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그의 생일>>
늦게 와서 저녁을 차려주지 않아 그가 이처럼 화내는 것이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나가면 일이 생겨 늦을 수도 있는 거지. 그녀를 거칠게 다룰 권리는 그에게 없다.
그가 조금 전에 보인 행동은 마치 남편이 아내에게 당연히 요구하는 것처럼 굴었다.
지나는 벽시계를 힐끗 쳐다봤다. 그가 말한 10분이라는 시간이 달랑 1분 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서둘러 샤워를 끝냈는데도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니. 만약 올라가지 않으면 그가 내려올까?
그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올라가지 말고 그냥 있을까 하는 생각이 빠르게 뇌 속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초침이 딸깍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두렵게 들려와 그녀의 몸은 저절로 방문을 나서고 있었다.
'이게 뭐야? 그가 오란다고 죽은 듯이 올라가는 건?'
어쩌면 그가 이렇게라도 나와주기를 은근히 바랐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했다. 그가 어떤 이유로 화를 내든 상관없다고 여겼다.
2층 유키의 방문 앞에 멈춘 그녀는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나 안에서 문이 먼저 획 열렸다.
깜짝 놀란 그녀는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먼저 뻗은 유키의 손에 잡혀 안으로 이끌리고 말았다.
"자, 잠깐만요!"
하지만 그의 입술은 그녀가 말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가차없이 공격해왔다.
숨이 막힐정도의 강력한 흡인력이었다. 그녀의 입술을 삼켜버릴 것처럼 그가 달려들었다.
그가 다급하게 키스를 해대며 그녀의 허리를 거칠게 끌어안은 채 침대로 이끌었다.
"하, 할 얘기가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의 입술이 잠깐 떨어졌을 때, 그녀가 재빨리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키스의 여운으로 매우 떨렸다.
그의 눈은 여전히 자신의 강압적인 키스에 그만 부풀어있는 빨간 입술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시선을 그녀의 검은 눈동자로 옮겼다.
"있었지. 10분 전까지만해도 있었소."
"그게 뭐죠?"
"나중에."
그가 다시 그녀에게 키스하려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지나는 얼른 고개를 살짝 돌렸다.
"듣고싶어요. 뭐죠?"
그녀는 정말 궁금했다. 뭔가 중요한 말이었을 것 같았다.
만약 자신이 기대하는 대답이라면 그녀도 그에게 하고싶은 말을 어쩌면 쉽게 꺼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닐 거야. 그가 날 사랑하게 되었다는 말같은 건... 아냐.'
끝없는 망상은 후회를 만들 뿐이었다. 이미 그녀의 사랑이 그렇게 아프게 지나가질 않았던가.
"나중에 해주겠소."
"유키씨."
갑자기 그가 그녀를 침대로 밀어부쳤다. 그리고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가 그녀를 거세게 눌렀다.
"나중에! 나중에 기억나면 그때 말해주겠소.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이미 질투에 눈이 멀어 앞을 제대로 내다보지도 못하고 있는 남자에게 뭘 듣고싶어한단 말인가.
그는 그녀의 셔츠 단추를 재빠르게 풀기 시작했다. 어깨로 옷을 젖히려고 하는데 그녀의 손이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뭐요?"
"제, 제가 벗을게요."
그가 그녀의 얼굴에서 진심을 찾아보려는 듯 내려다봤다. 이내 그가 몸을 일으켰다.
지나는 침대 옆으로 나와 그에게 등을 돌린 채로 겉옷을 벗기시작했다. 얇고 심플하게 디자인된 브래지어와 팬티만이 남았다.
유키는 천천히 그녀가 브래지어 끈을 내리는 것을 지켜봤다. 엉덩이를 감싸고 있는 작은 팬티만이 그녀의 몸을 가려주었다.
그녀의 손이 팬티로 내려갈 때였다. 그녀의 어깨가 가녀리게 떨리는 것을 본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고있단 말인가.
그는 그녀의 뒤로 가서 팬티를 끄집어내리려는 그녀의 손을 치우고는 뒤에서 그녀를 꼭 껴안았다.
