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유키의 키스>>
이런 장면은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나 존재해야 했다.
사랑하는 여자가 치한들에게 잡혀 있는 것을 그녀의 애인이 멋지게 나타나 그 악당들을 무찌르는 것이다.
그 모습에 여자는 애인에게 반하게 되고 그들의 사랑은 영원하게 된다는 얘기. 사토 유키는 이를 갈며 뛰기 시작했다.
그의 혈관은 충격적인 장면에 피가 화산처럼 뜨겁다 못 해 분출하기 일보직전이었고 뛰는 동안 그의 근육들은 힘차게 꿈틀거렸다.
그녀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그의 온 몸으로 파고들어와 괴롭히기 시작했다.
짐승보다 못 한 놈의 더러운 손이 그녀의 옷 속을 파헤치고 있을 때는 그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녀석들에게는... 아무런 말조차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을 신음소리 하나 내지 못하도록, 어떠한 반항도 하지 못하도록 바로 죽여버릴 작정이기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지나의 눈동자가 그의 모습을 보더니 놀라움으로 변했다.
'유키! 그가 날 구하러 왔어! 그가 왔어!'
사토 유키는 울부짖는 괴물같았다. 그녀는 달려오는 남자를 겁먹은 눈으로 쳐다봤다.
그는 눈 앞에 놓인 먹이감을 잡아먹으려고 악문 이를 드러내고 있었고 그의 검은 눈은 머리 위에 있는 조명 빛에 번뜩이고 있었다.
그의 얼음장처럼 차갑고 잔인한 얼굴은 완전히 죽음을 부르는 저승사자였고... 악마였다.
유키는 한 녀석의 목을 한 손으로 거머쥐었다. 잡힌 남자는 유키의 체구에 비하면 보잘것 없이 약하고 작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비명한번 지르지 못하고 땅에서 몸이 번쩍 들리자 발버둥쳐댔다.
이어서 그는 지나를 붙잡고 있던 두 녀석 중 한 녀석의 얼굴을 정확하게 발로 갈겼다.
느닷없이 타나난 거구같은 남자의 괴력에 그는 방어할 틈도 없이 벽에 '쿵'하고 부딪히더니 쓰러지고 말았다.
코뼈가 부러지기라도 했는지 남자는 비명에 가까운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몸을 일으켜 유키에게 달려들었다.
지나는 나머지 한 녀석이 어떻게 되었는지, 유키가 다음에 어떤 행동을 했는지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다리가 흐느적거리더니 땅으로 꺼져들고 있는 몸때문이었다. 그리고 눈꺼풀이 힘없이 닫히기 전에 그녀는 희미한 형체를 보았다.
유키말고도 누군가가 뛰어오는 것을... 열심히 자신을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였다.
'레...이...'
눈꺼풀이 무겁게 닫히면서 그녀의 몸은 차가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지나... 지나! 김 지나!"
유키의 떨리는 목소리가 다급하게 어둠 속에서 울렸다.
그는 레이가 쓰러진 지나를 안고있는 것을 보고 경직된 몸을 돌렸다.
그러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어느 녀석이 휘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차가운 금속이 피부에 스치고 지나가고 이내 자신의 가슴팍에서 붉은 피가 흐르는 것을 봤을 뿐이었다.
셔츠가 흥건하게 젖고 있었지만 유키는 아무런 통증이나 고통을 느끼지 못 했다.
그럴 겨를이 없을 정도로 그의 몸과 마음은, 세포 하나하나까지 모두 한 여자의 신변에만 쏠려있었던 것이다.
"지나! 지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대체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던 거지?
김 지나는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듯한 몸을 움직여봤다. 그나마 먼저 움직여준 것은 손가락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운 촉감이 손 아래에 전해져왔다.
'여기가... 어디지?'
몇 번이고 깜박여서야 주변의 사물들이 눈에 들어왔고 모두가 처음 보는 물건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른 입을 간신히 혀로 축이며 주변에 누군가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돌렸다.
밝은 실내와는 다르게 커다란 창에 어둠이 비쳤고 상체를 완전히 벗은 남자가 등을 보이고 있었다.
지나는 그 남자의 몸에 하얀 천이 감겨있는 것을 보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 남자가 누구지? 누구길래 붕대를 감고있는 걸까?
남자의 뒷모습은 그녀가 알고있는 남자, 사토 유키가 확실했다. 넓은 어깨와 등은 꾸준한 운동으로 탄력적이며 다부진 몸매였다.
'어떻게... 왜?'
