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지끈거리는 머리는 머리에 머리를 하나 더 얹은 듯 무거웠다. 무거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내가 어젯밤에 미쳤었구나!
‘내가 왜 그랬던 걸까? 도대체 왜? 사람들 앞에서 민망한 춤을 추다니 말이야. 비싼 술 사줬더니 고마워서 쇼를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이제 추태란 추태는 다 보여줬으니 창피해서 사람들을 어떻게 봐. 참! 윤섭씨! 윤섭씨한테 내가 뭐라고 했더라. 날 걱정하는 거냐고 베실베실 웃었던 것 같은데. 왜 전공도 아닌 애교를 떠냐 말이야?’
생각이 윤섭씨에게 미치자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에 회사로 향하는 발걸음은 더욱 힘이 빠지는 것이었다.
‘아! 회사에 가기 싫다. 정말. 아프다고 할까? 아니면 저번처럼 팔을 부러뜨릴까? 차는 너무 무섭고 오토바이도 많이 다칠 것 같은데. 어디 자전거 안 달려오나? 달려오면 확 뛰어들고 싶다!’
하지만 출근길 자전거는 구경도 하지 못한 채 회사에 다다랐다.
“문대리! 화장실 갔었어? 홍보부장님 호출 왔었어.”
점심시간이 끝나고 조금 후에 과장님이 부르셨다.
“아, 예.”
“어, 문대리! 지금 뭐해?”
“전화 드리려고요.”
“누가 전화를 하랬어? 전화하지 말고 직접 가봐.”
‘아, 참! 얼굴 보기 민망해서 그러지!’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과장님은 당장 홍보부로 가라고 난리였다. 아침부터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게 내 자리만 지켰던 나는 할 수 없이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으로 홍보부로 향했다.
“우리 회사 모델 오셨습니까?”
어째 김부장님이 싱글거리는 웃음이 날 비웃는 것처럼 보여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부장님! 어제는 잘 들어가셨어요?”
“그럼. 문대리도 잘 들어갔나?”
“예. 이사님 덕분에 집까지 편하게 왔어요.”
“아, 그랬지. 이사님 차타고 갔지?”
“예. 그런데 무슨 일로······?”
“오늘 이PD에게 연락이 왔었어. 일단 지면광고부터 써보고 싶다고 하더군. 그 전에 카메라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고 하던데.”
“카메라 테스트요?”
“내일 오후 3시까지 자기 사무실로 와 달라고 했어. 공문이 온 것은 아니지만 업무 협조 요청이니까 실수 하지 말고 잘 하라고.”
‘내일이면 크리스마스이브잖아?’
“문대리!”
“예?”
“무슨 생각해? 전례 없던 일이니까 내일 고분고분 업무에 협조하라고!”
“예. 알겠습니다.”
“알았으면 나가 봐요.”
‘크리스마스이브를 나랑 보내고 싶다는 거지? 나한테 직접 말하기는 자존심이 상하니까 회사에 업무 요청식으로 불러낸다. 어쭈, 머리를 좀 쓰는데.’
이로서 어젯밤 윤섭씨 행동의 의도는 모두 파악된 셈이었다.
‘윤섭씨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나도 이젠 머리를 좀 숙여줘야겠지. 내일 만나면 잘 해보자고 먼저 말하는 거야. 그럼 못 이기는 척 알았다고 하겠지? 하하. 이번 크리스마스엔 드디어 솔로 탈출이다. 하하.’
어제까지 시달렸던 연말우울증은 이제 내 것이 아니었다. 내게는 즐거운 일만 남은 것이었다.
‘세상의 솔로들이여! 필요하다면 내 우울함을 가져가라!’
작은 컴팩트 속의 내 얼굴은 활짝 웃고 있었다.
***
다음 날 오후 3시.
일찍 퇴근한 기분으로 윤섭씨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핸드폰 번호는 물론 알고 있었지만 업무상의 일이니까 명함에 있는 회사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이윤섭 PD님 좀 부탁드립니다.”
“문희 대리님?”
“예.”
