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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빛이 문창 사이로 스며들어 잠든 그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종현은 숨조차 크게 내쉬지 못했다. 방을 가득 채운 그 팽팽한 기운은 호흡속의 작은 파동으로도 사라져 버릴 듯 조심스럽고 아련했다.
"얼마나 되었느냐...."
"아직 ...날이 밝으려면 멀었으니 좀더 잠을 청해라"
그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 세웠다.
"지금까지 그리 있었더냐.."
"....이리 마셔도 취하질 않으니 오늘 술은 이상하구나..."
효원이 잠시 두 눈을 감고 긴 호흡을 마시고 뱉었다.
"오래전에 영월각에서 그림을 보았다. 여인이 살아 걸어 나올 듯이 생생한 그림이었다"
종현은 잠시 정신이 멍했다. 알몸으로 시린 바람을 맞은 듯 온몸이 찌릿하며 한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 말은 ....처음부터 나를 알고 내 집에 들었다는 말이냐...“
"속이려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어떤 이인지 알고 싶었다"
그는 그저 몸을 피하던 밤손님이 아니라 종현을 알아 찾아든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누구냐.....이제 내게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느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름을 가졌다...그러니 굳이 알아 낳을 것도 없다.."
"두렵지 않다....그러니 말해라....내가 처다 보지 못할 신분임은 이미 집작하고 있으니 듣는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냥 이대로가 좋다.... 너도 나쁘지 않다면 이대로의 서로를 보아 주기로 하자..."
그가 갓을 챙겨 매고 떠날 채비를 했다. 종현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지 말라는 말도 언제 오냐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을 하는 것 조차 죄가 될 것 같아 가슴이 조여 왔다. 그가 몸을 일으켜도 종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배웅해주지 않을 모양이구나...."
".. 갈 길이면 서둘러 떠나라..."
"대작을 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구나...쉬거라....."
그가 방문을 열고 나섰다. 종현의 가슴에 쿵하고 큰 것이 내려앉았다. 자신이 왜 그리 옹졸함을 보이는지 알 길이 없었다. 바스락거리며 신을 싣는 소리가 들리고 연이어 디딤돌을 내려서는 소리가 들렸다. 종현은 더 참지 못하고 급하게 방문을 열고 나섰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뒷짐을 지고 마당에 서 있었다.
"해연사에 갈 것이다...함께 가겠느냐...."
종현이 금방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자신을 알고 있었다. 묻지 못해 서운한 그 마음도 읽고 있었다. 잠시 가슴에 가졌던 그 옹졸함과 서운함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나흘 뒤 갈 것이다...몇 일 있을 것이니 누벼진 옷가지 몇 벌 준비해라...산이라 추울 것이다"
그가 몸을 돌려 싸리문을 향했다. 종현이 다급히 마루위에 놓인 비단 천에 쌓인 물건을 집어 들며 그를 불렀다.
"이걸 놓았다..."
그가 돌아보며 입가에 작은 미소를 걸었다.
"니 것이다....목검과 진검은 옷자락을 스치는 느낌부터가 다르다...그것으로 연마해라.. 그리고 다음엔 내 옷자락 한 자락은 잘라 보아라.."
종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비단 천에 쌓인 검을 바라보았다. 그가 사라진 대문 앞을 한참 그리 서 있다가 방으로 들어와 천을 풀었다. 검을 잡은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한번도 그런 검을 잡아 볼 것이라 꿈꿔 본적도 없었다. 어느 밤 꿈처럼 그가 왔던 것 처럼 종현의 손에 믿기 어려울 만큼 화려하고 진귀한 보검이 들려 있었다. 꿈길처럼 몽환의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검을 잡은 손 또한 그랬다. 너무 큰 기쁨은 내 보이면 빼앗길 것 같은 염려가 생겨나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밀담---
밀담을 나누는 여인의 얼굴에 깊은 시름이 내려 앉아 있다. 차마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을 전해들은 낯빛이 고뇌와 절망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아마도 마음을 준 듯 합니다...”
