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가 버릴 것만 같습니다.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 달콤한 초콜렛 무스크림위에
뿌려진 시큼한 계피 향처럼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향으로 다가옵니다.
시멘트처럼 굳어져버린 내 심장을 뚫고 들어 올까봐 너무나 두렵습니다.
너무나......,“
커피 잔을 들고 있는 그의 손이 떨고 있다. 이미 수개월 전부터 보아온 그였는데,
지금의 이 떨림은 본적이 없다. 늘 굳게 닫힌 쓰리버튼의 슈트와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
그리고 잘 채워진 와이셔츠의 금빛 카라 버튼이 말해주듯
그에게는 작은 떨림도 그 어떤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뜨거운 커피향이 스물 스물 기어 나오는 흰색 도자기 컵의 위쪽으로 보이는 그의 모습!
K는 피씩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우습죠? 제가 생각해도 우습습니다.
이 정도에 고작 이 따위 정도에 마음이 흔들리다뇨. 정말 우습죠“
그의 손의 떨림이 멈추었다.
“똑똑”
“누구십니까?”
낡은 사무실! 이제 거의 다 떨어져가는 인스턴트 커피병의 바닥을 긁고 있을 때 쯤
K의 사무실로 그가 찾아왔다.
“저......, 여기가 심리치료사 케이의 사무실이 맞나요?”
“아! 네 어서 오세요. 저기 커피 한잔?”
“아 네”
입고 있던 옷만큼이나 낡은 찬장에서 커피 잔 하나를 더 내려놓고 커피 두 잔을 만들기 위해 인스턴트 커피 병의 바닥을 긁는 동안 K는 도저히 이 커피 병에서는 한 잔 이상의 커피가 나오지 않을 것임을 감지하고 서둘러 찬장아래 나무 서랍을 열었다.
다행히 자신처럼 약간은 구겨졌지만 내용물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 현미녹차 티백하나를 발견하곤 K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뜨거운 물을 붓기 시작했다.
“저기......, 심적으로 불안하시거나 가슴이 아픈 분들에게는 커피의 카페인이 독사의 맹독 만큼이나 위험합니다. 녹차가 주는 은은한 향과 맛이 한결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죠. 하하”
궁색한 변명을 꺼내어 놓으며 케이는 말끔한 복장의 명품으로 치장한 엘리트 젊은이에게
멋쩍은 웃음을 한번 지어 보였다.
마지막 커피! 하루에 한잔 이상은 꼭 마셔야하는 카페인 중독자인 자신이기에 케이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그에게 녹차를 권했다.
“아 그렇군요. 세심한 배려 감사합니다.”
남자는 가지런히 정돈된 이빨을 살짝 드러내며 케이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분명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커피가 한잔 이상이 나오지 않아 그에겐 티백이 구겨진 녹차를 권한 것을......., 남자는 그 사실을 알고도
마치 예절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 듯한 매뉴얼 적인 미소와 가벼운 묵례로 묵묵히 녹차 잔을 받아드렸다.
“따뜻하군요.”
“풋”
따뜻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이 남자! 그러나 역시 너무 딱딱한 매뉴얼적인 말투!
케이는 커피를 마시다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스타일! 늘 바른 길! 올바른 길 만을 추구하는 완벽한 스타일.
이런 스타일은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여유롭지 못하다. 언뜻 보면 젠틀하고 완벽을 추구하지만 늘 한 켠으로는 불안하고 답답한 어쩌면 허술한 다른 타입의 사람보다
가슴 한 편은 더욱더 약한 스타일 그러기에 늘 상처받고 혼자서 그 상처를 이겨 내려 하는 스타일이다.
“상처를 많이 받으시나 보죠?”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머금은 체로 k는 그에게 말을 건네었다.
“네? 상처요? 아뇨 이제는 그 어떤 일로도 더 이상의 상처를 받지는 않습니다.
그날 이후 로는요“
단호한 표정! 너무나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그는 녹차 잔을 꾸욱 쥐었다.
힘을 너무 준 탓 인가? 아니면 아직도 가슴에 남은 상처로 인해 아픈 탓인가? 그의 손은 작게나마 떨리고 있었다.
