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관계
(10)내게는 오직 너 하나 뿐이야.
벌써 몇 시간째 멍하니 혼자 떠드는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앉아 있었다. 오도카니 소파에 쪼그려 앉아, 텔레비전에 시선을 주면서도 그것이 무슨 내용인지 영효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속절없이 재깍거리는 시간 초침 소리를 들으며, 여자는 소파에 기대어 누웠다. 발버둥치던 속도 이제 진정 되었고, 머릿속을 연신 맴돌던 그의 기억도 조금은 사그라졌다. 하지만 여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온 몸에 기운이 다 빠져 나간 것만 같았고, 손가락 사이로 기운들이 슬금슬금 빠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괜히 텔레비전에 시선을 주고 있자니, 이유 모를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여자는 나오려는 눈물을 막으려 눈을 껌벅 거렸다. 눈물은 흘리는 것 보다 참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 여자는 흐르려는 눈물을 참으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저 전등은 언제 켜 놓은 것일까?’
분명 오늘은 그녀가 키지 않았었다. 환한 대낮인데도 켜져 있는 전등을 보고 있자니, 애써 멈추어 놓았던 눈물이 발동 걸려 흘러 나왔다. 정말 대수롭지 않은 것에 슬프고,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서글펐다.
“나 진짜 왜 이러니........”
주인의 의지를 철저히 무시하고 자기들 끼리 사바사바해서 흐르는 눈물들을 훔쳐 내며 여자는 일어났다. 무언가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가만히 앉아있다가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아, 여자는 부엌으로 향했다. 오랫동안 비워 두었던 냉장고를 뒤져 잡채 할 재료들을 꺼내 놓았다. 목이버섯은 끝을 떼어 내고, 물에 불려 놓고, 양파는 껍질을 깨끗이 까고, 양파의 매운 냄새에 눈이 시큰거려도 여자는 손길을 잠시도 쉬지 않았다. 재료들을 곱게 썰고, 다지고. 그릇을 꺼내려 찬장을 연 여자는 포장도 벗겨지지 않은 채 써는 기계를 보았다. 상현과의 결혼 날이 잡힌 이후 우연히 본 홈쇼핑에서 산 채 써는 기계가 봉지도 벗겨지지 않은 채, 찬장 구석에 오도카니 자리 잡고 앉아있었다. 여자는 그 기계를 더 깊숙이 밀어 넣어버렸다. 볼이 깊은 양푼을 꺼내고, 야채들을 볶고, 여자의 머릿속에는 잡채의 레시피만이 맴돌 뿐이었다.
딩동- 딩동-
“올 사람이 없는데 ……. 누구지?”
여자는 신랑 신부 곰돌이가 수놓아진 부엌 타월에 손을 닦으며, 현관으로 향해 걸어갔다.
“누구세요?”
“나야, 문 열어.”
상현이었다. 여자는 순간 망설였다. 그가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고, 그를 집안에 들인다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인 것 같은 죄책감에 쉬이 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는 한참을 망설이다 문을 열었다. 살며시 열린 문틈 사이로, 양복 차림에 남자가 보였다. 학교에서 바로 온 모양인지,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여자가 미처 ‘들어와.’ 라고 말을 건네기도 전에 남자는 익숙하게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남자의 당돌한 행동에 여자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당장이라도
‘여기가 너희 집이야? 왜 너 멋대로 들어와? 주인인 내가 아직 허락 안했는데. 그리고 너 심심할 때마다 찾아오는 내가 네 심심풀이 땅콩이니? 나 그만 흔들어.’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막상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런 독기들이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남자가 집안 가득 흐르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맡으며 ‘요리 하고 있었던 거야?’ 라고 여자에게 물었다. 남자의 말에 영효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현은 갑갑하던 넥타이를 푸르고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있었다. 조금 전까지 영효가 앉아 있던 자리에 상현이 앉아 있는 것을 보니 영효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연예인이 자신이 앉은 자리에 앉아 준 것처럼 벅찬 감정마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이봐, 정신 차려. 박영효. 너 자꾸 상현이를 신격화 하는데 그건 아니야. 상현이는 이미 주리의 남편이라고.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조차도 불륜이야. 불륜.’
