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을 거부하는 나라 - 연구원과 족쇄
박상욱 님의 글 입니다.. 읽어 보시고.. 감상평이라도..
근래 몇 년간 성적이 영 시원치 않기는 해도, 박찬호가 LA 다저스에서 텍사스 레인저스로 팀을 옮기며 천문학적 연봉 계약을 체결하자 많은 국민들이 마치 자기 가족의 일처럼 기뻐하고 뿌듯해 했었다. “다저스에서 메이저리그에 입성하고, 최고의 투수코치들에게 지도를 받아 기량이 일취월장한 데다가, 찬호는 다저스 타자들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경쟁팀인 텍사스로 가서는 안되지 않느냐. 정 옮기고 싶으면 최소 3년간 야구를 쉬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LA가 박찬호를 수련시킨 이유는 자신들의 성적을 위해서였으며, 제고된 능력과 쌓은 승수는 고스란히 박찬호의 것으로 남는다. 이는 지극히 상식적이다.
같은 일이 과학기술계 연구개발자의 경우에는 영 거꾸로 일어난다. 최근 정부는 경제산업부처를 중심으로 기술유출방지를 위한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치고 올라오는 중국을 비롯한 후발 개도국에 우리나라의 핵심 기술이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점은 인정한다. 또, 특허를 비롯한 지적재산권의 보호는 기술개발활동에 대한 핵심적 지원제도이며 혁신에 대한 가장 효과적 인센티브라는 점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법안에 들어가서는 아니 될 조항 몇 개가 끼어들 조짐을 보이고 있어 우리 정부의 수준을 매우 의심케 하고 있다. 소식에 따르면, 연구개발자가 퇴사할 경우 일정기간동안 동종 업계로의 전직 또는 취업을 제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눈과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어이없는 이야기이다. 그 기간은 수일이나 수주가 아닌, 자그마치 3년이라고 하니 한마디로 직장 옮길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다.
급변하는 기술의 격랑 속에서, 과학기술인에게 3년의 공백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이다. 직장을 옮기지 못하니, 몸값을 올리기는커녕,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해도 저항할 방법이나 하소연할 곳도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현 직장에서 정년을 보장한다던가 ‘타사에 빼앗겨서는 안될’ 핵심인재 대접을 해 주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결국 연구개발직으로 일하려면 남의 노예가 되어 입 다물고 귀 막고 주는 대로 받아먹으며 일만 하다가 쓸모없어지면 버림받는 팔자를 감내하라는 뜻인가.
대기업인 L모 전자에서 퇴사한 연구원 몇 명이 경쟁사로 옮겨갔다 하여 벌어진 소송 사태가 지금도 진행중이다. 법원은 전직을 금해달라는 대기업의 손을 들어주었고, 멀쩡히 연구중인 연구원들에게 손을 놓고 1년간 놀라고 명했다. 이도 모자라 최근에는 1인당 하루 3백만원의 손해배상을 전직장에 내어 놓으라는 판결까지 나왔으니, 직장 옮기기가 국적 바꾸기보다, 심지어 타고난 성별 바꾸기보다 어려운 지경이다.
정부와 법원의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이유는, 절대적 강자인 대기업과 약자인 연구원 사이에서 대기업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류의 정책이나 판결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고로 새삼 이제 와서 흥분할 일은 아닌데, 무엇보다도 국가적 혁신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 아니기에 혹 그들의 공부와 생각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심각한 우려가 들기 때문이다. L모 전자의 주장은, 핵심 연구원들이 빠져나가 디지털카메라폰 개발 경쟁에서 우위를 빼앗겼으며, 그 손실이 매우 막대하다고 주장한다. 연구원이 새로 자리를 잡은 P모사의 경우 작년부터 급격한 매출 신장을 이루었으니 연구원 몇 명의 효과가 대단함을 실감할 수 있고, 연구원을 빼앗겼다고 스스로 피해의식을 느끼는 L사 입장에서는 분통터질 노릇이겠다. 그럼, 현재 상황은 어떠한가. P사의 약진으로 위기감을 느낀 L사와 다른 S사 등이 더욱 노력을 경주하여 디지털카메라폰 시장이 조기에 성숙하고, 다양한 제품들의 경쟁으로 소비자는 좋은 제품을 일찍, 좀 더 싼 가격에 만날 수 있게 되었고, 외국에서 국산 카메라폰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고 한다. 연구원을 놓친 L전자는 이를 악물었는지, 3백만화소에 스테레오 음향의 ‘디카폰’ 시리즈를 내어 놓아 브랜드 이미지를 더욱 확고히 하고 있다. 이정도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먹고 알먹고 둥지헐어 불 쬔 격이 아닌가?
혁신체제 이론가인 Malerba는 1998년 논문에서 시스템실패의 여러 유형을 다루면서 학습의 실패, 동태적 보완의 실패 등과 함께 ‘전유(專有)성 함정(Appropriability trap)'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지적재산권 제도나 영업비밀과 개발기술의 보호 등이 너무 강력하게 적용될 때 기술과 지식의 확산과 활용이 제한되기 때문에 산업 전체적으로 볼 때 기술개발활동에 제약을 가져온다고 한다. 기술의 확산, 지적 자산의 유동, 우수 연구인력을 포함한 혁신 자원의 활용, 그리고 혁신주체들의 상호작용을 활발히 하는 것은 국가 혁신에 있어서 지향해야할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전직한 연구원들은 L전자에 약간의 타격을 주었을 수 있지만, 관련산업 전체로 보아 혁신을 이끌어냈다고 평가할 수 있고, P전자를 통해 국부 증대에 이바지한 것이다. 시스템실패를 방지하기 위한 정부정책의 역할은 자명하다. 전유성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정부는 적절한 수준에서 연구개발인력의 유동을 보장하면서도 원소속 기업과 타협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지적재산권은 보호하되 연구원 머리 속에 들어있는 지식과 경험에까지 이동에 벽을 쳐선 안된다. 현실은 이와 정반대로, 대기업 편에 서서 연구개발자의 인권마저 침해하는 ’3년 취업 금지‘ 조항이나 만들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저명한 SF 작가인 필립 K 딕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페이첵’에서, 연구개발이 끝난 뒤 주인공인 기술자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내용이 나온다. 이번 법안에는 연구개발 결과물의 환수에 대한 언급까지 있다 하니,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기계가 개발되기라도 하면 가장 앞서 나서서 ‘기억삭제법’을 제정하겠다고 나설 태세다.(현 과학수준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새삼 위안이 된다) 기술유출방지법안의 독소조항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벌써 과학기술계가 뒤숭숭하다. 더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모두 제 대접 받으며 일할 수 있는 선진국이나 경쟁국으로 떠나야 하는게 아니냐는 말이 공공연하게 들린다. 과학기술인 출국금지법, 해외취업금지법이 만들어지기 전에 말이다. 정부는 그간 과학기술인들에게 무엇 잘 해준 것이 있다고 족쇄 채우는 일에만 열을 올리는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과학기술인이 정보에 어둡고 잘 뭉치지 않는다하여 업수이 보았다면, 경고가 현실이 된 뒤 후회하면 늦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확인하는 일만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