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부
어두운 긴 골목길을 올려다 보는 진우. 망설이다 골목길로 걸어
올라간다. 한참 뒤에 그 뒤로 수정과 태희가 골목길에 접어 들고
둘의 표정은 다소 어색하다.
-그만 가.
수정이 돌아서며 태희에게 말하자 태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생각 하지마, 이미 결정은 났으니까.
이번엔 수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괜히 헛기침을 하다 주위를 둘러
보고는 태희가 수정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돌아선다. 수정이 놀란
눈으로 태희를 본다.
-얼른 들어가, 내일 전화할게.
돌아서 내려가는 태희는 익살스럽게 슬밋 웃음을 흘리고는 뛰어서
내려간다. 그걸 보고 서 있던 수정은 제 입술을 깨물며 수줍게 웃으며
돌아서는데 앞에 진우가 서 있다.
-엄마야...
수정이 놀란 눈으로 뒷걸음질을 치다 방금 전의 행동을 보았을 걸
생각하니 창피하다.
-무....무슨 일이야?
수정이 말을 더듬으며 괜히 뒤를 힐끔 돌아본다. 혹시라도 태희의 모습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건 아닌가 하는 맘이다.
-봐...봤어?
-뭘?
수정의 물음에 진우는 굳은 표정으로 되려 묻는다. 봤으면서도 못 본 척
하는 것이다.
-아...아니, 그냥....근데, 나 기다린 거니?
그때 수정의 휴대폰이 울리자 당황한 수정은 진우의 눈치를 보며
휴대폰을 꺼내 돌아서서 전화를 받는다.
-왜 또?
-잘 터지나 싶어서 한 번 해봤다. 잘 자라.
-아이그..
끊어진 휴대폰을 흘겨보며 수정이 돌아서자 진우의 표정은 더욱 굳어져 있다.
-휴대폰 바꿨냐?
-어?....어.
-그래서 연락이 안 됐구나.
진우의 말에 괜히 수정은 자신이 나쁜 짓을 한 것처럼 뜨끔해진다.
-호텔에서 일한다며?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아, 윤미가 말해줬구나.
-호텔 사장 아들이라며?
-별 걸 다 까발렸네, 기집애.
뚱한 표정으로 궁시렁대는 수정을 보며 씁쓸하게 슬밋 웃는 진우.
-소원 성취했네, 황보수정.
비아냥거리듯 진우가 내뱉자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진우를 본다.
-신데렐라가 그렇게 되고 싶다더니, 정말 그렇게 될 날이 머지 않은 것 같다구.
소감이 어떠냐?
-너 지금 비꼬는 거 맞지?
-그 자식이 집이라도 사주겠대? 아님, 결혼이라도 하자 그래?
진우의 말에 수정이 화가 난 듯 노려 보고 섰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막상 진우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듣고 보니 화가 치밀었다.
-요즘 아주 꽃밭을 걷는 기분이겠다?
-그만해 너.
-너, 변했어.
-변한 건 니가 먼저야.
-난, 변한 게 아니라 잠깐 미쳤던 거구.
-그럼 나두 미친거겠지 뭐. 니 입에서 그런 말 들으니까 기분 무지 나쁘네.
니들 짰니? 윤미랑 너, 나 아주 속 긁어 놓으려고 작정했어? 내일은 또 누구니?
누가 내 속 긁을 참이야? 니가 미치지만 않았어두, 여기까지 오지 않았어.
수정이 화가 나서 돌아서려는데 진우가 거칠게 수정의 팔을 낚아챈다.
-그만둬.
-왜, 뭣땜에?
-지금이라도 그만....
진우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하자는 말을 하기엔
너무 자신이 뻔뻔하다고 느껴졌다. 수정이 슬그머니 팔을 뺀다.
-그러게 바람을 왜 펴?
수정이 돌아서 올라가자 진우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내려다 보고
섰다. 그러다 화가 난 듯 주먹으로 가로등을 세게 친다.
현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온 수정은 가방을 내려 놓고 바닥에 주저 앉는다.
그리곤 조금 전의 진우를 떠올리자 그다지 마음이 좋진 않다.