불륜이라는 단어로 마음에 채찍질을 가해도,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인터넷이나, 신문, 그리고 드라마의 소재로 불륜이 나올 때 마다,
‘미친 짓이야. 미친 짓. 도대체 책임지지도 못할 결혼은 왜 하는 거야? 누구 인생 말아먹으려고. 그리고 상대편들도 그래. 뻔히 결혼 한 줄 알면서도 사랑타령 하는 건 또 무슨 심보야? 사랑이라면 다들 면죄부를 받을 줄 아나보지? 저건 결혼한 유부남, 유부녀들도 나쁘지만 결혼한 사람들인 줄 알면서 꼬드긴 것들이 더 나빠. 알아서들 피해야 할 것 아니야.’
라고 열변을 토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 하지 않았던가? 여자는 상현을 보고 있자니, 그와 자신의 관계는 다른 사람들이 추악하게 입에 올리는 불륜이 아닐 것 같았다. 자꾸만 한쪽에서는 그런 그녀를 말리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주리도 네 남자친구인 줄 알고 빼앗은 거잖아. 네가 상현이랑 자는 것도 아니고, 섹스를 하는 것도 아닌데 뭘. 이 정도는 괜찮아.’라며 그녀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나 배고파. 밥 줘.”
“으응?”
“밥 달라고. 배고파. 그전에 조금 씻어야 겠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여자를 지나쳐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부엌으로 가 양복 재킷을 걸어 놓고 화장실로 향했다. 쏴아아- 하는 물줄기 소리가, 닫힌 화장실 너머로 흘러 나왔다.
‘꿈일까?’
여자는 아프게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꼬집힌 살들을 중심으로 피가 싸하니 번지는 느낌이 들었다. 화끈거리는 볼을 보니 거짓은 아니었다. 환상은 아니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현실이고 실제 상황이었다. 상현은 지금 그의 부인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집에 온 것이고, 마치 남편처럼 자신에게 저녁을 부탁했던 것이었다. 여자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불안한 감정들과 사회적인 잣대를 버리기로 했다.
‘그래. 내가 잠깐 행복을 느낀다고 해서 욕할 사람 없을 거야. 그럴 거야.’
여자는 부엌으로 종종 걸음 치며 걸어갔다. 남자를 위해 정성스레 식탁을 꾸미고, 음식에 맞게 접시와 그릇들을 디자인 하고, 음식을 먹음직스럽게 담아내고, 여자는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오직 그를 위해 배웠던 음식들과 테이블 세팅들이 제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음식들을 담아내고 수저를 정리할 때, 화장실 문 너머로 남자가 말했다.
“편한 옷 있으면 하나만 줄래? 양복 다시 입고 나가기 싫어서 말이야.”
상현의 말에 영효는 장롱 구석에 있는 자신의 추리닝과 헐렁한 박스티를 화장실 문 앞에 놓아두었다.
“이거 밖에 없어.”
“고마워.”
작게 열린 틈 사이로 뜨거운 김이 확 빠져 나오며 그의 매끈하고 하얀 팔이 밖으로 삐져나왔다. 더듬거리던 그의 손이 목표물을 잡고는 황급히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여자의 바지 끝이 남자의 복숭아 뼈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다. 길어서 몇 번 입고, 한 쪽 구석에 처박아 뒀던 것인데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남자가 자신의 옷을 입고,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서 식사를 하다니. 여자는 다시 환상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이거 정말 맛있다. 오늘은 정말 지친 하루였어. 날씨가 얼마나 덥던지. 하루 종일 애들 붙잡고, 수업 진행하다보면 50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겠다니깐. 게다고 오늘은 한 녀석이 숙제를 안 해가지고 와서 내가 한대 때리려고 했더니, 자꾸만 피하는 거야. 한 3번을 피하더니, 나중에 정말 약한 걸로 한대 맞아버린 것 있지? 약 올라서 더 세게 때리려고 했는데 그 약한 매 한대 맞고선 곧 죽을 듯이 바닥에 뒹구는 녀석을 보니깐, 웃겨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쿡, 나도 그런 적 있었는데……. 그래서 어떻게 했어?”
“그냥 둬 버렸어. 그렇게 곧 죽을 듯 뒹구는 녀석을 어떻게 더 때리겠어!”
소소한 일상들을 이야기 하며 서로 마주 보며 웃는 작은 행복들이 그녀는 크게 느껴졌다. 가지지 못하는 행복일수록 더 크고 소중한 법이니깐. 여자는 최대한 그 기분을 길게 음미하고 싶었다.
