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개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렛
(8) 여자의 마음은 갈대이다.
신애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창 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졌다.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본다는 것은 그만큼 생각할 것이 더 많아지고 있다는 뜻이 될 수도 있었다. 신애는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한 강을 불신하기도, 맹신하기도 하고 있었다. 마음한편에서는 그를 한 없이 믿고 싶어 하다가도,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를 의심하는 마음이 싹트고 있었다. 신애는 계속 밀려오는 그의 생각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만 하고 싶었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이 그녀를 놓아두면 여지없이 그의 생각이 밀려 들어왔다.
“신애씨, 무슨 고민 있어?”
유대리가 신애의 행동을 보더니 말했다. 그의 말에 신애는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애써 밝은 목소리로 신애가 유대리를 향해 말했다.
“커피 한잔 하실래요?”
“좋지!”
“진아 너도 마실 거지?”
“어? 제가 할까요?”
“아니야. 언니가 해 줄게.”
신애가 커피 자판기를 지나 커피와 프림통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종이컵 세 개를 꺼내어 각각에 맞게 커피를 타 진아와, 유대리에게 건넸다. 유대리가 신애가 건네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신애씨야. 자판기 커피보다는 역시 손으로 타준 커피가 제 맛이지.”
“언니는 불편하지 않아요? 자판기 커피 있는데…….”
“자판기 커피는 일률적이잖아. 맛도 똑같고. 근데 손으로 타는 커피는 타는 사람 기분에 따라서 맛이 틀려지니깐. 난 그 맛이 좋거든.”
“그럼 오늘 신애씨 기분은 환상인가?”
유대리가 신애의 말에 웃으며 말했다. 신애는 따스한 커피를 한 모금 축이며 생각했다. 유대리의 말처럼 자신의 기분이 지금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날 저녁 퇴근길에 진아가 기분 좋게 신애에게 매달리며 콧소리를 내고 있었다.
“언니, 오늘 우리 영화 봐요! 네?”
“남자 친구랑 봐.”
“남자 친구는 무슨....... ”
“왜? 싸운 거야?”
“재수 없어 죽겠어요. 매일 게임 하느라 밤새고, 전화도 안하고 정말 어떻게 고쳐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언니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제 고민상담 좀 해주세요!”
진아가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며 신애를 근처 생과일 전문점으로 끌고 들어갔다. 둘이 나란히 키위 주스를 시켜 놓고 진아가 본격적으로 신애에게 신세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거예요? 뭐 1년간 백수로 지낸 거는 내가 이해하겠어요. 하지만, 이제는 아르바이트도 안한다니깐요!”
진아의 남자친구는 백수였다. 1년간 사귀면서 1년 내내 백수로 지낸 것에 진아는 상당한 불만감을 가지고 있었다. 진아의 남자친구는 진아의 중학교 동창이라도 했다.
“그럼 일이라도 하게 만들어 봐.”
“말이라도 들으면 다행이게요. 요즘에는 게임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안한다니깐요! 아예 거기서 먹고 자고 해요. 이러니 제가 화가 안 나겠어요?”
“........”
“솔직히 다른 친구들 애인들은 차도 있고, 재력도 있고, 때 되면 뭐다 해서 기념일 핑계로 선물도 빠빵하게 안긴다는데, 사귄지 일년이나 됐는데 아직 실반지 하나 없어요.”
진아가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울먹거렸다. 그런 진아를 보면서 신애는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10년간 실반지 하나 끼지 못했던 손이었다. 신애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살며시 가렸다. 10년간 반지하나 낄 호사조차 못 누린 자신의 손이 불쌍해 보였다.
“그럼 다른 남자를 만나봐.”
신애의 말에 진아가 물고 있던 스트로우를 질근 깨물며 말했다.
“당사자가 아니면 모른다니깐요. 언니 너무 무성의해요!”
“너 내가 헤어지라고 하면 헤어질 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것 봐. 너 항상 그러는 거 알아? 내가 맞받아쳐서 남자친구 욕하면 너 또 꽁하게 삐칠꺼잖아. 그렇다고 내가 안받아주면 안받아준다고 뭐라고 하고…….”
“언니도 참……. 화내지 말아요. 나도 답이 안 나와서 그러는 거니깐요.”
“언니 남자친구랑 헤어졌어.”
“네? 10년간이나 사귀었잖아요.”
신애의 폭탄선언 같은 말에 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안타까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신애는 그런 진아의 표정이 부담스러워 눈을 탁자로 내리 깔고 말을 이었다.
