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완전히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밥도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고, 수업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다면 분명 엄마는 아버지의 손에 죽을 수도 있었다. 아버지와 약속이 다가오기 전까지 세준과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었고, 계속 그와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땀을 많이 흘렸어. 먼저 씻어야 할 것 같아. 엄청 찜찜하네."
"알았어요."
따르릉.
때마침 울리는 전화벨소리에 태림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수화기를 집어 올렸다.
"여보세요."
-나다.-
참으로 밉살스러운 목소리였다.
-약속 날짜가 다 되어 가는 걸 혹시 잊어버리고 있을 까봐 전화했다.-
마치 일상생활 이야기를 나누는 부녀지간 같은 대화였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래. 날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믿으마.-
띠띠띠
"누구 전화야?"
세준은 윗옷을 벗은 채로 욕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집에서요."
아버지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집에서라면 부모님 중에 누군지 밝힐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침대 위에 있는 서류 좀 서재에 가져다 놓아줄래. 가져다 놓지 않으면 서재에 가고 싶지 않을 것 같아."
세준의 말을 굳이 해석하지 않아도 그의 눈빛이 무엇 뜻하는지 태림은 이제 잘 알고 있었다.
"그럴께요."
지금이 기회였다. 다리가 떨려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지만 태림은 몰래 숨겨둔 카메라와 서류를 들고 조심스럽게 그의 서재로 향했다.
그가 눈치 못 채도록 서류의 순서를 잘 외어둔 태림은 모델 디자인이 그려진 서류와 그 외 영어로 써져 있는 서류를 다 찍었지만 무슨 정신으로 찍었는지 모를 정도로 긴장해 거의 스러질 지경이었다.
사진을 다 찍고 왔을 때에도 세준은 욕실 밖으로 나오지 않은 상태여서 카메라를 가방 속에 숨겼다.
"가져나 놓았어."
"네."
"가자 밥 먹으로 아무래도 너 많이 먹어야 겠다. 요즘 들어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아."
교복이 조금 헐렁해 지기는 했지만 올래 여름을 타는 태림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여름이라서 그럴 거예요."
"그럼 과일이라도 많이 챙겨서 먹어 아주머니가 챙겨주는 것만 먹지말고 먹고 싶으면 사먹기도 하고 그래."
"그럴께요."
"용돈 없어?"
머리를 털다 말고 세준은 태림에게 다시 눈길을 주었다.
"많이 있어요. 아버님이 넘치게 주시는 걸요."
태림은 그렇게 말하는 자신이 생기가 전혀 없어 보이는 걸 모르는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태림은 세준이 머리를 털다 말고 옷장으로 움직이는 것도 못 느끼고 있었다. 태림이 좀더 세준과 살아가면서 그가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몇 가지를 알게 되었는데, 그 중에 그는 머리에 물기가 남아 있는 걸 싫어해 마른 수건으로 여러 번 터는 것을 좋아했고, 머리를 말리다 말고 절대 다른 것을 하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태림은 갑자기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이마에 정통으로 물을 맞고 말았고, 그 물이 세준의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인 걸 알고 놀라 일어서 수건을 찾았다.
"머리가....."
"알아. 자 받아."
그녀는 세준이 내민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웬 지갑이에요?'
세준의 손에는 가격이 보통이 아닌 것이 한 눈에 보이는 고급 지갑을 들고 있었다. 그것도 여자 손 지갑이었다.
"너 주려고 지난번에 사놓았는데, 깜박 잊어버리고 있었어."
잊어버렸단 것 거짓말이었지만 쑥스러워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고마워요."
태림은 그가 주는 선물을 소중히 손에 쥐었다.
"빈 지갑 주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해서 용돈 좀 넣어 두었으니까. 필요한 것 있으면 써."
"너무 많아요."
세준이 준 돈은 지금까지 시아버지가 준 용돈과 맞먹을 정도로 많은 액수였다.
"이렇게 많은 돈은....."
"필용 없다는 소리는 마. 사람이 살아가면서 돈은 꼭 필요한 거야.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쓸 일이 생길 줄 어떻게 알아."