“도착하셨어요?”
“회사 앞이에요.”
“잠깐만 기다려요. 제가 내려갈게요.”
‘오, 예스!’
광고와 상관없이 날 불러낸 것이라는 내 예상은 맞는 듯 했다. 업무상 일이라면 회사로 올라오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윤섭씨는 본인이 내려오겠다고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남자는 분명 나와 멋진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기 위해 근사한 레스토랑쯤은 예약해 두었을 것 같았다. 아까 전화 받던 목소리엔 그런 긴장감과 떨림이 묻어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여자의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빵빵!
날 부르는 경적 소리가 들렸다. 곧 우리는 차에 함께 타 있었다.
“윤섭씨! 우리 어디로 가는 건가요?”
“문대리님. 윤섭씨라뇨? 이PD라고 부르시던지 이실장이라고 불러주시죠.”
“예? 아, 이PD님.”
‘망가진 자존심을 회복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오늘도 자기가 불러낸 거고 말이야. 오늘은 시비를 좀 걸어도 잘해주자. 다 내 잘못으로 이렇게 된 거니까 내가 참아야지. 암. 참아야지.’
“대리님! 오늘 간단히 사진 촬영한다는 말 못 들었습니까?”
“못 듣다뇨? 들었으니 왔죠.”
“들었다면서 복장이 그게 뭐예요?”
“제 복장이 왜요?”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치마와 크림색 블라우스를 입고 그 위에는 가장 아끼는 와인색 반코트를 입고 있었다.
“빨간색 코트에 가슴에 달린 황금색 별 꼭 크리스마스트리 같군요.”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
“신경써서 입었다 그겁니까? 대리님 회사 제품이 뭐예요?”
“모르세요? 아동복이잖아요.”
“그럼 문대리님은 그 빨간 옷 입고 아동모델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아니요. 하게 되면 엄마 역할을 하게 되겠죠.”
“그럼 그게 어머니 이미지에 맞다고 생각하세요?”
“저, 엄마긴 하지만 크리스마스니까요. 요즘 젊은 엄마들은 아줌마처럼 입지 않잖아요. 제가 그렇게 이상한가요?”
“옷이 이상하다는 것이 아니라 컨셉에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광고가 나가는 시점은 크리스마스랑 상관이 없는 때잖아요. 빨라야 2월에 나가게 된다는 거 모르세요? 광고의 기본도 모르시는군요.”
‘기본을 모른다고? 지금 시비 거는 거야?’
“그럼 미리 말씀을 해주시던가요. 어떤 복장이 좋겠다 구체적으로 적어서 공문을 보내주셨으면 되잖아요!”
“여전히 시끄럽군요.”
“시끄럽다니요? 처음부터 생트집 잡은 게 누군데요? 지금 저한테 체인 거 앙갚음이라도 하시겠다는 건가요?”
윤섭씨의 표정은 갑작스레 어두워졌다.
‘앗! 이게 아닌데. 참자고 했으면서 왜 제일 자존심 상하는 말을 뱉었을까? 나 정말 왜 이러지?’
끼익!
윤섭씨의 차가 갑자기 멈춰섰다.
“내려요!”
화가 많이 났던 모양인지 거칠게 소리쳤다.
“화 나셨어요? 전 그게 아니라. 사실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고요······.”
“저도 내릴 거예요. 빨리 내리세요.”
주변에 주목할 만한 것이 없는 강남의 4차선 도로였다. 여기서 내리라니. 내가 내리면 분명히 차를 출발시킬 것만 같은 기세였다.
‘부장님이 협조 잘 하고 오라고 했는데 내가 먼저 화냈다고 보고 하는 거 아니야? 그럼 안 되는데.’
“싫어요. 안 내리래요!”
“뭐 하자는 겁니까? 빨리 내리라고요.”
“저 두고 혼자 가시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제가 모를 줄 알고요? 그리고는 부장님께 이르려고 하는 거죠?”
“안 내리 거라면 저 먼저 내립니다.”
