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칙사랑 - 04. 유들유들 대작전!
“사실인가요? 당신이 한 말이 사실이냐고요!”
“······.”
갑작스런 큰 소리에 그는 당황한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세상이 천천히 돌고 있었다. 머리엔 쩡- 하는 울림이 계속되었고 이 순간이 정지된 듯 그의 행동이 느릿하게만 보였다.
“홍주씨.”
“사실이군요. 술 취한 여자랑 같이 있느라 힘드셨겠어요.”
털썩. 회색 가루에 가득 쌓인 곳에 떨어진 빨간 사탕. 온통 재로 덮혀버린다. 내 기분이 그랬다. 털어버릴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려요. 사실은 오늘 이 자리도 사과하러 나온 자리에요.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나직이 잘못했다는 말만 되뇌었다. 그 말밖에는 그에게 할 말이 없었다. 그를 오해하고 의심하고 나의 잘못도 모른 채.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사실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무턱대고 자신의 추측만을 믿고 행동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신도 상처를 입었던 일었던 일이 있었다. 같은 실수가 반복된 것이었다. 특히 이번 일에선 자책감이 심하게 들었다. 난 늘 왜 이럴까?
“홍주씨, 사실은 저도 미안하단 말 하고 싶었어요. 난 우리가 친해졌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홍주씨에게 섭섭한 생각이 들더군요.”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홍주씨 사과 받기 전에 제가 먼저 사과하고 싶어요. 제 사과 받아주실래요?”
그가 화해의 손길을 먼저 보내고 있었다. 난 잡고 싶었다.
“그럼요. 다 제 잘못인 걸요. 저도 죄송해요.”
“이제 서로 화해를 한 셈인가요? 죄송하다고 하셨으니 부탁 하나 하겠습니다. 도움을 받고 싶은 일이 있어요.”
“어떤 일인가요?”
“저번 하양주류 사건말입니다. 전 그 일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희 회사에 정보를 주는 첩자가 있다고 생각해요. 서서히 정보를 빼주고 있는 것 같아요. 회사를 위해서 그리고 나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그 사람을 꼭 내 손으로 잡고 싶어요. 도와주실래요?”
내부첩자라니. 회사 사람들 모두 좋게만 보이는데. 선뜻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그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 않고는 제품 이름과 컨셉, 광고까지 같을 수는 없을 테니까.
“예. 돕겠어요.”
화해를 하게 될 거라는 기대도 크지 않았는데 긴밀한 일까지 함께 하게 되다니. 그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그의 차를 두고 내 차를 이용해 그가 집에 데려다 주었다. 그는 차에서 내리기 전 내게 말했다.
“그날 일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을 겁니다.”
“알고 있어요. 이젠 믿어요.”
“사람들은 절대 모르는 일이 되겠죠. 그런데 그 일 말입니다.”
“예?”
“저도 모르는 일처럼 덮어야 하는 겁니까?”
“······.”
“잊고 싶지 않거든요. 아침까지의 일.”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창피했다. 분명 내가 그의 가슴에 먼저 파고들었다고 했는데 그 일까지 기억하는 건 원치 않았다. 그렇다고 그것만 지워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건 찬영씨 마음이죠.”
적절한 대답을 했다고 생각하며 돌아서는 내 등 뒤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홍주씨, 귀여웠어요!”
돌아봤을 때는 벌써 멀리 뛰어가고 있는 모습만 보였다. 귀여웠어요, 귀여웠어요. 마치 메아리처럼 그 말이 머릿속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그 후 일주일 찬영씨와는 가끔 저녁도 함께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구도 사귀자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연인과 시간을 보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은근히 주말 데이트를 기대했지만 그는 지방에 술을 담그러 간다고 했고 혼자 조용히 주말을 보내게 되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카페? 그녀가 고개를 가로 젓는다. 브라질 사람은 미신을 믿어요.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다시 만나면 안돼요. 순환이 마감되어 모든 것이 끝날 수도 있으니까.
