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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wi (키위) - 40. 바다로 간 두 여자

나비 |2005.01.14 22:00
조회 1,541 |추천 0

kiwi - 40


“혜림아, 일어나봐!”

“으응.”

“도착 하려나봐. 사람들이 가방 매고 나갈 채비를 하는데.”


어느덧 12시 40분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서울과는 달리 불빛이 많지 않아 더 늦은 시간처럼 생각이 되었다. 그 어둠은 내게 낯선 곳에 잘 왔다는 환영인사와도 같은 것이었다. 바다 가까이에 왔다는 사실에 들떠 좁은 의자에서 내내 불편했던 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빈 음료수 깡통과 과자 봉지들을 정리하는 동안 병진이는 가방에서 한 겨울 목도리를 꺼내더니 얼굴을 칭칭 감아댔다.


“그렇게 추울까? 겨울도 다 지났잖아.”

“추워서 그러냐? 타지에 그것도 바닷가에 우리처럼 예쁜 여자 둘이 거닌다고 생각해봐. 남자들이 가만히 두겠어? 너도 빨리 최대한 가려. 옷도 껴입고 올 걸 그랬나봐. 뚱뚱해 보이게.”


병진이의 말이 전적으로 틀린 것 같지 않아 모자를 최대한 꾹 눌러쓰고 입술까지 지워냈다.

드디어 터미널에 도착을 했다. 텅 빈 거리. 서울과 다르게 싸늘한 공기. 저 멀리까지 퍼져 있는 어둠.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그리고 바다를 보기위해서는 조금 더 이동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말에 우리는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바다까지는 얼마나 가야 하드래요?”


본토 사람처럼 보여야한다는 생각에 구사한 병진이의 사투리는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남몰래 픽하고 웃음을 터트리자 아직 자고 있던 얼굴 근육들도 깨어나는지 얼굴이 당겨왔다.


“다 왔습니다.”


택시 아저씨가 내려준 속초 해수욕장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사람이 너무 없다. 무서워.”

“그래도 자기 전에 바다는 보자.”

“그래야겠지?”


늦은 밤이라는 사실과 여자만 단 둘이라는 두려움도 바다를 향한 마음은 막지 못했다.


“뛰자!”


딱딱 딱딱.

우리는 손을 꼭 잡고 뛰기 시작했다. 고요함을 깨고 나의 구둣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병진이는 운동화를 신고 있었기에 유난스레 소리를 내는 것은 내 발자국 소리뿐이었다. 경쾌한 소리였다. 도시와 더 멀어지고 있는 그 발걸음은 자신의 소리에 취해 더욱 빨라져만 갔다.

하지만 뭇 남성들이 괴롭힐 거라는 병진이의 기대와는 다르게 바다는 우리의 접근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굳게 닫힌 철창문이 우리와 바다를 가로막고 있었다. 철조망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까만 바다가 넘실거리는 것을 아주 희미하게 볼 수 있었다.


“바다야! 어디 있니? 바다야! 병진이 왔어, 바다야!”


병진이는 철창에 매달려 바다를 향해 소리쳤다. 그 돌발적 행동이 낯선 곳에서 움츠려졌던 마음의 두려움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갑작스레 웃음보가 터진 나는 병진이처럼 철창에 매달려 웃다가 끝내는 모래바닥에 주저앉았다.


“와하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병진이도 웃다 내 옆에 쭈그려 앉아버렸고, 우리는 철창이 가로막힌 바다 앞에서 한참을 미친 사람들처럼 낄낄거렸다.


“좋다, 좋아. 여기 온 것만으로 마음이 절반은 풀렸어.”


병진이가 웃는 채로 말했다.


“나도 그래.”

“바다는 내일 보고 잠 잘 곳부터 구하자.”


우리는 근처 콘도라고 보기엔 좀 그렇지만 이름만큼은 콘도라고 씌어진 곳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생각이상으로 넓고 좋았다. 좋은 숙소를 구한 것에 안심하면서 우리는 라면을 사와 간단히 요기를 하고는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분명 일찍 잠이 든 것 같았는데 잠에서 깨었을 때는 해가 중천에서 꺾이고 있을 때쯤이었다. 오후는 간단히 요기를 한 후 바닷가를 거닐며 보내다가 저녁때쯤 해수욕장에 천막을 쳐놓고 회를 팔고 있는 곳에서 우럭과 오징어, 개불, 가리비등을 잔뜩 사가지고 돌아왔다. 술자리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평소 술을 좀 마신다는 병진이는 소주를 무려 7병이나 사자고 했다.

