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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goes on.. No more than..(sad)

renders425 |2004.12.15 11:23
조회 142 |추천 1

0.021kg에 담긴 인생 잔혹 이야기 인간 딜레마의 최후 질량
<21그램>
한눈에 봐도 <21그램>은 '물건'이다. 데뷔작 <아모레스 페로스>에 이어 단 두 편 만에 대가의 호흡까지 이른 멕시코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이 문제작을 통해 삶과 죽음, 인생에 대한 결코 가볍지 않은 통찰에 도달한다.
‘살 수 있는 날이 달랑 한 달 남았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남자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 보자. 임박한 죽음의 징후들로 인해 남아 있는 생의 시간조차 의미를 잃게 된 그 남자는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고통으로 비틀어져 가는 제 육신을 학대하려 들지 모른다. 그도 아니라면 신이 내린 저주스러운 운명을 되씹으며 사망자 클럽에 가입할 날만을 무력하게 기다릴 것이다. 어느 쪽이든, 생존 기간 동안 그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다. 그 남자는 또한 자신을 버린 세상에 더 이상 남길 것이 없다는 이유로 어떤 생산적 활동도 거부하게 될지 모른다. <21그램>의 주인공 폴이 그러하다. 점차 기력이 소진돼 가는 폴에게서 빠져나가고 있는 건 물리적인 생존의 시간만이 아니라 생의 의지다.
--> 지구가 자전하는 이유
소스라치게 놀랄 만한 대반전을 숨기고 있는 건 아니지만 <21그램>에 관한 한, 스토리 정보는 영화 관람에 독이 될 가능성이 크다.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21그램>에서 노린 바, 이 영화를 보면서 누릴 수 있는 쾌락의 절대치는 관객 스스로 복잡하게 얽힌 내러티브를 재구성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본다면 영화가 시작한 지 약 40분이 지나도록 당신은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온전히 파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토막 난 시간들을 재배열하며 흐트러져 있는 이야기 단위들을 수습하는 과정이 다소 더디다 뿐 엄청난 두뇌 게임을 요구하는 건 아니므로 겁먹을 필요까진 없다. 심장 질환으로 한 달 동안 삶의 유예 기간을 갖게 된 수학 교수 폴 리버스(숀 펜)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던 중산층 주부 크리스티나 펙(나오미 와츠), 그리고 어두운 과거를 뉘우치고 ‘주님’에게 귀의한 전과자 출신 잭 조던(베니치오 델 토로)의 운명이 모종의 비극적 사건을 축으로 교직되며 순환하는 이야기라는 것만으로 이 영화에 대한 스토리 정보는 충분하다.
극적이고 고단한 인생 체험을 다루고 있는 <21그램> 이야기는 편치 않은 심정으로 동참해야 하는 게임이다. 인물들이 겪는 사건을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체험하도록 강권하는 영화의 초반부 전개는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전작 <아모레스 페로스>에서 보여 줬듯이 시간의 교차와 생략은 이냐리투식 내러티브 구조의 근간이다. 플래시백과 플래시포워드가 무작위적으로 빈발하며 시간의 연대기는 물론,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친절한 단서나 해설을 곁들이지 않는다. 처음 몇 분간은 모든 배우들이 1인 2역을 하는 괴이한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다. 미처 앞의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새로운 데이터가 첨가되는 까닭에 그 때마다 관객에겐 먼저 지나간 장면들 혹은 이어질 장면들과의 전후 맥락을 부지런히 헤아려야 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단자화된 에피소드들을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배열하는 이 같은 서사 방식은 매우 전략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인간 세계의 본질에 관한 심금을 울리는 전언으로 채워진 이 인생 전서가 주는 묵직한 감동을 나누고 싶다면 얼마간의 혼란을 감수하고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살고 그들의 친구가 돼야만 한다.
