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화는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깨었다. 깨었다기보다 그저 잠자리를 털고 몸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어젯 밤 내내 아화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살갗처럼 익숙하던 침구가 그처럼 가시돋친 듯 불편한 적도,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던 침실이 어두운 숲처럼 두렵고 어색한 적도 여태 없었다. 시간은 결코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았고 결국 그 날은 오고 말았다.
아화는 깨질 듯한 머리를 한 손으로 짚으며 일어섰다. 그녀는 밤 새 그녀의 온 신경을 잡아두고 있던 옷장으로 걸어가 옷장 깊은 곳에서 오동나무 상자를 꺼내었다. 긴 오동나무 상자는 짜여진지 얼마 안된 새 것이었다. 그녀는 왠지 온 몸에서 힘이 빠져 상자를 질질 끌며 침실 가운데로 걸어갔다. 오동나무 상자의 덮개를 열자 거부할 수 없는 현실감각이 그녀를 깨웠다.
그녀가 상자 밖으로 쏟아낸 것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비단 옷이었다. 붉은 물감과 푸른 물감을 각각 세번 씩 들여 아주 고운 보랏빛으로 발색된 장군(長裙-가슴까지 올라오는 치마)과 금실로 봉황 한쌍이 새겨진 흰 허리띠 그리고 반투명한 보랏빛으로 촘촘하게 짜여진 삼(衫-망사로 된 상의)이었다. 아화는 며칠 전의 기억으로 돌아갔다.
만화루에 놀라운 방문객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서방 광목천 왕가의 방계 가문의 이름높은 부인이었다. 만화루에 여자가, 게다가 왕족이 찾아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지만 전혀 없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손님은 그 표정으로 보아 다행히도 불미스런 일로 찾아온 것은 아닌 듯 했다. 그녀는 물론 왕족 특유의 도도하고 불쾌한 표정을 보여주었지만, 태도나 목소리는 깎듯해서 아화는 더욱 긴장을 하여 그녀를 맞이하였다.
더 놀라운 일은 그녀의 방문 목적이었다. 그녀는 아화의 옷을 만들고자 찾아왔다고 말하여 아화를 놀라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를 보낸 이가 제 4황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아화는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왕족인 여인이 찾아온 것은 가히 파격적이고 대단한 영광이었다. 광목천 왕가의 방계 자손 중에 실을 잣고 바느질하는 솜씨로 이름이 높은 이 가문은 그들이 만든 옷을 입으면 마치 날개가 돋은 듯 하다하여 권세있는 황족이나 왕족들의 주문이 줄을 서는 집안이었다. 천제의 옷을 만드는 집안이라 더욱 알려져 있는 왕가에서 아화를 찾아온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여인은 능숙하게 아화의 치수를 재고 일찍 돌아갔다. 그리고 어제 완성된 옷이 도착했다. 할 말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운 옷이었다. 그리고 아화에게 완벽하게 맞아들었다. 아화는 자신의 눈동자와 같은 보랏빛의 귀한 옷이 초율의 완고한 선언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어졌다.
수많은 밤과 낮을 고민한 아화는 초율이 보낸 보랏빛 옷을 받았을 때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화가 만들어낸 핑계에 불과했다. 초율의 명령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떠오르는 과거의 비극과 회한과 두려움에 번민하면서도 가고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황성에 가고 싶다. 자신을 버리고 짓밟았던 두 남자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그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 저주스런 두 남자의 지금 모습을.
옷을 앞에 두고 아화는 몇 시간이고 생각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끔찍했던 과거가 생생히 되살아나 그녀의 시간을 짓누르고 있었다.
" 아화님, 소녀 유목이옵니다."
" 아..그래."
아화는 자기도 모르게 흐르고 있던 눈물을 급히 훔쳐내며 대답했고 유목이 차를 들고 침실로 들어섰다. 유목은 차를 놓으며 아화의 안색을 살폈다. 왠지 까칠해져있는 피부와 상기된 얼굴에 걱정이 되었다.
" 어디 편찮으신 게지요?"
아화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 미리 말하지 않은 게 있어. 오늘 저녁 출타할거야. 대신 만화루를 살펴주게."
유목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왠지 아화에게 어떤 위험이 닥칠 것만 같은 예감이었다.
" 언제...돌아오십니까?"
아화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비장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 글쎄....하지만 꼭 돌아올거야. 내가 돌아올 곳은 여기 뿐인걸. 여기가 나의 집이고.내 가족들이 있는 곳이니깐."
아화는 목이 매여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유목을 물렸다.
그 날 아화는 만화루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년느 화왕궁에 틀어박혀 물 밀 듯 떠오르는 과거에 둘러쌓여 있었다.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묻은 채 사슬로 꽁꽁 묶어 둔 기억들이 그녀가 약해지는 순간 순식간에 치고 올라와 아화의 정신을 헤집고 있었다. 너무나 슬퍼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오후에 유목이 한 번 더 찾아왔다.
