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거미줄 속에서..>>
결혼식 하루 전. 지나는 병원에 들러 뱃속에 있는 아기상태를 확인한 후, 웨딩샵에서 마사지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 앞에 도착한 그녀는 유키의 차와 유사한 검은 외제차가 대문 옆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운전석 문이 열리더니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내렸다. 지나는 곧 그가 유스케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유스케가 차 뒷문을 열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사토 유키의 어머니 카오리였다.
얌전하고 지적으로 틀어올린 그녀의 머리는 한 올도 흐트러져 나오지 않은 채 완벽했다.
귀에 걸린 작고 반짝거리는 것은 진짜 다이아몬드임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고급스럽게 보이는 소재의 투피스정장을 입고 있었다. 지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약간은 낯설게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유키의 얘기로는 일본에 계신 부모님은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었다. 그 뜻은 그들의 결혼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예전에 카오리가 그녀에게 유키를 변화시켜 달라고 부탁했을 때 결혼을 내비치긴 했었다.
다른 여자와의 결혼을 위해서... 그래서 결국 그녀는 카오리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유키를 변화시켰다.
그렇다면 카오리가 왜... 이곳에 왔단 말인가? 지나는 검은 차 곁에 서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결혼식때문에 온 것만은 확실했지만 카오리의 표정으로 봐서는 결코 축복을 주려는 얼굴은 아니었다.
긴장으로 떨리는 지나의 목소리와는 달리 카오리의 목소리는 뜻밖에 매우 차분하고 딱딱했다.
"오랜만이네요?"
여름에 레이의 방학 때 서로가 만났으니 석달 정도의 시간이라면 오랜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나는 긴장어린 시선을 카오리에서 유스케로 돌렸다. 그의 표정이 단단하게 굳어있는 것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아뇨. 사모님께서는 지나씨와 얘기를 나누고싶어하세요."
"네?"
지나는 약간 놀란 얼굴로 카오리를 쳐다봤다. 카오리는 이미 뒷자리에 올라타고 있었다.
"타요."
"무, 무슨..."
"멀리 가지는 않을 겁니다."
유스케는 조수석 문을 열어놓고 지나를 기다렸다. 몇 초동안 머뭇거렸던 지나는 두손을 꽉 쥐고 차에 올랐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동안에 두 사람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아 지나는 내내 더 초조함을 맛보았다.
분명히 그들은 자신에게 반가운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뭔가 기분 나쁜 말을 할 것만 같았다.
검은 차는 어느 호텔 앞에 멈추었다. 상류층 사람들이나 찾는 일류호텔이었다.
지나는 앞서 걸어가고 있는 카오리를 따라 조용히 걸었다. 이곳을 다시 나올 때는 지금보다 기분이 더 최악이 아니길 간절히 빌었다.
일류호텔이니만큼 커피숍의 실내 인테리어는 매우 격조가 높았고 고급스러움 그자체였다.
멋드러진 인테리어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김 지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기를 단번에 꺾고도 남았다.
유스케는 카오리가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뒤로 약간 빼주었다. 그리고 지나에게 다가와 역시 똑같이 의자를 뒤로 빼주었다.
그러나 지나는 카오리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가 없어 뻣뻣하고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유스케는 가볍게 목례를 한 후, 두 여자에게서 한참이나 떨어진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한국에 온 지 정말 오랜만이군요."
지나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의도였는지 카오리가 먼저 가볍게 대화를 끌어냈다.
"유키를 데리고 일본으로 떠난 뒤로 한번도 한국 땅을 밟아 본 적이 없어요. 20년이란 세월 동안 한번도..."
"아, 네..."
지나는 무의식 중에 카오리의 말의 속뜻을 파악하려고 했다.
20년만에 한국 땅을 밟는 이유가 바로 아들의 결혼때문이라는 것을 말하고싶은 것이겠지.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두 여자는 조심스럽게 찻잔을 들었다.
"드디어 내일이군요?"
지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카오리를 쳐다봤다. 예전의 부드러움과 지적인 이미지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녀가 지니고 있는 눈동자에서 다른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차가움...
"뜻밖이네요. 내가 김 선생한테 도움을 청한 것은 이런 결과를 가지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거 알고 있죠?"
"네..."
지나는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어째서 이런 결과가 생긴 건지... 물어봐도 되겠죠?"
"그건..."
"사랑이라는 건가요? 유키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건가요?"
카오리의 부드러우면서도 직접적인 질문에 지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뜻하지 않게 희미하게 콧웃음이 들렸다.
