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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 (22)

운운 |2005.10.07 18:00
조회 1,371 |추천 0

 

 

-  해어화(解語花)-말하는 꽃(6)-


 




‘하아... 무심한 달빛은 속절없이 밝기도 하구나......’


  넓은 창으로 초로의 밤풍경을 굽어보고 있던 중년 부인은, 혼잣말로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한숨소리에, 금빛 장삼위에 수놓인 봉황이 부르르 떨었다.

바로 다음 순간,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던 부인의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리곤 기품 있는 동작으로 빙그르 돌아서서는, 허공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상하게도 분명히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텅 빈 방안이 틀림없었다.


“묵운...이로구나.”


부인의 음성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내원의 바닥으로부터 시커먼 그림자가 조심스럽게 쑤욱 올라왔다. 전신이 검은 인영은 허리를 깊이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주군! 소인 명을 받들었사옵니다!”


차림새와는 다르게 몹시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였다. 대략 삼십대 초반쯤 되리라 짐작되는 음성이다. 중년부인은 반갑게 사내를 맞이했다.


“그래, 그들을 지켜보았느냐?”

“네. 의선 작약과 함께 있는 무사는 바로.......신궁한영이었습니다.”

“신궁..한영? 그자는 환사의 직전제자가 아니냐?”

“예에. 분명히 위한영이 틀림없었습니다. 주군. 또한 그녀는 비형랑과도 잘 아는 사이인 듯 합니다.”

“비형랑? 그와 말이냐?”

“예에. 오늘 우연히 두 사람은 솔원의 정자에서 마주쳤고, 사연이 있는 사이가 틀림없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 했습니다.”


“호~오! 그래? 그리고 일행이라는 또 하나의 소년은?”

“소년은, 소인이 미흡하여, 그 내력을 밝힐 수가 없었으나, 신궁을 누나라 칭하고, 위한영, 그녀 역시 아이를 귀애 하는 것으로 보아, 대단히 중요한 관계로 보였습니다.”

“흐음……. 신궁한영 이라하면, 환사 위제혁의 손녀고, 마신... 혈주단영의 조카가 되는 게지?”


  주군의 입에서 튀어나온 마신혈주라는 이름에, 부복하고 있던 묵운의 안색이 파리해지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역시도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바, 이십여 년 전, 중원을 피바다로 몰아넣었던 마신의 강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려움에 치를 떨었던 기억이 새삼 되살아나서, 묵운의 얼굴이 잠시 동안 납빛으로 질렸다.


“너도 기억하고 있는 게냐? 하긴... 어찌 잊을 수가 있겠니. 정말로...대단했지!”

“......”

“흐음... 사파의 중요한 핵심인 환사의 손녀와 의선이 함께 움직인다? 그것도 내력을 알 수 없는 소년과 함께 란 말이지....... 그래. 묵운, 그들이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은 무엇 같아 보이더냐?”

“소인이 지켜 본 바로는, 해루를 치료하고, 그 아이를 해한 자들을 처단하려는 목적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 외의 사심은 없다고 사료됩니다.”


“하하하하!”


  그 순간 온화한 표정의 화란부인은, 방안 가득 쩌렁쩌렁 울릴 만큼 시원스러운 목소리로 크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순풍처럼 부드러웠던 내원의 기운은, 변덕스런 날씨처럼, 순식간에 폭풍과 같은 기세로 묵운을 향해 몰아쳤다. 베일처럼 그녀를 감추고 있던 온화함이 싹 걷힌 화란부인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위엄이 가득 넘쳐흐르고 있었다.

끼아아아악-

폭발할 듯 순간적으로 방출된 그녀의 엄청난 기운에 반응하며, 장삼 위에 수놓인 봉황이, 날아오르려는 듯 홰를 쳐대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묵운 역시 압사될 듯한 기운에 괴로워하며, 힘겹게 주군을 올려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어찌.....?”

“묵운 기억나느냐? 정(正)이 무엇이고, 사(邪)가 무엇이더냐! 20년 전 그날도 그랬지.

마(魔)를 제거해야하는 정파라는 명목으로 그들은 환사를 무참히 짓밟았다. 비겁한 역습으로 어린아이나 노인 할 것 없이 잔인하게 씨를 말렸었지. 그 결과로 분노한 마신이 강림했고, 물론 그들은 죄 값을 받았지만 말이다.”

“그, 그러합니다.”

