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3월......
겨울은 빠르게 물러가고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겨우내내 눈이 많이 내리면 이듬해 날이 좋단다. 농사는 풍작을 이루고 일조량이 많아져서
식물이 자라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한다.
버스에 몸을 실은 추림은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짧은 방황을 견디지 못해 바람을 쏘일 요량으로 시골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구정을 보낸지 한달도 안되어서 다시 시골을 찾았지만 느낌은 사뭇 달랐다.
3월 중순. 곧 농번기가 시작된다. 얼어붙었던 대지가 녹아내리면서 파릇한 새싹이 돋아나
기도 했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가벼워 지고 있었다.
유미와 헤어진 후 연락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참아내는 중이다. 그날 유미와 길고 긴 밤을 보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일요일 날
잠깐 잠들었었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 그녀는 떠나갔다.
답이 없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지만 결국 추림은 그녀를 잡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두려웠다. 앞으로 그녀를 떠올리고 마음속에 키워나가야 할 시간들이 두려움으로 다가오
고 있었다.
비겁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 그 순수한 진실앞에 당당하지 못한 자신이어서 비겁하다 여겼다.
품안으로 파고들고 또 파고드는 유미를 안아주지 못했다. 그럴수 없었다.
사실은 그것이 아닌데도 머리속에는 그녀를 다른 사내의 여자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원망어리고 서글픔을 담은 그 표정을 잊을수가 없었다.
바보... 당신은 바보예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말 한마디 해줄것이지는...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도 않았고 자신에게 모든것
을 떠맡기려 하고 있었다. 마음이 같다! 서로가 그렇게 해주길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하고 용기가 없어서였다. 서로에게 부담을 줄까싶어서 미안한 마음에 아무런 내색조
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후회... 분명히 후회 스러웠지만 제 살 갉아 먹기식으로 상처만 키울 뿐이었다.
다시 찾아 간다면 만나 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타인의 경계를 이루어 가고 있는 상태였다.
그것은... 아이러니였다. 사랑하면서 사랑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일인가 말이다! 사랑하면서 타인일 수 밖에 없다는것은 엄청난 모순이었다.
그리웠고 자꾸만 기억되려 하고 있었다.
이건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결코 옳은 현상이 아니었다. 되도록 견디어내야 한다.
조금만 생각하고 덜 사랑해야 한다. 아니면 무척이나 힘들어 질 것이다.
중간 기착지에 정차한 버스에서 내렸다.
동안 선주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걱정이 되었다.
단 한번도 따듯한 정을 주지 못해 신경쓰였던 선주였다. 그녀도 자신처럼 힘들었을 것이
다. 자신도 이렇게 힘들고 아픈데 그녀의 가슴은 얼마나 쓰렸을까!
그것을 생각하니 너무 미안했다.
지선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지선은 혼자산다. 집이 지방인 그녀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아마 같이 있을지
도 몰랐다.
전화벨이 십수번 울릴때까지 기다렸다. 없는것일까?
-여보세요.-
있었다. 분명한 지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선씨? 저 추림입니다."
-어머. 추림씨! 이제 전화하시면 어떻해요. 집에 전화도 안받으시던데?-
"예 저 퇴원하고 며칠 있다가 시골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지금 올라가고 있어요."
-그러셨어요? 전화라도 하시지. 선주 걱정되서 전화하셨어요?-
"예. 연락도 없고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요. 잘 있는거죠?"
지선이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순간적으로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음을 느꼈다.
"말해보세요. 선주 집에 들어갔어요?"
-추림씨. 선주 학교도 포기하고 집에 갇혀 있었어요.-
"......?"
포기? 갇혀? 무슨 의미인지 혼동이 왔다. 자신의 집에 갇히는 사람도 있던가?
-얼마전에 들어갔어요. 개학이라 준비도 해야하고 그래서요. 강제로 붙들려 있다가 오빠
하고 엄청나게 다투었어요. 놀라지 말아요 추림씨. 선주... 자살기도 했었어요.-
"......!?"
놀라지 않을수가 없는 말이었다. 멀쩡한 여자가 자살 기도라니?
그녀가 일시적으로 힘든것은 알고있다. 하지만 그정도까지 힘들어야 할 필요는 없을텐데
자살 기도라니 말도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오빠와의 불화가 그렇게 심했던가?
혹 자신 때문에 그런건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자살이라니요? 자세하게 말좀 해주세요."
