자 학과 사무실에 들어가는 게
좀 그렇잖아. 그러니깐 같이 가자, 친구야...!"
계속 통화해봤자 상필의 고집은 수그러들 기세는 전혀 없는 듯 하니 평소처럼 그의 제안을
수락하는 것이 더 피곤하다고 판단했다.
"자기도 소심한 A형이면서...!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하자. 내가 어떻게 너의 그 소 심줄 같은
고집을 이길 수 있겠어?"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상필의 목소리는 약간 상기된 듯 했다.
"고맙다. 그럼 내가 차 몰고 아침 10시쯤에 너희 아파트 앞으로 갈게."
"알았어."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연이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괜한 근심이 내 머릿속을 순식간에 메우기 시작했다.
내일 혹시 헤어진 그녀와 마주치면 어떡하지?
어색하고 불편하겠지만 안부 인사라도 건네 볼까?
아냐, 괜히 건넸다가 나와의 지난 아픈 추억이 상기되어 그녀의 기분만 망칠 수도 있어.
그녀는 날 사랑한 것에 사실 자체를 후회하고 있을 테니 말이야.
그래도 그냥 모른척하기엔...
이런저런 상념과 그에 따른 갈등들로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당연히 몸은 나른해 질대로 나른한 나머지 겨우 샤워만 할뿐, 아침식사도 거른 채 옷장 속
에 걸려있는 아무 옷이나 주섬주섬 입었다.
남들은 오늘 같은 날을 위해 새롭게 마련한 옷부터 온갖 멋을 부리기에 여력이 없겠지만 고
작 졸업앨범과 졸업장을 받으러 가는 내게 있어선 그저 예전처럼 지루한 등교 길 같은 기분
일 뿐이었다.
몽롱한 두 눈으로 집으로 나오니 마침 상필의 차가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지루함도 없이 상필의 차를 타고 학교로 향했는데 오늘이 졸업식이라서 그런지 학
교로 가는 길은 예전과는 다르게 심한 교통체증을 앓아야 했다.
상필은 차가 막혀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도 정면을 쳐다보곤 괜스레 핸들까지 만지
작거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근데... 만약에 오늘 걔를 보면 어떡할 거야? 인사정도는 할거지?"
"글세... 그 상황이 닥쳐보면 알겠지. 웬만하면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잠시 정체가 조금이라도 풀렸는지 앞차가 조금씩 속력을 내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필은 앞차의 속력만큼 속력을 내어 운전하며 다시 말했다.
"그럼 만약에 내가 그 앨 만나면 어떡할까? 모른 척 할까?"
"그걸 왜 나한테 묻니? 네가 알아서 할 문제잖아."
"그래도..."
"비록 나는 그 애랑 헤어져서 친구라는 관계조차 불편할 수 있겠지만, 너와는 처음부터 친
구였으니 상관없잖아. 오히려 나 때문에 모른 척하는 게 더 어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또 그렇게 되는 건가?"
상필은 내 말을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교통체증 때문에 지체된 시간 때문인지 이미 졸업식 행사는
끝나버린 지 오래였다.
물론 애초부터 졸업식행사에는 참여 할 생각조차 없었지만.
바로 학과 건물로 향해서 난 졸업장과 졸업앨범만을 받은 반면, 상필은 자신의 사이즈에 맞
는 학사모와 졸업가운까지 챙겨 나왔다.
"너희 부모님이랑 유리는 언제 와?"
"유리하고는 11시 반쯤에 우리 학과 건물 앞에서 만나기로 했고 부모님은 정오쯤에 오신다
고 했으니..."
난 손목에 걸친 시계를 보니 11시 20분 정도였다.
"10분만 있으면 유리는 올 테니깐 난 그만 가볼게."
"야, 뭘 그리 급하게 가? 유리랑 모르는 사이도 아니면서. 오면 인사라도 하고 가."
상필이 나의 걸음을 잠시 잡아두는 사이에 때마침 유리의 모습이 보였다.
몇 번의 안면은 있었다지만, 아직은 낯선 나머지 쑥스럽게나마 인사했다.
"안녕, 졸업 축하해."