“하하하! 지금도 같은 상황이지 않느냐? 정파라는 놈들은 내 아이를 잔인하게 유린하고, 그 배에 든 씨까지도 짓밟았다 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들이 마(魔)라고 칭하는 사파의 여고수가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하지 않았느냐! 내 어찌 이 상황에 웃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하하하하!”

“.......!”


“묵운-!”


순간 화란부인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던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부인의 거부할 수 없는 무게감이 실린 목소리가 묵운의 가슴을 후려쳤다.

그는 다시 한번 자세를 바로잡아 깊이 부복하며 낮게, 하지만 힘차게 대답했다.


“옙! 주군. 하명하십시오!”

“되었다. 이제 그들을 지켜보는 일은 그만 두어라.”

“예!”

“대신-!”

“......!”


“이왕 일이 이리 돌아가니,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구나. 적을 먼저 살피는 것이, 우위를 점하는 첫걸음이지. 네가 직접 하북팽가로 잠입하여, 그곳의 분위기와 서가 놈의 행적을 쫒아 보거라!”

“존명!”


그때였다. 벽의 비밀통로를 통과하여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화란부인은 슬쩍 고개를 돌려 묵운을 믿음직한 눈길로 바라보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묵운은 황송한 머리를 깊숙이 숙여 주군의 믿음에 화답했다. 그리고 다시금 어둠 속으로 동화되어 스르르 사라져갔다. 묵운이 자취를 감춤과 동시에, 비밀 벽을 통과하여 화란부인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다가오는 이는, 키가 작아 청의를 길게 늘어뜨려 입은 삐쩍 마른 노인이었다.


“소인 왕수훈, 부인의 명을 받들고 찾아뵈옵니다.”

“어서 오게. 왕국주!”


노인은 다름 아닌 왕국주였다. 그는 화란부인의 명을 받고 급히 중앙의 탑을 향해 쉼 없이 달려온 길이었다. 지금 왕국주가 막 들어선 내원 안에는, 아까와 같은 화란부인의 광폭한 기운은, 어디에서도 한점 찾아 볼 수 없었다. 예의 따스하고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가, 조용히 그를 향해 미소 짓고 있을 뿐이다.


“그 손님들은 잘 지내고 있는가?”

“예에, 부인.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에 대해, 이곳 초로에 대해 ....... 혹여나 궁금해 하지는 않던가?”

“아, 네에. 부인 송구스럽게도 그러한 눈치는 없으나... 저기....”

“어려워 말고 말해보게.”


왕국주는 곤란한 표정을 짓고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조아린 후 말을 이었다. 화란부인은 그런 그를 그저 지켜 볼 뿐이다.


“저기... 해루를 해한 자를 찾아 보복할 모양입니다, 돌아가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그 분께서 해루에게 고얀 짓을 해 놓으신 듯 합지요.”

“허어... 고얀 짓이라?”

“그러니까, 소인도 잘 모르겠사오나, 흘려듣는 이야기로 해서는 안 되는 술수를 행하고 있다합니다, 부인.”

“해서는...안되는 술수라니?”

“믿기지는 않으나, 금지된 마귀(鬼神)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듯 합니다. 하긴... 저부터도 해루가 당하는 몰골을 직접보고는, 내리 사흘을 꼬박 잠을 이루지 못했지요.”

“그런 요망한 마귀의 힘을 빌리자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터인데....?”

“예에 부인. 그 분들께서도 그 점을 염려하시는 것 같았습니다요. 원흉이 누구냐고 물으시는 그 무사님의 닦달이 어찌나 집요하신지.... 부인의 함구령만 아니었다면 아마 벌써......”

“됐네. 수고했네.” 


쪼르륵-

화란부인은 말없이 돌아서서 시비가 준비해둔 찻잔으로, 더운물을 조심스레 부었다. 꽃잎이 두둥실 떠오르며, 달콤한 매화향이 방안 가득 퍼져나갔다. 뽀얀 매화꽃잎이 찻잔 안에서 활짝 만개하며, 3월의 싱싱한 아름다움을 되찾고 있었다. 따뜻한 증기를 한차례 들이마신 화란부인은, 잠시 후 다시 엎드려 있는 왕국주를 내려다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그들을....... 직접 만나 보았으면 하는데.”

“예에? 아, 아아... 네에, 부인.”