-선주 작은 오빠가 추림씨를 린치한 것을 선주가 알고 따졌어요.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
인간은 끝끝내 발뺌했고 어머니까지 선주에게 뭐라고 하셨어요. 결국 그 인간안테 대들다
가 엄청 맞았어요. 이가 흔들리고 손가락이 부러질 정도로 맞아서 기절할 정도였어요.
그러다가 지난주에 바보같은게 약을 먹었어요. 다행이 일찍 발견되어서 무사했지만 정말
놀랐어요. 어떻해요 추림씨? 선주... 바보처럼 변해버렸어요. 말도 안하고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가끔 추림씨만 찾아요. 지금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제가 얼마
나 찾았는지 알아요?-
이럴수가 있다니... 어떻게 여동생을 폭행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심한 무력을 사용할 수 있
는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사람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그렇게할 수가 없었다.
걱정이 되었다. 선주가 그렇게까지 힘들어 하고 있었다니 죄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최진규! 그놈을 용서할수가 없었다.
"지선씨. 세시간 후에 신촌에서 만날 수 있어요?"
-세시간 후요? 네 갈게요. 그쯤이면 도착하시나봐요?-
"예. 늦어도 그정도면 충분합니다. 신촌 병원입구에서 만나요."
마음이 무거워졌다.
갑자기 모든것이 어려워지고 혼란스러워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유미와 선주... 자신에게 어떻해서든 관련이 있는 여자들이다. 두명 모두 정상적이지 못한
상태인것이 정말 우연처럼 일치하고 있었다.
서둘러 버스에 몸을 실은 추림은 일단 선주를 만나고 나서 생각하기로 했다.
최진규. 그를 이대로 두고 볼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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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셨어요?"
"네 잘 지내셨나요? 일찍 오신것 같네요."
추림이 곧장 병원으로 달려오자 현관 입구에 서있던 지선이 다가오며 말을 건네왔다.
추림이 인사를 하며 현관에 들어섰다.
"선주 혼자 있어요? 보셨습니까?"
"네. 조금전에 보고 내려 왔어요.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혹시나하고 올라가 보니까 혼
자 있어요. 자던걸요. 어머니가 계셨었는데 선주가 싫어해서 혼자 있으려고해요. 하루에
한번 들러서 얼굴만 비추고 가시죠. 무슨 엄마가 그러는지 도통 이상한 집안이에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층으로 올라가 내려 곧바로 지선의 안내를 받으며 병실로 들어섰다.
기분이 이상했다. 얼마전에는 자신이 병원에 입원했었다. 선주가 보호자가 되어 자신을 돌
보았었는데 이제는 반대 입장이 된것이다.
6인 1실 병실로 들어서자 중간에 위치한 곳에 선주가 보였다.
짧게 갂은 머리와 초췌하게 변한 얼굴로 멍하게 넋을 놓고 침상위에 앉아 있었다.
며주 사이에 저렇게 달라진 모습을 하다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주야!"
지선이 선주를 부르며 다가가자 선주가 고개를 돌렸다.
"추림씨 왔어. 좀 괜찮아? 방금전에 자던걸 봤는데."
추림이 선주에게 다가가 섰다.
촛점이 흐려진 눈으로 추림을 응시하던 선주의 눈에 뿌옇게 습막이 차올랐다.
"선주야......"
"나쁜놈! 나쁜놈! 왜 왔어! 왜 왔어! 가! 가란 말이야! 나쁜자식아 꺼져 버리란 말이야!"
선주의 입에서 병실이 울릴정도로 커다란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리고 인상들이 구겨졌다.
"거 좀. 조용히 안해! 어린것들이 뭐하는 짓이야?"
"싸가지 없는 것들이네! 확 줘 패버릴라!"
그러자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곳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추림은 못 들은 척 하고 선주의 상체를 강제로 품으로 당겨 끌어 안았다.
"미안하다. 일이 있었어. 정말 미안해."
"흑흑... 흐엉... 왜 이제 왔어! 왜 이제 왔냐고! 나쁜놈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흑흑!"
추림의 품에 안겨 흐느끼는 선주의 등을 토닥여 주며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럴수록 선주의
울음 소리는 더 커졌다.
"거 씨발 되게 씨끄럽네! 나가서 지랄하던지. 여기가 놀이터냐?"
조금전 목소리가 다시 거칠게 말해왔다.
추림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말한 놈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나이롱 환자임이 드러난 놈은 많아봐야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이었다.
한놈은 멀쩡한 몸으로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그놈 곁에 스포츠 머리를 한 두놈이 거들먹
거리는 얼굴로 서 있었다.
