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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남자 유키*** <#20. 외출>

길스진 |2005.02.15 19:07
조회 3,162 |추천 0

#20

<<외출>>

 

 

 

사토 레이는 그날 종일 들뜬 마음으로 보냈다.

 

혹시나 아버지와 함께 외출할 수 있지는 않을까하는 기대감이 아이의 얼굴에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지나는 괜한 기대심을 아이에게 준 것 같아 미안했다.  아까 옥상에서 그에게 몰아세우긴 했지만 그가 그 말에 신경을 쓸지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거실로 과자와 케잌 그리고 우유를 가지고 나왔다.

 

그녀의 걱정스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는 학습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여전히 보리가 쪼그리고 앉아서 같이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녀석은 책이란 존재보다는 좋아하는 친구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마냥 행복한 것 같았다.

 

즐겁다 못 해 행복하기까지한 아이와 보리의 표정에 그녀는 더욱 시무룩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계단으로 향했다.

 

조금전 점심식사 때 유키의 속마음을 떠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대화하기를 거부했다.

 

그녀가 꺼내는 주제를 과감하게 잘라버렸고 '이제 그만 밥 좀 먹지'하는 눈빛을 매정하게 던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또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그녀의 바람을 산산히 부수고 있었다.

 

'그게 뭐가 어렵다고.  환한 대낮에 나가자는 것도 아니고, 밤에 바다 보러가자는 것 뿐인데.  왜 그렇게 남자가 용기가 없는 거지?'

 

지나의 중얼거림은 감히 겉으로 드러내지 못 하고 입안에서 맴돌기만 했다.

 

그녀는 레이가 문제를 다 푸는 동안에 읽다만 책을 계속 읽기 위해 아까 소파 위에 놔둔 소설책을 펼쳐 들었다.

 

이 책은 유키의 서재에서 몰래 가져온 역사물 소설책이었다.

 

그곳에는 여성들이 흔히들 관심있어하는, 사랑을 다룬 로맨스소설을 제외하고는 다양한 장르의 책들로 둘러져 있었다.

 

이곳에 오면서 짐 속에 있었던 몇 권의 책들은 언제부턴가 닳도록 읽어버려 다시 여행가방 속에 넣어두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그녀로서는 유키의 서재에서 발견한 책들은 그녀의 호기심과 충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유키의 허락도 없이 손 덴 것이라 그가 알면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다 풀었어요, 선생님."

 

지나는 책에서 눈을 떼고는 레이의 학습지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몇 개의 문제점을 발견한 그녀는 아이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쓸어넘기고는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예전보단 훨씬 문장이 자연스러운데?  하지만 여기, 이것들... 맞춤법이 맞을까?"

 

지나의 손가락은 올바르게 쓰여진 음식이름을 적는 문제에서 틀린 글자들을 가리켰다.

 

"아니에요?  육계장, 소세지, 김치찌게... 맞잖아요?"

 

지나는 틀린 것을 바르게 고쳐 적어주었다.

 

 

'육개장, 소시지, 김치찌개'

 

 

"그래도 소세지는 많이 발전했네?  저번에는 쏘세지라고 하더니...  하지만 이것도 틀린 거야.  소세지가 아니고..."

 

"소시지."

 

레이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녀는 활짝 웃어보이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보리가 낑낑거렸다.

 

"너도 쓰다듬어 달라고?"

 

그녀는 보리의 부드러운 털을 쓸어주었다.

 

"하긴... 선생님도 맞춤법을 완벽하게 알지는 못 해.  그래서 너한테 큰소리치기가 좀 그렇다."

 

아이는 공부를 끝내고 간식을 먹었다.  보리에게 과자와 빵을 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는 자신의 간식의 반을 주었다.

 

"녀석을 돼지로 만들 셈이야?"

 

레이는 과자를 보리의 입에 넣어주다가 몸을 돌렸다.  유키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버지!"

 

그러나 이내 보리가 자신의 손을 축축하게 젖을 때까지 핥아대자 얼른 손을 치우며 간식이 담긴 접시를 치웠다. 

 

"선생님은 어디 가셨지?"

 

"빨래 걷으러 나가셨어요.  저기, 아버지."