“그때까지는 일단은 계속 그 일에 대해서는 함구(緘口)하도록 하게. 또한 아이들의 입단속도 철저히 시키도록 하고. 날을 택하여 보고하도록 하게나.”

“예, 부인! 알겠습니다.”

“그럼 나머지 일은 왕국주가 알아서 잘 정리하도록 하고, 이제 그만 나가보아도 좋네.”

“네. 소인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왕국주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허리를 숙인채로 공손히 뒤로 물러나 벽 바깥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홀로 남은 화려한 방안에서, 그녀는 금빛 보료에 몸을 기대어 잠시 복잡한 머리를 식혔다. 활짝 핀 풍성한 매화 송이를 바라보던, 화란부인의 흐뭇하던 인상이 잠시 후 다시금 찌푸려졌다.


‘부인 놀랍게도, 아이들을 단속시켜 본 결과, 해루뿐만이 아니라.... 인근 마을에서도 수태한 여인들이 심심치 않게 자취를 감추고 있다고 합니다. 다들 워낙 은밀하게 쉬쉬하는 일이라... 아마도 권력과 무력의 힘으로 희생자들의 입을 막고 있는 듯합니다.

심상치가 않습니다, 부인. 분명히 무슨 큰 사단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요.’


살짝 끝이 올라간 고집스러운 눈매의 여인-

기녀들의 규율과 교육을 책임지는, 난원의 관리자인 금루국주. 그녀가 오늘 오후에 중앙 탑 꼭대기 방을 찾아와 은밀히 보고를 올린 말이, 계속해서 화란부인의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일단은 만나보는 거야. 그리고 묵운의 보고를 기다려 보는 거고. 후우. 향이 좋구나.’


뿌연 매화 안개 속에 중년부인의 시름도 함께 잠겼다.








“술만 드시지 마시고, 안주도 같이 드셔요. 몸 상하십니다.”

“나에겐 네 금(琴)소리만한 안주가 없다하지 않았느냐. 소군아.”


  여인의 작은 한숨소리와 함께, 잠시 끊겼던 고운 금의 선율이 다시 이어졌다. 잘 정돈된 방안에는 두 남녀가 앉아 있었다. 전각은 화려하다기 보다는 깨끗하고 단정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았다. 방안의 모든 벽에는 천장부터 바닥까지, 나풀거리는 푸른 빛깔의 휘장이 곱게 드리워져 있었다. 최대한 거추장스러운 장식품을 자제하고, 일체의 가구도 들여 놓지 않았다. 하지만 큰 정성을 들여 지은 듯한 전각의 건물 자체가 지니는 아름다움은, 오히려 검소하고 단란한 내부로 인해 그 멋을 한 층 더하고 있었다.

  중앙에 놓인 커다란 보료와 그 맞은편의 널찍한 오동나무 침상.

지금 그 결이 고운 나무 침상위에는, 한 상 거하게 받은 사내가 한가로이 술을 따라 붓고 있었다. 그는 술잔에 담긴 채 찰랑이는 붉은 복분자의 향을 음미하며, 보료위에 앉은 여인이 타는 금음(琴音)을 감상하고 있었다. 술잔을 잠시 떠난 사내의 시선이, 맞은편의 여인을 향해 머물렀다. 절정의 미녀(美女)였다.

  백옥처럼 희다 못해 푸른빛이 감도는 여인의 전신은, 그저 속이 훤히 내비치는 은빛의 모시로 아슬아슬하게 가려져 있었다. 여인의 앞섬이 이리저리 풀어헤쳐져, 봉긋한 한 쪽 가슴이 엶은 모시 밖으로 들어나 있는 모양을 보니, 이 미녀가 금을 타기 전, 사내의 행적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여인의 찰랑이는 머리칼이 허리를 둘러, 묘하게도 그녀의 하반신을 가리고 있었다.

  화려란 장미라기보다는, 청아한 난초에 가까운 여인이었다. 허나 지금 사내를 흘겨보는 여인의 눈에는 묘한 호기심과 질투가 어려 있었다. 사내는 반 시진 전부터, 멍하니 술잔 만 바라보며 희죽 희죽 웃어대고 있었다. 그와 반평생을 함께 했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옥구슬 같은 목소리가 금음 가락에 보태어 졌다.


“혹여, 즐거운 일이라도 있으셔요?”

“흐음... 있지! 드디어 오늘 만났단다. 생각지도 못하게 말이야.”

“만나다니, 누구를요?”