- 파울로 코엘료의 [11분] 중
그를 처음 만난 곳은 매일 출근하는 사무실이었다. 그 날 처음 출근한 3명의 신입사원 중 가장 키가 큰 남자가 그였고 처음 본 순간 남성적 매력을 물씬 풍기는 그에게 끌리기 시작했다. 브라질의 미신대로라면 우리는 처음 만난 곳에서 날마다 만나고 있는 셈이었다.
‘우리가 결국 헤어지게 되는 건가?’
대여기간이 하루 남은 책을 억지로 보고 있던 내게 그 글귀는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것이어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애 하냐?]
역시나 연미의 음성에선 무뚝뚝함이 흘렀다. 남자 앞에서는 대변신을 하는 연미였지만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어조가 늘 같은 힘없는 목소리였다.
“그런 건 아닌데 좀 비슷하긴 해.”
[그래서 항상 널널함을 못 이겨 하루가 멀다하고 전화하던 네가 일주일동안 잠잠했구나.]
“내가 언제 전화를 많이 했다고 그래?”
[너 그랬어. 남자는 쓸만하고?]
“쓸만하다니?”
[일단 덩치가 좋아야지. 그리고 네 성격을 받아줄 수 있는 남자냐?]
“응. 성격은 좋아. 인정이 많고 항상 잘 챙겨줘.”
[그럼 된 거지.]
연미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의 수다는 이렇게 5분이 멀다하고 뚝뚝 끊어지기 일쑤였지만 누구하나 먼저 전화를 끊는 법은 없었다. 침묵도 우리에겐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연미야? 우리 집 안 올래?”
[니네 집 비었냐? 피자 사주면 가고. 아니면 안 갈래. 마감 후 쉬는 피 같은 토요일이라서.]
“알았어. 와.”
추리닝 바람으로 30분 만에 홍주의 집에 도착한 연미는 명색이 잡지사 기자였다. 그것도 잘 나가는 여성지의 패션담당이었다. 하지만 동네에서만큼은 나름의 패션 철학이 있는지 추리닝을 고집했고, 그것이 퍽 잘 어울리기는 했다. 무뚝뚝함이 넘치는 연미가 어떻게 바쁜 일을 해내는지 항상 그것이 의문이었다. 하긴 그녀가 담당했다는 패션화보를 보면 늘 모델들은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면 나름대로 통하는 게 있구나 싶긴 했다.
“정말 미치겠다. 나 변태니? 하루에도 몇 시간은 벗은 몸을 상상하고 있다니까. 정신 병원이라도 가봐야 하는 걸까?”
이상할 정도로 질긴 9,900원짜리 피자를 씹으며 내가 말했다.
“그랬으면 난 중학교 때 정신병원 갔다. 뭔 피자가 이렇게 질겨? 피자가 아니라 껌인데. 옛날에 하드 먹고 막대기 씹는 아이스크림 있었잖아. 그것처럼 피자 위를 발라서 먹고 빵은 껌으로 씹으라는 건가? 새롭네, 완전히.”
“질기긴 하다.”
“맞아, 우리 목숨처럼 질긴 피자야.”
의미 없는 수다가 마음을 가볍게 해주고 있었다.
“어디 홍주 옷장 좀 볼까? 그래도 밦 값은 해야지. 남자가 귀여운 스타일을 좋아한다고? 내가 옷 좀 골라줄게.”
“진짜야? 고마워, 연미!”
“연애하더니 성질 버렸네. 저리 가!”
연미는 목에 매달리며 우정을 과시하던 나를 밀쳐내고 장롱문을 열었다.
“야하. 대단하다, 대단해. 어떻게 옷이 죄다 검은 색이야? 넌 옷도 안사냐? 이건 우리 고등학교 2학년 때 산 옷이잖아. 옷장이 아니라 완전 골동품 수집소 같애. 추억의 영화 소품 담당해도 되겠다, 너.”
“나도 이번에 알았어. 내가 검은 옷도 사 모은 걸 말이야.”