정말 그녀는 울고있었다. 자신을 사랑해주지도 않는 남자 앞에서 옷을 벗는 기분이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거칠게 다룬 남자에게 증오를 퍼부을 것이다.
그는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결에 입을 갖다대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그럴 필요없소.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살짝 돌렸다. 그녀의 뺨이 어느새 젖어있었다. 그는 젖은 뺨을 닦아주었다.
자신때문에 그녀가 우는 모습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니 그녀를 안을 수가 없었다.
"저... 할 얘기가 있어요."
"뭐요?"
그녀는 잠깐 뜸을 들였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얘기를 해야했다.
"그만...둘게요."
"???"
그녀를 껴안았던 그의 팔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여기 그만두려고요."
한달 전 그녀에게 그만두라고 했을 때 그녀는 있겠다고 했다. 그만두게 되면 그에게 얘기하겠노라고. 바로 그날이 다가온 것인가.
유키는 꿈틀거리는 턱을 다물고는 그녀에게 둘렀던 팔을 천천히 풀고 뒤로 물러났다.
왜 갑자기 그녀가 그런 결정하게 되었는지 들을 생각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돌아선 채 다시 벗었던 옷을 걸쳤다. 브래지어만 빼고. 그리고 그에게 돌아섰다.
"레이에게는 어떻게 말해야할지 걱정이네요. 이번 주 중으로 짐을 정리할거에요. 그때까지만 봐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전혀 생기가 없었다. 맑은 눈동자는 가득 고인 눈물때문에 더욱 흔들려보였다.
"이번 주 중? 봐달라고?"
그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레이였다.
그녀의 마음 속에 크게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상대가 자신이 아니란 사실에 화가 났다.
"진심이오?"
"네."
유키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눈을 피했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면 또다시 그녀를 껴안을 것만 같았다. 이번에는 그녀를 결코 놔주지 않을 것이다.
"잘 자시오."
"..."
그녀가 움직이지 않고 있자, 그가 차갑게 식어버린 시선으로 그녀를 내몰고 있었다.
"피곤할테니 가서 자요."
그가 가만히 서있는 그녀를 쌀쌀맞게 지나치고는 서재로 들어가버렸다. 그녀는 속옷을 챙겨들고 그 방에서 나왔다.
막상 그녀의 입에서 그만둔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유키는 배신감에 화가 났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여자가 지금에 와서야 떠나려고 했다.
그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몰랐다. 그새 사랑이 식어버리기라도 했나?
그는 글을 치던 손을 멈추고는 이미 헝클어진 머리를 빗어넘겼다. 또다시 머리를 자를 때가 된 것 같았다.
'제기랄! 도대체 왜 갑자기!'
당장 내려가서 그녀에게 따져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아야 했다.
다음 날. 지나는 레이가 학교에 간 후, 옷장 위에 놔둔 커다란 트렁크와 구해온 상자를 꺼내어 옷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작정 나갈 생각은 아니었다. 한달 정도의 여유를 가질 생각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왔던 것이다.
그에게 진실을 털어놓지 못하는 마음과 사랑하면서도 그의 곁에 머물 수 없는 현실에 가슴이 미어질 듯이 아팠다.
그가 없는 곳에 가버리면 그를 향한 그리움만 쌓이다가 어느 시기에 세월따라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에 더 있어봐야 상처 받을 사람은 그녀였다. 마른 옷에 눈물이 계속 떨어지자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재빨리 옷을 주섬주섬 담았다.
이번 주라고 해봐야 고작 나흘 뿐이었다. 그 시간 동안 살 곳을 구해야 했다.
유키에게 받은 월급은 고스란히 통장 속에 있지만 그 돈으로 집을 구하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군.'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울었던 자국이 선명했다.
레이가 돌아올 시간은 한참 멀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운전기사가 거실에 있었다. 그는 그녀를 보고 가볍게 목례를 했다.
"어디 아프세요?"
그가 이상한 눈길로 쳐다봤다. 그녀는 얼른 아무것도 아니라며 돌아섰다.
"시원한 거라도 드실래요?"
"아뇨. 따뜻한 커피 한 잔 주세요."
"네."
