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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칙사랑 - 05. 날 싫어하는 여자

나비 |2004.12.02 22:12
조회 3,033 |추천 0

나** 반칙사랑 - 05. 날 싫어하는 여자


월요일. 거울 속 내 모습은 부산스러웠다. 아니, 거울 속 내 모습은 긴장한 채로 뻣뻣이 서있었지만 마음이 부산했던 것이다.


‘머리색이 이거 외국인 수준 아니야? 너무 밝아서 얼굴이 더 칙칙해 보이는 것 같은데. 그건 그렇고 이 녹색 정장은 아무래도 지나쳐.’


녹색과 연두색이 섞인 블라우스와 녹색 치마는 빈대떡 위에 올려진 오이피클처럼 나와는 어울리지 않아보였다. 분홍색이 어울리지 않아서라지만 녹색을 권해준 연미에 대해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 행복을 순순히 빌어줄 친구가 아닌데. 계속 연미의 웃음이 생각났다. 내가 비웃음을 당할 것을 상상하는 듯한 기분 나쁜 웃음이.


전날 수면부족으로 몽롱해진 정신이었지만 찬영씨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꽤 긴장된 마음으로 출근길에 올랐다. 차 안에서 바하의 골든베르그 연주곡을 들을 때만해도 차분해지는가 싶었는데 회사에 도착하고 보니 더 긴장이 되는 것이었다. 학창시절 노래 시험을 볼 때 느꼈던 긴장보다도 강도가 높았다. 이제 내 순서가 2번째로 다가온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이었다.


‘날 보고 그가 뭐라고 할까? 너무 귀엽다고 노골적으로 칭찬을? 으흐흐. 그럴 땐 뭐라고 해야 하지? 그런 말 하다니 부끄럽잖아요, 이렇게? 아! 어제 준지 이야기는 머리에 남은 게 하나도 없단 말야.’


하지만 내게 감탄의 눈길을 보내야 하는 그는 예쁜 여직원 두 명에게 둘러싸여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칼라만 흰색인 분홍색 와이셔츠를 입은 그는 무척 화사하고 멋져 보였지만 다른 여자에게 웃음을 흘리는 그가 예쁘게 보일 리가 없었다.


“아침부터 모여들 계시네요.”


한마디 던지며 그들을 지나쳤다.


“아직 업무시간 전이니까요.”

“가자, 얘.”


물론 의도대로 여직원들은 업무시간도 아닌데 감시야, 하는 표정으로 흩어져 버렸지만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당신 때문에 월요일 아침이 이게 뭐냐고. 아침부터 시비로 시작하다니 말이야.


‘더 나쁘게 보일 수도 없을 정도야.’


체념한 나는 자리로 가 앉았다. 새 거래처인 주류 취급점에 보낼 샘플을 확인하기위해 창고에 들어간 나는 또 야릇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함께 누웠던 박스는 치워져 있었지만 대부분이 그 날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처음 앉았던 박스에 멍하니 앉아 그 때의 일을 떠올려보았다. 평소 이야기할 기회가 없던 그는 그저 잘 웃고 사람이라고 생각되었지만 그날의 그는 지나치게 냉정했었다.


‘위기에 강한 남자란 뜻인가? 저 곳에 누워있었지.’


누웠던 곳을 그릴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떠올랐다. 부드러운 감으로 만들었을 것 같은 연회색의 정장바지와 고급스러운 검은색 벨트도 생각났다. 바닥에 깔려있던 황색의 박스도 깨끗한 피부를 돋보이게 하는 소품처럼 보였었다. 이 옷도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였다고요. 그런 생각을 하니 내 자신이 초라하게 여겨졌고 조금은 쓸쓸해졌다.

그 때 창고로 조용히 들어온 건 바로 그였다. 마치 내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 놀라지도 않고 조용히 옆으로 다가왔다.


“못 보던 옷이네요?”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거지? 유들유들 강의에 따르면 코가 멍멍한 상태의 소리로 ‘맘에 들어, 자기 보여주려고 입은 옷인데’가 정답이었지만 그런 말은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사이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내가 뭐 옷이 없는 줄 알아요?”

“아직 춥지 않습니까, 그런 옷은?”

“아니요. 전혀 춥지 않아요. 옷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보죠?”


그랬다. 연미에게는 연애 비슷한 걸 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대화는 늘상 이런 식이었다. 서로 틱틱거리고 비웃고. 조용히 밥을 먹는 일도 없었으며 분위기 있게 커피를 마시는 일도 없었다. 그저 우리는 서로를 조롱하기에 바빴다.