"김 선생. 유키는 사랑을 믿지 않아요. 아무리 김 선생이 유키를 바꿔놓았다고 해도 그의 감정까지 바꿔놓을 순 없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유키는 아내를 잃었어요. 그에게 그 동안의 세월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 김 선생은 짐작도 못할 거예요.
가족과 연락을 끊고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을 정도로 유키는 고통스러워 했다고요. 그런 유키가 다시 쉽게 사랑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지나는 안타까웠다. 카오리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유키가 그토록 지옥같은 생활을 해왔는지, 왜 그렇게 어둠 속에서 살았는지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유키씨가 그렇게 힘들어하고 사랑을 믿지 않는 이유가 단지 그 이유라고 생각하세요?"
"김 선생."
"전, 그를 사랑해요. 여름에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부터... 그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유키의 아이를 키우기로 한 거예요?"
"네?"
지나는 심장이 덜컹하는 소리를 들었다. 무슨...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어떻게 카오리가 임신사실을 알고있단 말인가?
지나는 떨리는 턱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고는 찻잔을 들었다. 그러나 찻잔은 기다렸다는 듯이 여지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찻잔을 내려놓고 테이블 아래로 두 손을 꽉 쥐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고요? 김 선생이 병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어요. 그렇다고 일부러 미행한 건 아니에요.
근처에서 김 선생을 봤는데 마침 들어간 곳이 뜻밖에 병원이더군요. 산부인과. 그래서 김 선생이 나가고 난 뒤, 들어가서 확인해봤죠."
지나의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결국 누군가가 임신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가 딴 병원도 아니고 산부인과를 찾는 경우를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 알잖아요?"
"..."
"아이의 아빠가 엄연히 눈 뜨고 살아있는데다 그 아이아빠란 남자를 사랑하는 거라면 더욱 그를 놓치고 싶지 않겠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이때문에 결혼하는 거 아닌가요? 사랑은 그 다음이거나 핑계고."
"네? 저, 저를 어떻게 보시고... 아뇨. 절대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아이때문이라니... 말도 안 되요! 그랬다면 벌써 유키씨에게 말했을 거예요."
카오리는 놀란 표정으로 세차게 고개를 젓는 지나를 쳐다봤다.
유키가 결혼하겠다고 설처댔을 때, 츠바사에게 대들었을 때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가정교사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이상하게 여겼었다. 가정교사와 사랑에 빠졌거나... 아이가 생겼거나.
"그게 무슨 말이죠? 유키가 그 사실을 모른다는 거예요?"
"네... 그는 몰라요. 말하지 않았어요."
"왜? 말했다면 결혼이 더 수월했을 텐데."
"아뇨. 임신을 했든 안 했든 그와 결혼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지나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막상 사실이 밝혀진 이상 그녀에게만은 자신의 감정을 숨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걸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분명히 유키를 사랑한다고..."
"네. 유키씨를 사랑해요. 너무너무 사랑해요. 그래서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털어놓을까도 생각했었죠.
하지만... 그는 날 사랑하지 않아요. 사모님 말씀대로 유키씨는 사랑을 믿지 않아요. 또다시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해요.
그런 그에게 아기를 빌미로 붙잡고싶지는 않았어요. 혼자서... 키울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데 왜 생각이 바뀌었죠? 왜 결혼하려는 거죠? 츠바사와 난 이 결혼 인정할 수 없어요."
카오리는 지나가 얼마나 유키를 사랑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녀의 눈속에 담겨있는 것은 유키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었다.
"전... 유키씨를 사랑하는 것처럼 레이도 사랑합니다. 그 아이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사랑스런 아이예요.
레이와 헤어지는 것은 너무 가슴아플 것 같아요. 그 아이에게 또다시 슬픔을 줄 순 없었어요.
날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선택하는 대신에 두 아이를 지키고 싶었어요. 두 아이에게 엄마 없는 아이로, 아빠 없는 아이로 만들기 싫었어요.
유키씨를 사랑하니까... 나 혼자만이라도 사랑하면 되니까... 두 아이를 사랑하니까 괜찮다고 여겼어요."
지나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들어 맞은편에 앉아있는 아름다운 여자를 바라봤다.
카오리는 결코 매정한 여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알린다면 결코 결혼을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요. 허락해주세요... 제발..."
카오리는 묵묵히 상대를 차분하게 쳐다보며 차를 마셨다.