“역시 널 보러 오길 잘했단 말이야. 하하하”

“자꾸 말만 돌리시기예요? 두 달 만에 오셔서는 소녀에게는 관심도 없으셔요.”

“하하하하! 소군아 너도 질투를 할 줄 아느냐?”

“흥! 저는 여인도 아닌 줄 아셨나 보아요?”


팩하니 고개를 돌린 여인은 뾰루퉁하게 입을 닫고, 다시 금음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부드러웠던 여인의 금 소리가 점점 사나운 풍랑과 같이 거세어 지기 시작했다. 선율의 파동과 함께 차분하게 드리워져 있던 사방의 푸른 휘장이 아래에서부터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 있는 게 느껴진다. 내 심장에서 뿜어 나온 피가 내 오장육부를 휘감아 도는 것이 느껴진다는 말이다! 하하하!”

“.......랑!”


순간 여인의 금 선율이 뚝! 하고 끊어졌다. 잠시 고요함이 흘렀다.


“처음엔 호기심이라 생각했다. 허나 지난 4개월 동안 그를 찾아 헤매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 그리고 오늘 다시 만나서 알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내가 그녀를 찾고 있었던 이유를!”

“혹시 만났다는 분이, 4개월 전의 그 신궁이라는 위소저.......?”

“너도 기억하고 있느냐? 하하하하! 가슴이 두근거리는 구나! 분명히 뭔가, 날 즐겁게 해줄 뭔가를 가지고 있어, 그녀는!”

“혹여 위소저가 이곳 초로에 있던 가요?”


“오늘 오후 솔원의 정자에서 보았다.”


  위소저라면 소군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사파의 여고수인 신궁한영이, 자신과 함께 해어화(解語花) 세 송이로 불리는 기녀들 중의 하나인 초량과 유일한 벗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4개월 전 초량의 기루에서 잠시 머물고 있던 위소저가, 우연히 자신의 낭군 비형랑과 함께 작은 사건에 얽히게 되었다했다. 그리고는 어찌 된 일인지 한영은, 다음날 귀신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 후로 비형랑은 쭉 그녀를 찾아 헤맸고, 그때 마다 번번이 허탕을 친 그는, 이 곳 초로로 자신을 찾아와 금음을 듣고 가곤 했다.

  하지만 지금 한영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가는 그는 뺨까지 붉게 상기된 채, 흥분하여 외치고 있었다. 두 눈망울까지 반짝이면서 말이다. 일체의 인연에 연연하지 않으며, 삶의 미련이나 욕심 따위와는 평생 상관없을 것 같던 그가 말이다. 


‘후우…….기뻐해야 할 일인지, 아니면 슬퍼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구나! 나는 앞으로 어찌 해야 하는 걸까.......’


소군은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답을.

비형랑은 호탕한 목소리로 크게 웃으며 소군에게 만은 속내를 털어놨다.


“처음이다. 진심으로.... 내일도 눈떠서 세상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후후후”

“그 분이 들으시면 ……. 기뻐하실 말씀이네요.”


여인의 조용한 금의 선율이 다시금 이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그리움이 깊이 배인 슬픈 색깔을 띠는 소리다.


“그렇군. 곤륜산의 노부가 듣는다면 하늘을 날 듯 기뻐하겠구나. 하하하하!”

“사부님께 그 무슨 경망하신 말씀이에요!”


소군은 비형랑을 향해 자지러지는 고함을 버럭 질렀다. 조각 같은 그녀의 얼굴이 잔뜩 노여움을 띄고 있었다. 금을 타는 소군의 섬섬옥수(纖纖玉手)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부라 칭하지 마라. 나는 그런 거창한 인연을 둔 적이 없으니.”

“사형!”


  얼굴이 벌게진 채로 소군이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품안에 소중히 있던 금도, 하염없이 굴러내려 바닥에 널브러졌다. 막 머라고 퍼부으려던 소군은, 다시금 구름처럼 예전의 무심한 얼굴로 돌아간 비형랑을 보고는, 그만 입을 딱 다물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비형랑을 잘 알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둘은 남매처럼 곤륜산에서 자라왔다. 사부를 아비와 같이 의지하고, 오직 사형만을 바라보며 자란 소군이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재능과 신체를 타고난 비형랑이지만, 하늘이 너무나도 큰 재주를 내린 것이 화근이 되어, 아직 이른 나이에 그는 세상의 이치를 훔쳐보았다했다. 그 후로부터 그는 어떤 작은 인연에도 털 오라기 하나 남기려 하지 않았다. 그저 발길 닿는 곳으로 제 몸을 맡길 뿐.