“아......., 그럼 왜?”
“그냥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간판이 보이기에......, 사실은 그냥 와봤습니다. 이런 곳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하는 궁금증이 들어서요.”
“아 그러시군요.”
K는 지긋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냥 지나가다 발견하기엔 사무실의 위치는 너무나 외져있었고 더군다나 사무실엔 정확한 명패조차 없는데 그렇지만 이 남자
분명 처음 문을 열고 또박또박 ‘심리치료사 케이의 사무실이 아닌가요?’라고 물어보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의 이 남자는 자신의 인터넷 카페인 '심리치료사 K의 사무실‘에 최근 들어 자주 접속하여 짧은 글들을 남기는 바로 닉네임 ’강철심장‘이라는 것을......,
“그럼 우리 그냥 이야기 해볼까요? 어차피 우리는 서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
그냥 툭 터놓고 이야기 하기에는 좋은 상대인거 같은데,
자! 반갑습니다. 저는 케이라고 하구요.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하는
익명성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어느 한편은 심적으로 불안한 20대 후반의 젊은이입니다.
보시다시피 하루에 한잔이상의 카페인이 없으면 온종일을 소파에서 지내는 게으른 카페인 중독자이기도 합니다.“
K는 커피 잔을 스윽 남자를 향해 들어 보인 후 작지만 두툼한 손을 그를 향해 내밀었다가 이내 자신의 손이 이 결벽증에 가까운 남자의 손을 잡기에는 조금 더러운 것을 발견하고는
카고 바지 뒷주머니에 한번 스윽 하고 닦은 후 그를 향해 다시 손을 내밀었다.
“아! 저, 저는 동서 증권 남부지점에서 일하고 있는 김 재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는, 저는......,“
“이런 머가 그렇게 어려우세요? 제 이야기 좀 더 할까요?
흠 전 가슴에 상처가 아주 많은 사람입니다. 아마 제 가슴에 칼집을 내고 간 여자만 수십 명 그리고 완전히 돌아 갈 수 없도록 인연의 연을 끊어 버린 사람두 수십 명, 근데 그런 칼집들이, 그런 상처들이 패이고 패여서 어느 순간 타인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는 큰 분화구가 되어 버렸더라구요. 지금 여기에요“
K는 청년의 손을 잡은 후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대었다.
“들려요?”
“네?”
“여기 이곳에서 계속 ‘아파! 아파!’하는 소리가 안 들려요? 지금도 제 마음은 여전히 내게 준 다른 사람들의 상처로 인해 비명을 지르고 슬퍼하고 있어요. 그치만 이 아픔이 없다면 이 기억이 없다면 이미 전 제 곁을 떠난 모든 사람들을 잊어 버렸겠죠.
그리고 그 누구의 아픔도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겠죠.
그치만 제 심장은 아직은 사람의 심장으로 뛰고 있거든요. 아직은 피가 흐르고 있거든요.
그들이 남겨준 아픔 덕분에......,
이렇게 아직은 강철심장이 되지 않고 있거든요“
“네?”
K는 일부러 그의 심정을 가장 잘 대변하는 닉네임을 빌어서 문장을 만들어 내었고 순간 그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K는 더욱더 꾸욱 그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밀착 시킨 채 계속 말을 꺼내었다.
“유리는 깨어지면 그뿐이고 보석도 조각나면 그 값어치를 잃어버리지만 세상엔 깨어짐으로 인해서 더욱 아름답게 빛을 발하는 것이 있어요.
사랑은 깨어짐으로 인해 더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 심장은 금이 갈수록 아픔을 간직할 수록 더욱 더 크고 아름다운 무언가를 인생에게 남겨주죠.
그러니 두려워 하지말아요“
“난......, 난 내 심장이 금가는 게 싫어요. 싫다구요.
더 이상 내 심장에 타인이 들어오는 게 싫어요.
나와는 전혀 없는 타인이 들어오는 게 싫다구요. 내 말 알아들어요?
난 타인이 내 사람이 되려는 게 싫다구요“
그가 K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너무 세차게 뿌리쳤는지 그의 굳게 닫힌 쓰리버튼 자켓의 단추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케이는 떨어진 단추 하나를 주워들었다.