쿠엔틴 타란티노나 브라이언 싱어, 가스파 노에, 크리스토퍼 놀런까지 직소(jigsaw) 퍼즐을 풀 듯 시간과 사건의 순서, 인물들 간의 관계를 추측하면서 이야기를 추론하게 하는 화법은 근년의 영화 서사에 있어 어떤 유행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21그램>은 앞의 작품들과 조금 궤를 달리한다. 전자가 순수하게 이야기하기의 즐거움, 즉 유희적인 방식으로 시간의 미스터리를 만들어냈다면 이냐리투는 ‘이성’이 아닌 ‘정감’에 의해 추동되는 내러티브를 창조하기 위해 이 같은 방식을 도입한다. “난 논리보다 감정에 호소하고 싶다. 예술은 머리로 다 파악하기 힘든 진실에 대해 말해야 한다. 난 차가운 예술을 경멸한다”고 한 이냐리투의 말처럼 <21그램>은 플롯에 의해 움직이는 내러티브보다 인물들의 내면에 담긴 분노나 열정 따위의 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내러티브를 가진다. 무질서하게 이어 붙인 듯한 이 영화의 편집에 있어서 단 하나의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감정의 흐름’이다. <아모레스 페로스>에 이어 이냐리투는 다시 한번 자신의 영화가 어떻게 지적이기보다 감정적이 될 수 있는가(이는 관객의 영화 관람에도 동일한 경험적 효과를 유발한다)를 시험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21그램>에서 세 인물의 관계가 얽히는 것보다 더욱 미스터리한 것은 이후의 상황들이 야기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던 시간이다. 급정거하는 자동차의 브레이크 소리로만 처리되는 이 비극은 어떻게 발생한 것일까? 직장에서 해고당한 잭이 음주 운전을 했기 때문에? 아니면, 비둘기의 꽁무니를 쫓던 크리스티나의 두 딸이 부주의했기때문에? 나중에 사건 현장에 다시 온 크리스티나는 그곳에서 어떤 사건의 징후도 발견하지 못한다. 반복적으로 교통사고가 보여지는 <아모레스 페로스>와는 달리 이냐리투는 사고의 순간을 결코 보여 주지 않는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장소에서 벌어진 사건, 인물들 간의 관계의 결절점으로 작용하는 이 재앙은 흡사 하늘에서 ‘떨어진 사건’처럼 보인다. 사고의 시간을 보여 주지 않는 까닭은 그것이 ‘상황이 빚어낸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누구나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저항할 수 없이 주어진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진술 방식은 <21그램>이 세계의 거대한 순환 법칙을 따른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냐리투는 “인간은 수없이 많은 우연과 관계들 속에 있다. 분리돼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은 긴밀하게 연결돼 있으며 우연으로 보이는 사건들은 어떤 필연의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이런 세계관을 몸소 증명하는 한 장면을 보자. 심장 기증자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크리스티나를 미행하던 폴은 그녀와 처음 독대한 자리에서 베네줄리안이라는 프랑스 시인이 쓴 시의 한 구절을 들려준다. '우리가 가까워지도록 지구는 자전한다, 우리가 같은 꿈을 꿀 때까지… 지구는 자신과 우리를 위해 자전한다.' 이전까지 이무런 관계도 아니었던 두 사람은 이식된 '심장(생명)'을 매개로 가까워진다. 세상은 그처럼 설명이 불가능한 '영향'과 '관계'에 의해 굴러간다. 두 사람이 만나기까진 허다하게 많은 사건이 있었으며 오랜 시간의 관찰과 기다림이 존재한다. 폴의 말마따나 지구가 자전하는 것에 비유될 이 수학적 진리는 <21그램>을 관통하는 인간관계의 본질이다.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