그녀는 지나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믿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결혼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결혼을 인정한다는 것은 아들을 잃는 것과 같았다. 츠바사는 두 번 다시 유키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했다.
회사를 위해서 정해놓은 여자와 결혼하리라 생각했는데 일이 우습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회사 합병은 물건너가게 되는 것이다.
카오리는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고 지나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두 사람의 결혼 인정할 수 없어요. 생각할 시간은 단 하루밖에 없다는 거 알아둬요.
내일이면 김 선생은 내 아들과 결혼해서 가정을 가질 수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되면 유키는 나와 츠바사... 부모를 잃게된다는 걸 명심해둬요."
카오리는 놀란 눈을 깜빡거리지 못하고 얼어있는 지나를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잠깐만요!"
지나는 얼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카오리가 뒤돌아서는 것을 붙잡고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유키씨가 부모를 잃다뇨? 그게..."
"예전부터 츠바사는 회사를 유키에게 주려고 했었죠. 츠바사에게 있어서 회사는 그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부예요.
그런데 유키의 고집은 오랫동안 꺽이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아들까지 잃을 순 없어요. 유키는 영원히 사토집안에서 내몰리는 거죠."
지나는 살이 떨리는 것 같았다. 카오리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몰랐다.
사토 유키가 집안에서 영원히 내몰린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카오리는 돌아서기 전에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난 하나뿐인 아들을 잃게되는 거예요. 손자까지 말이죠."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이 묻어나왔다.
뒤돌아 기다리고 있는 유스케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카오리를 바라보는 지나의 검은 눈동자는 이미 빛을 잃은 지가 오래였다.
지나는 눈물이 나왔지만 애써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이를 악물고 입술을 지그시 다물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었지만 그녀를 알지 못했다. 멍한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시야가 뿌옇게 흐려있었다.
"지나씨..."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자, 유스케가 곁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스케..."
"잠깐 여기서 기다려줄래요?"
"네?"
"아주 잠깐이면 되요. 1분이면 되요."
"..."
그녀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멍한 시선을 들고있자, 유스케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사라졌다.
모든 결혼준비는 완벽하게 끝난 상태였다. 며칠 전에 결혼소식을 접하고 돌아온 가정부는 지나와의 결혼에 매우 놀라워했다.
그러나 이내 그에게 축하한다며 진심어린 마음을 보여주었다.
"좀 늦네요? 저녁식사를 하고오신다고 하던가요?"
"연락받은 건 없습니다."
식탁으로 다가오며 유키가 대답했다. 벌써 저녁 일곱 시가 다되었지만 아직까지 외출한다고 나간 지나에게서 전화가 없었다.
'마사지가 이렇게 오래 걸릴 리가 없는데...'
몇 번 전화를 걸어봤지만 받지 않았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맞은편에서 밥을 먹고있는 아들을 힐끗 쳐다봤다.
레이는 내내 행복한 것 같았다. 그렇게 원하던 엄마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녀석이 평소에 그렇게도 좋아하고 따르던 김 지나가 새엄마 되었으니 말이다.
"김 선생님을 아니... 사모님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사장님께서 이렇게 변하셨을꼬?"
"네?"
"방에서 꿈쩍도 안 하셨잖아요. 정말 신기하네요. 영원히 사장님 얼굴 못 보나 했는데..."
유키는 가정부의 주름 진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차갑게 대꾸했다.
"아주머니도 농담을 다 하시는군요?"
이내 가정부는 두 남자의 식사를 차려주고 자리를 떠났다.
"엄마는 왜 아직 안 오세요?"
유키의 차가운 시선이 아들의 얼굴로 날아갔다. 여전히 녀석은 결혼 전부터 지나를 엄마라고 부르고 싶어했다.
"레이. 아직 선생님하고 결혼 안 했다."
"하지만 할 거잖아요."
"레이."
"..."
이내 아들의 얼굴은 쀼루퉁해진 채 부어있었다. 유키는 한번 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난 후, 유키는 거실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있었고 레이는 곁에 앉아서 지나가 한달 전에 빌려놓은 만화책에 빠져있었다.
이미 봤던 만화책이지만 아이는 또다시 흠뻑 빠져들어 아버지의 꾸중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유키는 이내 녀석이 만화책을 읽도록 내버려두었다.
이때 전화가 조용한 침묵을 깼다. 주방에서 설거지를 끝낸 가정부가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유키는 얼른 그녀를 향해 손을 들고는 자신이 전화를 받겠다고 했다.
