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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사랑 (36장/ 1993년 봄!) <실극화>

추림의 풍 |2005.10.21 15:06
조회 284 |추천 0

얼굴 표정이 험하게 변한 유미가 은진을 노려 보았다.

은진의 어깨가 움츠려들며 숨을 죽였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날 속인거니? 이거였어?"

 

유미의 싸늘한 말에 커피숍에 둘러 앉은 이들의 얼굴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가운데 서

로를 바라보며 서로의 잘못을 애써 모면하려고 했다.

 

"나쁜... 널 그렇게 안봤는데 너 이제보니 아주 형편없는 친구였구나!"

 

유미가 다시 냉랭하게 말하며 몸을 휙하고 돌려 세웠다.

그러자 김석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미에게 다가갔다.

 

"야!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그럴필요 없잖아! 좀 앉아봐."

 

석호가 유미의 팔을 잡아가며 말하자 유미는 그의 손길을 세차게 뿌리쳤다.

 

"내몸에 손대지마! 너희들이 어떻게 놀던 상관하지 않아. 하지만 날 너희들의 장난질에

끼어 넣으려 하지마!"

"화좀 그만내라. 사람들이 본다 창피하게시리......"

 

석호가 주위 사람들의 눈길이 부담스러워 유미를 진정시키려 말했는데 오히려 화만 부추

켰다.

 

"그래? 잘됐네? 창피한 난 그만 가지!"

 

정말 재수 없다고 생각했다.

친구 은진에게 연락이 와서 무작정 따라온 길이었는데 일언반구 목적지도 말해주지 않은

은진의 의도가 이것이었다.

 

영등포까지 따라와 커피숍으로 들어왔을때 그녀를 기다린 이들은 김석호와 김영진이었

다.

속인것이다. 화가났다.

 

다시는 만나지 않으려 했던 친구들이었는데 이런식으로 자신을 농락했고 자신은 멍청하

게 굴었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솟구쳤다.

웃긴 일이었다. 은진처럼 얌전하고 순둥이를 어떻해 꼬드겼는지 말 잘듣는 아이같이 변

한 모습이었다.

 

"유미야... 미안해. 난 니가 싫어하지 않을줄 알고... 미안해 내 잘못이야!"

 

은진이 기죽은 모습으로 낮게 말하고 울어버릴듯한 얼굴을 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조금 약해져왔다. 운진은 정말 순하고 철없는 아이같은 계집아이였다.

그런 성격의 은진을 김석호나 영진같은 친구들이 다루기엔 식은죽 먹기였을 것이다. 

 

"그래. 다 우리 잘못이다. 맞아 죽을짓했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거든... 하지만 기왕 왔으

니 일단 앉아서 얘기하지고. 응 유미야?"

 

어느새 말을 놓아 버릴정도가 된 영진이 그렇게 말해왔다.

유미가 어쩔수 없다는듯이 자리에 앉았다.

 

"너 전화도 안받고 보고는 싶고... 어쩌냐? 해서 작전좀 짰다!"

 

석호의 말을 다 곧이 곧대로 믿는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좋아하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와 좋지못한 기억이 있어 피하려 하는데 석호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듯했다.

 

차를 한잔 마실동안 은진과 영진은 친근한 사이처럼 굴고 있었다.

서로 바라보며 히히덕 거리기도했고 귓속말같은 은밀한 대화도 나누었다.

 

"잘 지냈냐? 왜 전화도 안받았냐? 수십번도 더했는데 그때마다 없더만."

"지금말하지. 이제 전화하지 말아줄래? 나와 넌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 넌 너무 앞서가고

있는거 아니야?"

 

유미의 냉랭한 말에 석호는 상관없다는듯 웃는 얼굴이었다.

 

"그런가? 내가 널 좋아하고 넌 나를 피하고... 아니. 솔직히 너도 내가 싫지는 않잖아? 아

니야? 니가 마음속에 다른 남자가 있어서 그러는거 알고있지. 그것도 아니야?"

