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칙사랑 - 32. 늘 함께 할 약속
“지금 말하는 내용은 회사 기밀이 될 것입니다. 때에 따라선 영원히 묻혀질 이야기가 될 수도 있구요. 그건 꼭 지킬 생각입니다. 그렇죠, 정홍주 대리?”
“예.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또 다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젊은 여자 네 명이 입을 다물고 있는 분위기는 날카로움 그 자체였다. 난 순간 귀민의 눈에 비친 적개심을 볼 수 있었다. 그 눈은 명주 언니를 향하고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네요. 제가 말을 해야 하는 건가요?”
귀민이었다.
“아, 아니요.”
말을 자른 건 명주 언니.
“제, 제가 회사를 그만 두겠습니다. ······. 그러면 될까요?”
“예. 김명주 대리 일신상의 이유로 사퇴.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수고들 하셨습니다. 이만 나가보세요.”
귀민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명주언니는 새빨개진 얼굴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내가 부축을 하려 했지만 언니는 나의 손길을 거절했다. 나는 혼란을 느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모두가 나가고 난 후 홍미 언니에게 물었다.
“명, 명주 언니였던 거야?”
“응. 귀민이 혐의점을 잡았어. 어제 극비리에 나에게 말해주었고. 확증은 없는 상태였는데 스스로 고백을 하니 다행이네.”
“왜, 왜 그랬대?”
“알 수 없지.”
명주 언니는 내겐 친언니 이상이었다. 모든 고민을 들어주며 자상하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 언니였는데. 내가 알기론 범행을 저지를 만한 이유가 없었다. 이모댁은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고 명주 언니도 직장에 큰 불만을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명주 언니는 어떻게 되는 거야?”
“배신감을 많이 느끼고 있지만 조치가 어려워서 더 화가 나. 처벌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인척들간의 문제도 생길 것 같고. 잘못은 명주 언니가 했는데 경찰서에 보낸다고 해봐라. 욕은 우리가 먹는 거지. 너 이거 비밀 지켜. 아직 이모도 모르시고 어머니도 모르시니까. 아시면 충격이 상당하실 거야.”
“이해가 안가. 왜 명주 언니가.”
“마지막 예의가 있다면 이유 정도는 알려주겠지. 아마도 명주 언니 외국에 가야 할 거다. 그렇지 않고는 아버지가 화를 참기 어려워 질 것 같아. 오늘 이 자리엔 내가 억지로 못 나오시게 했어.”
기밀을 상대회사에 빼돌린 명주 언니나 사실을 알고도 너무나도 냉정하게 일을 처리한 홍미 언니나 모두 내겐 이해능력 밖의 사람이었다. 세상엔 아직 내가 모르는 일, 이해못할 일이 많은 것 같았다.
다행히 복분자술의 병디자인은 세모 모양이 아닌 원형으로 계획되고 있었다. 극비로 말이다. 그것은 찬기씨의 생각이라고 했다. 원형이었지만 기존의 주류와 차별이 되는 모양으로 호리병과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도자기 느낌이 나는 것이었지만 단가도 비싸지 않게 맞춰졌고 설문조사 결과 세모 모양보다도 여성 호감도 앞섰다고 했다. 회사는 새로운 제품의 출시를 앞두고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찬기씨는 여전히 매장관리팀이었고 나도 매장관리팀으로 복귀했다. 까다로운 점주를 상대하는 것은 여전히 힘든 일이었지만 그가 있기에 보람을 느끼며 일을 하고 있었다.
“오늘도 무지 힘들었다. 사무실 안 들어가도 되지? 홍주야, 우리 어디가서 오랜만에 술 한 잔 할까?”
“그럴까? 좋아. 홍주 어때?”
“뭐?”
“홍주 마시는 거 어떠냐고.”
“간만에 홍주 좋다. 녹두 빈대떡 먹으러 갈까?”
“그래, 좋다! 안국동 가는 거지?”