그동안 기사는 거실에서 신문을 펼쳐들었다.
그녀가 내온 커피를 받아들고 몇 모금 마시고 있을 때였다. 유키가 계단을 내려왔다.
유키는 주방에 지나가 있는 것을 무시하고는 기사에게 커다란 봉투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덧붙여 빠른 등기로 보내라고 했다.
"네."
기사가 나가고나자 유키는 계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다가 주방에서 요리하고 있는 김 지나를 불만스런 눈길로 바라봤다.
그의 시선을 의식한 그녀가 동작을 멈추었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고 그에게 말했다.
"뭐 할 얘기라도 있나요?"
"레이한테는 언제 말할 거요?"
"그, 글세요... 마음이 아파서 제대로 말이 나올지 모르겠네요."
그녀는 여전히 아이가 상처를 받을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의 기분같은 것은 상관없다는 것이다.
"보리와도 헤어져야하니까... 예전보다 더 마음의 문을 닫으면..."
"그렇게 레이가 걱정되오? 정 그렇게 녀석이 걱정되면 나가는 걸 그만두던가!"
지나의 동그란 눈이 주방 입구 쪽에 서있는 그를 응시했다.
그녀에게 소리지른 것이 미안한지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의 인상은 굳어 있었다. 최근에 그의 작은 미소 하나라도 본 적이 언제인지.
"그럴 수는 없어요."
"뭐라고 설명할 거요?"
"아, 그건..."
그는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2층으로 올라가버렸다.
더이상 그녀의 말을 듣기 싫었다.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흥! 그래, 나가고 싶으면 나가! 나도 당신 꼴 보기싫으니까!'
오후에 레이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지나는 오늘 아이에게 얘기하지 않으면 더 힘들어질 것 같아 조용히 아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와서 공부할 책을 꺼내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서자, 아이는 웃으며 그새 친해진 짝지에 대해서 말했다.
"오늘 친구생일인데 조금있다가 놀러갈 거에요. 무슨 선물이 좋을까요? 선생님도 여자니까 잘 아시잖아요. 꽃 선물을 할까요?"
아이의 눈은 여자친구에게 줄 선물에 대해서 고민하느라 잔뜩 흥분되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 아이에게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저렇게 행복해하고 있는데... 친구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저렇게 좋아라하고 있는데 어떻게 잔인한 말을 한단 말인가.
'절대 그럴 수 없어! 도저히 말 못 해!'
지나는 입술을 불안하게 씹으며 레이의 말에 호응을 해주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였다.
"선생님은 무슨 선물을 받고싶어요?"
"음?"
"생일선물로."
레이는 거실로 나가서 테이블 위에 책과 필기도구를 내려놓았다. 아이는 그녀의 뒤따라 나오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글쎄. 선물을 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
"그게 무슨 뜻이죠?"
"아, 그건 나한테 선물을 주고싶어하는 사람과 많이 친한지가 중요하겠지. 그 사람하고 좋아하는 사이인지, 뭐 그런 거..."
아이가 말똥말똥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아주 많이 친한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을 받고싶어지지. 가격은 중요한게 아니니까.
하지만 그다지 친하지도 않는 사람한테는 무슨 선물이 받고싶다고 말하기가 어렵잖아. 안 그래?"
"선생님은요?"
"음?"
"선생님은 저 좋아하시죠?"
"그럼! 그걸 질문이라고 해?"
"그럼 저한테서 생일선물로 뭘 받고싶으세요?"
마치 아이는 그녀의 생일이 언제인지 알고있어서 그녀가 무슨 선물을 원하는지 정보를 얻으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아이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말했다.
"음... 레이한테 바라는 건 하나밖에 없는데, 어쩌지?"
"뭔데요?"
"항상 행복해지기를 바라. 언제나 밝고 건강한 모습 말이야."
"치... 시시해. 그게 무슨 선물이라고."
"으음. 그게 얼마나 큰 선물인데."
돈으로 살 수 있는 선물이 아니라서 아이는 약간 실망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헤어질 경우를 대비해 아이를 기억할만한 선물을 생각했다.
"그럼, 예쁜 손수건 하나."