“너랑 있으면 내가 살아있는 것 같아.”
“다른 때는 죽어 있는 것 같아?”
“집에 들어갈 때만큼은. 그리고 집에 있는 동안만큼은 내가 아니지. 내가 아니라 주리의 입장에서 맞춘 밀랍 인형 같은 기분이야. 더러워. 상당히.”
“..................”
“내게는 오직 너 뿐이야.”
상현의 말에 영효는 들고 있던 수저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손이 떨려와 더 이상 잡고 있다가는 금방이라도 바닥에 떨어트릴 것 같았다. 영효는 떨리는 손을 깍지 껴잡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말 하지 마. 그러면 그럴수록 나 더 힘들어. 이제 겨우 너 잊으려고 하는데. 아니 이제 겨우 널 수월히 기억하려 노력하고 있고, 연습하고 있는데 네가 그러면 난 어쩌라고......”
“........하지 마.”
“응?”
“날 지우려 하지 마.”
“상현아. 하지만 우리 이제 이러면 안돼. 주리한테 죄 짓는 일이라고.”
“아니 그렇지 않아. 그 여자만 아니었다면 우린 결혼 할 수 있었어. 남들 앞에서 아무 문제없는 커플처럼, 금슬 좋은 부부처럼 연극하는 것도 신물이 나. 남의 이목에 미치도록 집착하는 그 여자의 얼굴만 봐도 두드러기가 날 지경이라고. 그 여자는 내가 그렇게 연극만 해주면 남들 앞에서만 그렇게 해 주면 아무 불만 없는 여자라고.”
“하지만 상현아...........읍.”
반박하려는 여자의 입을 남자가 막아버렸다. 갑작스레 밀려오는 남자의 향기에 여자는 당황하면서도 익숙한 그 향기에 어느새 취해버렸다. 부끄러웠던 그들의 첫 키스가 생각나, 싸움 뒤 화해의 제스처로 그가 내밀었던 달콤한 입술이 생각나, 여자는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볼을 타고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보던 상현이 혀를 내밀어 영효의 볼을 할짝였다.
“하, 하지 마. 간지럽단 말이야.”
“예나 지금이나 간지럼 많이 타는 건 여전 하네? 변한 게 하나도 없어. 눈물 흔해 빠진 것 까지도.”
상현은 마음이 아팠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이 여린 여자가 또다시 상처를 받을 까봐 겁이 났다. 하지만, 상현은 믿었다. 작은 아픔 뒤에 큰 기쁨이 존재 할 것을. 남자는 다시 한번 여자를 찾아오리라 맹세 했다.
상현은 밥을 다 먹고,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서 영효가 멋들어지게 깎아온 과일을 입에 넣었다.
“요즘 저 프로그램 재미있더라. 봐?”
“아니. 요즘엔 정신이 없어서. 무슨 내용 인데?”
“나도 가끔 보는데 노처녀들 이야기라고 하더라고. 사실적인 것 같더라. 봐봐.”
상현은 영효의 손을 끌어당겨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보는 영효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상현의 누운 머리 사이로 영효의 작고 따스한 손이 쓱쓱 지나다녔다. 이것이었다. 그가 원하던 행복이라는 게. 사랑하는 여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스르륵 잠이 드는 것. 큰 것도 아닌 작은 행복이 왜 이다지도 얻기 힘든 것일까? 남들에게는 당연한 행복이 상현 자신에게는 왜 그렇게 힘든 것인지. 남자는 억울했다. 그러나 그 억울함도 영효의 손길 하나에 숨죽였다.
영효가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수놓은 벽시계가 10시를 알리자, 상현이 화장실로 들어가 양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옷을 갈아입고 온 상현을 영효가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안가면 안돼?’라는 물음이 목구멍 까지 차올랐지만, 정말 그것은 이기적인 것이라, 여자는 남자를 잡을 수 없었다.
“조만간 올께.”
기약 없는 약조. 여자는 남자가 떠난 빈 방 털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두려웠다. 기약 없는 그의 약조에 매달려 하루를 보낼까봐, 그리고 매일 밤 떠나는 그의 모습을 봐야 한다는 것이. 가질 수 없는 것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 여자를 무섭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