" 마차가 세 대 왔습니다. 황가의 마차인 듯 합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알려주었다. 아화는 강인한 의지력을 발휘하여 슬픔을 다시 억누르고 비극적인 기억을 가슴 깊이 밀어넣었다.
아화가 만화루로 갔을 때, 안 뜰 가운데 유목이 말한 마차가 세 대 대기하고 있었다. 유목이 알아본 대로 황가의 문양이 있는 마차였다. 그 중 첫 번째 마차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내려섰는데 아화는 의외의 인물을 알아보고는 흠칫 놀랐다. 키가 크고 백짓장처럼 희고 창백한 얼굴에 얼음장같은 차가운 표정의 남자, 왠지 모를 섬짓함과 이질감이 옴몸으로 전해오는 그 남자는 바로 환휴였다. 아화는 인간미라고는 찾아 볼 수도 없는 이 남자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바로 앞에 서 있는 것이다.
환휴는 껄끄러운 기분으로 서 있는 아화의 심정은 안중에도 없는 듯 자기 도리를 다 하여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는 단조로운 억양으로,
" 황자 전하께서 모셔오라 명하셨습니다."
두 번째 마차 안에서 곧 여섯 명의 젊거나 나이든 여자들이 우아하게 쏟아져나왔다. 아주 고운 여자들이었다. 환휴가 그들을 소개했다.
" 미장사(美粧士)들입니다. 전하께서 이들에게 아화님을 준비를 도우라 하셨습니다."
아화는 그녀들과 함께 만화루의 미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화는 그녀들에게 둘러쌓여 2시간을 넘게 참아내야만 했다. 초율이 보낸 미장사들은 황궁 전속 미장사들이었다. 내노라하는 귀족가문에서 뽑힌 황궁 미장사들은 미장청에 소속되어 제황성 내 황족들의 화장과 복식 일체를 관장하고 있었다.
아화곁에서 움직이는 미장사들은 그 이름에 걸맞게 손길마다 노련미와 자신감을 싣고 아화를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 갔다. 귀족 신분으로 천민인 기녀를 위해 솜씨를 발휘한다는 것이 자존심 상한 듯 필요 이상의 말은 삼가고 있었지만 가히 그 실력들만은 최고로 발휘되고 있었다.
마침내 치장이 끝나고 아화가 미장실에서 나왔다. 유목과 기녀들은 아화의 여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자태에 할 말을 잃고 감탄의 눈길을 보냈다. 아화는 선녀와도 같이 신비롭게 빛났다. 무표정한 환휴마저도 순간 얼굴에 동요가 서릴 정도로 아화는 최고였다.
세 대의 마차 중 가장 크고 화려한 마차가 아화를 싣고 황궁을 향해 달렸다.
'드디어...가는구나...'
아화는 무릎 위에서 맞잡은 손을 꽉 쥐었다. 심장은 터질 듯 두근대고 그녀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내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이 시간이 영원이면 좋을 것 같았다.
얼마나 달렸는지 마차 안은 점점 어두워져 황금빛 지는 노을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차가 멈추어 섰다. 어두운 마차 안에서 아화는 자신의 강한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다. 감히 커튼을 걷고 밖을 내다 볼 엄두따위 나지 않았다.
조심스레 마차 문이 열렸다. 아화는 문 사이로 환휴의 얼굴이 쑥 들어오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환휴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 도착했습니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화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환휴에게 손을 맡겨 부축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녀는 몇 걸음 앞에 나타나 있는 초율의 붉고 흰 갑옷을 발견했다. 그 강렬한 색채에 그녀는 비로소 어느 정도 제 정신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아화는 치맛자락을 살며지 움켜쥐고 사뿐히 인사를 올렸다.
"..........나쁘지 않군. 수고했다, 환휴."
그녀의 눈부신 모습은 초율의 마음에도 드는 모양이었다.
초율이 지체없이 앞장섰고 그 뒤를 아화가 따랐다. 그리고 들 것을 든 네 명의 장정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들 것 위에는 황금색 술이 달린 커다란 비단 천으로 덮힌 무엇인가가 놓여있었는데 아마도 천제에게 바칠 생일 선물인 것 같았다. 환휴는 그 자리에 남아 입성하는 초율의 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화는 점점 정신을 차려 시야를 넓게 잡을 수 있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웅장한 천제궁의 까마득히 높은 계단이었다. 아화는 움츠러들었다. 황금테두리를 둘러씐 백색 대리석 기둥들은 하늘에 닿을 듯 치솟아 있었고 계단을 세 부분으로 나누고 있는 난간 지지대에는 천계의 시조가 어떻게 천계를 건국했는지 그 역사가 고스란히 조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천계의 영웅들 역시 그 활약상을 생생한 조각으로 전하고 있었다. 아화는 놀랍게도 핏 초율을 닮은 조각을 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더이상 그것에 의아해할 여유가 없었다. 조상을 닮은 후손은 얼마든지 있는 법이니까.
그녀는 가슴이 떨려왔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만화루는 천제궁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사람의 손에서 나온 건축물이라기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천제궁은 위대한 자태로 버티어 서 있었다. 백색 대리석과 황금으로 지어진 천제궁의 계단을 밟아가며 아화는 자기가 있을 장소가 결코 못 된다고 생각했다. 그제서야 후회가 밀려왔다.
