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이다.
나는 정훈과 약속한 대로 여행을 가기 위해 원룸을 여기 저기 오가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1박의 일정이지만 그래도 어떤 옷을 갖고 갈 것인가도 걱정되었다. 겉옷뿐만이 아니었다. 속옷도 어떤 것으로 가져갈까도 생각하며 이것저것 뒤져보기도 했다.
일단 짐을 다 꾸렸다고 생각하고 샤워를 시작하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정훈인가 싶어서 알몸으로 나와 전화를 받으려는 순간 핸드폰에 뜬 번호는 아버지였다.
나는 받을까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민아냐?"
아버지는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은 일이 전에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직접 대화를 하기보다는 엄마를 통해 아버지와 의사소통을 했었다. 이렇게 직접적인 대화는 이상하게도 긴장하게 만들었다.
"네."
나는 짧은 대답을 했다.
"네 엄마가 없어졌다."
"네?"
엄마가 사라지다니?
"어제 밤에 안들어왔다."
엄마가 외박을?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얘기하지 않고 결론만 얘기했다. 예를 들면 어제밤에 부부싸움을 해서 엄마가 나갔다던가 아니면 여기 저기 전화했는데 아무도 모른다던가 내가 참고할 만한 얘기를 해주면 좋으련만 엄마가 어제 밤에 안들어왔다는 말만 달랑하면 내가 다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뭐 외할머니네라도 간 거 아니에요?"
나는 여자가 부부싸움을 하면 친정에 간다는 도식적인 생각을 하며 물었다.
"전화를 안받는다."
아버지 그 말로는 엄마가 전화를 안받는다는 건지 외할머니가 안받는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제가 알아볼게요."
그래도 아버지보다는 내가 엄마나 외할머니에게 전화해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일단 그렇게 대답했지만 아버지와의 이 답답한 대화를 더 진전시키는 것도 어색했다.
"그래라."
아버지와 이 단답형의 대화는 언제쯤 개혁될 수 있을런지...
나는 우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아버지의 전화는 받지 않아도 내 전화는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벨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아 엄마는 내 전화를 받았다.
"엄마! 가출했어?"
"무슨 소리니?"
엄마는 나의 당황스럽고 걱정스런 목소리와 달리 오히려 내 질문에 놀라는 눈치였다.
"아버지가 왠일로 전화를 해서는 엄마가 가출했다고..."
"아무튼...일생 대화가 안통해..."
"어떻게 된 건데?"
"재즈 음악 발표회 있다고 했던 거 기억하지?"
"응."
"거기 다 젊은 애들이라 그런지 발표회 전에 MT같은 거 간다는 거야. 그래서 네 아버지에 말했더니 아무 말도 안하는 거야. 늘 그렇지...그게 싫다는 뜻이지..."
그렇다. 엄마도 우리에게 자주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아버지가 대답이 없다. 안되나 보다..라고
"그래서 일단 나와버렸어. 이 나이까지 아버지 말대로 움직이기 싫어서..."
엄마의 말이 공감이 간다.
나도 아버지가 결혼 전까지는 절대로 독립같은 건 안시켜줄 것 같아서 나왔었는데...
우린 모두 아버지의 적이 되어가는 건가?
"네 아버지 어제 저녁부터 전화했는데 내가 그냥 안받아버렸어. "
엄마와 아버지...도대체 어떤 사이인 걸까?
나와 엄마, 나와 아버지보다 더 먼 사이가 아닐까?
엄마와 아버지를 보면 결혼 생활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된다.
아이가 정말 부부 생활을 견고히 하는 끈이 되긴 하는 걸까?
엄마와 아버지는 왜 지금까지 부부로 살아온 걸까?
정훈이 이해가 될 듯도 했다.
서로가 계속 평행선으로 사느니 다른 선택을 하는 거 아닐까?
정훈도 그랬었다. 잘못된 선택을 돌리고 싶다고.
"일단 내가 그럼 아버지한테 설명할게. 그래도 아버지 대단해. 나한테 전화까지 하고..."
보통의 아버지 성격이라면 아마도 나에게 전화하지 않고 어떻게든 혼자 해결하려고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네 엄마는 어떻다'라고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양반 그래도 답답했나보다. 너한테 전활 다하고..."
엄마의 마지막 말은 묘한 여운을 주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답답해했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답답해하는 게 의외라는 뜻일까?
나는 다시 아버지한테 전화를 했다.
"엄마가 재즈 피아노 배우는 거 아시죠?"
"그러냐?"
