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칙사랑 - 31. 반칙 사랑
집으로 돌아와 애타게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라면 모든 걸 알고 있을 터였다. 주차장에서 떨고 있었던 것이 감기를 가져왔는지 몸이 으슬으슬하게 추웠다. 애써 진정을 해보려고 게임을 해보았지만 집중도 되지 않았고 몸살기는 점점 더 심해지는 듯 했다.
언니가 지친 기색으로 들어온 것은 아홉시가 넘어서였다. 그 때까지 찬기씨에게는 전화도 문자도 없었다. 나는 먼저 전화를 걸 수는 없었다. 언니의 말을 듣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했고 찬기씨가 먼저 전화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는 생각에서이기도 했다.
“언니, 어떻게 됐어? 찬기씨가 정말 범인이야?”
“피곤해. 여태껏 초긴장 상태에서 회의하다 왔단 말이야.”
“언니, 말해줘. 정말 찬기씨야?”
쉽게 말을 해줄 것 같지 않은 분위기. 정말 그란 말인가?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은 있어. 그런데 내일 밝힐 생각이야.”
“그 사람이구나. 맞지, 언니?”
“너 그 사람이랑 사귀는 것 맞냐!”
“······?”
“어떻게 만나는 사람인데 그렇게 믿음이 없어? 그런 너를 어떻게 만나는지 그 남자 정말 신기하다. 그 사람이 너한테 이름도 말 안했다면서? 그렇게 믿질 못하니 남자가 아무 말도 못한 게 당연하지.”
“당연하다니?”
“나 같아도 너한테 말하기 싫었을 거란 말이야.”
“언니도 만나는 걸 반대했었잖아. 왜 갑자기 찬기씨를 두둔해?”
“반대한 건 아빠였고. 아빠가 반대하는 이유를 듣고 난 뒷조사를 조금 했지. 좋은 사람이던데. 절대 회사 기밀 빼낼 사람도 아니고. 내가 못 만나게 한 이유는 처음엔 아빠 때문이었지만 나중에는 그를 의심하는 행동을 해서 스파이를 걸려들게 할 계산이었어. 그건 말 못해줘서 미안하긴 하다. 하지만 이런 방법 아니었으면 잡는데 시간이 더 걸렸을 거야. 찬기씨한테는 오늘 미안하다고 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넌 깊게 생각을 안 해. 너 편한대로만 생각하고. 아직 아버지의 뜻도 모르고 내 뜻도 전혀 몰라. 그러니까 아버지가 불안해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속이고 그런 연극을 할 수가 있냐고!”
“성질부터 내지 말고 생각을 해! 넌 그게 문제라니까. 그리고 나한테 이러지 말고. 그 사람한테 전화부터 해봐. 그 사람 기분 엉망인 것 같더라.”
“언니가 얼마나 잘났길래 전화하는 문제까지 왈가왈부야? 내 남자문제 정도는 내가 잘 알아서 할 수 있다고.”
“잘 하긴. 너 작은 아버지가 회사 물려주기 싫어서 집에서 쫓겨난 기분 헤아려본 적 있어? 마음 둘 곳 없어 너만 의지하는 사람을 툭하면 의심하고. 내가 진짜 그 남자라면 너 안 만나. 나가봐, 나 피곤해.”
언니는 소리를 치는 내게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도 돌리지 않고 태연하게 화장을 지우고 있었다. 이젠 무슨 소리를 해도 안 들리는 척을 할 것임이 분명했다. 할 수 없이 내 방으로 돌아왔지만 분함을 가시지 않았다. 헤아릴 줄을 몰라? 지 같으면 날 안 만나? 늘 있는 일이었지만 오늘따라 언니의 직설적 공격법은 내 가슴을 깊게 찔러대고 있었다. 처음엔 모욕을 당한 기분에 너무 분한 생각이 들어 머릿속에 말들만 맴돌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자 그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늘 그를 의심하는 나. 그래서 오늘도 기분을 상하게 만든 나. 모두 다 사실이었다.
그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자 전화를 하기는 더욱 겁이 났다. 11시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그에겐 전화가 없었다. ‘나 같았으면 너 안 만났을 거야.’ 언니의 그 말이 지금 이 시간 그가 이별을 생각하는 건 아닌가하는 불안감으로 바뀌었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1분여의 시간이 흐르고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여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여전히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렇게 여자의 목소리만 대여섯 번을 들어야 했다. 혐의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알고 있을 테고 내 전화를 피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믿음을 보이지 못한 내 행동에 그가 화가 났다는 뜻일 것이다.