"땡큐, 너도 졸업 축하해. 그런데 넌 학사모랑 졸업가운은 왜 안 입어?"
"별로 내키지 않아서..."
난 상필에게 고개를 돌리곤 말했다.
"유리도 왔으니 그만 갈게."
"사진이라도 같이 몇 장 찍고 가."
"됐어, 내가 언제 사진 찍는 거 좋아하던?"
"그래도, 임마. 졸업식 흔적이라도 남겨야지."
이번엔 결코 상필의 고집에 질 수 없다고 생각할 찰나에 이번엔 유리가 말했다.
"그래, 같이 사진 찍고 가."
유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필은 거들었다.
"유리도 그렇게 하라고 하잖아. 그리고 우리 둘이 좀 찍어주고 말이야."
상필은 그렇다하더라도 유리까지 가세하니 결국 또 다시 걸음을 붙잡힐 수밖에 없었다.
원래 남의 부탁을 거절 못하는 성격에다 이성의 경우는 더 그랬다.
"알았어, 일단 카메라나 줘. 내가 먼저 너희들 찍어줄 테니깐."
난 상필이 모처럼 비싸게 구입했다며 항상 자랑삼아 말한 디지털 카메라를 건네 받았다.
상필과 유리는 금세 학과건물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었고 난 디지털 카메라 LCD화
면을 보며 그들에게 초점을 맞출 찰나였다.
그때 LCD화면에 비쳐져 있는 그들의 모습 뒤로 헤어진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검은 색 졸업가운 위로 여전히 예쁘고 아름답기만 새하얀 그녀의 얼굴에 잠시 나도 모르게
멍해 있었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구나...
그 동안 나 때문에 많이 아파했을 까봐 주제넘게나마 걱정했는데...
아니, 어쩌면 넌 나와의 사랑했던 지난날마저 잊어버리길 원했으니 아프지도 않았겠지.
난 아프고 힘들었는데...
지금도 이렇게 아프고 힘든데...
그녀는 내 모습을 보지 못한 모양인지 점차 많은 사람들 속으로 헤어진 그녀의 모습은 점차
사라져만 갔다.
"야! 빨리 안 찍고 뭐해?!"
상필의 커다란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미안... 이제 찍을 테니깐 포즈나 취해봐."
마치 내가 그들을 위한 사진기사라도 된 듯 그들의 사진을 열심히 찍어됐다.
"이번엔 네가 나랑 같이 찍자. 유리야 부탁할게."
유리는 순식간에 내가 들고 있던 디지털 카메라를 가져가서는 나를 향했다.
결국 원치 않았지만 멋쩍은 모습으로 몇 장의 상필과 졸업식의 흔적이라도 남기게 되었다.
"상필이, 네 놈 말대로 사진도 찍어주고 게다가 나도 사진 찍었으니깐 이제 그만 가봐도 되
는 거지?"
"그래, 참∼ 수고가 많으셨다. 내가 전화할게. 나중에 한 번 보자."
"그렇게 하든지..."
"우유부단하고 시큰둥한 건 여전하군. 그리고... 힘내라! 걔보다 더 좋은 인연이 널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랬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아무튼 그렇게 잠시 작별이란 생각으로 끝인사를 나누곤 집으로 가는 버스를 수월하게 타기
위해 후문으로 향했다.
학과건물을 지나 후문으로 내려가는 내리막길에 막 달했을 때 일순 학과건물 옆으로 나있는
산책로에 시선이 잡혀 버렸다.
산책로를 따라 더 들어가면 벤치가 나올텐데 그곳은 내가 생각하기에 헤어진 그녀와 유일하
게 잔잔한 추억이 묻어난 곳이었다.
느닷없이 피어오르는 저 곳에서의 헤어진 그녀와의 추억에 발걸음마저 잡혀 버렸다.
더운 여름날이면 벤치 주위로 솟아오른 나무의 시원한 그들 아래 살포시 그녀의 무릎을 베
고 책을 볼 때면 헤어진 그녀는 그런 나의 모습에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난 그런 그녀의 포근한 손길에 이끌려 잠시 눈을 부치곤 했었다.
