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 지금..!"
"아, 맞다! 뚱땡이 너 먼저 들어가라, 나 깜빡한 거 있어."
베이비는 정말 중요한 걸 잊었다는 듯이 아차~하는 표정을 짓더니,
힘들게 올라왔던 오르막길을 다시 유유히 내려걸어갔다.
"야!야! 너....아씨.. 뭐야. 나 아직 말 덜 했는데.."
도대체 뭘 깜빡했길래 저리도 다급한 표정으로 내려갈까.■
한번이라도 내 말을 제대로 들어준 적은 절대! 한번도 없었다!
..지멋대로 베이비! 나도 몰라, 니 멋대로 해라! 문 열어주나봐라~! 흥!
대문을 쾅 닫고 들어와 좁은 통로로 들어섰다.(한번더 말하지만 내 방은 요즘엔 찾아보기 힘든 상하방이다.)
열쇠를 꽂아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문득 멈추어선 나.
..근데 베이비 저 놈 대문 열쇠는 있나?..
라는 잡스러운 생각이 났다.
..내가 미쳐~! 도대체..도대체 내가 왜 이런 잡스러운 걱정까지 해야하냐구~!..
"으아아아아~~! 내가 미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베이비가 내 앞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진 것이다.
굳게 잠궈놓았던 대문을 슬그머니 열어놓고 방으로 쏘옥 들어와버렸다.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면서도 내 귀는 대문 소리에 민감해져 있었다.
하지만 대문 소리는 커녕 쥐죽은 듯이 느껴지는 고요함.
도대체 뭘 깜빡했길래 이렇게 안오는 거야?
방에 들어와 거울 앞에 앉아 베이비 로션을 손바닥에 푸욱 짰다.
..그렇다.
난 20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존슨즈 베이비 로션을 바르고 있었다.
남들이 보면 웃겠지만 사실 난 화장이란 거 해본 적도 없고, 아이 크림..영양 크림...그런 잡다한 말들은 모른다.
오직 로션 하나면 충분하다.
내 얼굴이, 내 몸뚱아리가 비록 이렇게 볼품없다 하더라도 피부만은 다른 사람들에 뒤지지 않는다고 본다.
피부도 하얀 편이고, 무엇보다 잡티없이 깨끗했다.
..그래, 하늘이 그렇게까지 무심하기만한 것은 아니야.
진짜 피부까지 그지 같았음 나 완전 자살했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뚱땡이, 문 열어~!”
베이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난 언제쯤이면 베이비 저 놈의 입에서 화봉누나! 라고 들을 수 있을까?
방문을 벌컥 열자 해맑게 미소짓고 있는 베이비가 보였다.
“야, 너 니네 집 가서 자! 알았어? 어디 감히 다 큰 처녀 방에서 잔다고 그래~?
내가 안된다면 절대 안되는 줄 알아, 알았어? 절대 못 재워주니까 그렇게 알아~!!”
베이비가 다시는 그런 쓸데없는 말을 못하도록 단단히 못을 박아놔야했다.
갑자기 베이비가 눈을 껌뻑거리며 나를 빤히 바라봤다.
“......?”
그 시선의 의미는 뭐야?..
“자러 온 거 아닌데..”
“뭐?”
“이거.”
“......?”
베이비가 품안에서 무엇인가를 불쑥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든 나.
무엇인지는 몰라도 따스함이 내 손바닥에 느껴졌다.
“이거..뭐야?”
“십분만 있다 갈게.”
“야, 베이비 너..!”
“십분.”
단호한 베이비의 목소리와 거짓 없어보이는 눈빛에 난 이번에도 넘어가버렸다.
아니, 뇌물에 넘어갔다고 솔직히 말한다.
“..십분이다. 절대 자고 갈 생각하지 마.”
대답도 안하고 방안으로 쑤욱 들어오는 베이비.
“밖에 진짜 추워.”
지 방처럼 편안히 자리잡고 앉는 베이비 옆에 다가가 나 또한 털썩 앉았다.
“근데 이건 뭐야?”
베이비가 준 것은 바로 군고구마와 누드 군밤이었다.
“어? 군고구마랑 군밤이네?”
군고구마랑 군밤, 내가 과일 다음으로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짜식이 또 어떻게 알고~!!!..
“먹어. 뚱땡이 너 먹는 것만 보고 갈거야.”