아버지는 엄마가 재즈피아노를 배우는 것도 몰랐다는 말투였다. 나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엄마와 아버진 대화를 하고 사긴 사는 걸까?
"좀 된 거 같은데..거기서 MT인가 간다고..."
"알았다."
역시 아버지와 대화는 짧게 끝났다. 이 짧은 대화로는 아버지가 어디까지 이해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번갈아 통화를 하느라고 정훈과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았다. 어쨌든 서둘러 다시 샤워를 하러 목욕탕에 들어갔고 나와서 화장을 하고 머리를 말리는데 이미 약속시간은 30분이 지난 후였다.
드디어 정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많이 늦니?"
"아니, 잠깐만..."
"오래 걸릴 거 같으면 차 세워놓고 너희 집에 들어가도 돼?"
나는 순간 망설여졌다. 문득 현수와의 약속이 생각나서였다. 둘이 같이 있는 동안에는 누구에게도 집을 알려줘서는 안된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나의 집인 셈이니 들어와도 되는 거 아닐까?
더구나 이미 30분이나 늦은 셈이었고 지금부터 20분은 더 걸릴 것 같았다.
"응."
나는 대답해주고 간단히 위치를 알려주었다.
내가 머리를 말리고 있을 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나는 정훈임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집도 예쁘게 꾸며놨네."
솔직히 내 솜씨가 아니었다. 모두 현수의 것이었다.
"그래?"
"너한테 이런 면이 있는지 몰랐다. 그냥 철부지 아가씨 같았는데..."
나는 정훈의 말소리를 들으며 계속 드라이를 했다. 정훈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생각에 서둘러야 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훈의 손이 내 허리를 감싸는게 느껴졌다.
"젖은 머리 너무 섹시해 보여."
나는 드라이어기의 작동을 멈추었다. 멈춘 것은 드라이어기뿐만이 아니었다. 나의 몸도 그대로 정지된 채였다.
"잠시 이대로 있자. 머리 나중에 말리고..."
정훈은 그렇게 말하고는 나의 몸을 돌려 키스를 했다. 정훈의 뜨거운 입술을 느끼며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정훈은 내 겉옷을 벗겼다. 그리고 가슴에 키스를 했다. 나도 정훈의 티셔츠를 벗기고 바지 자크를 내렸다. 서로가 완전히 알몸이 되었다.
정훈의 페니스가 내 아랫도리에 닿았을 때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때였다. 정훈의 핸드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내가 놀란 몸짓을 했지만 정훈은 무시하고 나에게 키스를 했다.
"신경쓰지마."
나는 순간적으로 누굴까 생각하며 목소리만 들은 그의 부인이 떠올랐다.
둘만이 있는데도 누군가가 같이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면 감시 카메라가 있어서 우리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낱낱이 보여지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곧 정훈의 격정적인 몸짓으로 페니스가 내 질안으로 들어왔을 때 모든 것을 잊고 절정에 올랐다.
"사랑해."
정훈은 그렇게 말했다.
시련 없는 연인이 어디 있으랴. 둘이 이렇게 사랑한다면 다 극복해야할 문제가 아닐까...
내가 다시 샤워를 하겠다고 목욕탕으로 갔다가 돌아온 후에 정훈이 통화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네. 뭐라고요? 네....네..."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히 여자 목소리였다.
"누구야?"
"어머니."
"진짜?"
나는 정훈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나를 다시 만났을 때부터 결혼했었다는 것을 속이지 않았던가...그 때의 의심이 남아 있었는지 어머니란 정훈의 대답이 믿기 어려웠다.
정훈의 나의 의심스러운 마음을 아는지 수화기의 통화내역을 보여주었다.
분명히 '어머니'라고 쓰여 있었다.
"근데..왜?"
나는 의심한 것이 미안하기도 했지만 당당하게 물었다.
"부인이 집에 왔나봐. 임신했다고 말해서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나봐."
정훈은 전과는 다르게 자세하게 상황설명을 해주었다.
그래도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집에 당장 내려오래."
"지금?"
내 말은 나랑 여행을 취소하고 집에 내려 갈거냐는 뜻이었다.
"응. 미안해. 내가 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올게."
지금 간다면 도대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일까?
나는 그 문제의 해결방법이나 방향도 궁금했다.
정훈과 함께 하기 위해 그가 유부남인 것을 감당하기로 했지만 과연 이 정도도 내가 감당해야할 몫인지 궁금했다.
이건 단순히 다른 약속이 생겨서 둘만의 주말 여행을 취소한 것과는 다르게 심각한 것이라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