게다가 헤어진 그녀와의 첫 키스...
문득 그때의 설레임과 그에 따른 미묘한 떨림이 전해진 나머지 나의 가슴은 연신 두근거리
며 간만에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
물론 아주 잠시뿐이었지만.
산책로를 따라 그 벤치에 가보고도 싶었지만, 이젠 그저 지난 사랑의 아련했던 추억들뿐이
었으니 애써 참았다.
괜히 갔다가 겨우 참고 참아 보려는 헤어진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게 피어날 것 같기에 자국이 남을 만큼 입술을 깨물며 후문으로 내려왔다.
겨우 버스 정류장에 막 이르러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어느 꽃집이 나의 시선을 다시
잡아 버렸다.
특히 형형색색의 여러 종류의 꽃 가운데 제철인지 모르겠지만, 노란 색의 후리지아 꽃이 그
랬다.
후리자아는 헤어진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꽃이었기에 나의 그런 반응은 당연했다.
문득 작년 어느 선배의 졸업식을 마치고 그녀와 함께 돌아오면서 내가 지키고 싶었던 약속
이 떠올랐다.
"넌 무슨 꽃을 제일 좋아해?"
헤어진 그녀는 느닷없는 나의 질문에 오히려 반문했었다.
"꽃? 그건 갑자기 왜?"
"아니, 그냥. 알고 싶어서..."
"음... 난 후리지아 제일 좋더라."
"그래? 그럼 내가 내년에 네가 졸업할 때에는 후리지아로 가득한 꽃다발을 안겨다 줄게...!"
비록 어쩌면 지금 우리가... 아니, 헤어진 그녀와 내가 아무 사이가 아니겠지만, 순간 그때
했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꽃집에 들어갔다.
그녀에게 전해줄 수도... 아니, 전해줄 이유나 방법도 없었지만 무작정 후리지아 한 다발을
구입했다.
또한 바로 그 옆의 문구점에서 빨간 봉투가 돋보인 카드도 구입했다.
비록 이 모든 것을 헤어진 그녀에게 전해줄 수도 없겠지만, 아직 내 머릿속에... 내 가슴속에
존재되어 남아있는 사랑했던 그녀의 흔적에게라도 전해주고 싶었다.
그러기엔 그곳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유일하게 헤어진 그녀와 사랑했던 흔적이 남아있는 곳... 다시 그 산
책로에... 그 벤치로 돌아갔다.
난 예전처럼 항상 그랬듯 벤치 왼쪽에 앉았고 오른쪽에는 후리지아 꽃다발이 헤어진 그녀의
자리를 대신했다.
그리고 좀 전에 구입했던 카드에 몇 자 적을 생각으로 유일하게 가방 속을 채우고 있는 다
이어리 사이에 꽂아둔 펜을 꺼냈다.
"무슨 말을 쓰지...?
원래 작문실력이 없으니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물론 이 카드를 헤어진 그녀에게 쓴다지만, 그녀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나와의 지난 사랑조차 잊고자 한 그녀였는데 이곳에 올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수 차례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차근차근 적긴 적었다.
[졸업 축하해...]
단지 그뿐이었다.
지난 날 헤어진 그녀에게 숱하게 했던 [사랑해]란 말조차 적을 수 없으니 문장이 간결할 수
밖에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너무 허전한 것 같아 약간의 여운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에 말 줄임표도 찍어 보았지만, 뒤
늦게나마 조잡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미 카드에 적은데다 헤어진 그녀가 볼 수도 없으니 그냥 빨간 봉투에 넣어 후리지아 꽃다
발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리고 괜스레 헤어진 그녀에 대한 간절함만 더할 것 같다는 생각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
다.
난 아직도 헤어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내 모습이 어리석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헤어진 그녀에 관한 일이라면 항상 나의 이
성은 나의 감성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조금씩조금씩 나의 발걸음은 그 벤치에서... 그 산책로에서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헤어진 그녀에 대한 간절함은 가슴 속 깊이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헤어진... 아니, 사랑했던 그녀를 향한 나의 부족한 사랑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