같은 부서에 있으면서 함께 외근하는 일도 잦아서 우리는 예전보다 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고 서로를 더욱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찾은 술집은 국악이 흐르는 고즈넉한 분위기의 민속주 주점이었다. 작은 나무들이 있고 새를 풀어놓아 가끔 들리는 새소리가 야외에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독특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하얀 도자기 잔에 붉은 홍주가 따라졌다. 코에 확 번지는 알코올 향이 자극적이었다.
“홍주 오랜만이다. 그치, 오빠?”
“옛날에 우리 집에서 먹고 처음이지?”
“응. 우리 창고에 갇힌 날 그날 처음 같이 마셨는데.”
“그 날 생각나네. 하하. 참느라고 혼났었지.”
“참긴 뭘 참아?”
꽤 오래 전 일 같았다. 그 때와 비교하면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할까 훌쩍 커버린 느낌이다. 사랑을 몰랐던 내가 이젠 의젓하게 사랑을 하고 있자니 그 날의 내가 어린 아이처럼 느껴진다.
“뽀뽀하고 싶은 걸 참았다는 거지. 더 야한 생각 하는 거야?”
“아니,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랑 뽀뽀가 하고 싶었어?”
“잘 모르긴. 내가 좋아하고 있었는데.”
“아무튼 남자들이란 예쁜 거는 귀신처럼 알아요.”
“에구 그 날 몰래 뽀뽀한 게 누군데.”
“오빠는 밤에 했다며? 난 아침에 했다. 내가 먼저는 아니다, 뭐.”
“그래. 내가 먼저 했다. 홍주는 나한테 찍혔으니 나랑 꼭 결혼해야 돼. 알았지?”
“그럼 당연하지. 여보야, 이거 좀 먹어 봐요.”
녹두 빈대떡을 집어 그의 입으로 가져갔다. 덥석 무는 그. 그는 참 미남이다. 처음 본 순간 한 눈에 반할 정도로 잘 생긴 외모이기도 했지만 지금 그는 첫 대면 한 날 보다도 더 멋지게 보인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얼굴이 빛나 보여 눈이 부실 정도다.
“홍주 때문에 목숨을 구한 사람이 있다는 거 알고 있니?”
“응?”
“연산군 때 사화가 많이 있었잖아. 폐비 윤씨 문제로 벌어진 갑자사화 말이야.”
“응.”
“그 때 허종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그 전날 그 부인이 홍주를 많이 마시게 해서 그 다음날 어전회의에 못 나가게 됐거든. 그래서 허종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 당시 많은 선비들이 처형되고 그 자식들이 유배되고 나중엔 자식들까지 모두 죽었잖아. 허종만은 그걸 피할 수 있었던 거야.”
“지금 잘난 척 하는 거지? 공부 좀 했다 이건데.”
“하하하. 너와 같이 있던 날. 나도 너의 발목을 잡고 싶었다. 그 다음날 다시 서먹한 관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홍주를 마시자고 했지. 그건 몰랐지?”
“모르긴. 알고 당해줬네요.”
“이거 홍주가 알고 보니 여우였네. 딱딱한척 순진한척은 다하고 말이야.”
“나 여우야, 여우.”
우린 그날 홍주를 빚으러 진도로 여행갈 계획을 세웠다. 이미 교제를 허락받은 상태였고 약혼을 한달 앞둔 날이었다. 평범한 일과 속에서도 그와 함께 있기에 날마다 특별한 날이었고 늘 행복해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어느 새 가을이었고 두툼한 외투를 같이 보러가기로 약속도 했다. 홍주를 빚으러 갈 약속, 겨울 외투를 함께 살 약속, 내년 봄에 벚꽃 놀이를 할 약속. 나의 미래에 그가, 그의 미래에 내가 속한 달콤한 약속들이었다. 약속이 하나하나 지켜지면 또 다른 약속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이 평생 지켜질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요즘 홍주와 나는 매장관리팀을 나와 유통팀이 주관하는 행사를 함께 하고 있었다. 각 술집을 돌면서 술을 홍보하는 고된 일이었지만 홍주와 내가 자원하고 나선 일이었다. 도우미들은 손님들에게 술을 따라 주면서 홍보를 했고 나와 홍주는 점주와 대화를 하며 홍보를 하는 방식이었다. 그 날도 홍주와 함께 한 술집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송진 주류입니다!”