“어찌 그런 하잘 것 없는 ......”
여인이 말을 다 하지 못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태생은 보잘 것 없으나 그 배움이 천하지는 않은 듯 합니다.. .아마도 아성이 먼저 그것을 알아본 모양입니다...”
“그림을 그린다 하였더냐...”
“영월각을 드나들며 미인도를 그려주고 있는 모양입니다..”
“지금처럼 지켜보는 눈이 많은 난국에 어찌 그리 겁 없이 사람을 가까이 한단 말이냐.. 그리 생각 없는 아이가 아닌데 .....혹여라도 저쪽에서 눈치 채고 먼저 손이라도 쓴다면 아성이 곤욕을 치룰 수도 있는 일이질 않느냐....“
“잠시 두어 보시는 것이 낳을 듯 합니다. 지금처럼 혈기왕성한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성품을 아시질 않습니까....때가 되면 먼저 말씀하실 걸로 암니다“
여인의 얼굴에 자식에 대한 연민과 애절함이 절절했다. 자식을 지켜내지 못한 한맺힌 어머니의 그것이었다. 열자식을 가졌다 해도 여리고 아픈 한 자식이 못내 가슴에 맺히는 법이였다. 이미 천근의 고통을 가지고 태어났던 아이였다. 한 줌 핏덩어리로 태어나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세상에 눈을 뜨는 그것이 오직 고통이 될 수 밖에 없는 아이였다.
"차라리..그때....내가 욕심을 버렸다면 이리 큰 고통은 모르고 떠났을 것을... 그랬어야 했어...세상의 빛을 알지 못했을 그때 내가 욕심을 버렸어야 했거늘.."
"누구보다 강인하고 총명한 분입니다....어디 하나 모자람을 찾을 수 없을만큼 잘 해내고 계시질 않습니까..."
"그래서 더 아픈걸세....그 가슴이 어떨지 아는데....그리 하고 살기가 얼마나 피끓는지 아는데..."
여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
"의원은 뭐라 하더냐...."
"요즘은 의원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합니다...통증이 올때도 따로 약을 쓰지 않고 있는걸로 압니다..."
"뭐냐...그럼 그 통증을 생으로 그냥 앓는단 말이냐..."
"검술과 냉 찜질을 하시는 모양입니다..도진이 외에는 다른 이의 접근을 금하니 다른 것이 있는지는 아직...."
"그 자에 대해서는 더 알아보아라...철저히 알아보고 저쪽의 동태도 빠짐없이 살펴라..."
영월각---
그날 밤 종현이 새벽을 밝히며 그를 기다렸던 것처럼 기생 단향에게도 피를 말리는 기다림이었다. 자신을 버리듯 머리를 올리면서 여인으로 품었던 한가지 원마져 그리 한스럽게 놓아야 했다. 어느 집 조강지처 자리를 탐하지는 못한다 해도 머리를 올리는 그것 만은 평생 단 한번 가슴에 품은 정인과 연은 맺고 싶은 것이 그네의 염원이었다.
단향이 머리를 올리고 열흘 후 효원이 영월각에 들었다. 사냥을 마치고 채 피냄새가 가시지도 않은 차림새로 단향과 마주했다. 단향은 애써 냉정을 가장하며 그를 대했다. 이미 자신을 놓은 사람이었다.
"오늘은 수확이 좋다...꿩을 요리하라 했으니 독한 술을 준비해라.."
단향이 대답없이 효원을 얼굴을 응시했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것 같은 서러움이 그 눈속에 한껏 서려 있었다.
"왜 오셨습니까....참으로 자닌하십니다..."
효원이 손목을 보호하고 있던 천을 풀어내며 아무렇지 않은 듯 흘려 대답했다.
"이 곳은 내 놀이터가 아니더냐...늘 놀던 곳을 찾아 든것 뿐이다."
무심함...
한치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 그 무심함이 결국 단향을 무너지게 했다. 소리도 없이 쏟아지는 그 서러움이 한동안 멈출줄을 몰랐다. 효원의 얼굴에 잠시 아련한 그림자가 스치다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 눈은 단향이 알고 있던 효원이 아니었다.