 

석호가 말하자 영진과 은진의 대화가 중단된 채 유미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웃고 떠들 상황이 아닌것이다.

 

"착각하지 말아줄래? 니가 그렇게 생각하는건 니 마음이지만 그것이 널 좋아하지 않는

이유라고 착각하지마! 넌 내 스타일도 아니지만 난 기본적으로 누굴 좋아하거나 하기싫

어!"

"누굴 좋아하기 싫다고? 그 거짓말 믿을수가 없는데?"

 

석호의 말에 빈정대는 색채가 짙게 깔려있다.

 

"유미야! 석호 좋은 놈이다. 한번 만나봐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잖

아. 안그래?"

 

영진이 석호를 두둔하고 나섰다. 그런데 영진이 말하다가 은진에게 안그러냐고 하자 은진

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이 유미에게 보여 은진이 화들짝 놀라 머리를 숙여 피해버

렸다.

 

사람이 좋은사람 나쁜사람을 구분해서 좋아하고 싫어할까?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일 뿐이다. 그 인간적인 이유로 좋아지거나 하는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영진의 두둔은 관심을 가지라는 의미겠지만 그런 영진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석호가 인간적으로 그리 단점이 많거나 하는 남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석호는 지금 유미에게 가장 나쁜사람으로 변해버린 존재였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와 있었던 일이 아니라면 추림과 그렇게 힘들어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가 알고 있었다.

석호와의 일을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확실했다.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것이다. 천하게 오해한다는 것이 아니다. 석호를 생각해 자신을 어

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또한 석호와의 일로인해 추림에게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는 초라한 모습만 보이고 있

었다. 서로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 단 하나의 어긋난 일!

 

김석호! 그는 자시에게 가장 악한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모든게 후회스러웠다. 지난번 그를 만났을 때 차라리 모든것을 말해 버리지 못한 것도 후

회 되었고 모른척 그를 여전히 사랑하고 유일한 사람으로 여기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놓고 그를 떠나올 때 그의 입가에 맴돌던 서글픈 미

소를 잊을수가 없었다.

그 초조해하고 현실을 부정하던 표정... 집에 돌아오는 내내 울었고 와서도 밤새 울었지만

가슴속에 쌓이는 애정의 회한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와 인연이 아닌듯하다.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까워지려 하면 멀어진다. 사랑할수록 사랑해선 안되는 사람

처럼 변해간다. 하나의 길위에 놓인 두개의 선택에 강요당한다.

 

미칠것만 같았다.

그의 상처를 보았다. 완전히 낳지 않은 흉한 상처와 무척 말라버린 육신은 그의 고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었다.

 

다른 남자들은 자신을 가볍게 대하고  생각했지만 그만은 진정 순수하고 따듯하게 대해

주었는데 그것을 의심하지 말았어야 했었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를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알았더라면... 조금만 더 이른 운명이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 야속했다.

 

"유미씨? 참! 대답좀 해봐!"

"......?"

영진의 높은 목소리가 귓속에 울려퍼진 채 그 공명음이 윙윙 거렸다.

퍼뜩 현실로 돌아온 유미가 영진을 이해할 수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정신 나간 여자처럼 그게 뭐야?"

"......?"

 

자신이 너무 깊은 생각을 한 나머지 그들의 대화도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못듣고 있었다.

 

"신경쓰지마!"

 

별반 관신이 없던지라 무심하게 말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석호가 영진을 보며 거보라는 얼굴을 하자 영진이 혀를 낼름 내밀었다.

 

"유미아. 봄인데 우리 놀러가자. 가평쪽 갈건데 갈래? 뭐.그냥 가는건데 같이가자."

 

영진의 말에 때를 생각한 유미는 어느새 겨울이 가고 완연한 봄이 오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겨울!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 생겨버린 계절... 가버린 겨울이 못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

다.

최초 그를 만나고 한 차에 동승하고 밤늦게 돌아와서 추림이 자신의 어깨에 코트를 덥어

주던 때가 떠올랐다.