 

유키는 주방으로 따라 들어오는 아들녀석을 돌아봤다.  뭔가 할 얘기가 있는 얼굴이었다.

 

"무슨 할 얘기라도 있어?"

 

"그게..."

 

유키는 고개를 푹 숙이며 어깨를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는 아들을 내려다봤다.  그는 아들이 항상 자신감을 잃지 않고 자라주기를 바랐다.

 

"뭐야?  할 얘기가..."

 

레이는 자신의 손가락을 이리저리 비틀어대며 머뭇거렸다.

 

괜한 말을 꺼냈다가 아버지에게 꾸중이라도 들을까 봐 아이는 잔뜩 두려워하고 있었다.

 

"레이."

 

아들의 자신없는 태도에 유키는 괜히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의 차가운 음성에 깜짝 놀란 아이는 재빨리 두 손을 내저으며 다급히 말했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냥... 그냥요!"

 

레이는 쏜살같이 거실로 가더니 어질러져있는 노트와 책들을 챙겨들고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가는 레이와 주방에 서있는 남자를 번갈아 보던 보리는 갑자기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이내 짖어댔다.

 

"저 녀석이...  지금 나한테 짖어대는 건가?"

 

보리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과자를 놔두고 레이의 방으로 갔다.

 

"쳇!"

 

현관문이 열리면서 지나가 들어왔다.  커다란 소쿠리 안에 마른 빨래를 담아왔다.

 

그녀는 거실로 향하다가 주방에 유키를 발견했다.

 

그는 커피를 끓여마시려는 것 같았다.  커피메이커에서 원두커피의 향이 거실까지 날아왔다.

 

지나는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그리고 씻어놓은 자신의 머그잔을 유키의 커피잔 옆에 나란히 놓았다.

 

"커피 너무 자주 드시는 거 아니에요?"

 

그녀는 뜨거운 커피를 두 잔 따라서 한 잔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때까지 그는 지나의 곁에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조용히 서 있던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잔을 받아들었다.

 

"지금 날 걱정하는 거요?"

 

그들은 자연스럽게 싱크대 앞에 나란히 섰다.

 

"가실 거죠?"

 

"...??"

 

"바다말이에요."

 

유키의 미간이 천천히 좁아지기 시작했다.  그가 피식 웃었다.

 

그 짧은 웃음은 지나의 마음을 설레이게 할 정도로 매력적이었고 유혹적이었다.

 

"제법 끈질기군."

 

"레이를 위해서에요.  레이는 한번도 밤바다를 못 봤을 거에요."

 

지나는 시선을 내리깔고는 들고있는 커피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전, 아이를 위해서 좋은 선물을 주고 싶어요.  레이를 너무... 사랑하게 됐거든요."

 

지나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유키를 쳐다봤다.

 

진심어린 그녀의 눈빛에 유키는 마음이 흔들렸다.  충동적으로 그녀를 안고 키스를 하고싶을 만큼 마음이 두근거렸다.

 

아들녀석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고 싶었다.  자신을 위해서 그녀가 해주는 말이길 바랐다.

 

그리고 그녀가 진심으로 아들녀석을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믿고 싶었다.

 

돈 때문에 찾아드는 여자들과는 그녀는 다르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인정해야 했다.

 

유키는 그녀의 반짝거리는 검은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당신... 진심이오?'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는 그녀가 진심으로 아이를 좋아하는 순수한 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언젠가는 떠날 여자였다.  그녀가 헤어지는 것을 레이는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누군가에게 또다른 상처를 받는 것은 어린 아들에게 몹쓸 짓이었다.  아들이 과연 또 이별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

 

유키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몇 시 돼서 출발할 거요?"

 

 

 

 

저녁을 간단하게 먹고난 지나는 설거지를 끝내고 외출준비를 하기 위해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갔다.

 

벌써 기사가 도착해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먼저 옷장 문을 열고는 입고나갈 옷을 골랐다.  밤에 입을 옷이긴 해도 그와 처음으로 나가는 외출이라 제법 신경이 쓰였다.