"손수건요?"
"음, 선생님은 푸른색을 좋아하니까..."
"싫어요!"
갑자기 아이가 소리를 지르며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와 일어났다. 아이의 행동에 지나는 놀랐다.
"왜 그러니, 레이?"
"그거 말고는 없어요?"
아이는 집요할 정도로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거 말고는 없는데."
"싫어요! 씨... 손수건은 안 돼요, 선생님!"
아이의 눈에서는 닭똥같은 눈물이 손등으로 훔쳐내며 말했다.
왜 갑자기 우는 거지? 지나는 얼른 다가가 눈물을 닦아주었다.
"손수건은... 안 돼요. 이별을 뜻하니까 안 돼요."
"아, 레이..."
초등학교 3학년인 남자아이가 손수건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있는지 알고있을 줄은 몰랐다. 그녀가 그것을 달라고 했을 때 아이가 화를 낼만도 했다.
"레이... 난..."
"아버지께서 무슨 잘못을 하셔도 용서해주세요."
"뭐? 그게 무슨 뜻이니?"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아버지께서 선생님한테 화내시고 반찬투정하는 거 제가 대신 용서빌게요. 그러니까... 꼭 계셔야해요."
"레이..."
지나는 훌쩍거리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아이는 벌써부터 지나와의 이별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버지때문에 그녀가 나가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더욱 아이에게 사실을 말하기가 어려워졌다.
"선생님! 오랫동안 제 곁에 계실 거죠? 보리랑 같이 여기 사실 거죠?"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이번 주에 그녀가 떠난다는 말이 차마 입밖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우는 아이의 등을 쓸어주던 그녀는 계단 중간쯤에 서있는 유키를 발견했다.
"저랑 약속하실 거죠? 네?"
"아, 저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 남자의 시선을 마주하기가 너무 곤욕스럽다 못해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유키는 그녀가 아이의 말에 어떤 대답을 할 건지 해보란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레이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그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 말았다.
"그래. 약속할게."
대답과 동시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을 동시에 느꼈다.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녀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이유가 머릿속을 온통 시커멓게 만들었다. 임신한 사실을 언젠가 유키가 알게 된다면 그녀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레이."
계단에 있던 유키의 목소리에 레이가 그녀의 품에서 떨어졌다. 아이는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젖은 뺨을 손으로 닦아댔다.
"공부는 조금 있다가 하거라. 선생님하고 할 얘기가 있으니까."
"네..."
레이는 수납장에서 과자봉지를 들고 보리와 함께 마당으로 나갔다. 아이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해맑은 웃음을 띄며 보리와 뛰어놀았다.
지 재영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고는 옆에 앉은 친구를 쳐다봤다.
그곳에 있는 것이 힘들어서 나오고 싶다는 지나의 말이 그다지 믿음이 안 갔다.
"야. 하나만 묻자."
재영은 남은 햄버거를 입에 넣고 씹으며 말했다. 그녀는 벌써 두 개째 햄버거를 먹었다.
"거기서 나오려는 이유가 뭔데? 저번에는 아이가 너무 좋아서 있고싶다며?"
"그게..."
"혹시 너... 그 애아빠 좋아하게 됐어?"
"어?"
지나가 흠칫 놀라며 친구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돌렸다. 재영의 시선이 너무 예리했다.
"이런... 그 남자 사랑하는 구나, 너?"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은 여자치고는 입이 무거웠다. 하지만 화가 나면 무슨 말이든 다 해버리는 것이 문제이기도 했다.
"그 남자한테 얘기했어? 사랑한다고?"
"음... 한달 전에."
"그런데 그 남자는 너 사랑하지 않아서 힘들다? 그래서 일을 그만두겠다?"
그러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지나는 차라리 지금 힘든 시련의 원인이 그를 짝사랑하고 있는 것이길 바랐다.
재영이 날카롭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무슨 문제 있는 거 맞지? 그냥 그 남자를 사랑해서 힘들다는 말은 하지 마라. 안 믿으니까."
"나... 임신했어."
재영이 콜라를 마시다가 그녀의 말에 그만 사래걸리고 말았다. 심하게 콜록콜록 거리던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괜찮아?"