21그램>은 정신적 갱생의 기회를 얻은 남자와 육체적 소생의 기회를 얻은 남자의 운명이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엇갈리는 이야기다. 두 남자는 서로에게 타자이지만 정체성을 위협하는 실존적 질문에 휩싸여 번민한다. 기묘하게 대구를 이루는 두 남자의 운명을 통해 <21그램>이 던지는 질문들은 꽤 진중하다. 그건 현대 영화가 점점 더 멀리하는 질문들, 너무 본질적이고 거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는 질문들이다. 신이 있다면 왜 그는 악마가 사물을 주관하도록 내버려두는가?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삶과 죽음은 어떻게 연결돼 있는가? 죄의식에 맞서는 인간의 대응은 무엇이고 속죄는 어떻게 이뤄지는가? 어떻게 우리는 엄청난 상실의 경험 뒤에 희망을 발견하고 생존할 수 있는가?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21그램>은 이처럼 간단히 결론내릴 수 없는 질문들에 대해 묵상을 권한다. 모든 인물들에 대한 애정(설사 그가 한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한 범죄자일지라도)은 그들이 이 같은 인류 보편의 문제를 떠안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영화 곳곳에서 드러나는 ‘중독’에 대한 가치 중립적 태도 역시 동일한 맥락으로 읽힌다. 여기서 중독은 생의 유한성을 망각하려는 몸부림, 죽음의두려움을 잊기 위한 방어 기제다. 인물들은 종교(잭)와 마약(크리스티나), 임신(메리), 알코올, 담배(폴)에 중독된다.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는 제거해 버리고 싶은 열외의 순간이 있으며 그것은 현실을 잊게 만드는 중독의 기제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성취된다.
이냐리투의 영화는 늘 윤리적인 이슈를 던진다. 자수할 것인가 말 것인가, 아버지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 복수할 것인가 말 것인가, 죽을 수 있는가 없는가 등 선택의 순간에 내려야만 하는 결정에 의해 윤리적인 태도가 결정된다. 이를 위해 이냐리투는 대립하는 인물들을 배치한다. 누구도 선하거나 악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단지 거대한 환경의 우주 안에서 부유할 뿐”이라고 한 이냐리투의 말처럼 이들을 가름하는 기준은 ‘가치 판단’을 따르지 않는다. 영화는 그저 이들이 처한 곤경과 약함, 힘을 보여 줄 뿐이다. 개인차를 전제하지 않은 채 특정한 환경에 던져진 인간만이 세계의 보편적 진실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21그램>은 죽은 자들이 산 자들에게 미치는 영향, 혹은 과거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을 파고든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죽음과 가깝거나 그들과 가까운 사람들은 죽는다. 새롭게 변하고자 하는 그들의 인생을 곁 길로 새게 하고 굴절시키는 것은 죽음이다. 즉, 죽음을 통해 그들은 새로운 삶의 태도에 도달한다. 저마다의 이유로 새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지만 여의치 않은 폴과 크리스티나, 잭의 기구한 운명이 그러하다. 세 인물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트라이앵글을 전진시키는 건 폴이다. 폴의 결혼 생활은 파탄 직전에 몰렸으며 삶의 임차 기간을 얻은 후 그의 모럴은 새로운 우선 순위를 찾게 된다. 내게 심장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 이식 수술 후 폴은 에테르병 속에 담긴 자신의 부패한 심장을 보며 “이게 내 심장이야? 죄인이군”이라고 말한다. 이 ‘심장에 대한 죄의식’은 새롭게 설정된 윤리적인 과업으로 그를 이끈다. 생명을 얻게 된 순간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폴은 의사로부터 두 번째 죽음의 가능성에 대한 언질을 받는다. 그 후 폴의 심장은 죽음을 동경한다.