술과 친구와 좋은 안주들.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았다. 안주가 반쯤 없어졌을 때쯤 약간 취한 듯한 병진이가 말을 꺼냈다.


“연락와도 절대 절대 받아주지 않을 거야.”

“나도.”


어느새 지저분하게 고추장이 범벅이 된 광어회와 어울리는 대화였다.


“절대 받아주기 없기야. 약속해!”

“약속! 절대 절대 없다.”


이미 취기가 오른 나도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아졌다.


“우리끼리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자구!”

“절대 받아주기 없기!”

“절대!”

“절대! 자, 건배! 우리끼리 잘 살아보자!”


절대를 외치며 거듭된 완샷에 우리는 거나하게 취해버렸다. 볼을 때려도 아프지 않는 것이 피부는 감각을 잃고, 음식을 먹어도 별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마치 사랑에 푹 빠져버린 사람처럼. 사랑을 할 땐 다른 고통들에 대해 둔감해지고 지금처럼 감각기관도 마비되는 것 같다. 맛없는 핫도그를 먹어도 그와 같이 먹으면 천상의 음식이요, 산해진미도 집에서 쓸쓸히 먹으면 핫도그보다도 형편없는 음식이 되어버리니까. 입맛을 잃은 혀 때문에 민성오빠 생각이 간절해졌다.


“혜림아! 나 찔러봐.”


병진이는 내게 볼을 내밀었고, 나는 주저 없이 그녀의 볼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와하하하.”

“왜 웃어?”

“쿡쿡 찌르니까 자꾸 웃음 난다. 너도 해봐.”


나도 병진이에게 볼을 내밀었다. 정말 간지러운 것이 웃음이 나왔다.


“와하하. 진짜 신기하다.”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찔러대도 지금처럼 웃을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좋겠어. 그랬다면 민성 오빠가 내게 상처만 줬어도 웃으며 넘길 수 있을 텐데.


“전화해야지.”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핸드폰을 들었다.


“누구한테? 집에?”

“누구긴 누구야? 나 차버린 나쁜 놈한테 거는 거지.”


병진이도 나를 말리지 않았다. 역시 민성오빠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쁜 자식. 음성을 남기라는 안내에 따라 버튼을 눌렀다.


“야! 이 치사한 인간아! 내가 너 잡기라도 한대냐. 도망을 가긴 왜 도망을 가? 나 오빠 안 잡아. 다시 온다고 해도 받아주지 않기로 병진이랑 약속했다.”

“맞아, 우리 약속했어!”


병진이가 드러누운 채 말했다.


“절대, 절대 안 받아주기로 했다고. 여기 어디 게? 여기 동해바다야. 들어는 봤나, 동해바다! 부럽지? 오빠 없이도 나 아주 잘 살고 있어. 앞으로도 잘 살 거고.”


소주들이 혈관에 들어가 내게 거짓말을 시키고 있었다. 잘 못 살고 있는데. 이러다 기다리지 못하고 망가질까 얼마나 두려운데. 하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을 것이다. 잘 사는 척 그렇게 살면 잘 살게 되는 거니까.


“그거 재미있다.”


전화를 끊은 내게 병진이가 말했다.


“나도 걸어야지.”


영구 오빠 역시 전화를 받지 않은 모양이었다.


“말도 없이 집을 나가? 나도 방에 불 지르고 나왔다. 다신 안 들어갈 거야. 니가 나 공주로 살게 해준다며? 그러면서 장난감 집에 날 두고 혼자 도망을 가? 텔레비전 볼 때 몇 마디 했다고 집을 나가 버리냐구? 그랬으면 우리나라 사람들 벌써 다 헤어졌어. 이게 왜 이래? 우리 헌팅 해서 벌써 다른 남자들 만나고 있다. 이 사람은 날 정말 공주로 만들어 줄 거래. 어때? 속 쓰리지?”


병진이는 정말 속이 다 시원해졌는지 창문을 활짝 열고는 방에 누워 아직은 차가운 공기를 마음껏 맞았다. 나도 병진이의 옆에 누워 같이 바닷바람을 맞으며 오늘만큼은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바다와 술에 취한 이 기분을.


그렇게 누워 수다를 떨며 웃고 있을 때였다. 징징거리는 핸드폰. 바로 내 것이었다.


“병진아!”

“왜?”


병진이는 귀찮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민, 민성 오빠한테 전화 왔어.”


방안은 잠시 멀리서 들리는 파도 소리와 핸드폰이 징징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키위 이젠 막바지네요.

45편 완결이거든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반칙은 요즘 제가 생활이 넘 힘들어서.. 애쓰고 있으니 기다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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