홍주가 밝게 인사하며 점주에게 인사했다.
“무슨 일이시죠?”
“저의 송진 주류에서 나온 복분자술 ‘복향’ 홍보차 나왔는데요. 무료로 술도 드리고 포스터도 드리려구요.”
“아! 복향. 저의 술집에 벌써 있어요. 요즘 손님들 반응도 좋구요.”
“반응이 좋아요?”
홍주의 얼굴에 기쁜 미소가 떠올랐다. 홍주가 적극적으로 대화를 하기에 처음에 말을 많이 했던 난 오히려 뒷전에서 구경만 하는 신세였다.
“그럼요. 손님들이 먼저 찾으셔서 가져다 놓았는걸요. 술이 순해서 여자 분들이 좋아해요. 포스터만 있어요? 사은품은 없구요?”
“있죠. 예쁜 잔이에요. 세모 모양이라 손님들이 좋아하실 거예요.”
잔을 세모로 만든 것은 홍주의 생각이었다.
“많이 두고 가세요. 저희가 홍보 많이 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업시간 초기라 손님이 없어 우린 사은품만 드리고 매장을 나왔다.
“홍주야, 그렇게 신나?”
“그럼! 반응 좋다잖아. 오빠는 힘들어? 이제 우리도 슬슬 상품개발팀에 복귀할까? 안 그래도 반응이 좋아 걱정할 건 없을 것 같은데.”
“아니, 너만 괜찮다면 나는 괜찮아. 홍주야, 나는 꿈이 있어.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우리 홍주랑 술 빚으면서 사는 거. 그런데 지금은 이 일이 좋아. 그 때 요즘 일들이 생각나겠지. 사람들이 술을 나누면서 이야기하는 풍경. 반가운 사람을 만나 즐거워하고 기뻐할 일이 있을 때 서로 축하해 주는 모습, 고민이 있는 친구와 술을 한잔 같이 하면서 위로하는 모습. 술을 빚다 힘든 일이 있어도 오늘 본 게 큰 힘이 될 것 같아. 그 자리에 내가 빚은 술이 함께 한다는 거 큰 보람이니까. 나 혼자 먹을 술을 만들려는 게 아니거든. 사람들 속에 있고, 그 사람들의 삶 속의 감정들을 함께 하는 술을 만들고 싶어.”
“나는 그런 여보야 옆에 꼭 붙어있고. 하하하. 그럼 좋겠다.”
홍주는 눈웃음을 치며 애교 있게 말했다. 예전의 그녀는 자신의 눈웃음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지 못했었다. 그런 그녀는 요즘 부쩍 애교가 많아졌다. 그 애교와 눈웃음을 볼 때면 내 마음이 얼마나 설레는지 그녀에게 꼭 알려주고 싶다.
“에구, 이 애교쟁이!”
“그래서 애교 많아서 좋아, 응?”
그녀가 몸을 찰싹 붙여왔다.
당신 그거 알아요?
당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당신과 꼭 같이 살고 싶은 내 마음 알아요?
많이 고마워요.
나는 늘 그대와 함께 할 것입니다.
아슴한 어느 옛날
겁(劫)을 달리 하는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알뜰한
내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아비의 피 묻은 늑골에서
백년 해로의 지어미를 빚으셨다는
성서의 이야기는
너와 나의
옛 사연이나 아니었을까
풋풋하고 건강한 원시의 숲
찬연한 원색의 칠범벅이 속에서
아침 햇살 마냥 피어나던
우리들 사랑이나 아니었을까
불러 불러도 아쉬움은 남느니
나날이 새로 샘솟는 그리움이랴 이는
그날의 마음 그대로인지 모른다
빈방 차가운 창가에
지금이사 너 없이 살아가는 나이건만
아슴한 어느 훗날에
가물거리는 보랏빛 기류같이
곱고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다시금 남김없는
내 사람일지도 모른다
김남조, <너에게> 전문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