재영은 등을 두드려주는 지나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조용하면서도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임신? 누구..."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 제일 먼저 '서 동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나 곧 지나의 입에서 '사토 유키'라는 이름을 듣고 안심해야 했다.
"진... 진짜?"
지나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마냥 얼굴에는 핏기라곤 없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 생기가 있던 피부도 푸석해보이기까 했다.
갑자기 김 지나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울음을 쏟아냈다. 그녀는 그의 아이를 키우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혼자서라도 아일 키울 거야."
그런생각이라면 지나는 그곳에서 나와야 했다. 그녀가 그곳에 있으면 언젠가 사토 유키가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의 아이는 원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재영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김 지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 중에 몇 가지를 들려주었다.
그와 다퉜던 일, 열정적으로 관계를 가졌던 일, 그와 함께 밤에 바다에 같이 가서 있었던 일까지도 말해주었다.
얘기하는 동안 그녀의 눈빛은 반짝이기도 하다가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재영은 그 사토 유키라는 남자의 심중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아들한테까지 질투를 하는 것을 보면 단순한 육체적인 욕심으로 질투를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바닷가에서 일어났던 일은 결코 그렇게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녀가 비를 맞고 길에 쓰러져있는 것을 찾으러 나가서 데려온 일, 바닷가에서 그녀를 구해주다가 가슴을 심하게 다친 상태로 호텔까지 안고 와서 밤새 지켜준 것까지.
모두가 욕구나 호기심 그 이상의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이 명백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깨닫지 못하고 숨기려고만 하는 것인가.
"마누라는 어떻게 된건데?"
갑자기 재영이 유키의 죽은 아내 얘기를 꺼냈다.
"나도 잘 몰라.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밖에. 아내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그렇게까지 고통스러웠나? 그정도로 사랑했던 여자였단 말야?"
사랑했던 여자... 지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통증이 느껴지는 가슴을 매만졌다.
최근에는 이런 증상들이 너무나도 자주 일어났다. 과거에 남자와 연애할 때는 이런 증상을 겪어보지 못 했다.
그녀는 유키의 죽은 아내가 어떤 여자였는지 너무 궁금했다.
그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레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누가 알고 있을까.
'유스케가?'
유스케는 유키의 친구였다. 그의 말로는 유키와 오래된 친구라고 했으니 그녀가 궁금해하는 것을 말해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유스케는 그녀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다.
마음 정리를 아직 하지 않았는지 이틀 전 그를 만났을 때 그의 눈빛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아직까지 자신에게 마음을 두고있는 그에게 유키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벌 받을 짓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 두 여자는 커피숍에서 나왔다.
"나 때문에 햄버거 싸들고 여기서 점심 때우게 해서 미안하다."
"아니. 네가 시간이 안 되는데 뭐."
"그래도 너보고 점심 심부름이나 시키게 만들었잖아. 진작 알았으면 이렇게 멀리까지 오란 소리 안 했을 거다. 대신에 담부터는 내가 달려가지."
"알았어."
재영은 자신의 차에 타라고 했다. 그리고 가는 내내 그녀에게 먹고 싶은 것이 없냐고 귀찮을 정도로 물어댔다.
아내를 생각하는 남편의 행동같이 여겨질 정도였다.
"힘들면 언제든지 거기서 나와. 궁상떨고 있지 말고. 더 상처받기 전에. 집은 뭐 좀 좁지만 너랑 둘이서 살 정도는 돼. 그러니까 언제든지 와. 알았어?"
"음, 고마워."
"진작에 말하지 않고. 한달 동안 얼마나 힘들었던 거야?"
"..."
"참나... 너도 미련하다. 먹고싶은 거 있음 말해 사줄테니까. 새벽이든 필요하면 연락해.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려갈게."
지 재영은 서 동인에게 지나의 임신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했다. 녀석이 알면 당장에 그 남자에게 달려가 멱살 잡을지도 모를 테니까.
지나가 그 애아빠를 짝사랑하듯이 서 동인 또한 한 여자를 오랫동안 마음에 담고 있다는 걸 아는 이상 고통을 얹저주고 싶지 않았다.