그녀의 가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단단한 덩어리가 심장을 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마른 침을 간신히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유키...씨."
그러자 창밖을 응시하고 있던 그가 재빨리 돌아섰다.
일어나 앉아있는 지나를 보고 깜짝 놀란 그의 눈이 이내 걱정스러움으로 바뀌었고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괜찮소? 왜 더 누워있지 않고?"
지나는 걱정으로 가득 찬 그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의 가슴이 정면으로 보였던 것이다.
상체에 감겨있는 흰 붕대는 붉은 색이 제법 배어나와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녀의 시선이 얼굴이 아니라 가슴께로 향한 것을 안 유키는 속으로 호텔직원에게 욕을 퍼부었다.
찢어진데다 피로 범벅이 된 옷을 입을 수가 없어 직원에게 새 셔츠를 가져다달라고 했었다.
그런데 지나가 깨어날 때까지 몇 십분이란 시간이 지났건만 나타나지 않았다.
유키는 그녀의 손이 자신의 가슴으로 향하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그녀의 검은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난 괜찮소. 방심하다 살짝 스쳤을 뿐이니까."
그는 남의 얘기를 하듯이 아주 무덤덤한 표정으로 어떤 액센트도 없이 말했다.
"병원은요?"
"그 정도는 아니오."
이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온 사람은 호텔직원이었다. 새로 가져온 셔츠를 유키에게 내밀었다.
유키는 한마디하려다 대신 차가운 눈빛으로 직원의 기를 눌려버리고는 옷을 입었다.
직원이 나가고나서 몇 분 후, 운전기사가 레이와 보리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들을 본 지나는 레이를 향해 팔을 뻗었다.
"선생님!"
레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그녀에게 달려와 안겼다. 그리고 몇 번이나 그녀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아, 레이. 걱정 많이 했어? 이제 괜찮아."
그녀는 보리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이곳이 어딘지를 물었다.
유키가 달려와 누군가를 때린 것을 봤지만 그 후로는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긴 호텔이오. 당신이 정신을 잃어서 가까운 호텔로 올 수 밖에 없었소."
"아버지께서 선생님을 안고 오셨어요. 가슴에서 피가나는데도... 다치셨는데도 선생님을 안고 여기로 뛰셨어요."
레이의 울먹거리는 말을 들은 그녀는 레이 뒤에 선 남자를 올려다봤다. 그의 눈은 아직도 그녀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저 때문에... 다치셨군요? 정말... 죄송해요."
"그런 말은 듣고싶지 않소. 누구라도 했을 테니까."
그의 덤덤한 말에 지나의 두근거리는 심장이 일시적으로 멈추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물이 차오르는 것 같아 얼른 고개를 숙이고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의 말을 머릿속에서 떨쳐냈다.
유키는 그녀의 눈이 촉촉하게 젖은 것을 발견했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는 기사에게 레이와 보리를 데리고 먼저 돌아가라고 했다.
"아뇨. 저도 같이 가겠어요."
지나가 이불을 젖히자, 그는 놀란 눈을 던졌다. 그녀는 아직 몸이 성하지 않았다.
긁히거나 멍든 곳은 없지만 쉽게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적은 충격이 아니었다.
"애써 용기 낼필요 없소."
간신히 일어나려고 침대에 손을 내딛는 그녀의 행동은 몹시 조심스러웠고 위태롭게 보였다.
아마 그녀는 꿈에서까지 파렴치한 녀석들에게 시달릴 것이다. 그리 쉽게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돌아가게. 레이도. 아저씨 따라가거라."
"하지만... 선생님 곁에 제가 있어야 되요."
레이는 지나의 손을 꼭 잡으며 놓칠 않았다. 아이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가 아직도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아이의 머리 위에 손을 가만히 얹고는 부드러우면서도 엄한 아버지의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 대신 있으마."
"시, 싫어요. 선생님 곁에 있을래요."
"레이."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젊은 운전기사가 앞으로 다가왔다.
"여긴 아버지께 맡기자. 선생님한테는 너보다 아버지가 더 도움이 될 거야."
젊은 기사의 시선이 유키와 지나에게 번갈아 날아왔다.
"선생님 혼자 가게 했으니 내 잘못이다. 늦었는데 어서 가거라. 저 녀석 데리고."
레이는 아버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지나에게로 돌아섰다. 그리고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선생님."
"레이, 고마워."
"오늘 아무 일 없었으면... 훨씬 재미있었을 거에요."
"그래."
지나는 아이의 보드라운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유키와 지나 두 사람만이 남았다.