“헤어지고 나니깐 알겠더라. 사랑이라는 게 어떻게 안 된다는 거 말이야. 그렇게 내 목숨처럼 사랑했던 사랑도 한순간에 굿바이가 되어버리더라. 그러니깐 너도 후회할만한 사랑 하지 마. 사랑하면 목숨 바쳐 사랑해. 나중에 후회 없도록. 후회 할 것 같으면 아프더라도 헤어져. 그게 나중을 위해 좋은 일이니깐. 요즘엔 왜 진작 그 사람과의 인연을 끊지 못했나 싶을 뿐이야. 만약 미리 내가 끝냈다면 이렇게 아프지는 않을 텐데…….”
신애는 한탄 같은 말을 내 뱉었다. 신애의 말에 진아는 조용히 신애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남자친구 흉 볼 시간에 생각해봐. 정말 이 사람 없이는 안 되겠는지. 아니면 헤어져. 더 이상 힘들이지 말고…….”
“정이 들어서 이젠 헤어지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겠어요. 너무 익숙해 져서 이런 사람 아니면 어떤 사람이 내 성격 다 받아줄려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사랑이라는 게 한 사랑이 끝나면 또 찾아오는 게 사랑이더라.”
“언니 그럼. 그때 ......”
“아직은 그런 사이 아니야.”
진아가 한 강을 떠올리며 말을 하자 신애가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언제 발전 할지 모르니깐.”
“하긴,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잖아요.”
“이것 보세요. 아가씨. 그 갈대도 바람이 없으면 흔들리지 않는답니다.”
“하긴,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고 말하면서 흔드는 바람 욕하는 사람은 없더라고요!”
진아가 신애의 말에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신애도 진아의 웃음에 따라 웃었다.
“언니 그럼 그 전에 봤던 사람과는 진전이 있는 거예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
“왜요? 괜찮던걸요? 사람 핸섬해 보이고…….”
“그게, 한 번 사랑에 크게 데이고 나니깐 다른 사랑이 무서워져. 가끔 그 사람이 잘 해주면 ‘이러다 이 사람도 날 떠나겠지. 언젠간 내 곁을 떠나겠지.’ 하고 두려움이 앞서. 사랑보다는 그게 앞서. 그래서 선뜻 마음을 못 열겠어.
신애의 말에 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요. 한 번 사랑에 상처받으면 치유할 때 까지는 시간이 걸리더라고요. 이 세상에 사랑이란 없어. 라고 생각하게 되고요.”
“풋. 진아도 그렇게 생각한적 있어?”
“그럼요. 저도 한번 사랑에 크게 실패한적 있었거든요.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었는데 친구한테 빼앗겨 버렸어요.”
진아는 묻지도 않은 말을 잘도 말하고 있었다. 신애는 그것이 자신을 위해 은연중 배려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남자친구랑 사귄지 1년 정도 됐다고 했나?”
“네. 이제 며칠만 있음 일 년 돼요. 근데 언니 이상한 게요. 예전에는 제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고 그랬는데 요즘에는 그런 말도 못하겠어요. 헤어지자고 하고 며칠동안이라도 연락을 안 하면 제가 힘들어서 못 견디겠더라고요. 눈물만 나고.”
“너무 익숙해 져서 그럴 거야. 항상 거기 있던 사람, 항상 내가 전화하면 받아주던 사람이 갑자기 이젠 없다, 라고 생각하면 상실감이 크잖아.”
“언니도 그래요?”
“나도.......... 나도 그래. 나도 핸드폰 만지면 아직도 그 사람에게 전화해야 할 것 같은 기분 들고 그래.”
“그러고 보면 이 세상 남자들이 나쁜 것 같아요. 이렇게 착한 여자의 순정을 무시하고. 10리도 못가서 발병이나 나라!”
진아가 ‘진달래꽃’의 한 구절을 응용해 악담을 퍼부었다. 그 말에 신애가 빙그레 웃었다.
“사실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는 사랑이라는 거 앞으로 못할 거다. 라고 생각했어. 근데 이상하게 요즘에는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어.”
“사랑에 빠지기 전 현상이군요!”
진아가 자뭇 심각하게 신애의 진단을 내렸다. ‘사랑에 빠지기 전 현상.’ 진아의 말을 들은 신애는 자신이 그런 현상이구나 그제야 그렇구나 싶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 나 어쩜 그 사람 이제 사랑 할 것만 같거든.”
“에게? 10년 된 남자친구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진아가 신애를 놀리듯 말했다. 진아의 말에 신애가 그것도 맞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게. 나도 다음 사랑하려면 정말 오래 걸리겠구나 싶었는데 의외로 빨리 사랑이라는 게 다가오는 것 같아.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말이야.”
“그럼 언니도 이제 흔들리는 갈대가 되는 건가요?”
“바람이 부니깐.”