‘나 왜 이러나 몰라. 언제나 의심하고 믿지 못하고. 다짐하고 다짐해도 달라지는 게 없는 아이구나, 난.’
어디서부터가 문제인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복잡한 머리는 터질 지경이 되어 12시가 다 된 시간이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기 위해 일기장을 꺼내들었다.
‘꽤 예전에 쓰기 시작했는데 반 권도 못 썼네.’
첫 일기는 3년전 이었다. 대학 3학년 때 진로 문제를 두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장을 넘기자 연미와 크게 싸우고 마음고생을 하며 적은 일기도 있었다.
‘푸웃. 그 때는 심각 했었어. 연미랑 다시 안 볼 생각을 했었으니까.’
그러나 눈에 띈 것은 굵은 펜으로 쓰인 일기였다. 붉은 펜으로 적힌 그것의 제목은 ‘정홍주 사랑의 원칙’ 이었다.
[정홍주 사랑의 원칙]
1. 사랑하는 연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2. 연인외 다른 남자에게 눈 돌리지 않는다.
3. 애인이 있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4. 먼저 사랑을 그만 두지 않는다.
5. 그를 믿으며 의심하지 않고, 시험하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정한 사랑의 원칙이다. 이를 어기면 반칙이다.
순간 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결코 장난스럽게 쓴 글이 아니었다. 내 사랑의 원칙은 지켜낼 수 있다고 자신하며 쓴 글이었다. 당시 이 원칙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얼마나 우습게 생각을 했던가. 그런데 찬기씨를 만나면서 단 한 가지도 지킨 것이 없었다. 처음 애인이 있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그를 사랑했고 그에게 거짓말을 했고 사랑을 그만두려 했으며 잠시 잠깐 다른 남자를 이성으로 느끼기도 했었다. 그를 의심하는 것은 늘 저지르는 실수였다.
‘내가 이렇구나. 아주 기본적인 것도 지키지 못했어. 찬기씨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 많은 부분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그에게 보여준 것은 엉터리 사랑이었다구!’
원칙에 어긋난 사랑은 그를 괴롭혔지만 나 또한 괴롭혔다. 그 사람을 의심할 때마다 내 마음에 피멍이 들었었다. 힘들더라도 원칙을 지켜내려고 노력했다면 지금의 상처는 없었을 텐데. 내 마음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도망칠 생각만 했던 내 행동들이 생각났다. 어떻게 보면 나는 그를 괴롭히는 악취미가 있는 여자인 줄도 모른다.
반칙으로 시작해 반칙으로 얼룩진 내 사랑을 보면서 원칙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사랑의 원칙이라.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그에게 전화가 왔다. 피곤한 듯 들리는 목소리였다.
“오빠!”
“어, 미안해. 깜박 잠이 들었었나봐. 피곤했던지 집에 들어오자마자 잠이 들었어. 전화 많이 했었네.”
“피곤했어? 다시 자.”
“아니야. 이젠 괜찮아.”
“저, 아까는 미안했어. 맨날 사과만 하네. 이젠 사과하지 않도록 하려고. 오빠가 그랬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그런 일로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다보니까······.”
“괜찮아. 내가 저지른 일이었다고 해도 같이 있고 싶다는 네 말만 기억하고 있었어.”
“고마워. 피곤할 테니 다시 자. 내일 또 출근해야 잖아.”
“그래. 내일 보자. 내일은 맛있는 밥 먹으러 가자. 시간 괜찮지?”
“응. 빨리 자. 내일 봐.”
그는 아까의 일에 대해선 말을 아끼고 있었다. 분명 화가 났을 텐데. 아마도 피곤해서 잠이 들었다는 말은 거짓말일 것이다. 그 시간동안 내게 화가 난 것을 억누르고 있었을 것이다. 다소 마음이 누그러지기를 기다리며 침착하게 전화를 할 수 있을 때까지 참았을 것이다. 그는 그런 남자다. 나와는 달리 참을 줄 아는 멋진 남자다.
그러고 보면 거짓말을 하든 꼭 진실을 말하지 않든 그건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다. 내 지난 사랑의 원칙에 어긋나는 거짓말을 했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서로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억누르기도 하는 그런 마음인 것이다.
밤이 지나 새벽이었다. 커피 한잔을 옆에 두고 아주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그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다행히 마음에 드는 보랏빛 편지지도 있었다.