내가 좋아하는 모습에 괜시리 흐뭇해하는 듯한 베이비.
“근데 깜빡했다는 게 뭐야?”
베이비가 가지고 온 군고구마 하나를 들어 반틈으로 쪼개자,
모락모락 연기가 솟아오르며 유난히도 먹음직스러워보이는 노란 고구마살에 군침이 돌았다.
“그거.”
“이거? 고구마랑 밤?”
“응.”
내 말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베이비.
“너 지금 니가 깜빡했다면서 간 게 고구마랑 밤 사러 갔다고 말하는 거 아니지?”
“맞아.”
역시나 이번에도 베이비는 태연히 대답했다.
“날 왜 사다주는 건데?”
“그냥. 뚱땡이 너가 좋아할 것 같아서. 이거 안좋아해?”
“아니..뭐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사실은 고구마랑 밤 무지 좋아해.”
..그런데 내가 언제 고구마랑 밤 좋아한다고 말한 적 있나?..
“근데 진짜 이거 왜 사온거야? 정말 이것 때문에 갔다온거야?”
“응. 군고구마장수 찾으러 밑에 있는 편의점까지 내려갔다왔어.”
“뭐하러 이 추운 날에 거기까지 가? 내가 사달란 말도 안했는데..”
“그냥 사주고 싶어서.”
정말 거짓하나 느껴지지않는 베이비의 말에 괜시리 미안하면서도 감동이었다.
나를 위해 누군가가 이런 걸 사주다니.. 정말 꿈에도 상상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언제 이거 좋아한다고 말한 적 있어?”
“아니. 그냥 뚱땡이 넌 이거 좋아할 것 같아서.”
라면서 갑자기 베시시 웃는 베이비.
한쪽 볼에 깊숙이 들어가는 베이비의 한쪽 보조개를 보고 나도 피식 웃어버렸다.
내가 고구마와 군밤을 거의 다 먹을 때까지 베이비는 말 한마디하지 않고 내가 먹는 것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쳐다본다고 못 먹을 나도 아니었기에
물까지 한컵 떠와서 태연히 베이비가 사온 것들을 말끔히 먹어치웠다.
내가 다 먹자마자 베이비가 벌떡 일어났다.
“내일 보자, 뚱땡이.”
라더니 고맙다는 내 말도 듣지 않고 나가버렸다.
잘 먹었다고 말하려고 했는데..하여간 저 놈의 제멋대로 성격~!!..
정말 베이비는 알 수 없는 놈이었다.
잠이 들때까지 어이도 없고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해서 피식피식 웃다가 잠이 들었다.
베이비는 그 날 꿈속에서까지 나타났다.
군고구마와 군밤 한 박스를 사와서 나한테 그 자리에서 다 먹으라고 협박하는 꿈을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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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일찍이도 눈이 떠졌다.
..베이비 이 놈은 일어났을까?..
사실 어제 군고구마와 군밤을 사온 베이비에게 내심 고마웠다.
태미를 제외하고 어느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준 적은 없었으니까..
서둘러 오늘 아침도 콩나물국과 계란찜을 만들었다.
사실 내가 베이비에게 해줄 것은 이것 밖에 없었다.
콩나물국 간을 보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처음 봤을 때의 베이비가 떠올랐다.
정말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처음보자 내 넋을 빼놓았던 그 엉뚱한 놈 주려고 콩나물국을 끓일 줄은,
그리고 그 놈이 내 위층에서 자고 있을 줄은 말이다.
거의 아침 준비가 끝날 무렵, 난 이층으로 조심스레 올라갔다.
어제보다 아침 공기가 더 쌀쌀하게 느껴졌다.
우리 집은 1층의 주인집과 내가 사는 상하방, 이층도 똑같이 이층 전세로 사는 사람들과 상하방이 있었다.
조심스레 베이비가 이사왔다는 이층 상하방 문을 두들겼다.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어지간히도 피곤했나보다.
노크 소리까지 못 듣는 걸 보니 말이다.
“베이비~! 베이비~!”
라고 불러도 소용이 없었다.
...아씨, 콩나물국 식는데!!..
설마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방문을 열어봤다.
정말..정말 열렸다!
이 놈, 위험하게 문도 안잠그고 자나보다!
문 열어놓고 자면 얼마나 위험한데! 한마디 해줘야지!
“베이...비?”
슬그머니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
방안을 들여다본 나는 쇼킹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