-나쁜 자식, 그러게 왜 그랬어?
******************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정원으로 나와 서는 새어머니를 보고 태희가
놀란 눈으로 본다.
-누구세요?
새어머니가 이 집에 파출부로 오고 난 후로 태희와는 처음 마주친다.
-이 집 아드님 되시나보네. 저요, 며칠 전부터 이 집 살림 맡은 사람이에요.
-아, 아줌마? 네, 안녕히 가세요.
건성으로 인사하며 태희가 들어가자 새어머니가 돌아보며 흘긴다.
-싸가지 하고는.
그리곤 다시 돌아서다 혼잣말로 중얼 거린다.
-근데, 몇 살이나 됐나? 우리 혜지하고 비슷하려나. 아유, 싸가지라두
이런 집에서 사는 사위 봤으면 소원이 없겠네.
현관 문을 열고 들어서는 태희, 이층으로 올라 가려다 태희를 돌아보는
태경.
-다녀왔습니다.
-지금 아버지, 어머니 안 계셔.
-?
-조여사님이 오늘 아침에 운명하셨댄다.
-그래? 그럼, 늦겠네.
-아마도. 저녁은?
-먹었어.
태희가 이층으로 올라가자 태경이 뒤따라 올라간다. 방으로 들어간 태희는
뒤따라 들어오는 태경을 힐끔 본다.
-나한테 뭐, 할 말 있어?
-한 잔 하자.
-뭐야, 생전 안하던 짓을 다 하고.
-씻고 나와.
태경이 나가자 태희가 옷을 벗다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 거린다.
욕실에서 씻고 나와 이층 베란다 한 켠에 만들어 놓은 바에 다가와 앉는다.
태경이 잔에 얼음을 채우고 술을 따라 태희 앞에 밀어 놓자 태희가
잔을 들어 마신다. 덥썩 치즈를 집어 먹는 태희를 물끄러미 보다 태경이
먼저 입을 뗀다.
-그 여자랑은 어떤 사이냐?
-누구? 아...수정이.
태경이 잔을 기울이며 태희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니 형수하고 나 결혼할 때, 어땠었는지 기억해?
태경의 말에 태희는 그제서야 그때의 일을 떠올린다. 그리고 태경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대충 감을 잡는다.
-홀어머니에 줄줄이 동생들이 다섯이었다. 니 형수, 대학 겨우 졸업하고
동생들 학비 대느라 정말 고생 많이 했었어. 그런데, 나랑 결혼하겠다고
맘 먹으면서 맘 고생까지 무지 했었다.
-알어, 아버지가 좀 그랬어.
-집안 배경 빼면 니 형수도 어디 빠질데 없는 여자야. 아버지 욕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지? 니가 맘 고생하는 건 상관없어, 근데 너 때문에
그 여자가 맘 고생 무지 해야 할거다. 니 형수하고 결혼 승낙 받기까지
꼬박 삼 년 걸렸다.
-그럼, 난 한 오년쯤이면 되겠네. 지금부터 시작해볼까?
-적당히 연애하다 끝내.
-적당히 연애할 그런 애 아냐. 지금부터 결혼은 생각해볼거야.
태희의 말에 태경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태희를 돌아본다. 태희는 사실
당장 결혼할 맘은 없었다. 나이도 그렇지만, 수정을 당장 결혼 상대로
생각해본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감정이 그렇다고 장난 또한 아니
라는 걸 안다.
*****************
세수대야에 물을 받아 발을 담그고 마루청에 앉아 있는 새어머니 옆에
혜지가 와서 앉는다.
-나 오늘 수정이 봤다.
-어디서?
시큰둥하게 새어머니가 툭 내뱉는다.
-아무리 생각해두 이상해, 그 기집애 회사 짤린 것 같어.
-짤려?
그제서야 놀란 눈으로 새어머니가 혜지를 돌아보며 묻는다.
-어, 낮에 어떤 남자랑 손 잡구 가는 걸 봤다니까. 하두 이상해서 수정이가
일하는 가게에 갔더니 그만 뒀다구 그러더라구. 근데, 짤린 게 분명해.