세 사람이 토요일 점심식사를 하고있을 때였다. 희미하게 벨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는 미처 듣지 못한 지나에게 방에서 핸드폰이 울리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지나는 식사를 하다가 방으로 달려갔다.
유스케 전화였다. 오늘 저녁약속이 있다는 것을 그녀는 잊지 않고 있었다.
"장소는 정했나요?"
유스케가 물었다. 지나는 없다며 그가 먹고싶은 것이 있으면 직접 정하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비싼 거 먹어도 됩니까?"
"다음 날 제가 굶어쓰러지는 일만 없게 해주면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내가 책임지면 되니까."
"..."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농담입니다."
"그럼 있다가 뵙죠."
지나는 핸드폰을 하염없이 멍하니 내려보다가 노크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약간 열려진 문틈 사이로 유키가 있었다.
"식사 후에 차 한잔 합시다."
할 얘기가 있다는 뜻을 남기고 그녀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돌아서 가버렸다.
지나는 유키의 싸늘한 태도가 전혀 변하지 않아 쓸데없이 기대했던 자신을 욕했다.
레이의 약속을 들었던 유키가 조금은 달라질 거라고 기대했던 자신이 바보같았다.
그녀에게 먼저 이곳을 나가라고 말한 사람은 그였다. 그런 그가 그녀가 남아있게 된 것을 기뻐할 리가 없었다.
육체는 기뻐할지 모르지만 그의 기분은 매우 안 좋다는 것을 알았다.
"뭐죠?"
식사를 끝내고 2층으로 두 잔의 차를 준비해서 올라간 그녀가 그의 앞에 차를 내놓으며 물었다.
"앉으시오."
그녀는 그의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조금 달라진 그의 외모를 유심히 바라봤다.
이곳에 처음 올 때보다는 그의 외모와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머리는 여전히 덥수룩했지만 결은 부드럽고 윤기가 있었다. 그리고 자주 면도를 하는지 예전보다 매일 턱이 깔끔했다.
또한 주로 입었던 검은 색 계통의 셔츠가 아니라 조금은 밝은 톤의 셔츠를 입기 시작했다. 베이지색과 푸른색 그리고 아주 가끔은 흰색도 입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감정은 여전히 냉혈하다는 것을 알고는 그가 꺼낼 말을 기다렸다.
"오늘 저녁 때 시간 있소?"
"네?"
"없으면 나랑 갈 데가 있소."
"아, 저기... 어딜..."
"시간은 있는 거요?"
"그게 저기..."
지나는 유스케를 만나서 같이 저녁을 먹기로 한 것을 말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 유스케가 이곳에 따라와서 그녀에게 키스를 하던 날, 그날 유키가 목격했던 것이다.
그때 그가 바라보던 시선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냉정하고 싸늘해 심장이 얼정도였다.
"무슨 일인데요?"
"약속 있다면 됐소."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표정은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지나는 자신의 찻잔을 들고 방에서 나왔다.
유키는 그녀의 표정을 읽었다. 조금 전 아래층 그녀의 방문 앞에서 통화하는 내용을 얼핏 들었을 때 누군가와 저녁약속을 한 것 같았다.
그녀가 존칭을 쓰는 걸 보면 친구는 아니었다. 상대가 남자라는 예감이 강하게 밀려왔다.
똑똑- 창문을 내다보고 있던 그는 몸을 돌리지 않고 누구냐고 물었다.
"저에요, 아버지."
"무슨 일이냐?"
"들어가도 되나요?"
유키는 아직 한번도 아들을 자신의 방으로 들여보낸 적이 없었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들어오라고 했다.
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레이가 들어왔다. 뒤따라 오던 보리는 차가운 시선이 날아오자 꼬리를 흔들며 문 입구에 앉았다.
"뭐지?"
그는 자신보다 훨씬 작은 아들을 내려다봤다. 레이는 아버지 방을 넋을 놓고 구경하다가 그의 말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거요."
아들이 내민 것은 포장된 상자였다. 그의 짙은 눈썹이 놀란듯 움직였다.