 

그녀는 그의 눈에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앞서 어깨끈이 가는 흰색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가슴라인이 약간 깊게 파여져 있어 가슴 계곡이 아슬아슬하게 보이기까지 해 망설여지기도 했다.

 

대신에 길이가 짧은 가디건을 위에 걸쳤다.  아무리 덥다해도 바다이니 추울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녀는 가디건을 벗었다 입었다 하기를 5분 동안 계속했다.

 

그때 노크소리에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네?"

 

"선생님!  멀었어요?  다들 기다리세요."

 

"앗!  이런... 아, 알았어!  지금 나가!"

 

지나는 하는 수 없이 가디건을 입고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방문을 열었다.

 

"와아!  선생님 너무 예뻐요!"

 

아이의 첫마디에 지나는 괜히 우쭐했다.  어린 아이라고 무시해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레이 너도 보는 눈이 제법 있구나?"

 

두 사람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서는 인상을 쓰고있는 한 남자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짙은 카키색 면 바지에 그것보다 조금 더 짙은 색상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

 

지나는 유키의 표정이 왜 갑자기 굳어져 있는지 몰랐다.  아주 짧게 스치듯이 그녀의 외모를 보는 것 같았지만 그의 눈은 차가웠다.

 

그가 지나의 손을 잡고있는 아들을 노려봤다.

 

"너.  이 녀석도 데려갈 생각이야?"

 

"네.  그러면... 안 되나요?"

 

"안 돼."

 

유키는 최대한 위엄있는 목소리로 차갑게 대답하고는 현관으로 걸었다.  그러나 레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  보리랑 약속했는 걸요.  데려가기로요."

 

"안 돼.  분명히 안 된다고 했다."

 

유키는 돌아서서 아이를 향해 집게손가락을 들었다.  금새 레이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눈가에 촉촉함이 스며들었다.

 

지나는 아이가 막 울 것만 같아 유키에게 조용히 부탁했다.

 

"보리 얌전하게 있을 거에요.  그러니까..."

 

"당신 귀가 먹었소?"

 

"???"

 

"금방 안 된다고 했을 텐데.  저 애 표정보고 괜히 맘 약한 소리나 할 거면 없던 걸로 합시다."

 

지나는 레이를 쳐다보고는 힘없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갈 거면 지금 나가고.  아니면..."

 

"안 갈래요."

 

유키와 지나는 놀란 눈으로 아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레이?"

 

"보리데려가기로 약속했단 말이에요."

 

아이의 뺨 위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유키는 입술을 비틀며 바보같은 말에 화를 냈다.

 

"저 녀석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기억 못 해!  약속이란 것도 모르고!  알겠니?  저 녀석 때문에 외출을 포기하겠단 거야?"

 

"혼자 놔둘 수 없어요.  혼자 있으면... 쓸쓸해요."

 

지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주며 조용히 속삭였다.

 

"레이.  보리는 알 거야.  네 마음을..."

 

"하지만, 선생님..."

 

"알아.  넌, 약속을 지키고 싶었던 거야.  그치?  아무리 말 못 하는 동물이라고 해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렇지?"

 

레이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사토 레이는 지나와 보리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도 혼자서 지내고 있었을 것이다.

 

낮이든 저녁이든 그저 책과 텔레비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던 아이의 마음을 그녀는 이해했다.

 

그래서 보리를 혼자 놔두고 가기 싫었던 것이다.  혼자 지내는 것이 얼마나 힘겹고 슬프다는 것을 아이는 이미 알고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다음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지나의 말에 유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녀까지 외출을 포기하고 있었다.  모두가 저 털짐승때문이었다.

 

"아니면 제가 레이하고 보리를 데리고..."

 

유키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리쳤다.

 

"나중에 네가 차를 청소해야 할 거다!  무슨 말썽이라도 생기면... 레이, 알아서 해!"

 

그는 냉기를 뿜어내며 먼저 현관을 나갔고 뒤따라 운전기사가 나갔다.

 

김 지나는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서 나가자고 했다.

 

레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지나는 마지막으로 나가면서 문을 잠그고 차로 다가갔다.

 

유키와 레이가 나란히 뒤에 앉아있었고 보리가 조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뒷문을 열고 레이가 안쪽으로 옮겨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레이는 창쪽에 앉겠다며 그녀에게 가운데 앉으라고 했다.  그녀는 약간 망설여졌다.

