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wi - 07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 다시 오빠를 평생 볼 수 없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어제 그냥 현상 오빠가 결혼이라는 말에 주춤거리는 것에 화가 나 자리에서 일어나 나온 것뿐이었는데 그 것이 헤어짐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나란 애는 왜 이리 무신경할까 하는 생각과 너무 분별없이 행동한 것은 아닐까하는 후회가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마음은 아팠지만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아픈 마음만 잘 다스린다면 그걸로 끝인 거다.
우울한 기분으로 집에 들어섰는데 언니가 잠시 외출했는지 문이 열려있는 상태였다.
‘어, 이상하네.’
이상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나도 흔히 하는 행동이고 하니 별 생각 없이 거실로 들어섰다.
‘어머나!’
분홍 머리에 이은 두 번째 충격.
벌거벗은 큰 언니.
큰 언니가 벌거벗은 채 거실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거실이라는 점은 우리 집 유일한 전화가 있는 곳이라고 이해하려고 했다. 다섯 여자들의 수다 비용과 밤마다 무선 전화기를 두고 벌어지는 싸움을 감당하지 못한 아빠가 거실에 유선 전화 한대만 남기시는 비책을 쓰신 것은 벌써 오래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왜 저런 차림으로? 물론 전신 나체는 아니었다. 그녀의 엉덩이를 감싸고도 한참이 남는 흰색 팬티 한 장이 엉덩이에 걸려 있었다. 늘어진 고무줄이 언니의 허벅지를 한 바퀴 돌고도 남았다.
“제가 불임이에요. 아이 이야기가 나오니 마음이 아프네요.”
또 저 대사는 무엇인가 말인가?
혹시 남자를 떼어내는 중?
남자를 마다하다니 언니가 미쳤나?
아님 진짜로 언니가...?
전화를 마친 언니가 급히 욕실로 직행하는 것을 보니 샤워를 하려고 옷을 벗던 중 전화가 오자 뛰어나온 듯했다. 이로써 다행히 반라의 의문은 풀렸지만 대사가 마음에 걸렸다. 대사만 마음에 걸렸던 것은 아니다. 그녀의 허벅지도 마음에 크게 걸렸다. 뒷모습은 20대든 30대든 별 차이가 없는 법인데도 그녀의 뒷모습은 참 측은하게 보였다. 역시 노처녀들은 뭘 해도 처량해 보인다.
‘그래서 결혼은 일찍 해야 돼. 결혼 낙방생은 되지 말아야지.’
마음속으로 그녀들을 노처녀가 아니라 결혼 낙방생이라 부르고 있었다. 스물여덟부터 치러진 결혼이라는 시험에 번번히 낙방하고 있는 것이라고. 재수, 삼수, 사수 번번이 떨어져 작년 까지 아홉 번을 떨어져 버린 큰 언니. 그러기에 낙방 직후에 맞는 새해는 항상 집안이 초상집 같았다.
‘그나저나 아까 누구랑 통화를 한 걸까?’
궁금함에 언니가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달라붙어 물어보았다.
“언니 아까 그게 무슨 말이야?”
“아까 뭐? 야! 씻고 나왔는데 왜 이렇게 붙어. 너 나갔다 와서 씻지도 않았지?”
“아까 전화 받으면서 한 말. 불임 어쩌구 한 거 말이야.”
“아. 그거.”
언니는 수건으로 머리를 물기를 떨어내며 말했다.
“자꾸 책 사라고 귀찮게 하잖아. 아동용 도서라나.”
“그냥 애 없다고 하면 되지.”
“몇 살이라고 물어서 서른여섯이라고 했더니 당연히 애가 있는 줄 알더라구. 없다고 해도 믿지 않는 눈치라.”
그깟 외판원 전화를 피하면서 자기를 비하하는 거짓말을 하다니.
“언니, 왜 그래?”
“뭐가 또?”
“결혼 안했다고 당당히 말하면 되지. 왜 거짓말을 하다고. 불임이 뭐야. 불임이. 망측하게.”
“일일이 말하는 거 귀찮잖아. 당연히 결혼한 주부인 줄 아니까.”
“그리고 그 팬티는 또 뭐야?”
“뭐?”
“그거 엄마도 꺼잖아. 뭐 좋은 거라고 대를 물려 입어? 그게 우리 집 가보야?”
“와하하하. 미안하다. 가보 너한테 물려줄게. 너한테 안주고 내가 입어 화났냐?”