계단은 길었다. 아화가 충분히 생각의 가지를 펼칠만큼 길고 높았다. 아화는 말없이 걸어가는 초율을 향해 입을 열었다.
" 전하....."
"..........."
" 소녀, 대답하지 않으셔도 될 궁금증이 있사옵니다."
" 네 질문따위에 애초부터 대답할 필요가 없다."
" 그러하옵지요....."
아화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천제궁을 맞닥뜨린 긴장은 초율에 대한 두려움마저 망각하게 만들었다.
" 제 4황자이신 전하시옵니다. 하오나......황궁에서 황태자에 오르지못한 황자는 그저 이름만 가진 위치라고 들었습니다."
초율은 불필요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아화는 그가 말을 자르지 않는 것은 그녀의 질문을 허용한다는 뜻임을 알았다.
" 즉, 다른 직위를 가진 황자가 아닌 이상 권력의 중심과는 멀다는 거지요. 하오나 전하께서는....."
" 어째서 마음대로 하느냐 이거겠지? 황자일 뿐 장군도 정치가도 아닌데 어째서 제황성의 재물과 인재들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지 궁금한 것이 아니냐?"
" 네.전하. 바로 보시었습니다. 왕족이 제 옷을 만들었고 귀족 미장사들이 제 치장을 도왔나이다. 이들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황족 중에서도 극히 귀하신 분들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인 줄 압니다. 게다가.....저처럼 천한 기녀에게는 아무도 오려하지 않을 것인데...."
" 훗...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질문이다 했지? 네 말대로 그럴 가치가 없는 질문이다."
아화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초율은 잠시의 침묵 후에 입을 열었다.
" 누구도 내 명령을 거절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따를 뿐이다. 그것이 내가 가진 힘이다."
"........?"
이제 천제궁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입구 앞에서는 수많은 시종들이 손님들을 기다리며 대기하여 서 있었다.
" 천계에서 내가 하지 못할 일이란 없다. 그리고 나를 막을 자 또한 없다. 천제전하께서 나에게 진 빚은 그보다 더 크기때문이지"
아화는 알 수 없었다. 마계 대전에서 멸망에 처한 천계의 다섯 하늘 중 두 개의 하늘을 단신으로 찾아온 홍백면장이 바로 자기 옆에 있는 사내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것이 천제가 초율에게 진 빚이며 천제가 그 대가로 천계의 모든 것을 초율에게 허락했다는 것 역시 그녀가 알 리가 없었다.
초율은 천제궁의 거대한 문 앞에서 멈추어섰다. 단정하면서도 품위있게 차려입은 시종들이 초율과 아화에게 고개 숙여 정중하게 예를 갖춘 뒤, 무기나 불순한 소지품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수색을 마친 뒤 그들은 다시 한 번 허리 숙여 협조에 감사드렸다. 그들은 그 와중에도 보석같이 모든 것을 압도하고 빛나고 있는 아화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을 사로 잡는 아름다움에 한 시종은 넋을 잃고 아화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매력적이고 도도한 보랏빛 눈동자와 시선을 부딪히고는 움찔 놀라 고개를 황송히 숙였다.
문이 열리기 전, 초율이 아화를 향해 손을 내 밀었다. 숙녀를 이끄려는 여느 신사들과같은 친절한 태도에 아화는 놀라고 말았다. 초율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었다. 그녀가 낮게 심호흡을 하고 초율의 흰 비단 장갑에 가녀린 손을 맡겼을 때, 초율은 감격스러울 정도로 부드럽고 믿음이 갈 만큼 단호하게 그녀의 손을 쥐었다. 그 순간 초율의 옆 모습을 살핀 아화는 속으로 감탄사를 내어질렀다. 그 찰나의 초율은 영락없는 황족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아화의 몸을 마비시키고 있는 위압과 두려움과 초라함따위는 초율에게서 흔적도 볼 수 없었다. 타고난 피가 부여한 자신감과 당당함과 고귀한 품위가 초율의 어깨에 서려있었다. 아화는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고 말았다. 사람은 태어날때부터 똑같다는 그녀의 믿음이 초율의 모습 속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이 남자는........다르다. 이것이.......황족인가?'
시종 한 사람이 큰 소리로 고하면서 천제궁의 문이 열렸다.
" 제 4황자 전하 납시옵니다!"
밝은 빛과 함께 아화가 살아 생전 다시는 볼 수 없을 황족과 왕족, 대귀족들의 모습들이 그녀의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화는 초율의 손에 끌려 전혀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 드디어 기녀인 아화가 제황성에 입성했습니다. 자신을 버린 두 남자가 있는 곳으로요. 어머니와 뱃속의 자신을 권력을 위해 없애려했던 아버지 광목천과 질투에 눈이 멀어 부락을 짓밟은 관지가 있는 제황성이지요. 추석은 잘 보내셨는지요? 이젠 진짜 가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