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친구들과 그의 방까지 찾아가 보았으나 룸메이트 몇만 남아 있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탁 트인 공간이 필요해졌다.
주저없이 기숙사 옥상으로 올라갔다.
"어떻게 할래..."
요즘 들어 기숙사 안에서 술을 자주 마시는 은영이가 술잔을 만지작 거리면서 내게 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차갑게 시선을 거두던 그의 얼굴만 자꾸 떠올랐다.
고갤 저으며 술병을 움켜 쥐었다.
"야야~ 그러다 깬다..."
은영인 내가 술병을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쥐고 있자 이쑤시게로 내 손등을 찔렀다.
그때, 몇 병의 술을 다 마실 때 까지도 입을 열지않던 세내가 그만 들어가자면서 일어섰다.
"어떻게 할건데?"
은영이 물었다.
하지만 세내는 여전히 입을 다문채로 술병을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야~아! 오세내!"
은영은 신경질적으로 세내의 손을 쳤다.
"뭘 고민해~다 죽여버리면 되지."
꽤 아팠을텐데도 내색하지않으며 대꾸하는 세내의 말에 입이 떡 벌어졌다.
"다.다.다.다.다? "
은영의 혀가 꼬였다.
"너 취했어. 그만 가자."
세내는 뭘 그리 놀라냐며 오징어 다리로 나와 은영의 머릴 툭!툭! 건드렸다.
"너네 둘다 바보 아냐? 뭘 그렇게 고민해~끝을 보면 되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OK?"
오징어 다리로 삿대질을 하는 그녀를 보다 얼결에 대답했다.
잘 자라는 인사를 나눈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셋다 잠을 못 이루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어나 복도를 걷다보니 휴게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세내가 먼저 와 있었다.
"결국엔 셋 다 다시 모이게 됐네?"
은영이가 여름 이불을 들고 왔다.
"여기서 다시 정리 해 보자."
커다란 노트를 들어보이며 세내가 말했다.
여름인데도 휴게실 돌 바닥은 굉장히 차가웠다.
우리 셋은 휴게실에 일반 의자 대신 놓여있는 나무 벤치 네 개를 두 개씩 마주 보게 끌어다 붙이고 그 위에 이불을 깔아 냉기를 피했다.
"지연인 분명 미애를 죽였을 거야. 냄새가 나."
속눈썹이 눈을 찌른다며 눈을 비비던 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세내가 뭔가를 적으며 내게 물었다.
"걔가 언제 너랑 미애 뒤를 따라갔댔지?"
"음...우리 과로 와서 미애가 어디 있는지를 물어 본 다음 뒤따라 갔댔어. 왜?"
"걔~ 그거 거짓말이야."
"어?"
세내의 말에 나와 은영이 되물었다.
"내가 애들에게 들었는데 분명 걔가 너희 둘 이야길 하는 것을 듣고 나갔댔어. 한두 명이 본 것도 아니고 그때 경찰 진술 때도 들었던 말이야. 벌써부터 말이 안 맞잖아, 안그래? "
세내는 스크랩 노트에 상황을 차근차근 적어나갔다.
"맞아. 넌 얼굴만 때렸다는데 걘 전신 타박상도 입었지. 지난번 병원에서 보니까 멍이 엄청 많이 들었더라. 이상하잖아."
은영이 세내에게서 연필을 빼앗아 물음표를 그리며 물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아 노트를 내 앞으로 끌어 당겼다.
글씨를 들여다 보던 나는 그날 상황을 말 칸을 만들어 적었다.
"분명 누군가는 그 빗물에 넘어졌어. 근데 그게 미애가 아니라 지연이였을 가능성이 더 크지."
내가 적는 것을 지켜보던 세내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전신 타박상이 그 증거지...안그래?"
"빗물? 아!! 잠깐만..."
세내의 다음 말에 은영이가 휴게실 밖으로 나갔다.
"쟤~ 어디가는거야?"
"글쎄? 화장실?"
잠시 문을 바라보던 세내는 이불 밑으로 발을 집어 넣으며 다음 상황을 적어 나갔다.
"상대방이 미안해...잘못했어...라고 했지?"
"응...근데 얼굴은 못 봤어"
손가락 사이로 연필 돌리는 것을 들여다보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 어지러워."
"뭐? 또 아프니?"
가끔씩 빙빙 도는 물체만 봐도 어지럼증을 느끼는 내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준수 때문에 충격을 받았나 보구나?"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간간히 그를 처음 봤을 때가 파노라마처럼 망막을 어지럽히는 것을 즐겼다.