  사부의 수제자인 그가 곤륜파의 뒤를 잇지 않고, 도망치듯 곤륜산으로부터 속세로 떠나 올 때도, 노사부는 굳이 그를 잡지 않았다. 왜 사형을 잡지 않느냐고, 울부짖는 소군을 바라보며 허허로운 웃음을 흘리던 사부의 마지막 말이 늘 소군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소군아 손을 뻗어 보거라. 아가, 바람이 쥐어 지느냐?’


  하지만, 소군은 그렇게 사형을 포기 할 수 없었다. 그길로 사부가 하사한 금을 들고 곤륜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사형의 행적을 뒤쫓았다.

발길이 닿고 마음이 움직이는 곳으로, 구름처럼 무림을 주유하던 비형랑을 두고 사람들은 최고의 풍류객이라 부르고 있었다. 가끔씩 신선의 풍모가 흐르는 훤칠한 그의 외모는 여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바람둥이라는 둥 일개 한량이라는 등의 안 좋은 수식어가 꼬리말처럼 그를 따라 다녔지만, 소군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부! 사형이 바람이라면, 전 그 바람이 잠시 쉬어 가는 개울이 되겠어요!’


그녀는 비형랑 곁에 함께 있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으로, 바람이 잠시 머물러 가는 쉼터가 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 길로 화란부인에게 몸을 의탁하여, 초로의 난원에 머무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6년 이라는 시간이 살과 같이 흘러갔다.


  과거의 상념에서 벗어난 소군은 고개를 돌려, 창밖의 까만 별밤을 올려다보고 있는 비형랑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말없이 보았다. 그의 등에 날개가 돋아나 자신의 품에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으로, 그녀의 까만 눈망울에 보석 같은 이슬이 맺혔다.

저때는 그냥 혼자 있게 두는 것이 그를 위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소군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돌아서 막 돌아서 방을 나가려는 참이었다.


“너는 언제까지 이리 있을 참이냐.......?”


눈물을 남몰래 훔쳐내는 소군의 얼굴에 작게 미소가 걸렸다. 그래도 그는 아직 자신을 잊지 않고 마음 한 편으로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형이....... 방황을 끝내는 날까지!”


마지막 말을 남기 소군은 방밖으로 나갔다. 기다랗게 늘어진 그녀의 마지막 장삼자락이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돌아선 비형랑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갈색 눈동자 속에는 까만 별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래, 소소야 이리 와봐.”

“네, 아씨 찾으셨어요?”


  다름 아닌 방밖을 막 빠져나온 소군이었다. 그녀는 방을 나서자마자 자신의 전각에 배속된 시비인 소소를 불러들였다. 허겁지겁 달려온 소소는 그릇을 씻고 있었던 듯, 손에 묻은 물기를 치맛자락에 닦아내고 있었다. 


“혹여 요 근래에 초로를 찾은 특별한 여자 손님이 있더냐?”

“여 손님이라고요? 흐음…….어디보자……. 아! 있어요, 아씨!”

“그래? 솔원에 있다 들었는데? 그러하지?”

“네에~ 아씨께서 어찌 아셔요? 솔원의 홍루각에 머무르고 있는 일행 분들 중 여 무사 한분이 계시다 들었어요.”

“너도 본적이 있어?”

“그럼요~ 앗, 아니.. 놀러갔던 건 아니고요, 아씨…….”


  소소라고 불린 아이는 울상을 지으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금루국주가 소관인, 여기 난원의 대표전각이 소군각이라면, 그녀와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왕국주 소관의 솔원의 대표전각은 홍루가 머무르는 홍루각이었다. 금루국주의 불호령도 매섭기로 소문나 있었지만, 여기 소군역시도 그 미모만큼이나 몹시 깐깐하고, 냉정하기로 이름나 있었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마음을 열고 지내는 이 역시 비형랑뿐이지만.


“너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니, 본대로 대답해야해. 그 무사가 혹여 활을 지니고 있지 않던?”

“네에! 분명히 그 여 무사님은 오른쪽 어깨에 한 장은 족히 넘음직한 장궁을 항상 메고 계셨어요! 아씨~”


주인의 의도를 알아차린 소소는 그제야 활짝 개이며, 쾌활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소군은 잠시 동안 빠르게 판단했다. 비형랑과 관계된 일이니, 자신도 모든 것을 알아야 했다.