행색은 건달인데 분명 양아치다. 덩치는 크고 비대했지만 흉내만 그럴듯한 놈들이다.
"선주야 잠시 울음을 그쳐봐라. 갑자기 할 일이 생겼다. 지선씨 선주곁에 있어요."
"왜? 하지만 추림아. 내가 안할께 응 하지마."
추림의 의도를 눈치챈 선주가 추림의 옷자락을 당기며 말했다.
왼손에 붕대를 감고 있고 얼굴에 멍자국 투성이인 선주의 모습에 속상해진 추림은 화가
나 있었다.
"선주야. 너를 이렇게 만든 놈도 저놈들같은 자식이다. 사라져야 하는 놈들이지. 날 지켜
보거라. 가만있어 금방끝날 거니까."
추림의 얼굴에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추림이 몸을 돌려 곧장 그놈들에게로 다가갔다.
"어쭈? 한번 해보겠다고?"
"요 쬐끄만 자식이 입원하고 싶어서 기를 쓰누만!"
서있는 두놈이 실실 거리며 빈정거렸다.
그들에게 다가간 추림의 입에 웃음이 매달렸다.
"너 이리와봐라. 아까 한말 다시 해볼래? 토씨하나 틀리면 여기서 널 평생 살게 해주지."
추림이 느리게 말하며 다가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크고 덩치도 두 배이상 나갈것 같은
사내들 앞에 섰다.
갑자기 병실안에 침묵이 감돌고 싸늘하게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이 씹새... 컥!"
추림을 손으로 밀쳐내려던 덩치 한놈이 욕지거리를 하다가 말고 허리가 꺽어졌다.
비명을 내지른 놈은 하복부를 감싸쥐고 있었는데 추림의 발이 놈의 낭심을 걷어찬 것이다.
갑작스런 상황에 그놈 옆에 있던 또다른 덩치가 움직이려 하자 추림의 다리가 허공으로
비산하며 날아가 놈의 턱을 걷어 차고 덜컥 거리며 뒤로 재껴진 놈의 턱이 돌아오기도 전
에 다시 가슴을 그대로 강타해 버렸다.
"크헉!"
바닥으로 그대로 꼬꾸라진 덩치가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고 침상위에 앉아있던 나머지 덩
치 하나가 막 일어나 추림을 덥치려 했다.
"움직이면 여기서 널 내던져주지. 이 씨발놈아! 한데 어쩌나 이놈들이 이 모양이니 너도
좀 맞아야 겠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추림이 침대에 손을 짚고 몸을 날렸다.
머리가 아래로 향하고 다리가 위로 향한 자세로 날아가 침대위의 덩치를 그대로 덮쳐 버
렸다.
하늘 찌르기 기술이다.
"으헉!"
복부를 얻어맞고 침대 위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덩치에게 다가간 추림의 발이 놈의
허벅지를 걷어찼다.
"아까 뭐라고했니? 이 양아치 새끼야? 지랄? 내가 저 여자들이 너희에게 지랄을 했어? 너!
이리와봐라! 내가 갈까?"
처음 낭심을 걷어차인 놈이 추림의 호통에 움찔떨며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추림의 기
세에 눌려버리고 힘에 꺽여버린 놈이 마지못해 다가왔다.
"빌어라! 아니면 아주 죽여주마! 여기서 너희들을 내던져 버리겠다!"
병실에 있던 사람들의 입이 쩍 벌어지고 소란에 몰려든 사람들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치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추림은 화가나도 많이 나 있었다. 이런 놈들 때문에 선하고 순한 이들이 피해를 보고 억울
한 일을 당한다. 아무렇게나 말하고 행동한다. 이런 놈들로 인해 상처받고 고통받는 이들
이 넘쳐나지만 막을수 있는 방법은 요원했다.
법보다 주먹이 우선하는 사회! 쓰레기 같은 자들이었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일로 심기가 불편해있고 힘들어 하고 있을때 속풀이 상대가 되고 말
았다.
"빌어라! 아까 한말을 사과하고 용서를 빌란 말이다! 개자식들아!"
추림이 낭심을 얻어맞은 덩치의 멱살을 움켜쥐고 소리를 질렀다.
"이새끼! 너 어떤 놈이냐? 기습이 성공했다고 좋아하나본데. 기다려라 이새끼야 반드시 찾
아가마! 넌 이제 다리펴고 못잘줄 알아라!"
침상위에서 추림에게 당한 놈이 일어나며 으르렁 거렸다.