---->구상과 추상의 변증법
미국 매사추세츠 병원장이었던 윌리엄 맥두걸 박사는 죽을 때 인간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영혼의 무게일 거라는 가설을 세웠다. ‘21그램’이라는 영화 제목에는 이처럼 구체성(물질성)과 추상성(관념성)을 결합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시나리오를 쓴 기예르모 아리아가는 한 과학 잡지에서 이 말을 보았고 감독 이냐리투는 한 프랑스 소설에서 ‘죽음의 순간, 인간은 21그램을 잃는다’는 문장을 발견했다. ‘21그램’이라는 물리적이고 계량적인 수치를 형이상학적인 무게로 치환하는 추상화의 과정은 다분히 철학적이다. 5센트 동전 5개, 벌새 한 마리, 초콜릿 바 한 개의 무게, 혹은 삶의 무게, 상실감의 무게, 죽음의 비용, 죄의식의 무게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21그램’은 여기서 질량적 구체성을 너머 추상적인 의미를 얻는다. 시간의 순서를 비튼 이야기 전개 방식도 같은 맥락에서 읽혀진다. 영화 시작과 함께 던져지는 파편화된 에피소드들을 볼 때까지만 해도 추상화에 머물러 있던 인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구체적인 정황들에 대한 이해로 바뀌며 마침내 인물들의 감정에 동화할 수 있도록 구조화돼 있다. 인물들의 직업적인 배경도 추상화 패턴을 따른다. 폴이 수학 교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의 충격, 어느 모로 보나 범죄자의 냄새를 풍기는 잭이 비행 청소년을 앞에 두고 일장 설교를 늘어놓는 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말끔한 교외 주부와 타락한 마약 중독자 사이를 오가는 크리스티나가 결혼 전 약물 남용으로 치료를 받았다는 것도 의외다. '오른팔을 때리면 왼팔도 내밀라'고 한 성경의 명령을 현실 속에서 곧이곧대로 실천하는 잭의 행위(그는 개구쟁이 아들로부터 한쪽 팔을 맞은 딸에게 반대쪽 팔도 내밀라고 엄하게 명령한다)는 추상화된 규율을 구체화하면서 저지르게 되는 오류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구상과 추상의 통합을 본격적으로 보여 주는 건 영화의 시각적 스타일이다. <21그램>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블리치 바이패스 기법(현상 시 표백 단계를 건너뛰는 기법으로 이때 남게 되는 은 입자가 화면의 채도를 떨어뜨리고, 어둡고 거친 질감의 화면을 만들어낸다)과 핸드헬드 촬영이다. <21그램>의 핸드헬드 촬영은 구체성을 띤 현실감이 어떻게 추상적 인상을 창조하는가를 보여 주는 전범이다. 핸드헬드는 일상적인 보기(viewing)의 패턴을 따르기 때문에 높은 현실감을 전해준다. 그것은 또한 대상의 현재성과 운동성을 기민하게 포착하고 상황의 생생함을 만들어내는 다큐멘터리적 기교로 알려져 있다. <21그램>의 핸드헬드 역시 생동감 넘치는 현실을 포착하지만 그것이 전하는 인상은 매우 추상적이다. 이는 카메라가 사건(구체성)보다 감정(추상성)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배경을 무시한 채 인물들에게 최대한 밀착한 카메라는 그들의 분노와 열패감, 열정, 공포, 절망 따위의 추상적 감정을 담아낸다. 촬영감독 로드리고 프리에토의 탁월한 감각에 대해 이냐리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촬영감독들이 아름다운 이미지를 얻거나 깊은 인상을 남기려고 애쓴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미끈한 이미지보다 사람들의 심장을 건드리기 위해 노력한다.” <아모레스 페로스>에서도 핸드헬드는 쓰였지만 <21그램>에서의 그것은 퍽 다른 느낌을 전해준다. <아모레스 페로스>에서 그것이 가시 돋힌 듯 신경증적인 인상을 만들어냈다면 <21그램>에선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끌어내는 방도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움직이고 흔들리게 한 것은 촬영감독의 손이 아니라 격렬하게 들끓는 인물들의 감정이다. 그만큼 배우의 연기가 중요한 영화인 까닭에 <21그램>의 탁월한 만듦새는 숀 펜, 베니치오 델 토로, 나오미 와츠의 경이적인 연기에 힘입은 바 크다. 가족의 사고 소식을 접했을 때의 크리스티나, 폴이 겨눈 총구 앞에서 오열하는 잭의얼굴을 잡아내는 카메라는 모두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 단지 하나의 관찰자에 머물고 있었던 카메라는 어느 순간 세심한 연기를 따라 요동치는 한편, 지극히 묘사적이고 표현주의적인 순간을 잡아내기도 한다(적청 색조의 하늘을 포착한 두 장면). 