아버지는 약속대로 학교 앞에 나와 있었고, 오늘도 그 기사는 차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기사 아저씨는요?"
"나이도 있고 해서 집안 일이나 도우라고 했다. 가지고 왔냐?"
마음이 조급한 아버지는 더 이상의 대화는 원하지 않는 다는 걸 확실히 했다.
"네. 약속 잊으시면 안돼요. 절대 엄마에게 다시는 손대지 않는 다는 거요."
아버지는 카메라가 담긴 봉투가 자신의 손에 잡혀지자 비열한 웃음을 띄웠다.
"걱정할 것 없다. 요즘 집에 들어가는 일도 없으니까."
"태림아? 아직 안 갔네."
"응."
오늘 주번이었던 유정이 마지막 정리를 하고 나오는 길인 것 같았다.
"누구야? 그 사촌 오빠야?"
말에 가시가 있었지만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는 태림의 귀에는 거슬리는 소리로 들리지는 않았다.
"아니. 우리 아버지."
"무슨 일로 오셨는데, 얼굴만 보고 가셔?"
유정은 항상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온 외동딸이었기에 태림의 상황을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바쁘셔서, 뭐 좀 부탁하신 게 있으셨거든. 오늘도 아빠오시니?"
"응. 태워다 줄까?"
"아니. 괜찮아."
유정은 태림이 세준 의 집 앞으로 갈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안내할지 정말 궁금했다.
"태워다 줄게."
유정이 태림의 팔을 붙잡는 순간 그들 앞에 차가 멈춰 섰다.
"타."
"유정아. 미안해 먼저 갈게. 내일 보자."
태림은 세준이 오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의 차에 올라탔고, 차에 탄 세 사람은 유정이 주먹을 쥐고 이를 갈며 그들에게 저주의 말을 퍼붓는 것을 듣지 못했다.
"아까 그 학생 이름이 뭐야?"
"유정이요. 최유정이라고 아버지는 오..오빠 회사에...."
세준은 태림이 오빠라고 불렀지만 싫다는 표정도 그렇다고 좋다는 표정도 짓지 않았다.
"알고 있어. 지난 번 창립 파티 때 본적이 있는 것 같아.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를 입고 왔었지 아마. 친해?"
세준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태림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아버지가 준 사진기가 있었다면 꼭 담고 싶었다.
"그런 편이에요."
"그럼 다른 친구랑 친하게 지내고, 그 친구랑은 멀리지내."
태림은 그의 말에 놀라 자동으로 반문을 했다.
"그냥 별로야. 내가 싫어, 그러니까 친하게 지내지 말고 차라리 나중에 현이가 마음이 풀리면 그때 현이랑 다시 잘 지내."
"현이는 잘 지내고 있죠?"
"바쁘게 지내. 나하고도 말하지 않아. 일부러 일에만 전념하는 것 같아. 그때 일은.... 내 잘못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네."
하지만 이제는 정말 태림이 잘못한 일이 생겨버려서 어쩔 수가 없었다.
속이 별로 좋지 않아 자율 학습 시간에 조용히 빠져 나와 화장실을 사용하고 나오던 태림은 화장실 입구에서 각기 다른 포즈를 잡은 채로 서있는 오공주파의 모습에 잠시 주춤했다.
"좀 비켜줄래."
"흥."
태림은 그들의 신경을 그다지 거스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저기... 아야!"
오공주파 애들 중 선생님이 없으면 손목에 빨간 손수건을 두르고 다니는 점순이가 태림의 가슴을 꼬집었다. 코밑에 점이 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진짜네! 너 가슴이 많이 커졌다. 이상하네 지난 번 까지만 해도 완전히 아스팔트의 껌 같더니 요즘 들어서는 완전히 사과 수준이네."
"낄낄낄."
태림은 아이들의 정확한 지적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세준이 붕대를 감는 것을 싫어해 용기를 내서 속옷을 사 입었기 때문에 가슴이 커지게 보인 것이었다.