“타인? 세상에 완전한 타인은 없어요.
그들은 그저 아직은 나를 만나지 않은 인생에서 나를 만나기 위해 신으로부터의 번호표를
부여받고 태어난 나의 친구중의 하나죠.
그러니 그중 하나가 어느 날 아침 문득 나의 문을 두들겨 내 마음에 들어오고 싶다고
미소를 짓는다면 그것은 큰 축복이죠. 결코 두려워할 무언가는 아니어요.
설혹 이미 내 집을 다녀간 다른 친구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해도 말이죠“
“이런 류의 교회 설교식의 말을 들으러 온 거 아닙니다.
타인으로부터 상처받지 않는 방법. 더 이상 타인을 내 마음에 두지 않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온거라구요. 이런 류 따위의 설교가 필요했다면
그냥 동네 교회나 찾아갔을 거라구요!“
휙! K의 손에서 단추를 되돌려 받은 후 그는 너무도 어색하게 양복셔츠로부터 왼팔목을 길게 꺼내어 뺀 후 타이맥스 시계의 시간을 쳐다보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더 이상은 시간이 없군요! 그럼 이만
참 감사했습니다.”
전혀 감사할 만큼의 마음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문 앞에서 꾸벅하고 인사를 한 후
K의 사무실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역시 이런 허름한 사무실 따위는 찾아오는 게 아니었어, 역시’
그가 떨어진 단추를 정장 상의에 맞춰보고 있을 때 거리에서 누군가 그의 뒤에서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는 고개를 한번 살짝 흔든 후 이내 평정을 찾은 듯한 표정으로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린 사람을 쳐다보기 위해 뒤로 돌았다.
“누구시죠?”
작은 키에 하얀 얼굴 약간의 기미, 왼쪽 팔꿈치에 무언가 커다란 파일과 책들을 끼워놓은 한 여자! 그녀가 그를 향해 웃으며 너무나 친밀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었다.
“저기 형제님 형제님의 머리 위로 수심이 가득합니다. 혹시 귀신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그러시다면 저에게 5분 정도만 시간을 내어주시지 않겠습니까? 형제님의 수심을 덜어드릴 수 있는데......“
‘맙소사! 이 거리에서 너무나 자주 마주쳤던 ’도를 아십니까‘’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어깨에서 떼어낸 후 두 손을 그녀의 뺨에 갖다 대고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의 예기치 못한 행동에 그녀 역시 조금은 놀라운 기색을 보였다.
“오. 이런......, 이런......, 그렇다면
당신 역시 신으로부터 번호표를 부여받아서 온 나의 친구였군요.
오! 오늘은 이런 친구였군요.
오. 친구님 그래 당신은 몇 번의 번호표를 받았나요?
오실 때 친절히 안내는 받으셨나요?
우리는 정말 친구였군요“
그는 두 손에 가득 힘을 주어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머리에 댄 후 연신 머리를 부비어 대며
‘우리는 친구였군요’를 계속 중얼거렸고 그의 그 모습에 그녀와 그녀의 옆에 있던 동료는
미친 놈에게 잘 못 말을 꺼내었다며 서둘러 그의 손을 뿌리 친 후 종종 걸음으로 그의 반대쪽 도로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손을 흔들며 외쳤다.
“ 친구님! 제 가슴에 체 들어오시기도 전에 저를 떠나시는 건가요?
친구님........,
이런 미친 하하“
그가 문을 닫고 나간 그 자리
K는 입안의 반 정도 커피를 머금은 채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가 남긴 녹차! 아직 따뜻해 보이는데 이걸 버려? 아님 마셔?‘
십 몇 초 정도의 고민 후 그는 녹차 잔의 녹차를 반 정도 커피가 머금어져 있는
자신의 입안으로 가득히 몰아넣었다.
커피와 녹차 그 씁쓸한 조화!
전혀 달갑지 않은 그들 둘의 맛에서 K는 이들을 뱉어 버릴까 하다가 이내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자신의 목구멍 속으로 꿀꺽 밀어 넣어버렸다.
‘그래! 무엇이든 익숙치 않은 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