“소소야, 네게 임무를 맡길게. 잘 처리 한다면, 이 노리개를 주마!”

“정말요? 아이 좋아라~ 아씨, 분부만 내려주세요!”

“좋아. 지금부터 홍루각의 동태를 잘 살펴. 모든 일을 보고 듣고 와서 그대로 내게 고해라.”

“그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요. 아씨! 노리개 꼭 주셔야 해요! 호호호”


소소의 작은 그림자가 저 멀리 사라져 갈 때까지, 소군은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있었다. 비형랑과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는, 내용은 다르지만 그와 동일한 대상을 두고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잇! 누가 내 말을 하는 건가?”

잔뜩 짜증이 실린 얼굴로 귀를 후벼 파는 한영이 고개를 갸웃 고리고 있었다.

장소는 솔원의 홍루의 전각.

일행은 노모와 홍루가 준비해온 반찬으로 조촐한 저녁을 먹고 있던 중이었다. 아까부터 계속 귀가 근질근질한 한영은 손가락으로 마구 귓구멍을 쑤셔대고 있었다.


“그리 왈패같이 구니, 열이 뻗쳐올라와 귀까지 가려운 게지! 클클클.”

“풉!”


파바밧-

작약의 한마디에 한영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순간 웃음을 참지 못한 도화가 헛바람을 내뱉었고, 그 덕에 녀석의 입속에 있던 밥풀이 고스란히 맞은편에 앉은 흰둥이 얼굴에 온통 튀었다.


“멍!! 멍멍!!”

(주인- 이건 아니지!)


도화를 원망하듯 어이없이 짖던 야호는, 옆으로 돌아서서 부르르 떨어 묻은 밥풀을 털어냈다. 미안한 마음에 흰둥이를 바라보며 표정을 관리해 보려던 도화도, 한 번 새어나오기 시작한 웃음은 어찌 할 수 없었다.


“뭐야? 도화 너까지 이러기야?”

“누, 누나 미안..... 근데 자꾸 웃음이, 하하하”


피식-

화를 내려던 한영까지도, 벌어진 상황을 보니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오랜만에 그들은 모든 걸 잊고 한참을 밝게 웃었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작약이 나지막이 말했다.


“밥 먹고 깨끗이 씻은 다음 한번 보자꾸나. 귓병에는 범의귀 즙이 최고지. 생잎을 물에 씻어서 물기를 뺀 다음, 잘게 썰어 소금을 뿌리고, 가제로 꼭 짜서 즙을 내면 끝이야. 마침 내가 가진 것이 있으니.”


대답 없이 고개를 푹 숙인 한영의 뺨이 불그레하게 물들었다. 작약의 따뜻한 마음이 가슴으로 전해져 오자, 감정표현에 익숙하지 못한 그녀는 그저 머뭇거리며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누나 뺨이 빨개졌어?”

“이, 이 녀석이?!”


눈치 없는 도화가 고개를 모로 눕혀 비스듬히 숙이며, 한영이 왼쪽 팔로 감춘 얼굴을 들여다보며 소리쳤다.


“저, 저리가! 이 녀석아!”

“하하하하하!”

“클클클......”


“멍! 멍멍!”


별빛하나 비추지 않는 깜깜한 어둠.

달빛이 따스하게 감싸고 있는 홍루각 틈사이로, 세 사람의 따뜻한 웃음소리와 경쾌한 개 짓는 소리가 그 뒤로도 간간히 새어나왔다.

그리고 지금 그 홍루각으로 한 인영이 급하게 들어서고 있었다.


‘어서 빨리 알려야 해. 언제쯤이 적당할까..흐음... 홍루는 노모의 전각에서 해루를 돌보고 있을 테고... 그럼 저안엔 지금은 그들만이 있겠지?!’


그는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계산을 빠르게 하고 있는 왕국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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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이 금메달을 달았네요

부끄럽기도 하고, 황송하기도 하지만.... 너무나 행복합니다. 

글을 쓰는 이에게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을 거에요.

추천을 하여 주시는 분들과 또한 제 글을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멋진 주말이 될것 같아요.

 

울 님들도 다들 좋은 일 가득한 풍성한 주말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파안의 가호가 언제나 함께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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