 

불과 몇개월 전이지만 아득하게 먼 날의 일같이 느껴졌다.

허허롭고 환하게 웃어주던 추림의 미소. 매력적이다 느낀 그 웃음이 다시 그리워졌다.

감미롭게 미소지어주고 따듯하게 말해오며 부드럽게 자신을 어루만져주던 그 손길을 이

젠 느낄수가 없다.

 

"갈꺼야? 우린 갈껀데 같이 가자."

 

석호가 다시 물어와서 유미이 시선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마 자신의 대답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작은 기대를 하겠지?

 

"아니. 안갈꺼야! 너히들끼리 다녀오던지 해."

"그러지 말지? 같이 가자. 내가 아는데 있어. 가서 우리 재밌게 놀다오자 응 유미야?"

 

영진은 아이같은 천진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알고 난다면 그의 저 천진한 구석이 타고난 것일뿐이고 속은 전혀 다른 남자

라는 것을 안다면 놀랄 것이다.

 

사회 경험이 무척이나 많고 다양했다. 또한 많은 일을 겪어 보아서 모든 일에 상황대처를

어렵지 않게 대응하곤 하는 모습을 보였다.

속되게 말하자면 일찍 까진 것이고 좋게 말하자면 성숙하고 조숙한 것이다.

 

그리 관심이 가는 남자는 아니었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구석이 느껴졌다. 하지만 성정은 악하거나 삐뚤지 않아서 꺼리껴

지거나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영진아! 추림안테 한번 다녀올래?"

"추림안테? 전화도 안된다면서?"

 

"얼마전에 통화했다. 바쁜일이 있었나 보더라. 별일 없는것 같더라."

"그래? 그새끼 보고싶기도 한데? 이상하게 연락하기 힘드네."

 

가슴이 두근거렸다. 추림의 이야기가 들려오거나 그를 생각만해도 이렇게 가슴이 두근

거려왔다.

 

유미는 석호와 영진이 혹시 그에게 전화라도 할까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지금 전화해서 그와 통화한다면 자신과 같이 있을거라 말할지도 모를텐데.....

 

"언제 갈건데?"

 

유미의 입에서 갑자기 질문이 나와 석호와 영진이 추림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멈춘 채 그

녀를 바라보았다.

 

"어? 갈꺼야?"

"거봐! 같이 가고 싶으면서. 빼기는!"

 

미칠것 같다.

그들이 추림에게 연락할까 싶어 관심을 다른곳으로 돌리려 했던 것인데 이런 질문이 튀

어 나와 버리고 말았다.

 

"......!"

"다음주에 가자. 일요일 오전일찍 갔다가 저녁때 오는걸로 하고. 우리끼리 가는거야."

 

"좋았어! 내가 준비할께! 텐트하고 낚시도구. 석호야 다른 사람도 부르면 안될까?"

"안돼 새끼야! 우리끼리 단촐하게 다녀오자. 복잡하고 신경쓴는거 싫다."

 

그들의 얼굴엔 환한 웃음이 연신 벙글거렸다. 은진마저 좋은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싫다. 이렇게 또 원하지 않는 일을 만들어 버렸다.

정말 멍청하고 바보같다. 뭐가 두려워 추림을 피하려 했는지 이해가 안갔다.

그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제보니 자신의 이런 우유부단하고 꼬인 성격이 그를 멀리하게 하고 서로를 힘들게 하

고 있었던 것이다.

 

운명! 믿기 싫었던 그것이 풍운에 휩쓸리며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          *          *

 

거의 170센티정도 나갈듯한 키에 몸무게는 적어도 53킬로 이상이다.

옷을걸친 모습만으로 그녀를 평가하면 살이 찐듯한 모습이었지만 간단한 옷차림의 그녀

는 결코 뚱뚱하거나 비만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스커트를 즐겨 입었는데 연한 색을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오늘은 몸의 굴곡이 도드라져 보이는 면 바지를 입었고 위에는 반코트를 걸친 모

습이었다.