 

그렇다고 보리를 유키가 있는 뒷자리로 옮길 수도 없었다.

 

최대한 레이 쪽으로 바짝 붙어앉은 그녀는 유키와 몸이 닿지 않도록 했다.

 

가끔 차가 코너를 돌거나 할 때면 그녀의 몸이 그에게로 기울어져 서로 몸이 닿았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긴장 좀 풀지 그러오?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그러는 거요?"

 

"그러는 유키씨는요?  어지간하면 그 똥 씹은 듯한 표정 좀 펴시죠.  조만간에 누군가를 잡아먹을 것만 같군요."

 

유키는 고개를 돌렸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지나의 눈이 눈에 들어왔다.

 

차 안이 그렇게 밝지가 않았지만 그의 눈에는 그녀의 긴 속눈썹까지 세세하게 다 보였다.

 

그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지나가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당신은 가끔 사람을 열받게 하는 구석이 있소."

 

"뭐라구요?"

 

"날 화나게 하면 이로울 게 없을 텐데..."

 

그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녀의 입술 쪽으로.

 

그녀는 순간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기가 바쁘게 얼굴을 돌려버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던 것이다.

 

'열 아홉 번의 키스!'

 

오늘 외출이 그와 단둘만의 외출이 아니길 다행이었다.  레이와 보리가 있고 그리고 운전기사까지 함께 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바다를 보자마자 레이와 보리는 모래사장 위를 뛰어다니더니 물 쪽으로 향했다.

 

지나는 깜짝 놀라 뒤를 따르며 아이에게 물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소리쳤다.

 

해변가에는 그들 뿐만 아니라 제법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가족끼리 오거나 연인끼리 그리고 동성의 친구끼리 떼를 지어오기도 했다.

 

"정말 좋지?"

 

"네!  수영하고 싶어요!"

 

"안 돼.  어두운 이 시간에 하면 위험해."

 

레이의 신발은 이미 젖어있었다.  당연히 보리의 털도 젖어있었다.  지나는 그들을 보며 웃었다.

 

"멀리 가면 안 돼.  물에 깊이 들어가도 안 되고."

 

"네."

 

레이와 보리가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를 재미나게 피하며 노는 동안 그녀는 마른 모래 위에 앉았다.

 

운전기사까지 합세해 레이는 더욱 행복한 모습이었다. 

 

"좋군."

 

어느새 유키가 다가와 그녀 옆에 떨어져 앉았다.

 

하지만 그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알 수 없는 에너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강열했다. 

 

"뭐라도 마시겠소?"

 

"아... 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멀리 보이는 자판기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갔다오죠."

 

 

 

 

해변가에 설치되어 있는 음료수의 가격이 만만찮게 비쌌다.  하지만 그녀는 네 사람이 마실 음료수를 뽑았다.

 

"야.  꽤 몸매가 죽이지 않냐?  가슴 봤어?  탱글탱글한 게...흐흐흐흐..."

 

"혼자가 아닌 것 같은데?  음료수가 네 개째다."

 

낯선 남자들의 목소리에 지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자신을 두고 하는 말들이 아닐 거라고 여겼지만 음료수가 네 개째라는 말에 그녀의 심장 박동수가 놀랍도록 빨라졌다.

 

"뭐 어떠냐?  안 보이는 곳으로 끌고가면 될 걸..."

 

그녀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그들의 목소리는 아주 가까이 들렸다.  네 개의 음료수를 품에 꼭 끌어안고는 서둘러 자판기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녀의 동작은 너무 늦었다.  하필 그녀가 돌아선 곳에 갓 스물을 넘긴 듯한 남자 세 명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의 뇌리에 공포가 들이닥쳤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는 그들을 노려봤다.

 

'겁먹지 말자.  겁먹은 얼굴이면 이 인간들이 더 우습게 알 거야.'

 

그녀는 마음 속으로 주문을 몇 번이고 걸며 발걸음을 뗐다.

 

"딱 네 개네.  우리 셋하고 그쪽하고 마시면 딱 좋겠어."