어지럼증이 있긴해도 약간의 취기 덕분에 머리가 더 맑아졌다.
"또 꿈꿔?"
세내가 나와 같은 자세로 고쳐앉으며 머리칼을 쓸어 올려주었다.
"생각...하고 있어....후~"
"무슨 생각? 그날 상황?"
그녀가 목을 길게 빼고 내 옆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니..."
"그럼?"
다시 물으며 자신의 긴 머리를 틀어 올려 연필로 고정 시켰다.
"준수...처음 봤을 때."
"나원~"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엄지 손가락을 입에 넣으면서 웅얼거렸다.
"아직도 가슴이 설레는데...이렇게 아파죽겠는데..상처를 줘버렸어...독차지 하고 싶은 내 욕심 때문에...하아~"
명치 끝이 답답해져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야야~ 걱정하지 말고 빨리 지연이랑 했던 이야기나 풀어 봐."
급하게 뛰어 들어 오던 은영이가 뭔가를 벤치 밑에 던져 놓으며 말했다.
"그거 먹을 거야?"
세내의 순진한 척 꾸민 목소리에 은영이 소릴질렀다.
"에라~이 인간아~넌 생긴 것은 고상한게 왜 먹을 것은 죽어라고 밝히냐?"
은영은 검은 비닐 봉지를 세내 앞으로 던져 놓으며 그녀와 마주앉았다.
"이게 뭐~여?"
세내가 빠른 손놀림으로 매듭을 풀면서 물었다.
"지연이 샌들, 걔 방에서 가져왔어."
은영이 턱을 치켜들고 승리를 자축하는 사람처럼 대답했다.
"미숙이랑 선미가 지연이 소지품을 호실로 갔다놨대. 그날 다들 다친 지연이랑 미애에게 정신이 팔려서 아무도 안 챙기길래 자기들이 주워 다 놨다더라."
"네가 양동이에 고인 물을 계단에 뿌려놨었다면서?"
"......"
난 대답 대신 샌들을 들었다.
샌들의 연결 고리는 끊어져 있었고 물 묻은 채로 오랫동안 비닐 봉투 안에 들어 있던 탓에 습기로 인한 곰팡이가 생겨있었다.
"그럼 넘어진 것은 지연이네?"
세내가 말했다.
"걔 얼굴이 그렇게 된 것은?"
은영이 샌들을 바닥에 내려 놓으며 물었다.
"얘가 벽에 찍어대니까 늘어졌었댔어. 얘딴에는 정말 죽은 줄 알고 놀라서 자릴 떴는데 그게 지연이였음 샌들 끈이 끊어질 이유가 없지, 안그래?"
"그렇지...그럼 그 인간 얼굴은 왜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세내의 말을 듣던 은영이 다시 물음표를 향해 화살표를 그으며 물었다.
"자작극 아니면 누군가가 더 있었단 얘기지,뭐"
세내는 자신의 조각같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화살표 위에 물음표를 그렸다.
제 3이라는 글자와 함께.
"에에? 제 3?"
은영이 몸을 뒤로 제끼며 물었다.
"안그럼? 야야~ 아무리 자작극이래도 지연이 그것도 여잔데 설마 간도 크게 그 이쁜 얼굴을 스스로 망쳤겠냐? 것두 얼굴 전체를 고쳐야 할 정도로? "
솜씨 좋은 세내가 대답하며 지연의 캐릭터를 재빠르게 그렸다.
그러나 보기좋은 그 그림은 은영의 낙서로 엉망이 되어버렸다.
"야아! 기껏 그렸더니 이게 망쳐놔?"
"이게 무슨 명화라도 되냐? 걔한텐 이것도 가문의 영광이야~영광~"
"다~추리할 때 쓰는거란 말이야~!"
세내가 은영의 머릴 쥐어 박았다.
한참 서로의 손을 때리며 장난치는 두사람을 보며 내가 입을 열었다.
지연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누군가에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만 한다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이번엔 내가 3이라는 숫자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뭐?"
두사람이 동시에 물었다.
"보여야만 한다면...아니 보일 수만 있다면 말이야...안그래?"
내가 물었다.
두사람의 시선이 노트 맨 윗부분을 두드리는 내 손끝에 집중되었다.
"그...사람...?"
은영이 써진 그대로 읽었다.
"어쩜 공범이 아니라 걔가 좋아하는 사람 일수도 있다는 말이야?"
머리 회전이 빠른 세내가 먼저 대꾸했다.
"응, 분명 우리학교 학생이고 기숙사 생활을 한댔어."
내가 덧붙여 적으며 말했다.
"그럼 [그...사람...]이라는 녀석이 실마리겠군?"