"한번이다...이번 한번만은 내 앞에서 이리하는 걸 보아 줄것이다... 다시는 내게 보이지 마라... "
"어찌 저에게 이리 하시는 겁니까...이런 분이셨습니까.."
단향은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효원이 아니었다. 늘 그 눈속에 정이 넘쳤고 그녀 앞에서는 어린 아이처럼 맑은 심성을 다 드러내던 사람이었다.
"너는 니가 보고싶은 데로 나를 보았을 뿐이다. 그러니 내게 다른 모습을 찾지 마라.. 오늘 나는 술을 하고 싶어 온것이다. 내가 이곳을 찾는 이유는 나를 내려놓기 위함이다. 그러니 그 어떤 것도 더 보태지 마라...자신이 없으면 다른 아이를 불러라..."
단향은 자신을 추스리려 애썼다. 더이상 그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효원을 향했던 그 모든 것들이 오직 자신만의 꿈이었다는 사실에 단향은 시린 서릿발 같은 한기를 느꼈다.
"아님니다...잠시 나가 다시 단장하고 들겠습니다...제가 잠시 딴 꿈을 꾸었습니다.. 미천한 제 신분을 잊고 한낫 놀이게감에 지나지 않는 장난질에 정을 품으려 했습니다"
단향이 나가고 술상이 들었다. 도진이 들어와 그의 머리태와 나머지 한쪽 보고대를 풀어주며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많이 놀란 모양입니다..굳이 이리 하실 필요까지..."
효원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도진의 말을 중간에서 받았다.
"그냥 두면 부질없는 곳에 미련을 두게 된다....저 아이는 ...그래.. 종현과 닮아 있다. 가끔 나를 읽어내는 기술을 가졌다...그래서 편하고 또 그래서 불편하다...한번은 정을 끊어 주어야 살 것이다..."
효원이 술잔을 비우고 다시 한잔을 채워 도진에게 내밀었다.
"마셔라.."
"아닙니다...어찌.."
"너는 내 벗이다...내 형제보다 가깝고 내 아버지보다 나를 더 많이 걱정하질 않느냐.. 니가 없으면 나는 옷한벌도 제대로 갖춰입질 못하는 신세지 않느냐.."
편치 않은 심정을 그리 농으로 넘기는 효원의 눈빛을 도진이 모를 리 없었다.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이 자라며 모셔 온 사람이질 않은가...어쩌면 도진은 자신보다 효원을 더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의 고통이 무엇으로 시작되었는지 그 근원을 알고도 아홉해를 넘겼다. 차마 눈으로도 입으로 내 뱉지 못할 그 통한의 시간들을 자신을 갈고 닦아 지금의 효원이 있었다. 그 인품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성품을 연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신분의 차이가 있어 섬겨야 할 주인이 있다면 도진은 한치의 주저없이 다시 태어나도 그를 모실 것이라 여겼다.
그 밤 효원은 단향을 앞에 두고도 없는 사람인 듯 그리 술을 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 마음을 너무도 잘 알아 차라리 거추장스러웠다. 품을 수 있는 가슴을 가지지 못한 자에게 그런 정은 도려내야 할 환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한점 흔들림 조차 허락치 않고 단향을 대했다. 취할 수 없었다. 너무 큰 무게가 심장에 내려 앉아 술도 취하지 않았다. 단향을 앞에 두고도 수없이 종현을 떠올리던 효원은 자꾸 서러워 지는 가슴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새벽 종현의 방에 든 효원은 더이상 자신을 붙잡을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모든 것을 토해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마지막 남은 한점 이성으로 억누르며 몇잔 술을 가슴에 쏟아붙고 그렇게 잠들어 버렸다.
[너무 좋은 것은 눈을 감아도 눈속에 내려 앉는다.
그 새벽 정신을 놓고 싶은 그 혼미함 속에서도 효원은 자신에게 들이워진 종현의 시선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