“뭐가 웃기다고 웃어. 에이, 빨리 결혼을 해서 집을 나가야 저 꼴을 안보지.”
황당해하는 언니를 뒤로 하고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이가 들면 자존심도 없어지는 걸까?
천연덕스럽기도 하지.
하지만 잠시 후 괜히 화를 낸 것이 미안해서 발지압봉과 크림을 들고 슬며시 언니의 방문을 열었다.
“뭐해?”
“...”
대답이 없었다. 맘 상한 연기를 한다.
“언니! 동생이 오늘 발 맛사지 쏜다.”
슬그머니 다가가 언니의 발에 발크림을 발랐다. 언니는 눈을 흘기면서도 뻗은 발을 빼지는 않았다. 내 직업은 발 관리사다. 독일과 일본에서 발관리를 배운 셋째 언니의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이 전부고, 아직 자격증은 없는 상태라 부모님의 찜질방에서 언니의 보조를 해주고 있었다. 언니는 장래를 위해서 외국에 나가 체계적으로 배울 것을 권했지만 돈과 성공 아무것에도 욕심이 없어서인지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만난 애는 어땠어?”
“사귀기에는 좋은 것 같더라. 그냥 그래.”
“너 결혼이 그렇게 하고 싶냐?”
“결혼 하고 싶지. 못하는 것보다 빨리 하는 것이 좋잖아.”
고등학교 때까지는 노처녀 언니들을 보면서도 결혼을 빨리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없었다. 언니들의 삶은 기혼녀들보다 자유롭고 여유로웠다. 그리고 결혼 문제에 대한 조급함없는 그녀들은 당당해 보이기만 했다.
하지만 내가 원하던 대학에 낙방을 해보니 모든 것이 달라보였다. 세상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나 자신이 한없이 작게만 느껴지고 점점 움츠려들고 있었다. 다른 직장을 구하지 않고 부모님 가게에 얹혀 있는 것도 그 이유였다. 그리고 결혼을 서두르게 된 것도 결혼이라는 시험에 계속 떨어지지 않을까하는 걱정에 누구보다도 일찍 시험을 치루고 싶었던 것이다.
“언니도 결혼 하고 싶잖아.”
“결혼이라는 거 좋지. 나쁘게 생각 안해. 그런데 언제 누구랑 하느냐가 중요하잖아. 키위야, 결혼이라는 건 남자랑 데이트하고 각자 집으로 가는데 정말 집에 들어가기 싫다. 매일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럴 때 하면 좋은 거야. 너에게는 그런 남자랑 이라는 말을 어울리겠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사람이랑 같이 살고 싶다하는 생각은 들어야 결혼을 하지.”
“...”
내 어릴 적 기억이지만 큰 언니에게도 같이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남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집에 인사를 하러 온 그들을 집안이 별로라는 이유로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부모님은 돌려보내셨다. 지금은 후회하고 계시지만.
반라의 그녀가 측은해 보였던 건 언니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저 세상 일이 우리의 맘대로 되지 않는 것뿐이다.
모처럼의 휴일도 끝나가고 있었다.
며칠동안 현상 오빠는 오션의 죽돌이가 되었고, 나는 현상 오빠의 기다림을 무시한 채 집에서 언니들과 조용히 휴일을 보냈다. 마음이 흔들려 나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서루 오빠 때문에 참을 수 있었다. 서루 오빠와 다시 만나지는 않았지만 하루에 한두 시간씩 전화 통화를 하며 일단은 좋은 오빠 동생으로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간히 결혼을 일찍 하고 싶다는 말도 비췄고, 현상 오빠와 말끔히 정리 되었다는 이야기도 했으니 이제 관계가 진전되는 것은 시간문제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빠도 결혼 문제가 시급하다고 했으니 반은 성공한 거라 믿으며 계속 작업을 볼 생각이었다.
휴일도 끝나고 다시 영업이 재개되었을 때 일손이 모자르다며 엄마가 밤에 부르셨다. 시간 외 수당을 톡톡히 약속받고 찜질방으로 향했다. 아직 재영업을 시작한지 모르는지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대부분 늦은 시간이라 자는 사람들이 많아 조용했다. 언니들도 밤에 오는 것을 싫어했는데 꼴도 보기 싫은 커플을 봐야한다는 이유가 그 중 하나였다.
“일단 저쪽부터 정리 좀 해.”
엄마의 말대로 정리를 하고 있는데 저 멀리에서 분홍 머리가 눈에 띄었다.
어느 여인의 손을 잡고 잠들어 있는 분홍 머리가.
‘서루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