"사실 창피해서 천으로 감고 다녔는데, 올 여름이 너무 더워서 풀고 다녀서 그래. 그만 해."
태림은 그들을 피해 나가려고 했지만 그 중에 세 번째로 태어나 삼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지나가려는 태림의 머리채를 붙잡아 태림을 뒤로 끌어 당겼다.
"이년이 어디 건방지게 말도 다 안 끝났는데 가고 지랄이야."
"아야! 도대체 할 말이 뭐야. 이거 놓고 말을 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들이 태림을 둘러 샀다.
"너~ 결혼했다면서."
질문이 아닌 확신이었다.
"뭐?"
태림은 놀라 부정하지도 못했다.
"너 결혼했다는 거 다 알아. 그런데 너 결혼했으면서도 미팅했다면서."
태림은 너무 창피해 아무 말도 못하고 고스란히 당하고 있었다.
"네 남편도 너 미팅한 거 알고 있냐?"
"..."
"어머머. 남편 몰~~래 했겠지, 그런 걸 남편한테 말했겠니?"
"그만해."
"싫어. 너 결혼 한 채로 딴 남자하고 눈맞으면 간통인 거 알고 있니?"
아이들은 자신들이 한 말에 서로 마주보고 낄낄 웃었다.
"네 남편이 좀 시원찮은 가봐. 남자들 정력에는 뱀이 좋다던데. 너네 아버지 돈 많다면서, 엄마한테 말해서 사위 몸보신 좀 시켜달라고 해. 딸 바람 피게 만들지 말고."
태림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 오빠 더 이상 모욕하지마. 나 이제는 못 참아."
"아이고 무서워라. 그러면 우리가 벌벌 떨 줄 알았냐."
이제 점순이는 태림의 이마 중앙을 손가락으로 뚝뚝 퉁기기 시작했다. 지가 마치 학생주임 선생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오빠를 말하는 거냐? 아니야 그게 궁금한 게 하니라 우리가 좀 불량해 보여도 완전히 숫처녀들이거든, 먼저 결혼하신 선배님으로써 우리 성교육 좀 시켜주라."
이들이 원하는 것을 가는 할 수가 없는 것이 태림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다들 수업중이라 화장실을 찾는 사람은 없을 거고, 있다고 해도 오공주파의 심기를 건들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였다.
"본론만 말해."
"어머. 그 당당함은 유부녀가 되면 생기는 거니? 걱정하지만 우리가 알고 싶은 것 처녀하고 유부녀하고는 거기가 생긴 게 다르다며? 너니 남편이랑 뜨거운 밤 많이 보냈을 거 아니야. 그러니 불쌍한 중생들한테 보시한다고 치고 좀 보여주라."
태림은 오공주파에게 포위 당했을 때 보다 더 창백해지고 말았다.
"뭐.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태림은 최선을 다해 나가려고 했지만 아무리 키가 큰 태림이어도 다섯 명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이들은 효율적으로 태림의 팔과 다리를 붙잡기 시작했고, 태림이 거칠게 반항하면서 팔꿈치과 발길질에 의해 다치자 보복으로 태림의 뺨을 때렸다.
"야! 이런 씹년이. 가만이 있어. 조금 구경만 하고 보내준다는데 왜 이렇게 뻣뻣하게 굴어."
"하지마. 너희들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아이들은 태림의 몸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드디어 태림의 팬티를 벗기는데 성공하려 하고 있었다.
"너희들 이게 무슨 짓이야?"
중요한 일이 있어 잠시 자율 학습을 시켰던 담임 선생님과 실습을 나온 선생님이 어떻게 알았는지 손에는 항상 쥐고 다니던 매를 쥐고 헉헉거리며 화장실에 들어와 들고 있는 매로 태림을 괴롭히고 있는 아이들은 사정없이 한 대씩 내리쳤다.
태림이를 꼭 쥐었던 아이들은 갑작스러운 선생님의 등장과 바로 이어지는 매질에 태림을 놓아주었고, 담임의 매질에 꼼짝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맞았다.