“어디서 본 옷 같기도 한데. 아! 동생 집 강아지가 입고 있던 옷이랑 색깔이 똑같네요.”

“지금 내 옷이 강아지 옷 같다는 건가요?”

“그런 말이 아니죠. 색깔이 그렇다고요.”


찬영씨는 내가 흥분한 게 재미있다는 듯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저 인간은 날 놀리는데 취미를 붙인 게 분명해.


“홍주씨는 녹색보다는 베이지 색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옷 한 벌이나 사주시고 말씀하시죠. 그래야 남의 옷에 왈가왈부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가만히 보니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네요. 아주 좋아요. 홍주씨 오늘 예쁘네. 아주 예뻐.”


찬영씨는 일부러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당황한 나는 표정관리도 못한 채 서 있었다.


“저, 저기여!”

“나이가 몇 갠데 이렇게 귀엽게 굴어요?”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고, 나는 더욱 당황스러웠다.


“예뻐요. 진짜에요.”


그는 웃음을 띤 얼굴로 내 어깨를 툭 치더니 창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제서야 그에게 당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예쁘대. 진짜로 예쁘대.’


사랑에 눈 먼 나는 당했다는 생각은 금세 잊고 그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지고 말았다. 적응이 되지 않는 옷에 신경이 쓰인 나는 자연스레 거울을 보기위해 화장실 들락거렸고  자꾸 회사 동료인 귀민과 마주치게 되었다.


“정대리님, 오늘 어디 가시나봐요?”

“가긴요. 가봤자 거래처죠.”


귀민도 거울을 보는 일에 열심이었다. 소매에 앙증맞은 주름이 잡혀있는 노란색 정장은 4월과 딱 맞아떨어지는 옷이었다. 4월이 아닌 다른 달에 입는 것은 연초에 산타 복장을 입는 것처럼 어색할 정도였다. 같은 색 치마와 작은 꽃무늬가 있는 스타킹까지  귀여운 옷이란 이런 거야, 라고 말하고 있는 듯 했다. 4월에 딱 맞는 귀여운 옷은 아직 내 옷장에는 없었다. 내게 4월이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귀민씨도 어디 가세요?”

“소개팅이요. 하고 싶지 않다는데 친구가 자꾸만 졸라서요. 작년에 산 옷이라 그런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예.”


대화를 피하고 싶어 목례를 하고서 화장실을 나왔다. 회사에서는 지독히도 말을 아끼고 있는 나였지만 귀민에게는 왠지 말을 더 하기가 어려웠다. 나이는 동갑이었지만 찬영과 입사동기여서 나에게는 1년 후배 격이었다. 같은 여자면서 동갑 선후배 사이는 만나도 껄그러운 소리가 날 것만 같아 더 피하게 됐었다.


그에게 퇴근 후 만나자는 말이 없어 애가 타는 가운데 점점 퇴근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이 다 되어서 홍주에게 거래처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 연락을 포기하고 있던 주류 매장에서 일단 이강주를 다섯 병만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한 박스도 아니고 다섯 병이라니. 귀찮은 주문이었지만 업체의 요구대로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껄그러운 귀민과 동행까지 해야 된 것은 매우 짜증스런 일이었다. 운전은 내가 하고 귀민은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아, 졸리다.”


차가 출발하기도 전에 귀민은 하품을 해댔다. 동행하고 싶지 않았다는 표현 같아 여자의 하품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졸리면 자요. 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

“그럴 수 있나요? 조수석에선 안 자는 게 예의라면서요? 만약에 운전자가 졸면 나만 손해니까 어쩔 수 없죠.”


공격적인 말투는 뜻밖이어서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내가 피하는 걸 알았을까? 나는 이 참에 친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정대리님은 애인 없죠?”

“없어요. 나 애인 없다는 건 회사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나 봐요?”

“다 알죠. 사장님 딸이라니까 다들 특별하게 보는 건 당연하잖아요. 대리님은 키도 키고 예쁜데 왜 애인이 없을까 다들 이상하게 여기고 있어요.”

“글쎄요. 저에게 문제가 있나보죠.”

“정대리님 별명이 뭔지 알아요? 회사에서.”

“알아요.”

“아시네요. 말도 없고 너무 차가워서 대리석 같다고 하더군요. 성격이 그래서 연애를 못한다고는 생각 안 해봤어요?”