진아가 잘 됐다는 표정으로 방긋 웃음을 지었다.
우현은 느지막하게 일어났다. 5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어제 새로 시작한 게임에 빠져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던 그였다. 우현은 스르륵 눈꺼풀을 다시 감았다. 무언가 허전했다. 항상 울리던 신애의 전화도, 조용히 그를 걱정하는 듯한 말투로 종알대던 그녀의 잔소리도 없었다. 우현은 자꾸만 밀려오는 신애의 허전함을 채우려는 듯 담배를 집어 들었다.
[빈속에 담배는 안 좋아요.]
새초롬한 신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환청이 우현을 괴롭혔다. 어딘가 신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현은 물었던 담배를 쳐다보았다. 연신 ‘빈속에 담배는 안 좋아요.’ 하는 신애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아, 우현은 담배를 내려놓고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면서도 머릿속은 전혀 개운하지를 못했다.
“정말 벌을 받고 있는 걸까?”
우현은 신애를 버린 벌을 받을 것이라는 친구들을 말을 떠올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대충 비누칠로 몸을 닦고 우현은 옷을 챙겨 입었다. 이런 날 혼자 있으면 더욱 외로울 것 같았다. 우현은 근처 상근이네 술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스라이 아파트 내에 있는 가로수 벚꽃들이 지고 있었다. 연 분홍 꽃잎이 지는 하늘 사이로 날아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우현은 문득 작년 윤중로 벚꽃 축제에서 아이같이 좋아하던 신애의 얼굴이 떠올랐다.
“제길. 어딜 가든 그 여자뿐이군.”
이제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는 그였다. 그가 버린 여자였다. 자신이 매몰차게 내몬 여자, 이제 와서 자신이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신애를 버리고 싶어 안달했던 황우현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녀를 버리고 싶어 자존심마저 짓밟은 자신이 이제와 그녀를 이토록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이라는 말인가. 우현은 뱃속 끝에서부터 밀려오는 알코올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다. 이런 날 알코올로라도 그녀를 잊어야 갰다는 생각이 드는 그였다. 좀더 빠르게 우현은 상근이네 가게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횡단보도의 신호를 기다리던 우현의 눈에 무언가가 잡혔다. 소연이었다. 소연은 짙게 썬팅된 차 안에 타고 있었다. 창문을 내린 소연의 얼굴만 보일뿐 옆에 앉은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소연은 몸살이라고 말했었다. 몸살이라던 여자가 지금 낯선 승용차에 낯선 이와 웃으며 앉아있는 것이었다. 우현은 주저 없이 신호를 기다리던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야, 장소연!”
우현의 부름에 소연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놀람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우현의 목소리에 반대편에 있던 사람이 무어라 말하는지 소연이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우현은 소연이 앉은 조수석으로 가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소연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여전히 야한 그녀의 옷차림이었다. 아무리 10년 만에 찾아온 폭염이라지만 4월의 끝자락에 옷차림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녀의 옷차림이었다. 하얀색 탱크 탑에 배꼽을 훤히 내보이고 있었고, 짧은 청치마는 금새라도 그녀의 하얀 허벅지를 들어낼 듯 하고 있었다. 우현이 그녀를 끌어내리자 차 안에 있던 남자가 따라 내렸다. 추민석이라는 남자였다. 소연의 소개로 가끔 얼굴을 본적이 있는 남자였다. 추민석은 소연의 친구 추민아의 오빠였다. 그런 그가 왜 소연과 같은 차에 있는 건지 우현은 상황정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그때 추민석이 소연과 우현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그러긴 한데.......”
오랜만이라면서 그는 우현에게 착실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때였다. 신호가 바뀌었는지 뒤에서 차들이 민석의 차를 향해 신경질 적인 크락션들을 울려댔다. 민석이 우현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다는 듯 고개를 잠깐 숙여보이고선 근처에 있던 동사무소로 차를 빼었다. 그 사이 우현은 소연을 바라보았다. 소연은 우현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잔뜩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 뭐야? 아프다며? 몸살이라며? 근데 왜 추민석 차에 같이 타고 있는 거고, 이 옷차림은 뭐야!”
“뭔 상관이야!”
“뭐?”
“뭔 상관이냐고!”
소연은 우현의 말에 짜증이 가득 섞인 말투 대꾸했다. 소연은 우현을 쳐다보고 있지 조차 않고 있었다. 아예 대놓고 얼굴조차 보기 싫다는 듯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소연의 옷차림이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지 근처에 있는 몇몇 사람들이 소연을 쳐다보고 있었고, 그중 두어 명의 남자들이 소연의 몸을 대놓고 감상하고 있었다. 우현은 재빨리 자신이 들고 있던 재킷을 소연의 어깨위에 걸쳐주었다.