"이것들이, 내가 뭐라고 했어. 공부하지 않아도 좋다. 학교를 나오지 않은 것도 너희들 자유 다고 했지. 다만 아이들을 건들면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고 말했을 텐데. 니들이 건달이야. 이런 양아치만도 못한 것들. 너희들 오늘 한번 나 쓸어 질 때까지 맞아봐."
태림은 풀어진 교복을 수습하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흥분한 담임 선생님을 막을 수도 없었다.
"태림이 넌 교실로 가있어."
"하지만....."
"가 있어."
태림은 담임 선생님이 이토록 화난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잠시 주춤거리는 태림은 실습선생님이 등을 떠밀자 교실로 향했다.
"오늘 너하고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선생님이 오늘 일이 생겨서 못할 것 같아. 집에다가 오늘 있었던 일 이야기해서 가능하면 전학 가는 걸로 하자."
"네."
태림은 담임선생님께 너무 죄송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언제나 매를 들고 다녔지만 숙제를 하지 않거나 수업시간에 조는 경우를 빼고는, 그것도 한두 대가 최대였다. 누구를 그토록 심하게 때린 적은 없는 분이었다.
"너 아니었어도, 요즘 그 애들이 하는 행동이 좋지 않아서 보고 있던 중이었어. 당분간 조심하도록 하고 화장실 갈때도 혼자 가지 말도록 해."
"네."
"너 다리가 왜 그래?"
세준은 앞에 김기사가 있어서 태림의 치마를 들추지는 못했지만 태림도 넋이 나가서 못 본 멍을 발견해 손으로 만져보았다.
"어. 그게..."
다행이 손자국이나 손톱자국은 남지 않아서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더 이상의 걱정거리를 더해주고 싶지 않았다.
"체육 시간에요.... 피구하다가 공을 좀 많이 맞아서 그래요."
"너만 공격한 거야?"
"아니요. 얼굴 맞아서 멍든 애도 있어요."
이제 거짓말이 술술 잘 나왔다. 어른들 말처럼 할수록 느는 것은 거짓말 같았다.
"너 운동신경 별로지?"
"그리 나쁘지는 않아요."
대화가 다른 곳으로 흘러갔지만 태림은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세준의 놀림을 조금의 장난기로 받아 주었다.
"아닌 것 같은데. 운동신경이 좋다면서 어떻게 이렇게 멍이 많이 들어."
세준은 멍 이야기를 하다가 김 기사가 없고 그가 운전을 했었더라면 태림에게 또 다른 새로운 경험을 시킬 수 있을 상황으로 몰리고 말았다.
태림은 멍이 잘 드는 피부였기 때문에 세준의 손길에도 멍이 잘 들곤 했지만 또 금방 사라지기도 했고, 혹시 세준이 조금만 힘을 주어서 그녀의 피부를 입에 머금기라도 하면 자줏빛으로 변해 태림이 조금만 목 근처로 와도 놀라기도 했다.
태림은 갑자기 자신을 놀리다가 말을 멈추고 밖을 내다보는 세준의 변화에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길을 느꼈는지 태림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사람의 손이 이렇게 따뜻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엄마의 손은 따뜻했지만 커 갈수록 태림의 손이 더 커갔었고, 아버지와는 손을 잡고 외출한 적은 한번도 없어 누군가의 손에 그녀의 손이 폭 감싸진 적은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손을 잡은 채 각자의 옆에 있는 창을 바라보며 이렇게 잡은 손이 절대 놓아지는 일이 없도록 빌었다.
오공주파 아이들은 그 일이 있는 다음 날 바로 근신에 들어갔고, 아이들은 잘되었다고 좋아하면서도 소리소문 없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궁금해했고, 다들 추측을 할 뿐이었다.
태림이 그들에게 당하는 걸 선생님에게 보고해준 고마운 후배 역시 누군지 모르지만 나중 일을 생각해서 소문을 내지 않는지 저학년에서도 별다른 소문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유정은 뭐가 불만인지 태림에게 말을 잘 걸어오지도 않았지만 태림은 곧 터질 일 걱정에 신경 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