“옷이 날개지. 그 남자 키 작고 귀여운 스타일 좋아한다면서? 키야 줄일 수 없으니 귀엽기는 해야 할 텐데 너 걱정이다. 이러다 10일 만에 차이는 거 아냐? 남자들이 예쁜 여자 보면 선녀 같다고 하지? 그게 다 옷 빨이야. 속 다 비치고 하늘하늘한 옷 입으면 다 선녀처럼 보이는 거지. 남자들은 그걸 몰라요. 너도 조만간 귀여워질 수 있어. 근데 좀 힘들겠다. 이 옷으론.”
“근데 갑자기 스타일 바꾸는 거 그거 좀 자존심 상하는 거 아니니? 각자 스타일이라는 게 있는 건데 남자한테 맞춰야한다는 거 그건 좀 그래. 그 남자도 우습게보지 않을까 걱정되고.”
“자존심 좀 상하면 어떠냐? 그거 별 거 아니야. 난 그거 있었으면 벌써 자살 12번은 했다. 매일 상사들한테 욕먹지, 매달 싸이코 독자들한테 테러당하지. 자존심 버리니까 아주 살기 편해. 괜히 튕기다 채이지 말고 그냥 스타일 바꿔.”
“어울릴까?”
“일단 좀 보자. 이거부터 입어봐.”
연미가 고른 옷은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추석에 입으라고 사다주신 분홍색 블라우스였다. 레이스가 조금 달리긴 했지만 단정한 스타일이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연미에게 물었다.
“어때?”
“세상에! 대단하다, 너.”
과장된 감탄사에 잠시 으쓱해졌다.
“내가 여러 사람 옷 입은 것 봤지만 너처럼 분홍색과 레이스가 안 어울리는 여자는 처음이야! 그리고 달려있는 그 리본은 너와 융합되지 못하고 완전히 따로 노는데.”
“그 정도야?”
“우리 남자 모델들은 분홍색도 잘 어울리던데. 어쩜 넌.”
“역시 난 귀여움이 안 되는 걸까?”
“방법이 있겠지, 생각해보자고.”
대책회의 끝에 찾은 곳은 머리를 잘한다고 소문난 미용실이었다. 연미덕에 저렴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어서 함께 머리를 하기로 했다.
“원장님, 최대한 귀엽게요! 귀엽게 안 되면 소문 안 좋게 낼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연미의 거듭된 부탁에 원장은 자신이 있다는 표정으로 웃어주었다.
나는 긴 생머리를 어깨에도 미치지 않을 정도로 짧게 자르고 색도 밝은 갈색으로 바꾸었다. 머리가 가벼워진 느낌은 좋았지만 마치 앞니가 빠진 것처럼 허전하기도 했다.
“너 변신 좀 했다. 내가 자랑스러워.”
연미는 성공했다며 좋아했고, 어색했지만 거울 속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귀여운 스타일의 옷을 몇 벌 산 무리한 쇼핑 후 돌아오는 길에 연미가 말했다.
“넌 큐트 걸이야! 이 말을 명심해.” 연미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자기 최면이 중요하다고. 얼굴이 예쁜데도 예쁜 척 안하는 여자는 남자들이 예쁘게 봐주지 않아. 그런 대부분의 여자가 여자들 사이에서만 예쁜 여자야. 소개팅이라도 시켜주면 남자들은 걔가 뭐 예뻐, 하는 여자들 있잖아. 자신이 귀엽다고 생각하면 남들도 그렇게 봐준다고. 그리고 너 옷 살 일 있음 꼭 나랑 같이 가. 귀여운 옷 고르라니까 멜빵바지를 고르다니 기절하는 줄 알았다, 야.”
연미가 웃으며 말했다.
“왜 멜빵바지가 어때서?”
“넌 키가 크잖아.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건.”
나는 이런 옷들이 어울릴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쇼핑백을 내려다보았다.
“넌 이미 귀여워졌어, 친구.”
내 걱정을 알았는지 연미가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나는 쇼핑한 물건보다 좋은 친구를 두었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든든해졌다.
