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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련아! 채련아, 나 어쩌면 좋니? 아앙. 나 이게 뭐니. 대체 이 꼴이 뭐야? 아아앙.”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채련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채련은 한 걸음에 와주었다. 고마운 친구. 바쁘다고 튕기려고 했다가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자 바로 달려온 것이었다. 채련의 차안은 마음껏 울음을 터뜨리기 좋은 장소였다. 쿠션 좋은 의자. 그리고 까맣게 선탠이 되어있는 것까지. 뭐 우는 친구를 마련해 놓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꼭 오늘을 위해 채련이 얼마 전 차를 구입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야, 울어도 좀 조용히 울어. 운전을 못 하겠잖아. 나 면허 딴 지는 오래됐어도 초보 운전이란 말이야.”
“아앙·····!”
“이러다 사고 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나라면 나라지. 지금 기분으로는 살고 싶은 생각도 안 든단 말이야.”
“웃기고 있네. 같이 물에 빠지면 날 밟고 올라올 걸.”
“몰라. 야! 휴지는 없니?”
“아마 없을 거야. 다 썼어. 이제 한강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좀 참아.”
“콧물 났단 말이야.”
“네가 그러니 남자한테 줄줄이 차인 거야.”
채련은 톡 쏘는 듯 하면서도 나의 투정을 다 받아주고 있었다. 평소에 애교가 많다거나 어리광을 부리지 않는 나였지만 오늘 같은 날은 상대에게 마음껏 의지하고 싶었다. 대상이 채련이라고 해도 말이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채련의 집 근처 한강이었다. 채련은 여전히 울먹거리는 나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안도의 한 숨만 내쉬고 있었다.
“휴우. 정말 사고 안 내고 여기까지 오다니 내 자신에게 너무 뿌듯하다. 야! 너 아직까지 울고 있었어?”
“그럼 울지. 오늘 같은 날은 실컷 울어야 돼. 넌 친구가 옆에서 우는 데도 몰랐니?”
“운전에 신경쓰다보니 그랬지. 따뜻한 커피랑 휴지 좀 사줄게 기다려.”
채련은 곧 따듯한 캔 커피 두개와 휴지 그리고 오징어를 사왔다. 차에 냄새가 밸까 평소에는 먹지 않는데 날 위한 배려였다고 어찌나 생색을 내던지 오징어는 뜯지도 않았다.
“채련아!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아니? 비 오는 날 쇼핑백을 들고 가는데 밑이 확 찢어진 기분이야.”
“그래?”
시큰둥한 기집애.
“날 위한 의자가 두 개 있었어. 하나는 보기에도 너무 푹신해 보이는 의자였고, 다른 하나는 마호가니 의자였지. 알아? 마호가니?”
“알지. 붉은 색의 비싼 의자 말하는 거잖아. 내가 바보니?”
“너야 비싼 거 전문이니 잘 알겠지. 두 의자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하나는 의자다리가 부러진 불량품이었고, 아니다. 의자에 압정이 삐죽 나와 있었다고 하자. 암튼 불량이었어. 불량.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의자에 발이 달려 있는지 도망을 가버린 거야. 이젠 두 의자다 나와는 상관이 없는 거지. 지금 내 기분이 그래. 알았니?”
“넌 고등학교 때부터 말을 이상하게 빙빙 돌려 하더라. 한마디로 기분 더럽다 이거 아니야?”
“맞아. 니 말이 딱 맞아. 정말 더러운 기분이야! 어......어엉.”
“희야! 이거!”
채련이 내민 건은 휴지도 아니고 오징어 다리였다.
“뭐야? 사람 울고 있는데.”
“날 믿고 한 번 먹어봐.”
눈물이 묻어 있는 손으로 오징어 다리를 받아들었다. 정말 먹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채련이를 한 번 믿어보고 싶었다. 설마 입 다물라고 준 것은 아니겠지. 그리고 한동안 오징어 다리만 우물거리고 있었다.
“어때? 기분이 좀 나진 것 같아?”
“응. 음. 좀 그런 것 같기도 해.”
“난 우울할 때 입으로 뭘 씹으면 기분이 나아지더라고.”
“별 맛은 못 느끼겠는데 기분은 좀 낫긴 낫다. 신기해.”
믿었던 사람과 날 좋아했다고 믿었던 남자의 자리를 오징어가 대신해줄 수 있다는 건 정말 묘한 일이었다. 하긴 어느 때는 10만 원짜리 수표보다 휴지가 더 요긴하게 쓰일 때가 있으니까.
“윤섭씨는?”
“뭐?”
“윤섭씨랑은 어떻게 할 거냐고?”
“다 끝났지. 날 보려 하지도 않는데.”
“아깝다. 좋은 사람이었는데.”
“맞아. 아까워.”
오징어는 용준씨와 혜림이의 자리만 대신할 뿐 윤섭씨의 자리는 메워주지 못했다.
“희야! 오늘로 다 잊어버려. 내일 또 다른 남자 만나면 되지 뭐. 몇 년 사귀다 헤어진 것도 아니고. 용준이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 같으니까 더 진행되기 전에 잘된 거잖아.”