"여보세요."
신문사 문화부 기자였다. 며칠 전에도 전화가 왔었다. 결혼소식을 매우 축하한다며 취재를 해도 되는지 물었었다.
"안됩니다. 사절입니다. 가족끼리 조촐하게 하는 결혼식이니까 취재에 응하고싶지 않습니다."
역시나 다른 언론에서도 그가 결혼하는 것을 어떻게 알고 식장에 나타나겠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유키는 부모를 모시고 축복받으며 하는 결혼이 아니라서 그들의 카메라 속 주인공이 되기 싫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얼굴이 언론에 밝혀지는 것은 더욱 싫었다.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제가 언론에 공개되는 일이 있다면 곧 그에 따른 책임을 지셔야 할겁니다. 기자생활에 손해가 가지 않길 바랍니다."
유키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다.
마당을 비추는 조명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덥수룩한 머리를 쓸어넘기다가 문득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내일이 결혼식인데 이런 꼴로 지나를 맞이할 순 없었다. 여태 미용실에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때문에 그는 갈수록 사람들이 있는 곳에 대범하게 나타났다.
아름다움과 고급스러움이 있는 웨딩샵까지 가서 그들의 결혼예복까지 맞추었다.
하지만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자를 걸 생각하자, 다시금 의기소침해졌다. 집에서 손질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아버지."
뒤돌아서자, 잠옷바람에 서있는 열 살 난 아들이 있었다. 잠옷은 앙증맞은 케릭터가 그려져있었지만 아이의 체격에 비해서 조금 큰 것 같았다.
유키는 아들에게 다가가서 긴 소매를 걷어주고 바지끝도 접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안자고 나왔니?"
"엄마 기다... 아니, 저... 선생님 기다려요."
"무슨 할 얘기라도 있니?"
"네."
유키는 아들이 가슴께로 끌어안고있는 책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말?"
"자기 전에 선생님한테 사랑한다고 할 거예요."
그 말에 유키의 검고 짙은 눈썹이 들썩였다. 아이는 아주 진지한 얼굴이었다.
"여자는 사랑을 먹고사는 동물이랬어요."
"뭐?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더냐?"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한다는 말을 해줄 때가 제일 기분 좋다고 했어요."
"누가 그런 소릴 하더냐고?"
"누구긴요..."
레이는 더이상의 대답보다는 의미심장한 대답을 남기고 방으로 돌아가버렸다. 마치 그가 당연히 알고 있어야하는 사람인 것처럼 아이는 말했다.
여자는 사랑을 먹고사는 동물이란 말은 너무나도 구시대적인 발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어디 사랑을 못 먹고 매마르게 살아가는 동물이다 이건가? 그 사랑이란 것... 주면 주는대로 받아먹을 수 있다.
그러나 남자든, 여자든 사랑이란 감정에 치우쳐서 정작 냉정하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할 문제에 있어서는 제대로 생각을 못한다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사랑에 눈이 멀어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 않았던가.
유키는 까칠한 턱을 매만지며 혹시나 김 지나가 올까하는 기대심에 대문 쪽을 힐끗 바라봤다.
'어리석군.'
그의 행동 또한 사랑에 빠진 남자 같았다. 그래서 어리석게도 베란다에 서서 몇 십분이고 대문을 쳐다보고 있지를 않는가. 손목시계를 몇 번이나 내려다봤던가.
그는 혀를 끌끌차며 돌아섰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유스케?"
"말 그대롭니다."
"아뇨!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요!"
지나는 자신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안전벨트를 서둘러 풀었다. 더듬거려서야 벨트를 풀 수 있었고 달리는 차문을 열어젖힐 수 있었다.
동시에 유스케의 짧은 비명같은 고함소리가 지나의 귓속을 뚫고 들어왔다.
"무슨 짓이에요!"
유스케는 얼른 오른 팔을 뻗어 열린 조수석의 문을 닫고 문을 잠궈버렸다. 운전석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문이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순간 유스케의 온몸을 휩쓸고 지나간 것은 그 순간 그녀가 달리는 중에 차에서 뛰어내릴 뻔 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지나는 문고리를 계속 잡아당기기를 반복했다. 하다 못해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다.
"어서 차를 세워요! 얼른요!"
"지나씨!"
"아뇨! 더이상 유스케와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어른 차를 세워요! 당장 내리겠어요!"
"지나씨! 제발 내 얘기 좀 들어요!"