이냐리투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유자재로 붓을 휘젓는 화가가 된 것마냥 카메라를 놀린 셈이다. “트라이포드나 크레인, 달리를 인위적인 기교로 생각한다”는 이냐리투는 핸드헬드가 잘 사용됐을 때, 즉 MTV적인 경박함을 배제한 채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에 타이트하게 밀착했을 때, 진정한 리얼리티를 창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리가 사는 세계의 풍경을 포착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죽음과의 투쟁은 태초부터 인류에게 부과된 과업이었다. 시체를 보존하기 위한 고대 이집트의 미라나 중국 황제들이 즐겨 먹었다는 불로장생의 묘약들은 죄다 죽음에 저항하려는 의지의 소산이다. <21그램>의 시나리오 작가 기예르모 아리아가는 이 같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저항이 “자연을 거스르는 부질없는 짓”이라고 말한다. “현대 사회는 점점 더 죽음을 부정한다. 예컨대 슈퍼마켓에 가면 고기는 모두 포장이 돼 있다. 이미 생명줄이 끊어진 생물들은 마치 살아 있는 양 방부 처리된다. 그건 죽음에 대한 부정이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다이어트 코크는 죽음에 대한 부정이다. 늙지 않고 영원히 팽팽한 피부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크리스티나는 존재 이유를 상실한 자신에게 "그래도 삶은 계속된단다"라고 건네는 아버지의 위로를 부정하지만 후일 새로운 삶의 이유를 찾게 된다. 심장 이식을 통해 죽음의 시간을 연장한 폴은 "지금의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라며 정체성 탐험의 두 번째 인생을 꾸려간다. "머리카락 한 올의 움직임도 아시는 주님"이 내린 형벌을 저주하는 잭에게 그의 아내는 "예전에 주님을 몰랐을 때 당신이 좋았어, 주님이 있건 없건 삶은 계속돼"라고 말한다.
삶(존재)과 죽음(비존재)의 관계를 고려할 때 특별히 두 장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새떼들이 날아오르는 도입부 장면과 푸른색으로 무늬가 진 하늘 위로 새들이 추락하는 종반부 장면이 그것이다. 둘은 서로 반사하는 거울의 이미지다. 세 명의 주요 인물들을 소개하는 첫 장면과 이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모이는 클라이맥스 장면 후에 나오는 이 비상과 추락의 이미지는 가장 부조리하고 잔혹한 비극 뒤에도 삶은 소멸하지 않고 이어진다는 걸 보여 준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이 지극히 상투적인 명제는 진리이자 거짓이다. 삶은 계속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죽고자 하는 자에게 삶은 계속되고 생의 의지를 가지고 살기를 열망하는 자에게 죽음은 엄습해오기 때문이다. 임신을 간절히 원하는 폴의 아내 메리(샤를로트 갱스부르)에게 생기지 않던 아이가 희망이 완전히 소진된 듯했던 크리스티나에게 주어지는 걸 보라. 이 불가해한 운명의 장난은살아남은 자가 짊어지게 될 책임, 잔인하지만 동시에 긍정할 수밖에 없는 생존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21그램>은 인간이 실존적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길은 ‘죽음(소멸)을 이기는 생의 의지’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완전한 긍정’이라고 주장한다. '죽어야 사는 남자' 폴은 마침내 죽음을 받아들이고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던 여자' 크리스티나는 새로운 존재의 이유를 찾게 되며 한때 앙망했던 주님을 저주하며 '신을 부정했던 남자' 잭은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괴물의 다리를 연상시키는 호스를 꽂은 채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병자들이 득시글거리는 죽음의 대기실을 박차고 나온 폴은 영생을 통해 초월적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삶의 본질을 인정함으로써 죽음을 초탈하게 되는 것이다. 완전히 절망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장밋빛만도 아닌 이 황량한 승리의 풍경이 ‘21그램’이라는 보잘것없는 무게에 담긴 둔중한 생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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