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관계
(1)일방적 이별통보
“우리 이 결혼 없던 일로 하자.”
담담한 어조로 말하는 상현의 얼굴을 영효가 빤히 쳐다보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 영효는 갑작스런 남자의 말에 꿈인지 현실인지 순간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여자보다 더 흰 살결을 가지고 있는 상현의 잘생긴 볼을 사정없이 꼬집어보고 싶은 욕구가 들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상현의 말에 영효는 하마터면 스트로우로 빨던 오렌지 주스를 내 뱉을 뻔 했다. 당황하고 황당해 하는 영효와 달리 상현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였다. 흥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우물거리지도 않은 담담하지만 단호한 어조였다. 교통사고가 난 것도 아니고, 하늘에서 벼락을 맞은 것도 아니었다. 결혼식은 이제 겨우 반달 남짓 남았고, 오늘도 상현과 함께 예물을 고르러 나왔다 차 한 잔 마시자는 상현에 의해 카페에 끌려 들어왔을 뿐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상현의 ‘우리 이 결혼 없었던 일로 하자.’라는 말은 이해할 수 없었다.
“너 미쳤니?”
“아니, 지극히 정상이야!”
“그럼 어디 아프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거야? 아니면 너 나오는 길에 나 모르게 교통사고라도 당해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니?”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영효의 말에 상현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농담이 아니었다. 하긴, 상현의 성격상 이런 이야기를 농담으로 내뱉을 성격도 아니었다.
“갑자기 왜? 이유가 있을 것 아니야.”
결혼식이 가까워지면 남자든 여자든 회피하고 싶은 감정이 생길 수 있다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게 어떻게 허락을 받은 결혼인가? 여자는 남자를 이해 할 수 없었다. 동성이라는 이유로 갖은 고난을 같이 이겨 겨우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이제 와서 헤어지자는 말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유를 묻는 영효의 시선을 피한 채, 상현이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효는 그의 고개를 두 손으로 잡아 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렇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던져 놓고 이야기하기 싫다는 저 표정은 무엇인가?
“이유를 말해 보라고!”
“그냥, 결혼이라는 게 하기 싫어 졌을 뿐이야.”
“그게 네가 하고 싶다고 하고, 하기 싫다고 안하는 그런 쉬운 거야?”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저 고집 센 남자는 책임감 하나는 끝내주는 남자였다. 저 남자와 결혼 해야지 마음먹은 것도 저 남자의 끝내주는 책임감이 결정타였다. 그런 남자가 이런 무책임한 말을 쉽게 내 뱉었을 리는 없다. 영효는 주먹을 꼭 쥐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녀의 주먹이 그의 명치끝을 정확히 날려 버릴 것만 같았다. 부들부들 떨면서 입술을 꼭 깨무는 영효를 보던 상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이동산에서 길을 잃은 아이 같은 표정으로 앉아있는 영효를 보던 상현이 천천히 출입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야! 박상현! 너 거기 안서!”
조용하던 카페 안에 날카로운 영효의 목소리가 울렸다. 영효의 외침에 상현의 발걸음이 우뚝 섰다.
“너 갈 때 가더라도 이유라도 말해 주고 가! 이 나쁜 놈아!”
언제부터 흐르기 시작했는지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제멋대로 닦아 내고선 영효가 소리쳤다. 그녀가 눈물 흘리며 아무렇게나 닦아대면 항상 깨끗하게 접힌 네모반듯한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던 그 듬직한 남자는 지금 등을 보이고 서 있을 뿐이었다. 영효는 상현을 향해 ‘나 울잖아! 이 나쁜 자식아!’ 라고 외쳐주고 싶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어찌나 깨물었는지 비릿한 피 맛이 입안으로 스며들어왔다. 아침부터 무언가 꼬인다 싶었다. 마스카라도 안 되고, 상현이 사준 하얀색 원피스 위로 코피가 주르륵 흘러 내렸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분명 이런 일이 일어날 전초전인줄 알았다면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자던 상현을 졸라 나오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상현을 졸라 나왔기로 서니, 이런 모진 형벌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기분 좋게 예물 까지 맞추고 온 사이 아닌가? 명실 공히 이제 반달만 있으면 인정받는 부부, 한 사람의 안사람, 한 사람의 남편이 되는 그런 입장들이었다. 그런 자신들에게 이런 형벌은 너무 했다. 영효는 지금 이라도 당장 거리 한 복판에 나가 하늘에 대고 따지고 픈 심정이었다.
“미안해.......”
한참을 망설이다 상현이 겨우 내 뱉은 말은 미안해. 그 3마디뿐이었다. 그 말에 영효는 스프링처럼 튀어나가 자그마한 주먹을 꼭 쥐고 상현의 넓은 등을 인정사정없이 내리쳤다. 퍽퍽 거리는 소리에도 상현은 뒤돌아 그녀를 안아주지 않았다.
‘나 화났단 말이야! 나 화나서 너 이렇게 때리면 항상 안아주고 다독여 주는 건 네 몫이잖아! 왜, 왜 오늘은 안 그래! 왜!’