“맞아.”
“근데 혜림이라는 애 정말 웃기다. 처음 볼 때부터 재수 없더니.”
“걔도 너 처음보고 싫다고 하더라.”
“왠 줄 알아? 속으로 의뭉한 생각하는 애들은 나처럼 직선적인 사람을 싫어하거든. 걔가 날 알아본 거지.”
“맞아. 걔는 생각이 너무 많아. 사람들 생각 하나 하나를 다 읽으려고 하고. 욕은 절대 먹기 싫어해. 너랑은 틀리지.”
“난 욕먹기 좋아하고?”
“넌 남들한테 욕먹는 거 두려워하지 않잖아.”
“그런 걸 왜 무서워 하니? 남들 때문에 사는 것도 아닌데.”
“나도 너처럼 시선들 생각 말고 당당히 살래.”
“그러든가. 문 좀 열자. 냄새 장난 아니다.”
창문으로 시린 바람이 들어왔다. 어느 새 겨울의 한 가운데 있게 된 것이었다.
‘이제 크리스마스 얼마 안 남았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다시 또 우울해 지는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에 또 혼자겠네. 이번에는 데이트를 하면서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흐윽.”
또 다시 눈물이 흘렀다. 오늘은 눈물이 마를 때까지 그냥 마음껏 울기로 했다.
앞으로는 새롭게 살아야겠다는 각오로 일단 정보에 빠른 여자가 되어보자 했다. 신경을 써서 보면 우리 주변에는 좋은 정보들이 넘치고 있다. 평소 갖고 싶었던 제품들의 할인 정보나 경품을 주는 행사들도 유익하다. 주의를 좀 더 기울여 본다면 생각지도 못한 정보도 접하게 된다. 그 때 내 눈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하와이! 상품이 일주일 하와이 여행권이었다.
‘음! 엄마가 좋아하겠는 걸. 딸 덕에 하와이는 꼭 가시겠다고 하신 분이니까. 아빠랑 다녀오라고 하면 좋겠군.’
상품은 좋았다. 하지만 상품을 타기엔 불가능해 보였다. 그건 사내 모델 선발 대회 1등에게 주어지는 상품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보 맨 귀퉁이에 조그맣게 실린 공지는 꼭 이미 당선자가 결정되어 있는 거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작게 공지를 할 이유는 없을 테니까. 당선자는 정해 있지만 절차상 실은 거겠지. 자세히 보니 참가상도 눈에 띄었다. 우리 회사의 유아복 한 벌.
‘이거라도 어디야? 사촌 언니 조카에게 생색이나 내볼까? 음. 전신사진 두장과 간단한 프로필. 그것도 이메일 접수. 어려운 것도 아니니 오늘 내지 뭐.’
이메일을 보내고 받은 편지를 열어보았다. 혜림이의 메일이 와 있었다. 그 날 이후 혜림이는 매일 메일을 보내고 있었다. 어제 자신은 친구 누구와 어딜 갔었노라는 일상적인 얘기였다. 난 평소처럼 가차 없이 완전삭제를 눌러버렸다. 일상생활에서 혜림이와 나는 그 일 전과 눈에 띄게는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정하게는 아니지만 점심시간에 가끔 밥도 같이 먹으러 다녔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내 일상사에 관한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았다. 나에 대해 더 아는 것을 그녀에게 허락하지 않은 것이었다. 혜림이는 그 날 증거를 포착한 후에 집에 온 것이 다였다고 말했다. 용준씨가 한 얘기 -자신이 용준씨가 싫지 않아했다는 것, 그리고 나만 괜찮다고 둘이 만날 수 있다는 것 - 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어떻든 상관없었다. 한 남자에게 선택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그 벽이 그녀와 거리를 두게 만든 것이었으니까. 피해의식이라고 몰아세워도 할 말은 없다. 못난이라 해도 반박할 생각도 없다. 욕하려면 욕하라지. 이젠 욕먹는 것쯤 눈치 안 볼 거라고!
***
며칠 후 과장님이 날 불러 세웠다.
“희씨! 요즘 좀 뻔뻔해진 것 같아.”
“제가요?”
“희씨도 나이가 드는구나. 파릇파릇 신입 때가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말이야. 희씨도 노처녀 대열로 가는 건가? 올해 지나면 스물일곱이지?”
“과장님도. 요즘 스물일곱이 무슨 노처녀에요?”
“내년엔 갈려고? 남자 있어?”
“내년에는 안 갈 것 같은데요.”
“그래? 난 또 시집가고 싶어서 안달난 줄 알았더니. 회사 모델 응시 결과 나왔던데. 위에서 통보가 왔어. 서류 합격했다고. 시집가고 싶어서 응모한 거 아니었어?”
“네? 서류 합격이요?”
“다음주 월요일 면접이래. 내가 응원할 게. 잘 해봐.”
월요일 면접이라니. 통과 된 것은 좋았지만 막상 면접을 봐야 한다니 망설여졌다. 젊고 싱싱한 얘들도 많이 나왔을 텐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반복되는 일상에 던져진 새로운 사건은 남자와의 데이트를 앞둔 것보다도 설레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