아직까지 아버지에 대해서 긴장감과 거리감을 조금은 가지고 있는 아이는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서, 선물요."
"..."
유키는 아들의 머리꼭지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내 생일선물이냐?"
"네..."
아들이 내민 상자는 제법 컸다. 그 안에 뭐가 들었을지 너무 궁금했다. 그는 상자를 받아들고 앉으라고 했다.
그러나 레이는 고개를 저으며 얼굴을 붉히며 자신이 나가면 선물상자를 열어봐달라고 말했다.
"왜지?"
"그게... 저기..."
"흠... 알았다. 그래, 알았다. 그렇게 하마."
"생신 축하드려요, 아버지."
유키는 아들을 가볍게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그제야 아이의 얼굴에는 귀엽게 웃음이 번져 있었다.
레이가 나가자 유키는 상자뚜껑을 열었다. 그 속에는 여러 개 포장 된 선물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편지 봉투도 들어있었다.
그는 그 중에 봉투 하나를 집어 뜯었다. 초등학생치고는 글씨가 너무 엉망인 편지였다.
몇 글자 읽어본 그는 어느새 미소를 짧은 미소를 지었다. 이 편지는 레이가 여섯 살 때 그의 생일을 축하하며 쓴 편지였다.
그는 다른 편지도 읽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편지는 조금은 글씨가 알아봐줄만 했다. 그리고 여섯 살 때 쓴 것보다 조금은 단어 몇 자가 더 많았다.
상자 속에 있는 편지와 선물은 7~8년 동안 아버지의 생일선물을 챙겨서 보관해두었던 것이다. 편지와 함께.
오랫동안 아버지를 만나지 못 해 전해주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그동안 못 전해준 선물과 편지를 한꺼번에 주는 것이었다.
그의 단단하고 차가운 심장이 따스한 온기에 스며들더니 훈훈해지고 있었다.
아들은 그동안 얼굴도 내밀지 않고 있는 아버지의 생일을 한번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저절로 아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아들에게 자신은 해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열 살 짜리 아들녀석보다 나은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아들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김 지나에게 상처를 주고 내보내려고 했을 뿐이었다.
유키는 만년필, 시집, 겨울용 털슬리퍼 등 아들이 준 선물을 하나씩 만지작거리다가 고스란히 내려놓고 뚜껑을 닫았다.
외출 준비를 끝낸 지나는 나가기 전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아까 유키가 꺼낸 말을 기억했다.
왜 시간이 있느냐고 물었는지 궁금했다. 그는 같이 갈 데가 있다고 말했다. 그곳이 어딘지 궁금해 유스케의 저녁약속을 미루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그러기에는 시간이 다 되었다.
계단을 내려오던 그녀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있는 레이를 만났다. 아이 곁에는 여전히 보리가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먼저 발견한 보리가 당장 달려왔다. 하지만 레이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레이."
다른 때라면 예쁘게 화장을 하고 옷을 입으면 제일 먼저 칭찬을 아끼지 않는 아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잔뜩 골이 난 얼굴로 만화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레이."
하지만 아이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갔다올게."
현관에서 구두를 신고있자, 레이가 그녀를 부르며 다가왔다. 아이의 얼굴에서 오랜만에 차가움을 발견했다.
"선생님은 좋아하는 사람한테서 뭘 받고싶으세요?"
또 선물 얘기였다. 지나는 진짜 아이가 자신의 생일을 알고서 묻는 말이 아닐까 의심했다.
"넌?"
"제가 갖고싶은 건 돈으로 살 수 없어요."
"그래? 뭔지 물어봐도 돼?"
"엄마요."
아이는 전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 대답에 숨을 삼키며 놀란 지나는 아이의 말투가 그다지 부드럽지 못하다는 걸 느끼고는 간신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 그래?"
"선생님은요?"
"난... 없어."
"난 알아요. 선생님이 뭘 갖고싶어하는지."
"???"
"사랑."
지나는 아무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이는 예전에 감정이 전혀 없는 눈을 가진 열 살 짜리 남자아이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뭘 갖고싶어하시는지 아세요?"
"음? 아버지? 그, 글쎄..."
"오늘 아버지 생신이세요."