남자가 그 넓은 가슴으로 다시 한번 안아주길, 여자는 간절히 바랬다. 그 넓은 가슴으로 자신을 안고, 거짓말이라고, 그냥 한 순간 더운 여름 날씨에 정신이 나간 것뿐이라고 남자가 변명이라도 해 주길 바랬다. 허나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여전히 여자를 향해 싸늘한 등을 내 보인 남자는 끝내 뒤돌아서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정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멀쩡하던 애정전선에 아무 이상이 없는 커플 사이에 한 명이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 한다는 것은 상식상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그런 말을 하려면 적당하고 타당하고 상대방이 이해할 만한 이유라는 것이라도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냥 하기 싫어졌다는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동갑내기 커플로 티격태격 거리긴 했지만, 상현이 여자에게 이별을 고할 만큼 여자는 남자에게 잘못한 것이 없었다. 여자의 기억 상 남자와 싸운 지가 언제 인지 조차 가물거리고 있을 만큼 둘의 관계는 이상 무였다. 뭐 최근 들어 가끔 남자가 딴 생각으로 여자의 말을 귀 기울여 주지 않았다던가, 바보처럼 멍하니 딴 생각을 한 적은 조금 있었어도, 결혼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이별을 고할 만큼의 변화는 아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잉꼬커플로 소문이 난 그들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헤집고 들어가고 또 들어가도 남자가 여자에게 일방적으로 그런 통보를 할 만큼 잘 못한 일은 도무지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런 여자에게 남자의 말은 목에 걸린 가시처럼 칼칼하고, 도저히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과 같았다.
‘우리 이 결혼 없던 일로 하자.’
“나쁜 자식, 빌어먹을 자식! 이 우라질 놈아! 그게 한창 단 꿈에 젖어 있는 예비 신부한테 할 소리냐! 이 해삼 멍게 말미잘 같은 녀석아 아아아!”
남자가 사준 커다란 곰 인형의 얼굴을 향해 어퍼컷을 날려도 여자의 기분은 쉽사리 풀어지지 않고 있었다. 카페에서 마스카라 줄줄 흐르는 엉망이 되어있는 그녀를 보고서도 그 녀석은 매정하게 나가버렸다. 그녀를 내 팽겨 치고. 카페에서 남자가 일방적으로 가 버리고 4시간째, 그 빌어먹을 해삼 멍게 말미잘 같은 녀석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여자가 연락이 안 되는 것을 죽는 것 보다 더 싫어하는 것을 아는 녀석이었다. 분명 일부러 연락을 안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영효는 자신의 옆에서 도무지 울 생각이 없어 보이는 핸드폰을 한대 툭 쳤다.
“울어봐! 울어봐! 울어보라니깐! 지금 전화하면 내가 봐준다고. 이 나쁜 자식아!”
자식 잃은 암사자 마냥 울부짖어도 상현에게 연락이 올 리 만무했지만, 영효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횟수로 5년 동안 사귀면서 영효가 헤어지자는 말은 몇 번 했어도, 정작 상현에게서 헤어짐을 들은 것은 처음이라 그만큼 충격이 적지 않았다.
“내성이 생기기도 전에 잘도 그런 말을 지껄이다니! 이번에 버릇을 확실히 고쳐주겠어!”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해 보아도 남자의 반성이 없다면 소용없는 일이었다. 여자는 쥔 주먹을 풀기 아깝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그대로 곰 인형을 향해 다시 어퍼컷을 날려버렸다. 퍽 소리와 함께 곰 인형의 오른쪽 뺨의 솜이 푹 죽어버렸다. 여자는 일어나 책상위에 놓인 작은 액자를 집어 들었다. 사진 속에는 상현과 4주년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는 상현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여자는 참았던 눈물이 다시 수도꼭지처럼 흘러 내렸다.
“아아아앙! 박상현! 너 죽었어. 결혼 하면 내가 오늘 일 다 갚아줄 거야. 늙어서 꼬부랑할망구가 될 때까지 이 일 울거먹을 꺼야. 이 나쁜 자식아! 이렇게 여자 눈에 눈물 흘리게 하면 네 눈엔 피눈물이 흐른다고 이 우라질 놈아! 아아아앙.”
그녀의 눈에 눈물이라도 맺힐라 치면 손이 발이 되도록 빌던 녀석이 오늘은 없다. 항상 그녀의 곁에서 맴돌던 녀석이 오늘은 그녀를 모르는 사람처럼 내 버려 둔 채 혼자 저벅 저벅 걸어가 버렸다. 영효는 눈물 콧물 다 흐르는 얼굴을 소매 끝으로 대충 닦아 내고 핸드폰을 들었다. 실낱같은 자존심이 여자의 머릿속에서 ‘전화하지 마!’라고 명령하고 있었지만, 그 실낱같은 자존심은 이내 뭉개져 버렸다. 영효가 핸드폰 슬라이드를 탁 소리 나게 밀어 올리고 상현의 전화번호를 누르려 할 때, 핸드폰 벨이 그제야 미친 듯 울어 젖혔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언제 울었냐 싶게 여자는 비실비실 웃으며 맹렬하게 우는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받지 말어?’ 괜한 핸드폰과 흥정을 하던 여자는 늘 그랬듯 핸드폰이 끊기기 전에 얼른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코가 반쯤 막힌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녀의 말에 전화기 너머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이젠 익숙하다 못해 외워버리는 상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낮은 저음이 매력적이라고 그녀가 늘 놀려대던 남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상대편은 여자였다. 그것도 그녀가 아주 싫어하는, 이가 갈리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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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쓰고 있는 글입니다. 재미가 있을 런지 모르겠네요. 전번에 쓰던 카멜레온은 너무 무겁게 나가게 되는 것 같아서 잠시 보류이고, 이 글은 완결 거의 직전까지 써 놓아서
보류 되는 일 없을 거에요~
재미있게 보시고 질책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