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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어떤 사람인가.

하늘바다 |2005.04.17 20:32
조회 654 |추천 0

(김대중의 사생활)

1959년 6월 金은 강원도 인제 지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 낙선하자 빚을 지고 생활고에 허덕였다. 이때 김대중의 전처 차용수는 빚에 시달리고 계까지 깨져 음독 자살했다.

김대중은 그후 62년 10월 현재의 부인 이희호씨와 중매로 결혼했다. 김대중은 국회의원시절에 처 이씨를 자신의 비서관으로 등록, 해외여행에 동반하기도 했다.

김대중은 1945년 8·15해방 후 근무하던 일본인 해운회사를 인수해서 사업에 뛰어들었다.
해방 당시 일본인 소유의 회사, 토지, 주택 등 여러 형태의 재산은 적산(敵産)이라 하여 미군정청이 인수했고 1948년 대한민국 건국 후 국유재산이 되었다. 이른바 ´적산불하´ 로 출발한 한국의 기업은 많았다.

김대중이 어떠한 과정으로 일본인 기업을 인수했고 정계에 입문하면서 처분했는지, 김대중은 1980년 계엄사에 제출한 자술서에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다(자료집 참조).

1980년 한국에 체류하면서 김대중을 집중적으로 취재한 일본의 시바다 미노루(柴田穗) 기자는 김대중의 회사 처분에 대해 위 경향신문의 기사와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이래는 시바다 미노루,『김대중의 좌절』산께이 신문(1982) 기사다.

"김대중씨가 급히 강원도로 피신을 하게 된 것은 해운회사의 부사장 나상수가 김대중씨를 횡령으로 고발했기 때문에 그는 급거 강원도로 몸을 숨긴 것이다. 당시, 군통제지역에서 행정지구로 막 편입됐을 뿐인 강원도 인제 지구는 김대중씨가 잠적할 장소로서 가장 적당했다. 김대중씨가 59년 선거직전이 아니라 56년에 강원도로 옮긴 사실과, 56년까지의 사이에 횡령이 있었다는 사실은 시기적으로 꼭 맞아떨어진다".

"김대중씨가 민주당에 입당한 것, 그 직후에 카톨릭 세례를 받은 것, 강원도로 옮겨간 것은 모두 56년에 일어났다. 그렇다고 하면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서는 세례도, 횡령도 태연하게 한다는, 김대중씨의 수단을 가리지 않는 술책을 보여주는 것이다".

"59년 6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인제 지구에 출마, 낙선한 직후 새로운 횡령사건이 발각된다. 선거기간 중 투개표 입회원이었던 문수룡(文壽龍)이라는 사람이 돌연 급사했다. 민주당에서는 문수룡을 순직으로서 처우하고, 조의금을 보내게 되었다".



"당 중앙간부가 조의금 30만원을 모아 김대중씨를 통해 유족에게 건네주도록 했다. 그런데 김대중씨가 이중 12만원만을 유족에게 건넸을 뿐 나머지 18만원을 착복해 버렸다. 이 사실을 안 당시 민주당원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이 김대중씨의 파렴치한 횡령행위를 비난하고
민주당에서 탈당해 버렸다".

"김대중씨의 조의금 착복사실이 널리 당내에 전해지자, 당내는 물론 선거구 전체의 비난이 집중됐다. 그래서 궁지에 몰린 김대중씨는 반대로 탈당한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하는 행동으로 나왔다. 고발당한 네 명은 김대중씨를 횡령과 무고(허위신고)로
대항, 고소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사건은 유야무야로 끝난 듯하다"

"61년 7월부터 김대중씨는 민주당의 대변인이 된다. 그런데 선전부장 시절에도 횡령 사건이 있었다. 선전부장으로서 학원공작을 구실로 조달한 선거 자금 3천 7백만원 중 7백 7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어 검찰에 송치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김대중의 모략 질)

1960년 7월29일 4·19혁명으로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는 7명의 후보가 난립, 4·19혁명으로 쓰러진 자유당의 이름을 내걸고 선전한 전형산씨가 김대중을 누르고 당선됐다.

