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초율(礎律) 제 48화

피바다 |2005.02.14 20:25
조회 357 |추천 0

  증장천왕 제공의 백마 화류마(花柳馬)가 동방성의 외성을 들어섰다. 지국천왕은 기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른 시간부터 목을 빼고 이 귀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던터라, 직접 영접하고자 왕궁 입구를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그가 입구에 이르자 때마침 제공도 막 도착하여 나비처럼 날듯이 말 등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제공은 직접 마중을 나온 지국천왕에게 황송하여 예의를 올리며,

  " 미천한 아랫사람을 위해 친히 납시다니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 어서오세요, 증장천. 귀한 분이 오시는데 제가 어찌 팔짱만 끼고 있을 수 있습니까?"

  지국천왕은 최고의 예우를 지켜 젊은 왕을 맞이했다.

  사왕천 남쪽 지역을 다스리는 남방성의 주인-증장천왕 제공. 비록 유례없이 젊은 나이에 왕위에 등극했지만, 그는 엄연히 동방성 지국천왕과는 동등한 서열이었다. 한창이던 선대 증장천왕이 아들 제공의 성인식이 끝나자마자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하게 왕위를 물려주고 은둔 생활을 시작하여 천계를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지국천왕가(王家) 못지않게 대대로 충신이던 증장천왕가의 그런 의아스런 대물림에 의문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무엇보다 제공은 스스로 정당성을 가진 왕이었다. 겉으로는 호색가에 대풍류꾼이었지만, 이미 소시적부터 문무를 겸비한 출중한 왕자로써 그는 준비된 후계자였고 왕가에서 그의 입지는 확고하여 누구도 감히 그를 제치고 왕위를 넘보는 혈육들이 없었다. 심지어 백성들에게조차 전례없이 존경받는 왕자였던 그는 사왕천에서는 천제보다 인지도가 높을 정도였고 그런 이유로 황가에 대한 그의 영향력도 막강했다. 제공에 대한 천제의 신뢰는 고급귀족들 사이에서 유명했고, 그는 실제 남방군 최고의 장군으로써 최강의 군대를 이끄는 수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의 화려한 타이틀에 어울리지 않는 호색꾼 노릇도 자신의 재능을 숨기기위한 가면일지도 몰랐다.

  이러한 탓에 문왕(文王) 이며 도리와 법도를 잘 아는 지국천이 제공을 손아랫사람이 아닌 존경스러운 왕으로 깍듯이 대우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제공은 무시할 수 없는 학문적 소양을 가진 문우(文友)이기도 했던 것이다.

  지국천은 증장천을 위해 정갈한 오찬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둘은 서로의 지식과 사상을 자유롭게 나누며 즐겁게 식사를 마쳤고, 그 후에도 제공이 선물로 준비해온 비차(琵茶)를 마시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국천은 제공의 방문에 크게 즐거워 보였다. 그는 간만에 수준있는 학자를 만나 깊이 있는 토론을 할 수 있어 기뻤다.

  제공에게는 동방성으로의 비공식적인 이 첫 방문에 다른 중요한 목적이 있었지만 지국천왕의  학문적인 갈증이 해소될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응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짧은 침묵의 시간이 제공에게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 왕께 몇 가지 의논을 드리고자 제가 예의를 뒤로하고 귀한 시간을 청했나이다."

  그제서야 지국천은 자기가 눈치없이 자기의 즐거움만 취한 것을 깨닫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 아니오, 증장천. 귀왕의 방문이 내게 큰 기쁨입니다. 헌데....나와 의논할 거리가 있다니 그게 무엇입니까?"

  제공은 진지했고,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

  " 그것은 엄연히 지국천왕가의 사사로운 일입니다. 소인이 감히 입에 올려서 될 문제가 아니오나, 소인의 짧은 소견으로 그것은 필시 천계의 문제이기도 하옵기에 무례를 무릅쓰고 여쭈어보고자하옵니다."

  지국천의 머리에 문득 설무랑이 스쳐지나갔다. 제공이 걱정하는 것은 바로 그 문제일터였다.

  " 장자(長子) 설무랑에 대한 말씀을 하시려는게지요?"

  지국천은 피하지않았다. 제공이 그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치를 볼 수 있는 사람이면 설무랑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설무랑의 죽음에 가장 슬퍼했던 제공이 아니었던가. 시신이 없는 무덤 앞에서 목 놓아 울던 어린 제공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국천은 제공이오래 전의 자기 거짓말에 대한 해명을 듣고 싶어할 거라 짐작하고 있었기에 제공의 그런 의문이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다만, 진실을 어느 선까지 밝여야하느냐가 문제였다.

  제공은 지국천이 자신의 의도를 이해해주자, 한결 질문하기가 수월해졌다.

  " 왕께서는 300년전, 천제 전하와 저에게 설무랑이 병으로 운명을 달리했다고 전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믿지 못하였지요."

  제공이 지기(知己)인 설무랑의 사망 소식을 접한 것은 둘이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헤어진지 겨우 닷새만의 일이었다. 제공은 비보를 들은 뒤, 슬픔에 빠져 동방성으로 한걸음에 달려왔고 믿을 수 없다며 떼를 썼다. 마침내 지국천에 채 흙이 마르지도 않은 작은 무덤 앞에 그를 데려간 후에야 제공은 체념한 듯 앞에 쓰러져 하염없이 울었다. 그 누구의 설득과 위협에도 무덤 앞을 며칠씩 떠나지 않고 울던 제공을 아버지였던 선대 증장천왕이 강제로 소환함으로 비로소 남방성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 그 때, 그 무덤에는 분명.....설무랑의 시신이 누워있었나이까?"

  지국천은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300년동안 자신과 왕비만이 비밀로 지켜오던 그 비극적인 결정을 한 순간에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단지 왕가의 엽기적인 사건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안에는 층층이 무서운 예언과 비밀들이 숨겨져 있었다.

  제공은 지국천의 입술이 굳게 맞물려 있는 것을 보고 오히려 들어야할 이야기가 있음을 확신했다. 삼쌍성에 대한 예언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국천에게서 첫 번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예감이 들었다.

  " 설무랑은 반드시 죽어야만 했겠지요. 죽어야하는 자가 죽지않고 살아돌아왔습니다. 오히려 더 큰 화로 변하여 말입니다."

  제공은 지국천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 왕께서는 천계의 운명을 바꿀 마지막 남은 단 한 번의 기회를 마저 놓치시려는 겁니까? 아니...삼쌍성의 운명... 말입니다."  

  지국천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그는 어째서 제공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 저는 한 번도 확신없이, 무모하게 말하거나 움직인 적이 없었습니다. 단연코 이것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왕께서 홀로 거대한 불덩이를 마주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저를 믿어보시겠습니까?"

  지국천은 이제 완전히 결심이 섰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공이라면 뭔가 해 낼 것만 같았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면 그가 매달릴 사람도 천계에선 오직 제공밖에 없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 500년 전, 설무랑이 태어났을 때의 일이오.........."

  드디어 지국천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