"아뇨! 싫어요! 싫다니까요!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듣고싶지 않아요!"
눈물을 글썽거리며 지나는 문고리를 놓치지 않았다. 언제든지 차에서 뛰쳐내릴 기세였다.
"제발... 아무 소리하지 말고 세워줘요... 유스케..."
유스케는 눈물을 가득 머금고있는 그녀를 쳐다봤다. 당장 검은 눈동자에서는 폭포수같은 눈물을 쏟아내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녀는 너무 흥분되어 있었다. 물론 그녀에게 자신의 말이 얼토당토 않을 수도 있고 또는 미쳤다고 여겨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기까지 생각해서 꺼낸 말이었다.
천천히 차는 도로변에 세워졌다. 그러나 문은 섣불리 열어주지 않았다. 대신에 차분한 음성으로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지나씨... 이건 내가 지나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욕심부리는 거 아닙니다. 만약 그런 생각으로라면 이렇게 지나씨를 설득하거나하지는 않을 겁니다.
무력을 쓰든 어떻게서라도 당신을 일본에 데려기만 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난 그러고싶지 않아요. 당신을 해치고싶지 않습니다.
사모님의 말씀...기분상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순 더 없어요. 정말 유키를 그의 가족에서 떼어놓을 작정입니까? 그러고 싶어요?"
지나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며 유스케의 진지한 눈을 들여다봤다.
그의 말이 절대적으로 틀렸다고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옳다고 바보같이 따르기도 싫었다.
사토 유키를 사랑하는 그녀의 감정 앞에 유스케의 말은 완전히 정신 나간 미친 짓이었다.
내일 당장... 사토 유키와의 결혼인데... 그를 버리고 일본으로 같이 떠나자는 말은... 유스케의 말은 정신나간 짓이었다.
"정말 그러고 싶어요? 영원히 사토 집안에서 쫓겨나는 거라고요!"
"아... 아, 아뇨..."
"정말 유키를 사랑한다면... 놓아줘요. 어차피 그녀석은 당신을 가슴 속에 묻어둘 남자가 아니니까요.
그의 감정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아요. 당신만 힘들어지니까. 당신 심장만 다쳐요. 그러니까... 나와... 가요."
유스케의 손길이 다가와 지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넘겼다. 그녀는 그의 손길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망부석이 되고말았다.
"뱃속에 있는 아이를 생각해요. 어차피 그 아이는 당신의 사랑을 받을 순 있지만 두 사람의 선택이나 사랑에 의해서 자라지는 못할 겁니다.
그것은 그 아이에게 슬픔을 줄 뿐이에요. 아이의 행복을 위해선 차라리... 날 선택해요. 난 기꺼이 준비가 되어있으니까."
유스케의 눈동자는 진지함 뿐만 아니라 진실함까지 담겨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지나는 더욱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뱃속의 아이에 대해 얘기를 꺼낼 때는 입밖으로 승낙할 뻔하기도 했다.
"무... 문... 열어줘요. 늦었어요."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혼란스러운 정신상태 속에서도 그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다는 자신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탁'하는 소리와 함께 문고리를 당기자, 조수석의 문이 열렸다. 지나는 무릎 위에 얹혀져있는 핸드백을 꼭 쥐고는 차에서 내렸다.
"내일... 열 두 십니다."
지나는 차에서 완전히 내리지 못하고 놀란 얼굴로 뒤돌아봤다. 갑자기 열 두 시라니...
"공항에서 기다릴 겁니다. 지나씨를요..."
"안녕히 가세요."
"지나씨! 열 두 십니다! 기다릴게요!"
지나는 서둘러 그곳에서 벗어나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해주고 숨을 내쉬던 그녀는 목구멍까지 숨이 막혀있었음을 깨달았다.
숨이 턱까지 올라차 거칠게 뿜어졌다. 간신히 빠른 숨을 가다듬고 창밖을 응시했다.
'내일 열 두 시라니! 말도 안 돼! 내가 그곳에 갈 일은 결코 없을 거야! 난 가지 않을 거니까. 당신 혼자서 떠나게 될 거예요.'
택시는 잠시 후, 커다란 대문 앞에 멈추었다.
택시가 떠나고 난 뒤, 지나는 대문쪽에 비치는 조명 외에는 어느 불빛 하나 없이 주변이 온통 어둡다는 것을 알았다.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초인종을 굳이 누르지 않고 열쇠로 이용해 대문을 열고 그리고 잠겨진 현관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컴컴한 거실에 유일하게 비춰진 주방의 작은 불빛에 의존해 침실로 향했다.