이렇게 되자 김대중은 4백 명의 데모대를 조직, 군청개표소에 난입, 투표한 22개중 15개를 강탈한 후 전씨의 사퇴를 강요하는 연좌데모를 벌이게 했었다.

드디어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전씨는 김대중에게 사퇴를 약속했지만 법적인 효력이 없어 전씨의 당선은 보장됐다.

그후 민주당 정권이 전씨를 공민권제한 대상자로 만들어 의원자격을 박탈하자 김대중은 61년 5월의 보궐선거에서 일방적으로 당선됐다.

이밖에 김대중이 각종선거전에서 저지른 폭력 및 흑색선거운동을 보면-

▲자신의 선거참모를 자파 당원으로 하여금 구타하고 상대당원이 테러를 했다고 역선전했으며

▲목포시 만호동 상가주택을 철거한다는 낭설을 퍼뜨려 자기선거운동원을 측량기사로 위장,주민의 불안감과 반감을 유발케 했고

▲자신의 선거운동원에게 상대방의 완장을 두르게 하고 고무신을 배급, 유권자의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상대당원을 가장하여 유권자들에게 회식이 있다고 초청하는 허위선전을 해 상대방후보에 대한 반감과 불신감을 갖게 했으며

▲김대중의 사인을 받아오는 자에게는 돈을 주게 하여 자신의 인기를 조작했다.

1971년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을 때 그는 단순한 자동차사고를 여당 측의 암살음모라고 떠들어대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중 운전사의 운전부주의로 김대중이 탄 승용차가 전복된 것이 조사결과 밝혀져 자동차 사고의 암살음모 주장은 결국 김대중이 조작한 혐의가
짙다는 것으로 끝났다.

* 김대중의 집안에 폭발물을 설치한 세칭 폭발물 자해사건도 발생했다. 이는 대통령후보인 김대중의 집 앞에 폭발물을 장치, 공화당에서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한 사건이다.

조사결과 이 폭발물은 어린이들의 장난감용 딱총 화약을 은박종이에 싸서 배터리 전지로 폭발할 수 있게 만든 조잡한 것이었다.

김대중 암살용 폭발물이었다면 이같이 조잡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결국 김대중이 조카를 시켜 저지른 조작극으로 밝혀졌었다.


(김대중의 사기 행각)


김대중은 현재(1980) 그가 살고 있는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을 비롯한 부동산 4억원, 동산 1억원 등 5억원의 재산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2월 29일(1980) 복권 후에는 자신이 집권할 경우 경제적 이권, 정부 요직 등을 미끼로 각계인사로부터 무려 12억 원 이상을 받아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가 정치자금을 조달한 것은 대부분 파렴치한 수법에 의한 것들이었다.

▲우선 1959년 6월 인제 지구 재선거에 출마했을 당시 그의 선거참관인 중 문수룡이 참관도중 급사하자 민주당에서 조위금으로 보내온 30만원 중 18만원을 횡령 착복했고

▲50-56년 사이의 목포해운회사 경영 중 선원봉급과 배를 판돈 1억 5천만원을 횡령, 도주했다.

▲또 60년 4월~61년 4월까지 민주당 선전부장으로 재직할 때 학원공작구실로 조달한 3천7백만원중 7백70만원을 횡령, 검찰에 구속 송치됐다.

▲7대의원 당시에는 8대 국회의원 당 공천을 해준다고 속여 박종태로부터 5백만원, 김세종으로부터 3천8백50만원, 이원형으로부터 1백만원 등 4천4백50만원을 사취했다.


그후에도 국회의원이란 직위를 악용, 호남제분, 동아건설, 대한농산, 삼양수산 대표들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아낸 사실도 밝혀졌다.


1972년 10월 김대중이 일본에 머물고 있을 때 10월 유신으로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산됐다. 그러자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왕래하며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와 군사원조의 중단, 망명정부수립, 김일성 정권과의 접촉시도 등 반국가적 행위를 자행했다.

1973년 4월에는 미국 하버드대 코헨 교수에게 한국의 박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 미국이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도록 미의회 지도자에게 압력을 넣어달라고 호
소했다. 또한 미국에서 북한을 방문한 친북한 분자들을 만나 반국가 단체를 조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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