제겐 예전에 정한 사랑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정홍주 사랑의 원칙]
1. 사랑하는 연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2. 연인외 다른 남자에게 눈 돌리지 않는다.
3. 애인이 있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4. 먼저 사랑을 그만 두지 않는다.
5. 그를 믿으며 의심하지 않고, 시험하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정한 사랑의 원칙이다. 이를 어기면 반칙이다.
우습지요?
당신을 만나는 동안 난 단 한 가지도 지키지 못했잖아요.
사랑한다면 당연히 지켜낼 수 있는 것들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쉽게 어기고 말았어요.
내 사랑 반칙으로 얼룩져 있군요.
당신이 부족한 나를 감싸준 덕분에 지금 이 사랑 지켜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원칙보다는 중요한 것이 서로 잘못을 덮어주는 것임을 알게 되었어요.
그렇다고 원칙도 없는 사랑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원칙을 만들어 보았어요.
[정홍주 새로운 사랑의 원칙]
1. 그를 이해하도록 노력한다.
2. 그를 믿는다.
3. 잘못이 있을 땐 먼저 사과한다.
4. 사랑의 마음을 자주 표현한다.
5. 절대 다른 곳에 눈 돌리지 않는다.
이것이 정홍주의 새로운 원칙이다. 이를 어기면 반칙이다.
이것이 저의 새로운 원칙입니다. 거창하지도 않고 훨씬 지키기 쉬운 것들이지요.
하지만 말이에요. 이것들을 지켜내면 우리의 사랑 더욱 커지리라 믿어요.
다시는 반칙 사랑 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당신을 믿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나의 미래에 당신이 속해 있길 진정으로 바랍니다.
편지를 읽은 그는 그 자리에서 큰 소리로 웃었다.
“이게 정말이야? 잘 지킬 자신 있어? 특히 난 4번이 마음에 드는 걸. 어디해 봐. 찬기씨, 사랑해요.”
“장난은. 집에 가서 읽으라니까.”
그와 단둘이 하는 점심식사에서 그는 편지를 받자마자 읽어버린 것이다.
“편지가 정말 홍주답다.”
“뭐? 뭐가 어때서?”
“딱 부러지는 성격 아닐까봐 차트를 만들었어요. 하하하. 원칙 없는 사랑은 싫어? 그냥 사랑하면 안 되는 거야? 난 원칙 없는데. 그냥 너만 사랑하고 너만 바라볼 건데.”
“때론 이런 원칙도 필요한 거야. 봐! 오빠가 어긴 것들도 있다니까. 거짓말 했지, 음 또 없나?”
“내가 잘못한 것도 많지. 그 때마다 홍주가 이해해주고 덮어주고 해서 너무 고마워.”
“고마운 거 알면 잘 하셔.”
“하하하. 알았어. 그나저나 사랑해, 해봐. 얼른!”
“뭐야? 식당에서. 이렇게 사람도 많은데.”
“자주 표현 한다면서, 얼른!”
“사랑해! 됐지?”
부끄러움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아직 새로운 원칙을 지키기 위해선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았다. 하지만 노력할 생각이다. 그는 큰 소리로 웃으며 따라 나왔고 우린 회사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회의실로 호출된 것은 나와 귀민 그리고 명주 언니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호출이라 세 사람 모두 긴장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글쎄. 나 이번 보고서 문제없었는데. 홍미가 잘 못된 거라도 발견한 걸까?”
나의 말에 명주 언니가 답했다. 귀민은 관심 없다는 냉담한 표정이었지만 약간은 초조해 보이기도 했다. 회의실에는 홍미 언니와 호출된 세 사람 네 명이 원형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아무 물건도 놓아져 있지 않은 테이블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부장님, 차라도 가져올까요?”
“그래요. 정대리. 아마도 누군가는 마시고 싶지 않겠지만 난 시원한 걸 마시고 싶군요.”
냉장고에 있는 콜라를 꺼내 종이컵에 따랐다. 회의실에 들어가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상태인지 냉냉한 침묵만 돌고 있었다.
“여러분도 아실 거예요. 우리 회사에 하양주류의 스파이가 있다는 사실. 거기에 대해 할 말 없습니까?”
“······.”
‘이건 무슨 분위기지? 자백이라도 하라는 분위기잖아. 그렇다면 이 중에 범인이 있다는 건가? 설마 귀민? 아니 명주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