추림이 놈을 바라보며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너같은 놈들을 질리도록 보아왔지. 그래? 어떻게 찾아올건데? 주먹식으로 말해볼까?
너 이새끼들 어디 계보냐? 모시는 형이 누구냐?"
추림이 갑자기 그렇게 나오자 놈들이 당황했다. 양아치들이 잘나가는 주먹들을 알고 있어
도 계보나 누구를 모실 정도일리 없었다.
"멍청한 놈들! 잘 들어라. 너희 같은 놈들이 얼마나 무지한 놈들인지 내가 깨우쳐 주마!
난 청량리 까마귀 형과 호영호제 하던 때가 있었다. 영등포 늑대! 안산 광배형! 수원 두원
이 형님! 인천 석주형! 더 말해볼까? 양아치지만 들어는 보았겠지? 내 직업이 궁금하냐?
난 공돌이다 이새끼들아! 너희처럼 더럽고 비겁하게 살지 않는단 말이다! 자 빌어라! 누가
먼저 빌테냐?"
추림의 말에 완전히 기가죽은 놈들이 우물거렸다.
영등포 늑대는 중앙파의 핵심이고 안산 광배는 산이슬의 부두목이다. 수원 먹거리파의 주
먹인 고두원은 폭력전과 칠범의 베테랑 건달이고 인천 이석주는 맨몸으로 인천 삼대 조직
을 일군 수도권 서부의 최고 최고 주먹으로 통하는 실세였다.
"미안하게 됐수다."
"나도 그렇수."
"모르고 한것이니 용서하슈."
용서를 비는 자들의 말이 아니다. 하지만 저들의 생리를 잘 아는 추림은 그정도로 해두기
로했다.
"그런데 정말 고두원 형님을 아슈?"
한놈이 의심스러운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비굴하게 보였는지 추림이
풀석 웃고 말았다.
"모르고 이름만 팔까? 전국 주먹은 아니지만 경기이남 지역에서는 최고지! 나중에 보게되
면 강원도의 독종에 대해서 물어 보거라. 그가 나다."
그 말을 남기고 선주와 지선에게 다가가며 추림이 씨익하고 웃었다.
마음을 졸이고 있던 그녀들이 너무 싱겁게 일이 끝나자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추림을
노려 보았다.
갑작스런 소란에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가라앉고 사람들이 저마다 수군거리며 사라지자
그제서야 병원 경비들과 의사들이 몰려왔다.
병실로 들어와 생뚱맞은 얼굴로 두리번 거리던 그들이 소득없이 돌아가자 병실이 조용하
게 변했다.
병실에 입원해 있던 사람들과 보호자들은 추림을 홀깃 거리며 믿을수 없다는 표정들이었
다 단신에 호리호리한 추림이 순식간에 덩치 큰 세명을 패대기처 버린 것이다.
그동안 이 병실에 알게 모르게 주인으로 행세하던 자들의 말로였다.
"어디갔었니? 나쁜놈아! 한참 찾았잖아?"
선주가 다시 뚱한 얼굴로 추림을 홀기며 물었다.
"음. 시골에 갔었어. 그냥 생각나서 다녀왔다. 미안하다. 연락도 못하고 이런저런 일로 겨
를이 없었다. 몸은 좀 괜찮냐?"
"아니. 엉망이야. 보고도 몰라? 나쁜놈! 필요할 때 없고 말이야. 얼마나 기다렸는줄 아느냐
고? 누구랑 같이 있었지?"
"너 자꾸 놈놈 할래? 사나이를 어떻게 보고 자꾸 놈이래. 너도 한번 맞아볼꺼야?"
"때려봐? 여자는 못 때린다면서? 나쁜놈아!"
선주가 추림을 놀리며 장난치려하자 추림의 얼굴에 맥빠진 기색이 스치고 그만 웃고 말았
다.
지선은 마냥 신기했다. 그렇게 말도 없고 바보같은 모습이던 선주가 추림이 오자마자 변
해 버린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잘 웃고 장난도 치려 하고 있었다.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퇴원해도 되지만 그동안 선주가 퇴원하길 거부했었다. 이제보니 추림을 기다린듯 보였다.
"나 퇴원할래. 지겨워. 추림아 나 데려가줘 응?"
지선의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선주가 퇴원한다 말하고 있었다.
추림은 난감한 얼굴로 지선을 바라보았다.
"해도 돼요. 진작에 해도 되는걸 저 계집애가 미루고 있었어요. 뭐 집에 가고싶겠어요?"
