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주 부모님 댁에서 보름동안 맘껏 게으름을 피고 달콤한 시간을 보낸 후 드디어 오늘 우리 삼남매는 서울에서의 찬란한 동거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이사를 했다. 방배동에 위치한 이 하늘하우스는 고급 빌라로 이모네 가족이 살던 곳이었다. 이모부가 말레이시아까지 사업을 확장하면서 콸라룸프르(Kuala Lumpur)로 이모네 가족 전체가 약5년 거주 계획을 세우고 이사를 하게 되었고, 몇 달 전부터 비어있던 이곳을 오빠들이 함께 살던 작은 신림동 오피스텔을 처분하고 받은 값으로만 저렴하게 이모에게서 임대해 관리비만 부담하며 살게 되었다. 넉넉한 이모네 덕분에 앞으로 4년 이상 별탈 없이 머물 수 있는 106평 고급 빌라에서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전주의 본가는 아담한 2층집으로 아래위층 다 합쳐봐야 50평 남짓이었고, 미국에서는 20평정도 되는 오피스텔(원룸)에서 룸메이트와 함께 생활했었다. 그렇게 30년을 살다가 운 좋게 복층형 넓은 빌라에 입주한 소감이야 어찌 이루 말 할 수 있으랴. 내 능력으로 구입한 집은 아니지만 이모님 댁이니 일단 마음 편안하고,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하지 않는가! 좋은 주거환경에서 살게 되니 마음도 넓고, 풍요로와 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생활비는 대부분 쌍둥이 오빠들에게 부담시키고, 용돈도 두둑하게 타서 쓴다면 나의 삶의 질이 얼마나 향상될지…… 아무리 생각해도 아주 바람직하고 좋은 상황설정이라 기대하는 바가 크지 않을 수 없다.
남매 중 유일한 여자라는 이점을 이용해 2층을 홀로 차지하게 된 나는,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듯 심부름하는 발걸음의 체공 시간이 길게 느껴졌고, 즐거운 마음에 절로 콧노래가 흘러 나왔다. 돌돌 말린 쓰레기봉투를 손가락으로 볼펜 돌리 듯 휙휙 돌리며, 콧노래에 박자를 맞추어 리듬감이 흐르는 걸음걸이로 빌라 일층 로비를 가로지르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분명 그다.'
엘리베이터의 번쩍이는 은색 알루미늄 문에 비추어진, 지금 내 옆에 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이 사람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가 분명하다.
'그리고, 그와 세 번째 만남이다.'
그를 알아본 순간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던 콧노래를 삼켜 버렸다. 갑자기 두근거리는 심장이 '얼음 땡' 놀이의 얼음상태처럼 나의 몸을 경직시켰다. 머리에서 심장박동이 빠르게 느껴지는 것이 나는 현재 극도의 흥분 상태가 분명하다. 특별히 그에게서 느끼는 어떤 감정의 형태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물론 그동안 문득 두세 번 그의 안녕 여부가 궁금했던 적은 있었지만, 다르게 생각할만한 그에게로 향하는 나의 파장을 감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상태는 한가지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반가움, 그리고 그의 안녕 상태에 대한 순수한 기쁨. 생각지 못한 곳에서의 갑작스런 만남으로 나는 반가움에 들떠 흥분상태인 것이다. 나는 빠르게 그에게로 몸을 돌려 그를 내 시선 안에 가두고 머리에서 아래쪽으로 시진으로만 건강사정을 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은 조명 탓에 반짝이기는 했으나 분명 건강하게 윤기를 머금고 있었고, 피부는 인위적으로 건강하게 보이려고 햇빛에 그을린 흔적은 없었으나, 탄력 있고 분홍빛 감도는 혈색이 무척 좋아 보였다. 가슴 중간 부위부터 단추로 연출된 연두색 면 셔츠는 습한 장마철인데도 무척 뽀송뽀송해 보였고, 위에서부터 꽤 많이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그의 가슴이 안타깝게 살짝 엿보이며 멋스러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역시 적당한 근육맨인 것은 여전했다. 고개를 떨어뜨려 시선을 더 아래로 내렸지만 아쉽게도 긴 바지를 입은 상태라 시진을 통한 건강사정은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딩동."
엘리베이터가 일층에 도착하면서 바로 문이 열렸다. 나는 그의 뒤를 이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어찌되었든 3년 만에 다시 보게 된 그는 건강해 보였고, 나는 그에게 감사했다.
"끈적거리는 그 시선, 제가 더 견뎌야합니까?"