 

그덕에 더 키가 커 보이고 매력이 물씬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외투를 벗은 그녀의 몸을 확인하고 추림은 바로 눈을 돌려 버리고 말았다.

 

일요일,늦은 잠에 들어 있을때 울린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었을 때 밝은 웃음을 지은 이

시연이 무언가를 잔뜩 사들고 서 있었다.

 

간밤에 회사에서 오랜만에 회식이 있었다.

출근을 다시하고 나자 사람들이 축하주를 마시자며 만든 자리가 새벽 늦게까지 이어져

서 추림은 잔뜩 취해 돌아와 그대로 잠이 들었었다.

 

연락이 없던 이시연이 다시 찾아와 집안을 들볶고 있었다.

 

"옷좀 갈아 입던지 하면 안돼요?"

 

추림이 급히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오면서 한소리 안할수 없었다.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옷차림만해도 민망했는데 상체에 걸치고 있는 옷이라

는게 차라리 안입고 있는게 낳을듯한 차림이었던 것이다.

 

"벗으라고? 호호호! 너 알고보니 되게 쑥맥이구나? 쑥맥 이추림!"

 

시연이 카레를 만들려고 하는지 재료를 손보며 추림을 놀렸다.

 

"어때? 이정도면 소피아로렌이 울고 가겠지? 한번 만져볼래?"

"......!"

 

시연이 두손으로 커다란 젖가슴을 받쳐 들어올리며 추림에게 짖꿎은 농을 던졌다.

그녀는 배꼽이 드러나는 탱크 탑만을 상체에 걸치고 있었다.

 

헬스장에서 바로 이곳으로 왔다고 하는데 상체엔 헬스복을 그대로 입고 왔던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몸매가 서양의 그것을 닮아 있기는 했다. 작거나 아담한것과는 전혀 다르

고 하체는 길며 상체는 짧았다. 타고난 체형이다.

 

팔등신! 그녀를 평가한다면 솔직히 소피아로렌보다 점수를 더 주고 싶었다. 성격만 빼면

말이다. 소피아의 성격이 실제 어떤지는 몰라도 이시연처럼 엉뚱하거나 철면피적이지는

절대 아닐 것이다.

 

"쳇!"

 

추림이 시연을 외면하고 티비를 켜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머리가 무척이나 무겁고 둔중하게 느껴졌다. 어제마신 술이 적지 않게 피로감을 주고 있

었다.

 

"여자 있었구나? 이거 여자 머리카락인데? 어쭈? 아주 무더기네! 흔적이나 지우지... 응큼

하게시리. 누구야? 선주? 지선? 아니면 제 삼의 여인? 바람둥이!"

 

주방바닥과 거실 곳곳에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찾아 다니며 시연이 마구 중얼거렸다.

선주는 다시 지선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일주일 전이었다. 그 뒤로 청소를 한번도 하지 않

았다. 남자의 짧은 머리카락도 자주 빠지는데 여자의 머리카락이야......

 

"바람둥이요? 세상에 내가 바람둥이면 바람둥이지 않을 남자는 없을결요?"

"그건 니가 뭘 몰라서 그러는거야. 바람을 피우고 다녀야 바람둥인줄 알아? 자신은 원하

지 않아도 주위에 여자들이 꼬이면 그게 바로 바람둥이로 둔갑하는거야."

 

"어거지네요? 제 주위엔 제가 바람둥이 될 만한 여자들이 없네요! 착각하지 마셔!"

"나뭇가지는 잠잠하려해도 바람이 그냥두지 않는 법이지."

 

손가락을 펴고 흔들며 이시연이 하는 말에 피식하고 웃음지은 추림이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외면했다. 아무래도 이시연의 옷차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의 웃음. 말투! 행동! 넌 타고난 바람둥이야! 니가 몰라서 그러는거라고. 내 눈에는 너

의 숨겨진 끼가 보여. 아마 넌 여자를 알게 되면 지독한 끼를 발산해내려 할걸?"

 

추림은 이시연의 말이 제법 그럴듯하게 들렸다.