-아니, 며칠 전에 왔을 때도 그런 말 없었는데. 근데, 남자라니?
새어머니의 물음에 혜지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어떻게 생겼어? 돈은 좀 있어 보이디?
-모르지 뭐, 뒷 모습만 봐서. 입은 옷차림을 보니까 뭐, 궁상 맞게는
안 보이구.
-좀 보지 그랬어. 이게 아주 바람이 났나, 회사까지 그만두고 연애질을 해?
-여보, 물 좀 줘.
방안에서 부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새어머니는 짜증 섞인 투로 소리를
지른다.
-내가 이 집 파출부야?
그리곤 고개를 돌려 혜지에게 말한다.
-갖다 드려.
-아이씨...
투덜대며 혜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가고 새어머니는 수정이
정말 어떻게 된건지 궁금하다.
-이러다 생활비도 못 받는 거 아냐. 그럼 뭐야, 이제 땡전 한 푼 없는 거야?
******************
과일팩을 하고 침대위에 누워 있는 윤미의 방문을 열고 모친이 들어온다.
옆에 와서 앉자 윤미는 눈을 감는다.
-결혼 얘긴 안 들을 거야.
미리 못을 박자 모친이 슬밋 흘기며 설득 하려는 듯 말을 차분하게 꺼낸다.
-강회장님 아들 정도면 어디 빠지는 게 있니? 인물도 좋다 그러던데, 영
맘에 안 들어?
-싫어.
-왜 싫어?
-싫은데 무슨 이유야? 그냥 싫어, 다 싫어.
-윤미야.
-아이 증말.
짜증을 내며 벌떡 일어나 모친을 흘겨 본다.
-엄마 왜 그래? 내가 싫다구 글쎄.
-그러게, 왜 싫어? 맘에 그렇게 안 들어?
-생긴 것두 싫구, 성격두 맘에 안 들구, 옷 입는 것두 촌스러워서 싫어.
끔찍하게두 정말정말 싫어 죽겠어. 됐지?
그리곤 벌러덩 누워 버리자 모친이 짧게 한숨을 내쉰다.
-니 맘에 드는 남자가 있긴 하니?
-있어.
-아무데다 굴러 다니는 애들 말구.
-엄만 내가 그런 애들하구 다닌다구 생각해? 도대체 엄만 어떤 애들을 두고
하는 말이야? 아무데나 굴러 다니는 애들은 어떤 애들인데?
-그럼 데리구 와 봐 어디. 떳떳하지 못하니까 니가 안 보여 주려는 거잖아.
-내가 안 보여 주려는 게 아니라, 걔가 싫대.
-니가 왜 싫어? 저는 뭐 그리 잘났다구?
-잘났어, 무지 잘나서 놓치고 싶지 애야.
-자존심도 없어.
-그런 거 없어, 걔한테만큼은.
-미쳤네.
-알면 그만 나가줘요, 두 번 다시 강회장님 들먹거리지 말구.
-나두 모르겠다. 니 아버지한테 니가 알아서 설명해, 중간에서 나만 괴롭히지
말구.
모친이 나가자 윤미가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얼굴에 있는 팩을 떼어
버린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수화기를 찾아 들어 진우에게 전화를 건다.
-너 어디야?
-왜?
-지금 어디냐구 글쎄.
-......
-술 마셨니?
-조금.
-기 막혀, 어디루 가면 돼?
전화를 끊고 진우가 일러준 장소로 향하는 윤미는 수정일 떠올린다. 그러다
기분이 확 상하고, 장소에 도착한 윤미는 낡은 포장마차 입구에 서서 기가
막힌 듯 보고 서 있다가 안으로 들어가면 진우가 혼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프라스틱 의자를 힐끔 내려다 보고는 불결한 듯 손으로 대충 먼지를 닦고
자리에 앉는다. 진우는 그런 윤미를 보지 않고 빈 잔에 술을 채운다.
-나 물건 아니다, 사람이야. 눈 좀 맞춰줄래?
그제서야 진우가 고개를 들어 취한 눈으로 윤미를 본다. 윤미의 얼굴이
수정으로 보인다.
-어, 수정이 왔네?