"???"
지나는 레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다시 한번 움직이는 아이의 입모양은 고스란히 '아버지 생신'이라고 말해주었다.
유키의 생일이라고? 지나는 전혀 몰랐다. 그래서... 그가 아까 오늘 약속있느냐고 그녀에게 물었던 것이다.
지나는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미 유스케와의 저녁약속시간이 다 되어갔다. 지금 급히 가야 제시간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먼저 유스케와의 약속이 중요했다.
"모르셨죠?"
"아, 음... 그런데 어쩌니? 약속이 있는데..."
그녀가 아버지의 생일을 잊고 약속때문에 나가는 것을 레이는 화가 났던 것이다.
"미안하구나. 대신... 선물을..."
"지금 선생님 가시면 아버지 선물 소용없어요."
지나는 시간이 점점 흐르고 있다는 걸 느끼며 다급하게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다녀오세요."
레이는 대답하지 않고 인사를 하고는 돌아서서 거실로 갔다.
지나는 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확이하고는 재빨리 현관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오늘도 여전히 아름다운데요?"
"고마워요, 유스케."
번화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아늑한 음식점이 있었다. 음식은 매우 맛깔스러웠고 장식또한 예술처럼 훌륭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지나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무슨 생각해요?"
식사를 끝내고 차를 마실 때 유스케가 물었다. 지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며 커피가 아닌 녹차를 마셨다.
"무슨 문제라도?"
유스케는 이미 그녀가 이곳에서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해댔는지를 정확히 기억했다.
그녀와 만난 시간은 두 시간이 조금 못 되었지만 정확히 열 여섯 번을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는 턱근육을 실룩거리며 그녀에게 쾌활한 음성으로 나가면 영화를 보자고 했다. 그러나 지나는 선뜻 찬성하지 않았다.
"그게..."
"다른 약속이라도 있습니까?"
"아, 아뇨.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당신이 불안하게 있거든요. 뭔가 중요한 것을 해야하는 사람처럼..."
지나는 그의 시선이 자신의 마음 속을 들여보는 것 같아 내심 떨렸다. 흘러내린 옆머리를 뒤로 넘기며 속으로 긴장했다.
이때 유스케의 손이 날아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럼 조금 더 있다 가도 되겠군요, 지나씨?"
"네? 아, 네..."
유스케는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의 핸드백을 건네주었다.
그가 계산을 하는 동안 입구로 가던 지나의 발걸음은 쇠덩이라도 매달아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그녀는 바깥으로 나와 핸드폰을 꺼내었다. 집으로 전화를 하자, 레이가 받았다.
"아버지 계시니?"
"아뇨. 나가셨어요."
"뭐? 어, 언제?"
"선생님 나가시고 나서 20분 쯤 지나서요."
"그럼 너혼자 있는거니?"
뒤를 힐끔 쳐다보자 아직까지 유스케가 나오지 않았다.
"아뇨 아저씨랑 같이 있어요."
"그래? 레이. 아까 아버지가 나한테 같이 갈데가 있다고 했는데 혹시 거기가 어딘지 알고있니?"
"아뇨."
실망감이 몰려왔다. 유스케가 나오기 전에 통화를 끝내야 했지만 유키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 상태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아저씨가 아세요. 잠깐만요."
"그래!"
지나는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는 것을 듣고 유스케란 걸 알았다. 자신도 모르게 그만 핸드폰을 재빨리 끄고 핸드백에 넣었다.
그의 차로 향하는 길이었다. 핸드백 속에서 벨이 울려댔다. 그녀가 받지 않고 있자, 유스케가 이상한 눈길을 던졌다.
"전화 온 것 같은데?"
"네? 아, 안 받아도 되요. 왜 모르는 번호 있잖아요? 그런게 자꾸..."
"아, 그건 나한테도 자주 걸려오죠."
열 번 정도 울리던 벨은 그녀가 차에 올라타자 멈추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딩동'하며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는 벨이 들렸다.
정면을 보고 운전하는 유스케를 힐끗 쳐다본 지나는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사장님께서는 **동 S호텔 옆 <로즈마리>에 가셨을 겁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