"네? 하하. 직업병이라…… 죄송합니다."
처음 듣는 그의 목소리였다. 한번도 그의 목소리를 상상해 본 적도 없었으면서,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은 어이없게도 '생각보다 울림이 기분 좋은 깔끔한 목소리네.'라는 것이다. 어쨌든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원래 소리를 내는데 이상이 없었던 사람이지만 나는 실어증 환자의 목소리를 들은 듯 기분이 더욱 좋아져 그에게 감사의 표시로 바보처럼 이를 환하게 들어내고 크게 웃어주었다.
나는 우연한 만남 세 번이면 필연이라 생각한다. 평상시 생각하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 그를 우연히 세 번째 만남으로 그와의 인연을 필연이라 생각하는 중이다. 친구이든 연인이든 숙적이든 그와 어떤 관계를 맺고 유지하게 될 지는 모르지만 분명 범상치 않은 필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의 반쪽이 아닐까?'하는 물음이 마음을 스친다.
필연이 아니더라도 한번쯤 반복되는 이 우연한 만남을 좋은 관계로 발전시켜도 좋지 않을까? 문제는 나에게 그는 세 번이나 우연히 마주친 인연이지만, 그에게 나는 적어도 의식이 온전한 상태에서나 불명인 상태에서나 우연이든 필연이든 기억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관계를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아무런 관심이 없는 그 보다는 나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그것도 그다지 성질 좋아 보이지 않는 그의 차가움이 느껴지는 오로라를 보건대…… 그 노력의 과정이 썩 유쾌할 것 같지가 않다. 머리 아프지 않게 그냥 어떤 관계든 흐르는 대로, 노력 없이 운명에 맡겨 볼까싶은 생각도 든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그에게 어떤 방법으로 적절하게 접근하고, 그와의 인연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 제대로 생각해 보기도 전에 그와 대화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무언가 있을 것 같은 인연의 관계는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302호. 301호의 유일한 같은 층 이웃사촌이 그인 것이다.'
그가 302호의 문을 열고 집안으로 사라지자 오히려 나의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너무나도 명료하며 간단했다. 다른 인연을 운명으로 착각하지 않고, 더 이상 머리 굴리지 않아도 된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냥 좋은 이웃사촌으로 지내면 되는 것이다. 나는 그를 감추고 있는 302호의 현관문에게 선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인사를 했다.
"이웃사촌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꼭 주인답게 302호 현관문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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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여기 쓰레기 봉투."
"그래. 고맙다. 이제 거의 정리가 다 됐네. 고생했다. 막내. 우리 삼남매 이곳에서 잘 살아보자."
삼남매 중 차남 수현이 수련에게서 쓰레기 봉투를 받아 이사 짐을 정리하며 나온 쓰레기를 가지런히 정리해서 봉투에 담기 시작했다.
"큭큭. 오빠들이 직분을 다하기만 한다면 난 이 성에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지."
"우리 직분이 뭔데?"
장남 수영은 막내의 목소리에서 장난의 기를 감지하며, 그녀가 서운해하지 않도록 궁금하다는 기색으로 물어주었다.
"아직도 몰랐어? 생활에 있어 꼭 필요한 존재. 빛과 소금의 역할이지. 바로 가사 도우미. 이 어린 동생은 외국에서 홀로 고생 많이 했잖아. 이제 좀 편하게 살아야지. 곱디고운 심성의 이 여동생은 오빠들에게 많은 것 바라지는 않아. 적당히, 아주 적당히 생존이 가능한 만큼의 도움만 바랄 뿐이야. 흐흐……"
수련은 오빠들의 야유 속을 유유히 빠져나가 자신의 공간으로 배정 받은 2층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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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그녀의 모습이 생각나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몸을, 정포장되어 있는 귀한 선물을 궁금해하면서도 아주 천천히 열어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을 담아가던 그녀. 착각인지 상상인지…… 별빛을 받아 반짝이는 호수를 연상케 하는 그녀의 눈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가 주고 싶을 정도로 그녀가 귀엽게 느껴졌다. 또 그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기된 얼굴로 내내 미소를 짓는 그 얼굴을 자신의 손에 담아, 보이는 것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자신을 보고 만족스런 평가를 내리며 유혹하듯 웃음을 흘리는 여자들에게 스스로 혐오감을 느껴 보라는 듯 경멸과 짜증을 고밀도로 압축하여 눈빛에 흘려 보냈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그녀에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선 어떤 유혹의 향기도, 기대가 섞인 계산적인 행동도 보이지 않아 오히려 뭔가 아쉬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재수 없는 말로 그녀를 나무랐지만, 절대 그녀의 시선을 끈적임으로 느끼지 않았었다. 오히려 그녀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몸에 힘을 주어 단단해 보이도록 하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아무 말이나 건네고자 했는데……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 나간 것이다. 정말 나이에 맞지 않은 유치한 행동이었다. 그래도 그녀의 목소리는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은 정확했다. 그런 경우 보통 '죄송합니다' 내지는 '미안합니다'라는 사과의 말은 반사적으로 튀어나오게 되어 있으니깐 말이다.