진우의 말에 윤미는 화가 치밀고, 진우 앞에 놓인 잔을 빼앗아 단번에
마셔 버린다.
-뭐야, 수정이 때문에 이러는 거야?
그제서야 윤미를 잘못 본 걸 알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쓴다.
-아, 윤미구나.
-너 왜 이러냐구 글쎄.
윤미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주위에 있던 손님들이 힐끔힐끔 쳐다 본다.
-미안....나 속이 좀 거북한데...
진우가 손을 들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자꾸 비틀거린다. 윤미가
놀라 벌떡 일어나 진우의 팔을 잡고 부축한다.
-정신 좀 차려봐.
기어이 진우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 자리에 꼬꾸라진다. 윤미는 난처한
표정으로 서서 진우를 내려다 보고 있다.
****************
아침 일찍부터 외출 준비를 하는 수정을 현숙이 옷을 입으며 힐끔 본다.
-출근할 직장도 없으면서 아침부터 화장은 왜 하냐?
-집에 다녀오려구. 현숙아....나중에 너 마칠 시간 되서 가게 앞으로 갈게.
-왜?
-그냥. 너랑 오랜만에 밖에서 소주 한 잔 하려구.
-왜, 오늘은 그 놈 안 만나냐?
-놈이 뭐냐?
-하이고, 이제는 아주 편까지 드네.
가방을 들고 현숙이 입을 삐죽거리며 나가자 수정이 뒤따라 나간다.
-조심해서 다녀와.
-조심해서 다녀와, 마누라 흉내내구 있네.
현숙이 수정의 흉내를 내며 투덜대자 수정이 피식 웃는다. 현숙이
나가자 수정이 안으로 들어와 옷을 갈아 입고 나갈 채비를 서두른다.
***********
아침 식사 자리에서 강회장이 먼저 입을 뗀다.
-태희 넌, 오늘부터 정리해야지?
-네.
여전히 부은 얼굴로 태희가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태경이 그런 태희를
힐끔 쳐다보고 모친은 위태위태한 표정으로 강회장과 태희를 번갈아
눈치를 본다. 다행히 아무 말 없이 수저를 놓고 강회장이 자리에 일어나자
모친이 덩달아 일어나 뒤따라 나간다. 안방으로 들어온 두 사람.
모친이 겉옷을 내어 주고, 강회장을 힐끔 본다.
-똥마련 강아지 새끼마냥 왜 그래?
-내가 뭘 어쨌다구...
-이회장 댁 하고 가끔 만나지?
-바자회에서 가끔 보긴 해요, 근데 그건 왜요?
-태희 녀석 일로 아마도 기분이 많이 상해 있을 거야.
-싫다는 애한테 그러게 왜 그래요? 저도 먹을 만큼 먹은 나인데, 여자
문제까지 관섭하니까 저러지, 괜히 저러나.
모친의 말에 강회장이 인상을 구기며 노려보자 시선을 슬며시 피하며
지지 않고 다시 말을 잇는다.
-태경이로 족해요, 태희마저 상처 주지 말구. 태경이 결혼 때도
오죽 시끄러웠어요? 그것 때문에 평생 가슴에 멍 자국이 남은 애에요.
태희는 저 좋다는 애랑 그냥 엮어 줘요. 다 늙어 무슨 욕심이에요?
사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 당신은 뭐 가진 게 있었수? 나 시집 올 적만
해도 겨우 밥 먹고 살았지. 아이구, 그 고생을 어떻게 말로 다 해?
-치매 있어? 아님, 정말로 죽을 때 된거야? 왜 그래 대체? 그동안 말이
하고 싶어서 어떻게 참고 살았을까. 안 하던 잔소리까지 늘었어 이제.
강회장이 핀잔을 주며 모친을 툭 밀치고 나가자 모친이 주먹을 들고
한 대 쥐어 박을 듯 하며 뒤따라 나간다.
***오늘도 더운 건 여전하네요.
더운 날에 마시는 술은 정말 독약인 것 같습니다.
아이고, 머리야--;; 하늘이 뱅뱅...@@
오늘은 좀 늦었지요? 오늘도 다들 굿데이 되시구요
더운 날 힘내시구,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