***
일요일은 친구 준지와 함께했다. 준지는 꽤 있는 집 딸이었지만 아버지가 국회의원선거에서 세 번이나 낙선을 한 바람에 졸지에 아주 평범한 집 딸이 되어야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고생을 모르고 자란 고운 자태를 갖고 있었고 항상 밝은 그녀의 주변엔 늘 사람들이 많았다. 오늘은 특별히 애교 많은 그녀가 특별강의를 자처해 우리 집을 찾은 것이었다.
“유들유들 작전!”
준지가 말한 유들유들 작전이란 고개를 비스듬히 콧소리를 섞어 말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었다. 침대 위에서 시작된 강의는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유들유들이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왠지 뻔뻔함이 생각나는 걸.”
“회사에서 네 별명이 뭐라고 했지?”
“대리석.”
“내가 너랑 같은 회사에 다녔다면 말이야, 널 북어라고 불렀을 거야. 이름이 마음에 들지않는단 핑계대지 말고 받을래, 말래?”
“그래도 뻔뻔함이 자꾸 생각나는 걸.”
“뻔뻔함이라 해두자. 그래도 뻣뻣보다는 나을 거야.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긴다 몰라? 사회생활을 할 때 여자라면 익혀두면 유용한 거라고. 유들유들이라 함은 단지 콧소리로 말하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냐. 포근한 어머니 품을 포함하는 말이라고.”
“일단 들어보자.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음. 장황하게 설명하기보다 상황적 실습을 해보기로 하자. 남자친구가 집 앞에서 널 기다린다고 했어. 그래서 넌 나갔지. 근데 너한테 주려고 선물을 가져왔어. 손에 들고 있고 아직 주지는 않았단 말이야. 그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1번 평소대로 인사한다. 2번 선물을 못 본 척 한다. 3번 선물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4번 뭐냐고 묻는다.”
“글쎄. 선물을 달라는 건 없어? 난 2번 할래. 무슨 말이든 먼저 아는 척 하는 건 창피한 것 같아.”
“이 뻣뻣아. 4번까지 답은 없어. 2번은 그 중에 가장 좋지 않은 거고. 그럴 땐 말이야. 팔짱을 끼면서 ‘자기야, 그 선물 나주는 거야?’하고 있는 힘껏 콧소리를 내야 하는 거라고.”
“너무 노골적이다. 선물을 무척 밝히는 여자 같잖아.”
“남자야 여자 기쁘라고 선물 가져온 건데 선물에 관심가지면 더 기분이 좋지. 너처럼 못 본 척하면 남자도 말을 꺼내기 어려운 거라고.”
“이게 수업이야? 좀 별로다.”
“시끄럽고. 두 번째 상황이야. 차 안에 남자랑 단 둘이 있다. 아주 조용해. 그런데 남자가 방귀를 뀐 거야. 그럴 땐 뭐라고 해야 할까?”
“야야. 그런 것도 연습해야 하는 거야? 너무 지저분하잖아.”
“바보야. 데이트 할 때 이런 상황이 가장 당황스러운 거라고. 나중에 나한테 고마워할 걸.”
“글쎄. 그런 상황이 있을지 모르겠다. 보기는 안 줘?”
“응. 이번엔 보기가 없어.”
“아무래도 남자가 무안할 테니까 모르는 척 한다. 아니야, 아니야. 모르는 척은 답이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난 그렇게 할래. 아는 척 하는 건 아무래도 이상해.”
“땡. 이번에도 틀렸어. 그럴 땐 남자한테 안기면서 ‘우리 자기는 방귀쟁이야. 홍주는 그런 자기가 너무 귀엽다’ 하고 애교 있게 말해줘야 해. 콧소리를 한껏 실어서 상대방이 무안하지 않게.”
“세상에! 그게 지구의 언어란 말이야? 아니, 세상 여자들이 그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 거야?”
“넌 진짜 세상 편하게 살았지. 그러니까 여태껏 변변한 남자 친구가 없었던 거라고.”
“아무리 그래도 말도 안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
“있잖아. 나랑 연미.”
“연미까지? 진짜 싫다, 싫어.”
유들유들 강의는 밤이 새도록 계속되었지만 특별히 머릿속에 남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주말이 끝나고 그를 볼 수 있다는 설렘이 나를 기쁘게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