그들이 나가고나서 실내에는 두 사람 사이에 조용히 감돌고 있던 기운만이 존재했다.
"호텔이... 이런 곳이군요?"
"..."
유키는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말은 한번도 호텔이란 곳에 와본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정말... 끔찍했어요."
그는 건조한 그녀의 말투 속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두려움과 공포를 읽었다. 바지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도 몇 시간 전의 일이 떠올라 다시금 화가 치밀었다. 그 녀석들을 완전히 죽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운전기사가 달려들어 그들의 얼굴과 복부를 발로 짓이기고 있는 그를 말렸기 때문이었다.
반병신이라도 만들어놨어야 했는데... 그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너무 무서웠어요. 이대로 죽는 건 아닐까하고..."
"한참 지나도 당신이 오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했소. 멀리서는 당신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소. 으슥한 곳이라 더 보이지 않았으니까."
"전... 그들이 쉽게 물러나 줄거라고 여겼어요. 그런데... 내 머리를 잡더니 벽으로 밀어부쳤어요. 그리고...날... 내 옷을..."
지나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간신히 말했다. 하지만 그가 다가와 끌어안는 바람에 말을 차마 끝내지도 못 했다.
그의 체온이 얇은 그녀의 옷을 뚫고 들어왔다. 지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힘없이 파묻고는 떨리는 몸을 그에게 기대었다.
"쉬잇-."
유키는 그녀의 등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그녀의 머리 위에 턱을 대고 조용히 말했다.
"그 얘기는 그만해요. 당신에겐 무척 힘든 시간이었소."
"미안해요."
"당신이 미안할 건 없소."
그의 몸이 떨어졌다. 지나는 엄마품에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어린애처럼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유키는 지나의 턱을 받치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이 잘못한 건 없소. 전혀. 당신을 그곳에 혼자 보낸 내가 잘못이지. 내가 갔어야 했소."
"아뇨. 그건 제가 가겠다고 한 거에요."
"그래도 당신을 보내는 게 아니었어. 당신 같은 여자를 그런 곳에 가게 내버려둔 건 내 잘못이오. 그건 매우 어리석고 바보같은 짓이었소."
"하지만... 당신이 날 구해줬잖아요. 덕분에 전 무사해요."
자신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고있는 그의 손 위에 지나는 자신의 손을 가만히 얹었다.
손 아래에서 꼼지락거리는 그녀의 표정이 조금은 평온해 보였고 귀여워 보였다.
유키는 그런 그녀의 맑은 표정에 죄책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음이 무겁게 눌러졌다.
"... 해도 되나요?"
"음? 뭐, 뭐라고?"
지나는 붉은 혈흔이 보였던 그의 가슴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말에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다시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고집스런 입술이 제일 먼저 보였다.
그리고 아까부터 자신의 표정을 열심히 쫓고있던 그의 검은 눈동자에 이끌려 중얼거리듯 말했다.
"키스해도... 되요?"
뜻밖의 그녀의 말에 그는 숨을 쉬는 것을 멈추었다. 잘못 들었으리라.
"???"
"..."
대답없는 그가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려 그를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었다. 턱을 그가 받히고 있어 그녀는 시선만 내리깔았다.
"내가 하는 거요? 아니면 당신이?"
"아, 저기..."
지금까지 그와의 키스는 항상 그녀가 그가 먼저 시작했다.
그는 능숙했고 노련한 키스로 그녀의 정신을 흐려놓았고 완벽하고도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황홀한 테크닉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그의 키스 뿐만 아니라 침대 위에서의 그의 육체는 완벽하게 그 이상의 열정을 그녀에게 불어넣어주었다.
유키는 그녀의 몸이 아직까지 긴장하고있다는 것을 알고 숨쉬기조차 두려울 만큼의 미소를 보였다.
지나는 그 미소에 흠뻑 젖어들어갔다. 얼굴에 그어진 기다란 상처는 처음부터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야성적인 남자였고 닳지 않는 매력까지 소유한 멋진 남자였다. 그녀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으로 답해주었다.
"서툴러도... 이해해... 줄 거죠?"
그의 얼굴 가까이 몸을 내밀며 그녀가 속삭이듯 물었다.
"난 그런 걸 더 좋아하오."
그가 지나의 턱을 끌어당겼다. 지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자신의 입술을 그의 입술 위에 가만히 멈추었다.
누구의 심장소리인지 그녀의 귀에 선명하게 들렸고 그의 입술에 닿은 자신의 입술이 팔딱팔딱 뛰는 것만 같았다.