"정말 그래도 되나 모르겠네? 어머니가 오셔서 수속 밟아야 하는거 아니야?"
당연히 절차를 밟고 퇴원해야 했다. 병원비도 그렇고 환자 임의대로 퇴원했다가 불미스
런 일이라도 생기면 병원측이 난감해 지는 것이다.
"아니. 어제가 밀린 병원비 계산하는 날이었어. 오늘 하루거만 내고 그냥 가자. 지선아 니
가 보증서. 퇴원보증 말이야."
"그러지 뭐. 그런데 너 집에다가 알리지 않아도 돼? 또 난리 날텐데?"
"알면서 그래! 거긴 죽어도 가기 싫어. 나 따로 살거야. 일이나 하면서 살지뭐."
선주가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병실 사람들이 놀라서 쳐다보았다.
좀전에도 선주가 큰 소리를 내 사고가 난 것인데 다시 큰 소리를 지르니 놀란 것이다.
"그러자. 나도 거긴 싫어.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닌것 같아. 일단 퇴원하고 도망부터 가고
보자."
죽이 척척 맞는 둘이었다. 사실 지선의 입장에서도 친구인 선주가 현재의 모습이 마땅찮
은 모습이었다. 집에서 선주처럼 불편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허구한날 싸우고 두들겨 맞고 성할날이 없었다. 차라리 딴데가서 사는게 낫다 싶었다.
"이추림! 너 누구랑 있었느냐니까?"
선주가 조금전에 한 질문을 다시 꺼내며 추림을 노려보았다.
"얘가 왜 생사람을 잡을까? 내가 누구랑 있어 있긴? 시골 다녀왔다니까!"
"그래? 거짓말이면 가만 안둘줄 알아?"
"......!"
어이없어진 추림이 지선과 마주보며 싱겁게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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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에 위치한 클럽 모나코를 확인하고 시간을 보니 자정이 훌쩍넘은 두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선주에게 위치를 물어 이곳에 온지 삼십분이 지났다. 모나코. 무척 유치한 느낌이 드는 술
집 이름이었다.
마포에 위치한 모나코는 바식 술집이었는데, 새벽 세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난다고 했다.
이제 한시간여만 지나면 영업을 마칠 것이다.
담배를 입에물고 도로 건너에서 모나코로 통하는 입구를 응시하며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
렸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손님들이 나오는 빈도수가 늘어나더니 조금 더 지나자 뜸해지기 시작
했다. 힐긋 다시 시간을 확인하니 십분전 세시였다.
도로를 무단으로 횡단했다.
담배를 던져버린 추림은 가죽점퍼의 옷깃을 새우고 모자를 깊숙히 눌러썼다.
다리의 상처가 불편하지 않은지 확인하고 몸 상태를 점검한 추림은 곧장 모나코의 입구로
다가가 계단을 올라갔다.
모나코 문가 곁에 서서 안을 살펴보니 손님들이 다 빠져 나가고 종업원으로 보이는 몇명
이 정리를 하고 있었다.
머리를 더 기울려 안을 살펴 보았다. 입구 근처에 카운터가 있었지만 최진규는 보이지 않
았다.
"대충하고 들어들 가지!"
누군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홀의 우측 안쪽에서 흰 와이셔츠를 입은 장신의 사내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다! 최진규!
지난번 린치 사건때 보았던 그 얼굴 그대로였다. 여유있고 거만한 행동은 여전했다.
"최진규. 널 오늘 박살내주마!"
중얼거린 추림이 품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끼고 손수건을 다시 꺼내 주머니에 든 콜라 캔
을 손수건에 쌌다.
이십여분이 지나고 종업원들이 줄줄이 빠져 나가고 모나코의 주전등들이 꺼지고 보조 전
등이 밝혀졌다. 종난것이다.
얼굴이 냉정하게 변하고 눈빛에 형형한 빛을 띤 추림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곤 문을 그대로 잠궈 버렸다.
추림의 기척에 바에 앉아 무언가를 홀짝이던 최진규가 얼굴을 돌려 추림을 바라보았다.
"누구야? 영업 끝났는데."
손님인줄 착각했는지 최진규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짜증이 묻어나고 귀찮다는 투였다.
"최진규! 다른 영업 한번 시작해보자!"
추림이 최진규에게 말을 건네며 다가갔다.
놀란 최진규가 미간을 모으고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혔다. 그런 최진규를 바라보는 추림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져갔다.
(35장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