세내가 글 위에 짙고 굵은 별을 여러개 그렸다.
그게 누구냐며 은영이 묻자 세내와 난 잠시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람..."
세내가 먼저 말했다.
"아마도 우리 과 학생이겠지...잘 생긴 애들도 많고 부잣집 애들도 많으니까 말이야."
그녀의 말에 은영인 오리처럼 입을 삐쭉거리며 나와 세내를 번갈아 봤다.
"넌 누굴 것 같니?"
세내가 내게 물었다.
잠시 고민이 되었다.
누굴까...
"은영이 넌? 하긴 네 그 돌대가리로는 아무 생각도 없쥐?"
내 대답이 없자 그녀는 계속 입을 삐쭉거리는 은영의 이마를 손끝으로 찌르며 물었다.
"씨이~ 이거 왜이래? 이래뵈도 아까 샌들 가져온 건 나였어~"
두 사람이 티격태격 말싸움을 시작한 소란스러운 틈에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누굴까...누구길래 그렇게 애틋할까...
한 사람의 혼을 빼버릴 만큼 매력적인 사람이 누굴까...
누굴까...
머릿속은 금새 작은 사각형 여러개를 만들어 갖가지 생각을 담기 시작했다.
오른쪽 뇌는 우리 과에서 잘나가는 남학생을...
왼쪽 뇌는 지연의 말투와 행동...그리고 대화 내용을 그렸다.
!!!! 있다..........한사람...
" You touched my life~ With the softness~ in the night. My wish was your command~ Until you ran~ out of lo~ve~"
"저건 또 무슨 노래라냐?"
나도 모르게 지연이 불렀던 노래를 흥얼거리자 세내의 머릴 쥐어 잡고 좌우로 흔들던 은영이가 세내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몰라~ 어디서 많이 듣던 노랜데 제목이 생각 안나네?"
세내가 몸을 일으키며 대꾸했다.
"너희들... 어디서 많이 들은 노래지? 그치?"
내가 물었다.
둘은 일어서는 날 보며 뒤따라 일어났다.
"어디가?"
대답 대신 거기 있으라는 손짓을 하고 내 방으로 갔다.
밤이 깊은 덕에 룸메이트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책상 위 램프를 켜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휴대용 미니 카세트를 찾아냈다.
건전지까지 챙긴 다음 서랍에서 테잎 몇개를 꺼내 다시 휴게실로 갔다.
"들어봐."
테잎들 중 음악 테잎 하나를 추려내 카세트와 함께 내밀었다.
둘은 테잎에 붙어있는 라벨을 읽어 보더니 어깨를 으쓱여 보인 다음 카세트에 넣고 틀었다.
잠시후,
감미로운 음악이 휴게실 안을 가득 채웠다.
[You touched my life~With the softness in the night.
My wish was your command~ Until you ran out of love Tell myself I'm free.
Got the chance of living just for me No need to hurry home~
Now that you're gone Knife, cuts like a knife~
How will I ever heal~ I'm so deeply wounded Knife,
cuts like a knife~You cut away the heart of my life~]
노래가 흘러 나오자 두사람이 아는 노래라며 따라 불렀다.
"야야...김세휘~ 네가 부를 땐 무슨 노랜지 몰랐다, 야~. 아까 그게 이 노래였냐?"
은영이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세내가 소릴 줄이며 누가 부른 노래냐고 물었다.
"권준수"
"야야~그거 말고 가수말이야, 가수~"
"권.준.수"
내 짧은 대답에 둘은 또 낭군님 자랑한다며 날 쥐어박기 시작했다.
"작년 카니발 때 너 꼬실려고 부른거잖아? 맞지?"
내 머리통을 잡고 헤드락을 걸던 세내가 기억 난 듯 물었다.
"그랬지...그리고 그때 초대 가수가 [사랑,그 쓸쓸함에 대하여]란 노래도 불렀지. 켁.켁.."
내가 열심히 바둥대면서 대꾸했다.
"그게 뭐?"
"그러게?"
둘은 내 귀를 양쪽에서 잡아 당겨댔다.
"야!! 이 바부들아~!!!"
화가 난 내가 소리쳤다.
"어쭈~? 이게~?"
성격 급한 은영이가 내 볼을 쭈욱 잡아 늘렸다.
장난이 심한 둘 덕분에 심각한 상황이 아주 우습게 되어 버렸다.
간신히 헤드락에서 빠져나온 내가 목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낄낄대던 두사람은 풀 죽은 내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도 소란스러웠다.
"이 바부팅이들아~ 걔가 말한 그 사람이 권준수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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