조금씩 조금씩 입술을 움직였다. 그는 아직까지 가만히 있었다. 가까이 끌어안지도 입술을 벌리지도 않았다.
물론 유키입장에서는 말로 표현하지 못 할만큼의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했다.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를 탐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완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녀와 관계를 맺는 것은 그녀에게 잔인한 짓이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녀는 정말 서툴렀다. 그러나 어설프게 움직이는 그녀의 입술은 세상 어느 것보다 더 부드럽고 달콤했다.
그래서 이미 불끈 솟아버린 흥분은 숨길 수가 없었다. 애써 온몸으로 방어벽을 쌓아올려 거리를 두는 짓은 너무 어려웠다.
갑자기 유키는 다문 입술 사이로 천천히 혀를 내밀고 그녀를 입술을 건드렸다.
'???'
깜짝 놀란 지나는 불에 덴 것마냥 뒤로 도망가버렸다. 그리고 그를 빤히 쳐다봤다.
"왜 그러지?"
"아, 저기..."
"또 아, 저긴가? 키스하고 싶다더니 그게 다요?"
그녀의 얼굴이 수줍게 붉어졌다. 그는 속으로 웃었다.
가끔 야한 말로 그녀를 당황시킬 때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수줍어했다.
붉게 물든 그녀의 얼굴에 키스를 마구 퍼붓고싶을 정도로 그를 매료시킨다는 사실을 그녀는 과연 알까?
"가, 갑자기 그, 그러면 어떻게... 해요?"
"뭘?"
꽤 당황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의 혀가 나타나리라곤 몰랐을 것이다.
조용히 깃털같은 입맞춤만 하고 떠날 생각이었던게 분명했다.
유키는 그녀의 순진한 생각에 피식 웃었다.
"난 당신이 키스를 원하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아, 그게... 마, 맞아요. 하지만..."
"'프렌치 키스(French Kiss)'라고 들어봤소?"
"네? 아, 알아요."
"당신이 조금 전에 한 건 키스가 아니라 단순한 입맞춤이었소. 물론 그걸 굳이 전문용어로 따진다면 '버드 키스(Bird Kiss)'라고도 하겠지만..."
'전문용어'라는 말에 지나는 기겁했다. '버드'라면 새를 말하는 것이다.
그 정도로 그는 전문가였고 완전히 키스에 대해 해탈한 남자인 것 같았다.
유키는 그녀의 뺨을 건드렸다. 실크보다 더 부드러운 그녀의 살결이 손에 와 닿았다. 느낌이 매우 좋았다.
그는 그녀에게 다시 키스를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가 직접 다가갔다. 그의 행동에 놀란 그녀는 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난 버드 키스가 아니라 프렌치 키스를 할 거요. 혀를 쓰는 거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그녀의 얼굴을 감싸며 키스를 해왔다.
그의 키스가 익숙해질대도 되었지만 그녀는 매번 긴장과 흥분을 놓치기 어려웠다.
점점 그의 농도가 짙어지자 어느새 그는 그녀를 자신의 품에 끌어 안았다.
미끌어져 들어온 그의 혀는 주춤거리는 그녀의 혀를 만나기 위해 쉴 새 없이 입 안을 점령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삼켜버릴 듯이 완전히 덮어버렸다.
지나의 몸뚱아리는 이미 그의 키스에 반응했고 그의 옷자락을 놓지 않으려고 손에 힘을 주며 매달렸다.
"이건..."
잠깐 그가 키스를 멈추고 입술을 떼지않은 채 속삭여왔다.
"와이드스페이스 키스(Wide-Space Kiss)'라는 거요."
그리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어버렸다.
그녀의 움직임이 그의 몸에 닿자, 그는 약간 움찔했다. 칼에 벤 상처가 그녀의 젖가슴에 닿았던 것이다.
유키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녀의 얼굴은 아주 달콤한 표정이 녹아있었다. 살짝 감겨져있는 그녀의 두 눈에 그는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올라갔다.
"이것도 키스라 할 수 있지."
지나는 몸서리칠만큼 짜릿한 그의 입맞춤을 오랫동안 느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더이상 키스하지 않았다.
그녀는 빠져나오기 싫었지만 서운함을 드러내지 않고 그에게서 물러났다.
"그만 자요."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려하자, 지나는 얼른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와 눈을 마주치고 말할만큼 그녀는 대범하지 못 했다. 대신 눈을 그의 손을 쳐다보았다.
"있어주실 건가요?"
"아무데도 가지 않을 거요. 난 저기 소파에서..."