'네? 하하. 직업병이라……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를 하던 그녀, 솔직히 직업을 가진 여성으로 보이지 않았다. 어깨를 살짝 덮을 듯한 길이의 풍성한 생 머리는 높이 묶여 있었고, 160cm도 안될 것 같은 조금 작아 보이는 키는 마른 체격으로 인해 더 작아 보였다. 쌍꺼풀이 아담한 크기로 선명하게 진 눈은 많이 웃는 모양인지 반달모양으로 자연스런 눈매를 완성하고 있었다. 왼쪽 가슴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高', 학교 체육복인 듯한 연하늘색 운동복을 입고있는 그녀가 정말 고등학생이라는 데는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런데 분명 '직업병'이라고 했다. 그럼 직업을 가진 성인이란 말이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동안에 놀라면서도, 안심이 되는 가슴은 어떻게 생각해야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참 짧은 시간에 빠른 회전력을 보인 자신의 머리가 새삼스레 대견하게 생각되어진다.
'처음 보는데 옆집에 사는 사람일까? 방문객인가?'
분명 다른 층을 누르지 않은 것으로 짐작하건대, 그녀는 301호로 들어갔을 것이다. 궁금해진다.
그녀가……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무지개연못'
벨소리와 함께 액정에 떠 있는 글자가 깜빡거리며 춤을 추고 있다. 너무 반가운 마음과는 달리 선뜻 폴더를 열 수가 없다.
"네. 원입니다."
"원아……"
한없이 부드럽고 촉촉한 엄마의 음성이 귓바퀴를 두어 번 감싸더니 마음을 짠하게 울린다.
"네. 말씀하세요. 어머니." '엄마……'
"그냥 해 봤다. 건강한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건강합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되요." '엄마야말로 어디 아픈 것은 아니지?'
"조만간 집에 좀 들렀으면 좋겠구나. 얼굴 잊어 버리겠다."
"……네. 알겠습니다." '나도 엄마 보고싶어.'
"그래, 그럼 꼭 들리거라. 끼니 거르지 말고."
"네. 그럼 들어가세요." '엄마……'
나는 청개구리다. '옛날 어느 곳에 청개구리가 살고 있었다.'로 시작되는 전래 동화는 실화일지 모른다. 윤회를 거듭해 인간이 되었지만 버릇을 고치지 못한 동화속 청개구리가 꼭 내 모습인 것 같다. 엄마가 '동쪽으로 가렴.'하면 서쪽으로 가고, '언덕 위에서 놀아라.'하면 강가로 나가는 청개구리. 강가에 엄마를 묻고 비가 내릴 때마다 무덤이 쓸려 내려갈까 걱정되어 우는 청개구리. 동화속 청개구리처럼 엄마를 잃고 나서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이라도 달려가 엄마 품에 안겨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받고, 다정한 모자 사이로 돌아가고 싶다.
무지개 연못과 성북동 본가는 나에게 있어 같은 의미이다. 개구리 왕눈이는 청개구리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부모님께 순종하는 착한 개구리였지. 용기와 희망을 주는 여자친구 아롬이와 무지개 연못에 살고싶어 하는 왕눈이를 쫓아내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작전을 꾸미는 투투와 심술꾸러기 친구들…… 투투와 심술꾸러기들은 이미 일년 전에 사라졌다. 아롬이 대신 엄마와 함께 따뜻하고 행복한 무지개 연못에서 살고싶다. 3년 전 교통사고 당시 골절상을 입었던 갈비뼈가 아직도 다 붙지 않은 듯, 이 가슴 저리는 통증은 실제로 느껴지는 감각이다. 지난 날을 바로잡을 줄 모르는 용기 없는 겁쟁이 자신이 한심스러워 침실이 있는 이층으로 올라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자고 일어나면…… 누군가 나를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줄 것 같다.'
'결국 나는 도피형 청개구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