그러나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어디선가 들리는 섬뜩하고도 차가운 음성에 몸이 굳고 말았다.
"오늘 중으로는 나타났군, 그래."
지나는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을 뚫고 시야를 던진 곳은 거실 소파였다.
그녀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리면서 유키의 모습을 세밀하게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발소리가 먼저 들렸다.
그 발소리는 지나의 바로 앞에 멈추었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야 지나는 유키의 몸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정도로 그녀의 신경은 복잡한 감정때문에 둔해져 있었다.
"아, 아직도... 안 잤어요?"
"..."
"죄송해요. 전화를 못 해서... 그럴 사정이 좀..."
"손이라도 다쳤나보군? 그랬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 난 그 정도로 아량을 베풀 수 있는 남자니까..."
지나는 고개를 들었다. 얼굴 가까이 들리는 그의 음성이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냉기에 닿기만해도 몸이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가. 그래서 사토 유키의 기압이 완전 저기압이란 말인가.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아 몹시 몸이 떨렸다.
목구멍까지 치솟아올라온 말을 묶어버린 것은 아까 유스케가 말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 전에 만났던 카오리의 말이 그녀의 목을 힘껏 조여오고 있었다. 지나는 힘겹게 침을 삼켰다.
"죄, 죄송해요..."
그러나 유키는 대답보다는 지나의 왼쪽 손목을 신경질적으로 거머쥐었다. 그리고 아주 짧게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야 지나는 그가 화가 난 이유가 단지 하나란 것을 알았다.
"시계는 차고있군. 그리고 손을 다친 흔적은 전혀 없고."
"죄송하다고요."
"누구랑 있었소?"
"네? 아, 저..."
말할 수 없어! 카오리를 만났다는 것을, 유스케를 만났다는 것을 말해선 안 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그들을 왜 만났는지를 다그쳐 물어댈 것이고,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그녀에게도 그 두 사람에게도.
지나는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그 침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누구하고 있었냐고 물었소."
"치, 친구하고 있었어요."
"친구 누구?"
"어차피 당신은... 내 친구에 대해서 한 명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아무 이름이라도 대겠다는 거요? 거짓말로?"
"아, 아뇨."
지나는 그를 지나쳐 주방으로 갔다. 목이 계속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에게 어눌한 거짓말을 꾸며내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는 알았다.
그래서 무슨 말을 내뱉기가 더욱 힘들고 목이 말랐다. 시원한 물을 두어 모금 마시고나서야 그에게 조금은 자신있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연락도 없이 늦은 건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아직까진 우린... 결혼하지 않았어요. 제게도 사적인 시간이 있다는 것만은 알아줬으면 해요."
유키는 슬리퍼를 조용히 끌며 주방으로 걸어들어와 그녀 곁에 섰다. 그리고 그녀가 쥐고있는 물컵을 빼앗아 남은 물을 마셨다.
그리고 냉랭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알아. 난, 당신 남편도 당신 애인도... 그리고 당신의 가족도 더욱 아니니까. 그런 말이 하고싶은 거 아니었소?
그러니까 신경 끄란 소리지. 내가 누굴 만나든, 몇 시에 들어오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는 거 그 말 아니오?"
아랫입술을 무의식 중에 깨물고 있던 지나는 두 손을 깍지끼고는 한참 후에 속삭이듯이 대답했다.
"그, 그래요. 맞아요..."
"아아... 알겠소. 당신이 나가서 다른 남자와 침대에서 뒹굴고 들어온다고해도 난 상관하지 말아야겠지. 우린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니까.
하지만, 명심해! 당신은 나와 결혼할 여자란 걸! 단 몇 시간 동안이라도 잊어서는 안 될 거요!
내 결혼에 어떠한 불명예스러운 일이라도, 내 기분을 흐트러놓는 어떠한 방해물이라도 존재해서는 결코! 결코 안 된다는 거... 잊지 마시오!"
유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그녀의 턱을 거칠게 거머쥐고는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
아주 짧은 키스였지만 그녀에게 무언의 경고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충분히 그녀에게 죄에 대한 대가이고도 남았다.
지나는 떨리는 몸을 추스르기보다는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도와주세요. 내가 결코... 결코 그를 배신하지 않도록... 그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지 않도록 힘을 주세요.
내일 결혼식까지... 그때까지만 그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그를 따를 수 있도록... 제발 저를 인도해주세요...'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