“원래 말이 많은 편인데 아버지 회사라 조심하는 것뿐이에요. 그런 오해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나는 운전대를 꽉 쥐며 말했다. 참자, 참아.


“역시 특권의식이 있구나. 그럴 줄 알았어요. 회사가 작아도 사장님은 사장님이니까.”

“그쪽도 나랑 동갑인데 남자 친구 없잖아요? 귀민씨한테도 문제가 있는 건가요?”

“아니에요. 전 있어요. 이 나이에 없는 게 이상한 거죠. 얼마 전부터 사귀게 된 사람 있어요.”

“아까 소개팅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건 친구가 졸라서 억지로 나가는 거고요.” 


‘누군지 몰라도 속고 있겠군. 귀여운 맛에 만나고 있겠지만 나중 되면 고생 좀 하겠네.’


“그 사람이 잘해줘요?”

“그럼요. 전 여자를 떠받드는 남자가 아니면 만날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대리님도 그렇죠? 얼굴이 예쁘니까. 예쁜 애들은 나보다 더하더라고요.”


‘안 친해지길 잘했군.’


나는 대꾸 없이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더 나올지 두려웠고 들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왜 대꾸를 안 해요? 대리님도 그렇지 않냐고 물었는데.”

“글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남자가 정대리님 떠받들어 주면 좋지 않겠어요?”

“글쎄요.”

“그럼 대리님이 남자를 떠받들면서 살 건가요?”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럴 마음이 들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전 누가 누굴 떠받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서로 좋아하면 자연스레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 거고. 받을 때나 줄 때나 행복할 거라 생각하죠.”

“착한 척인 것 같네요, 그 말은.”

“착하게 봐줬다니 고맙네요.”


라디오 볼륨이 커져 있어서 둘은 언성을 높여 말하고 있었다.   


“무슨 잡지 인터뷰 보는 것 같아요. 단 둘이 있는데 이미지 관리할 필요는 없잖아요. 사장 딸이라서 그런가요?”

“이미지 관리 아니에요. 전 연애관이 그렇다고요. 귀민씨 이제 보니 사람을 비꼬는 취미가 있군요. 떠받들어 주는 남자 만나고 싶으면 만나세요. 제가 그걸 보고 비난하지 않으니까.”

“당신이 비난해도 할 건 해요. 여태껏 연애도 못해봤죠? 연애 경험이 없으니 알 턱이 없지. 경험 있는 사람 이야기 할 때 귀 기울일 줄도 알아봐요. 매사에 잘난 척 하지 말고.”

“경험 있는 사람한테 귀 기울이는 사람이 선배한테는 대드는 건 정상이에요?”

“선배 좋아하네. 재수 없기는.”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히 들렸다. 찌릿한 전기자극이 뒤통수로부터 등으로 이어졌다. 내가 귀민을 돌아보자 그녀는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활짝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랩으로 싸여 식품매장에 쭉 진열되어 있는 죽은 생선을 보는 기분을 들게 했다. 투명 막으로 싸여 있는 천진한 웃음. 현실과 분리되어 투명한 막으로 싸여 있는 듯 했다. 만질 수도 홍주의 힘으로도 깰 수 없는 단단한 막. 웃음은 죽은 생선처럼 죽어있었다.


‘저 여자 나를 싫어해. 먼저 시비를 걸고 있었어. 나랑 싸우고 싶었던 거야. 내게 소리를 치고 욕하고 싶었던 거라고. 그런데 왜지? 왜 날 싫어해? 내가 사장 딸이라서? 피해의식 그런 건가?’


고등학교 때도 선생님의 귀여움을 받는 아이들을 무조건적으로 싫어하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살아오면서 자신보다 우위의 사람들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괜한 증오를 품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다. 다른 이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귀민과는 회사에서 말을 나눌 기회도 거의 없었던 것이다. 우리 둘은 표면상 아주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방금 내가 들은 말 맞아요?”

“아마 맞을 걸요. 왜 불쾌해요?”

“······.”

“불쾌했다면 어떻게 할까요? 당장 차에서 내리라고 말하고 싶겠죠? 내릴게요. 나도 별로 동행하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나는 조용히 차를 세웠다.


“회사엔 함께 다녀온 걸로 해주겠죠? 6시까지 회사로 오세요. 저도 그 시간에 맞춰 갈 거니까.”


귀민은 차에서 내리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것처럼 털끝만큼의 미련을 보이지 않고 내렸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는 홍주의 마음을 때렸다. 불쾌한 아픔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가 내린 후 출발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을 멍하게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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