“뭐야?"
“입고 있어. 사람들이 쳐다보는 거 안보여?”
“사람들이 나 쳐다보는 거 한두 번이야? 새삼스레 왜 그래?”
“입고 있으라면 잠자코 입어!”
“내가 인형이야? 입으라면 입고, 벗으라면 벗게?”
소연이 곧바로 우현이 걸쳐준 재킷을 내리면서 말했다. 우현이 무어라 더 말하려 할 때 추민석이 나타났다. 그는 우현보다 2살 아래였다. 우현은 그를 좋아했다. 처음 보았던 그 순간부터 친근감 있게 행동하는 민석을 보며 소연에게 민석의 칭찬을 쉼 없이 했던 그였다. 그런 그와 자신의 여자친구가 이상하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었다. 민석은 편해 보이는 면바지에, 하얀색 남방을 걸쳐 입었다. 고급 외제 차에서 나온 그의 모습이 그를 더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우현은 민석의 그런 모습을 보자 조금 주눅감이 들었다.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이네요. 저번에 제 동생 생일날 이후 처음이죠?”
“네.”
우현과 민석이 말을 나누고 있는 사이 소연이 우현이 잡고 있던 자신의 팔을 빼 낸 뒤 민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들이 본다면 영락없는 연인 사이 같았다. 민석과 소연은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소연이 너, 오늘 몸살이라더니 그 옷차림은 뭐고, 왜 여기 있는 거야?”
“그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자리 옮기시죠!”
“그러죠!”
뭔가 불길했다. 소연에게 묻는 질문을 대신 대답하겠다고 하는 민석의 태도가 의심스러웠지만 우현은 한편으로 그럴 리 없다고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소연이 쌀쌀맞기는 해도 자신과의 섹스를 얼마나 즐겼고, 자신을 얼마나 따랐던가? 게다가 사귄지 이제 한달이 다 되가지 않은가? 서로에 대해 한참 즐거울 때 그녀가 그럴 리 없을 것이라고 우현은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우현은 근처에 있던 상근이네 집으로 향했다. 우현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는 척을 하려고 하는 상근에게 아는 척 하지 말라는 눈짓을 주자 상근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이른 시각이여서 그런지 가게 안은 적막했다.
“친구 가게입니다. 뭐라도…….”
“아닙니다. 아까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지요.”
우현은 민석의 당당한 태도에 마른침을 삼켰다.
“저희 사귀기로 했습니다.”
“뭐라고요?”
“알아들었잖아!”
되묻는 우현의 말에 소연이 비웃듯 말했다. 몇일전 까지만해도 자신의 침대위에서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여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미 정이란 정은 다 떨어진 말투였다.
“다시 제가 이해하기 쉽게 말해주세요!”
“말 그대롭니다. 저희 사귀기로 했습니다.”
“아니 소연이는 저와.......”
“나 이제 오빠 재미없어. 민석 오빠랑 사귀기로 했어.”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냐?”
“뭐 사귀는 게 결혼같이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귀다가 다른 사람 사귈 수도 있고 그런 거 아니야?”
“그런 말을 잘도 하는구나. 이유가 뭐야? 헤어지자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지겨워 졌어.”
“뭐?”
“지겨워 졌다고.”
“야, 너 최소한 나한테 미안한 감정이라도 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오빠가 그랬잖아. 사귀고 헤어지는 게 뭐 대수냐고, 저번에 신애라는 그 여자랑 헤어질 때 나한테 그렇게 말했잖아.”
“...........”
소연의 말에 우현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소연의 말이 맞았다. 소연의 말처럼 우현은 소연에게 지나가는 말로 그렇게 말했었다. 그때는 소연이 자신에게 그 말을 되돌려 줄지 모르고 했던 말이었다. 이렇게 그 말이 우현 자신에게 되돌아 올 줄 몰랐었다.
“더 이상 이야기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으니,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우현은 소연의 팔을 잡고 나가는 민석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붙잡을 수 없었다. 대신 우현은 담배를 입에 물어 하얀 연기를 뿜어냈다.
“박신애. 너도 이런 기분이었냐?”
부엌에서 엿들었는지 상근이 소주 한 병을 들고 나와 우현을 향해 내 밀었다.
“마셔.”
“신애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러게, 내가 너 벌 받을 줄 알았다.”
“쿡. 그런가?”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고 했다.”
“신애 마음은 갈대가 아니었어.”
“신애씨는 특별한 여자였고…….”
우현은 앞에 놓인 소주병을 통째로 들이켰다. 그동안 느꼈던 신애에 대한 죄책감이 사그리 올라오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