윤섭씨는 먼저 차 문을 열고 내리더니 뒷좌석에서 카메라 가방을 꺼내 들었다. 목적지가 이곳이었던 모양이었다. 또 나 혼자 이상한 상상을 하고 만 것이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도 윤섭씨를 따라 내렸다.
“여기서 뭘 한다는 거죠?”
“사진 찍지 뭐합니까?”
‘진짜 사진을 찍으려는 거야? 하긴 증거물을 가지고 들어가긴 해야겠지.’
“이렇게 휑한 길거리에서 찍어요? 좀 더 예쁜 곳도 많을 텐데. 아시는 스튜디오는 없으세요?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좋은 곳도 있잖아요.”
“이 쪽으로 서세요.”
윤섭씨는 내 얘기를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어디요?”
“가로수 있는데요. 가로수를 안으세요.”
“가, 가로수요?”
“가로수를 안고 밝은 표정으로 나무 위를 올려다보세요.”
‘환한 대낮에 그것도 이런 길거리에서 그런 민망한 포즈를 잡으라는 거야? 해도 너무 한다.’
“뭐해요? 빨리 안하고?”
“그래도 이건 좀.”
“아니. 문대리님! 시키지도 않은 이상한 춤을 잘 추면서 이건 민망합니까? 시간 없으니 빨리 포즈 잡아요!”
윤섭씨는 내게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이브의 추억을 확실히 만들어 주고 있었다.
***
시간이 지나자 쑥스러웠던 일에 점차 익숙해졌다.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했던 윤섭씨는 마가상 카메라를 들자 프로의식이 발동했는지 눈빛부터 진지해졌고, 나도 장난스레 임할 수가 없었다. 열중하다 보니 사진이 찍히는 일도 꽤 재미있는 일이었다.
“표정 좋아요. 이대로 몇 장만 더 찍습니다. 하나, 둘. 예, 다시. 하나, 둘. 좋아요. 이번에는 얼굴 클로즈업 할 거예요. 눈을 감아요. ······. 예. 좋아요.”
능글맞기도 하고 장난기 많은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어딘가에 몰두하는 모습. 정말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문희씨, 춥죠?”
“예. 조금요.”
“이제 거의 다 끝났어요. 얼굴 긴장했으니까 손을 따뜻하게 해서 얼굴 좀 만져 줘요.”
“제가 많이 미숙하죠?”
“아니요. 지금 잘 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섯 컷만 더 담을 거예요. 이번엔 웃는 얼굴이요. ······네! 좋아요.”
윤섭씨와 함께 무언가를 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함께 있으면 자주 다투게 되도 일궁합은 잘 맞는 것 같았다. 윤섭씨의 능숙한 리드덕이 크긴 했지만 말이다.
“많이 추웠죠? 문희씨가 잘 해준 덕에 빨리 끝났어요.”
“매일 연예인이랑 모델이랑 일하시다가 민간인 사진을 찍으려니 힘드셨죠?”
“아니에요. 전문 모델이라 해도 호흡이 맞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문희씨는 제가 원하는 걸 잘 아시더라고요.”
“칭찬까지 감사하네요. 이제 다 끝난 건가요?”
“왜 약속 있으세요?”
“오늘 크리스마스이브에요. 제가 약속도 없는 여자로 보이나요?”
“약속 있으시겠죠.”
“바쁘지만 식사 대접할 의향은 있어요.”
“지금 제게 데이트 신청하시는 겁니까?”
“광고 출현 기회를 잡고 있는 분이니까 잘 보이고 싶은 것뿐이에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갈 거면서 튕기기는. 나랑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고 싶었다고 솔직히 말씀 하시지!’
우린 윤섭씨가 아는 미사리쪽으로 가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내 계획대로 잘 되고 있는 셈이었다.
‘이제 내가 고백할 일만 남았군. 고백이라고 생각하니 떨리는 걸.’
윤섭씨 차안은 겉옷을 벗고 있을 만큼 따뜻해졌고. 듣기 좋은 캐롤이 흐르고 있었다. 노래를 따라 마음이 하늘을 향해 날아갈 만큼 점점 들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