그의 묵직한 손이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어깨에 살며시 눌렀다. 그리고 두어번 두드리고는 소파로 걸어갔다.
당연히 소파는 장신인 그가 눕기에는 매우 작았다. 자다가 떨어질지도 모를 것이다.
지나는 차마 그에게 같이 자자는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불이 꺼졌다.
그녀는 이불을 가슴께로 끌어올리고는 어두운 천장을 응시했다.
어디선가 시계소리가 째깍째깍 들렸다. 김 지나는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괜히 시계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시계소리 외에 들리지 않는 무거운 침묵 속에서 그의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숨소리조차도. 그녀는 그를 불렀다.
"저기... 주무세요?"
"아니."
그녀는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그 무언가가 피부로 전해오는 것 같아 두려웠다. 주위가 너무 조용해 더욱 두려움이 몰려왔다.
"주무세요?"
"..."
"유, 유키씨?"
"아니. 안 자고 있소."
유키는 당연히 잠이 오지 않기 때문에 화가 날 이유가 없었지만 가슴의 통증때문인지 그녀가 자꾸 부르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몇 분 후, 또다시 그녀가 그를 불렀다. 유키는 소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1~2분에 한번 꼴로 그를 불렀다.
"대체 잠은 언제 잘 거요?"
"잠이 안 와서요."
"하..."
유키는 앉은 자리에서 팔을 가슴으로 올리고는 팔짱을 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지나가 누워있는 침대 쪽을 뚫어지게 노려봤다.
지금 그녀는 그의 인내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테스트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무슨 심술이란 말인가.
고단할 텐데 그만 자지 왜 그의 굶주린 허기를 채워줄 것처럼 불러댄단 말인가. 유키는 잇사이로 차갑게 대꾸했다.
"나보고 어쩌란 말이오?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거요?"
"그게..."
"어디 아픈 거요? 아니면... 아까 그 일때문에 힘든 거요?"
다행히 그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 달리 부드럽게 누그러져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잠을 못 자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를 악물었다.
"침대가 넓어요. 혼자 자기에..."
"...??"
"그래서 더... 겁이 나나봐요."
"지금... 그게..."
유키는 일어섰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과연 알고 있을까? 그녀의 말은 한 침대에서 같이 자자는 뜻이었다!
"날... 유혹하는 거요?"
"아뇨."
어둠 속에서 그녀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도움을 청하는 거에요."
"같이 자잔 말이오?"
그녀의 대답은 곧장 들리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대답이 나왔다.
"네. 그러고 싶어요."
"..."
하지만 그녀는 그가 딴 생각이라도 할까 봐 얼른 다음 말을 이어 붙였다.
"잠만요. 자, 잠만 같이 자자고요..."
유키는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들뜬 기분으로 기대를 했던 것을 아쉬워하며 속으로 자신에게 비웃었다. 어리석은 인간이라고...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침대 가장자리가 다리에 닿았다. 희미하게 그녀의 형체가 보였다. 어둠 속에서 익숙한 그였다.
이불이 바스락거리며 움직이더니 그가 그녀의 옆으로 유연하게 들어와 누웠다.
그리고 그녀가 간격을 두기도 전에 옆으로 돌아누워 그녀를 품으로 당겼다.
그녀의 허리와 엉덩이를 자신에게 끌어당겨 팔베게를 해주고 다른 팔을 잘록한 그녀의 허리에 둘렀다.
"안그래도 소파에서 진짜 자는 건가 싶었지."
"고, 고마워요... 유키씨."
유키는 고개를 숙여 어둠 속에서도 능숙하게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가볍게 키스를 한 후, 이마로 올라와 굿나잇 키스까지 해주는 그는 완벽하리만큼 자상한 남자였다. 나무랄데 없는 부드러운 남자였고 멋진 애인이었다.
'애인? 유키가 내 애인이라고? 말도 안 돼! 이 남자는 내가 자신을 사랑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어.'
지나는 그에게 바짝 다가가 안겼다. 자신있게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는 행동까지 스스럼없이 해냈다.
'그런데 어떻게 짝사랑만으로 이 남자를 내 애인이라고 여기는 거니?'
그녀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늘 습관처럼...
사토 유키는 몇 시가 되었는지는 절대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그에게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와의 관계를 하지 않고도 무사히 오늘밤을 넘길 수 있느냐였다.
물론 그에게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칼에 의해 다친 상처보다 더 고통스럽고 또한 곤욕스럽겠지만 그는 품안에서 꼼지락거리는 그녀의 동작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제발... 김 지나! 날... 시험하지 마!'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