 

한 남자가 재빨리 다가와 그녀 품에서 음료수 하나를 뺏어들었다.  그리고 두 개의 음료수가 더 그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세 남자는 그녀를 애워싸며 저질스런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녀가 움직일 때면 그들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조금씩 그녀의 걸음은 일행이 있는 곳이 아니라 반대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만... 하죠."

 

지나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비록 잠긴 목소리긴 했지만 그런 말이 생각지 않게 튀어나온 것이 놀라웠다.

 

그러나 세 남자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 했다.

 

그들 중에 한 남자가 슬그머니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그녀의 몸을 천천히 훑기 시작했다.

 

끈적거리는 듯한 남자의 낯선 시선에 그녀는 발가벗겨진 것마냥 수치심이 느껴져 참을 수가 없었다.

 

"어서 비켜요!  댁들하고... 할 얘기 없으니까."

 

지나는 앞에 선 남자의 가슴을 힘껏 밀치고는 재빨리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더 빨랐다.  그녀의 묶인 머리채를 붙잡히고 만 것이다.  그녀의 입에서 비명을 터져나왔다.

 

"아!  이거 놔요!"

 

그러자 담배 냄새가 자욱한 손이 그녀의 입을 가로막더니 벽 쪽으로 그녀의 몸을 밀쳤다.  딱딱한 벽이 그녀의 등에 부딪혀와 욱신거렸다.

 

"그냥은 못 가지."

 

"야.  이것 봐라."

 

억센 손이 몸을 감싼 그녀의 팔을 거칠게 치우더니 그녀의 가슴라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가슴 예쁘다?  제법 돈 좀 줬겠는데?"

 

"야, 이새끼야!  보면 모르냐?  자연산인 거."

 

세 남자의 눈이 동시에 그녀의 가슴과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들의 억센 힘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야, 여기서 할 거야?"

 

한 남자의 손이 허리띠를 끌르고 있자, 옆에 있던 일행이 소리쳤다.

 

"씨발새끼.  어지간히도 급하네.  빨리 해, 인마!"

 

두 남자가 그녀의 몸을 벽으로 밀쳐 누르고 지나의 가디건을 거칠게 벗겨냈다.

 

드러난 살결에 세 남자의 탄성과 휘파람이 그녀의 귀에 잔인하게 들여왔다.

 

다른 한 남자는 지퍼를 내리고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의 얇은 셔츠를 통해 그의 끈적거리는 살이 전해져왔다.

 

"제발..."

 

겁에 질린 그녀의 몸은 바르르 떨렸다.  남자는 자신의 몸을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에 짓눌렀다.

 

이이서 남자는 그녀의 가슴계곡을 과감하게 내려다보고는 손끝으로 가슴을 건드렸다.

 

"아-악!!  하, 하지마!  제발!"

 

"제발 뭐?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이 아가씨야.  뭘 겁먹냐?"

 

그녀가 울먹거리더니 이내 울음을 토해내자, 남자들이 칙칙한 웃음소리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조롱하듯 그녀의 살결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 때면 양옆에 있는 두 남자가 그녀의 입과 머리를 붙잡았다.

 

"빨리 해, 새끼야!"

 

남자의 차가운 손이 그녀의 어깨끈을 내리더니 끈 없는 브래지어를 잔인하게 웃으며 감싸쥐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이 움직이더니 그녀의 엉덩이를 지나쳐 스커트자락을 올렸다.

 

지나의 검은 눈동자는 두려움과 무서움에 잔뜩 확대되어 있었고 몸은 멈출 수 없을 만큼 바들바들 떨려 서있기조차 힘들었다.

 

'제발... 누구라도 와 줘요!  제발!  유키!  나... 여기 있어요...'

 

그녀는 힘껏 눌러대는 낯선 손 아래에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 한채 울어야 했다.

 

이렇게 후회될 수가 없었다.  괜히 바다가 보고싶다고 밤에 나가자고 유키를 설득시킨 자신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영원히 그에게 자신의 감정을 말하지 못 한 채, 침묵으로써 이들에게 당해야하는 자신이 너무 불쌍했다.

 

'난... 이제 끝이야...'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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