하지만 전혀 상관없는 억측으로 여겼다. 다른건 몰라도 자신이 여자를 대하는 것만은 절

대 무관심하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뒤에서 뭐라고 떠드는 이시연의 말을 무시하며 추림은 정오 뉴스를 시청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후 문민정부가 열렸다며 바뀐 세상을 나름대로 해석하는 보도문

들이 정신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참 흥미가 동해 뉴스를 시청할 때 시연이 다가와 뒤에서 목을 감싸 안아왔다.

 

"으헛!"

 

기겁한 추림이 시연의 팔을 풀어내려고 하자 시연이 더욱 강하게 목을 졸라왔다.

풍만한 가슴이 그대로 느껴지고 진한 향수 냄새가 코속을 간지럽혀왔다.

 

"미쳤어요? 어서 떨어져요. 숨막혀 죽겠네!"

 

추림이 소리치며 발버둥치자 시연의 웃음소리가 아주 가깝게 들려오며 그녀의 음성이 귀

에대고 소근거려 왔다.

 

"왜? 싫어? 누군 남자인지 한번 알아보려고 하는데? 가만있어줄래? 오분만 이러고 있어

줘. 나 조금 힘들어서 그래."

 

기운없이 들린 목소리라 추림은 멈칫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연의 목소리였다. 이상해 지려는 감정이 밀려가고 차분하게 가슴

이 가라앉았다.

 

"언니가 지난주에 결혼했어. 나 이제 혼자인걸 실감하고 있어. 힘든데 어디 갈때가 없더

라구. 웃기지? 이만큼 나이 먹었는데 갈곳도 없고 친구도 없다는게. 있지만 이 마음을 기

댈수 없다는게 문제라서 말이야... 외롭거나 쓸쓸하다는 감정에 무척 익숙했는데... 미칠

것 같았어. 날 이해해줄래?"

 

"이해못한다고 하면 죽일놈 될것 같은데요? 울지는 않을겁니까? 그거 겁나는데......"

 

추림이 가만히 움직임을 멈춘채 가볍게 응대해 주었다.

정말 싫었다. 주위사람이 힘들어 하거나 우울한건 이제 지긋지긋했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해도 엉망인 선주를 달래야 했고 언제 사라질지 모를 억압된 감정

이 마음속에 가득했다.

 

유미... 그녀 하나만으로도 힘들어 할 이유는 너무 많았는데 선주에 이어 이제는 시연까

지 기대려 하는게 못내 부담으로 다가왔다.

 

성규가 다시 방황한다고 연락이 왔고 명숙에게도 가보아야 했다.

도대체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시연, 이 여자와는 이미 인연이 엮어져 버렸다.

말도 행동도 너무 자연스러워 지고 남같지 않게 다가오고 있는 그녀를 나몰라라 할수는

없었다. 지금의 이 행동이 귀찮기도 했지만 피할수는 없다.

 

미치고 환장할 일이다. 도대체 어쩌라는 것인지!

몸이 서너개면 좋겠다고 생각한 추림이 느슨해진 시연의 팔을 풀어내고 돌아 앉았다.

이미 오분은 두번쯤 지나가버렸다. 

 

"들어 볼까요? 이시연시의 마음을 한번 보도록 하지요."

 

추림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말투는 장난끼가 다분하다.

귀여운 미소를 지은 시연이 추림의 얼굴에 바짝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아니. 먼저 밥먹고 술한잔 하면서 하면 안될까?"

"술이요? 또 술인가? 지겨워......!"

 

추림의 얼굴이 와락 구겨지며 한숨이 흘러 나왔다.

 

"나 오늘 취할거야. 한번 원없이 마셔볼건데 책임져줄거지?"

"......?"

 

책임? 자기가 술먹는데 자신보고 어떤 책임을 져달라는건지... 헌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느때와는 다르게 시연이 무척 진지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어느 모습이 그녀의 진짜 모습인지 알 수 없는 시연이었다.

                                                                                                      (37장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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