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약속이 많아서 그런지
시간이 몹시 빨리 흘러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방부 시간만 빼고.
제대까지 앞으로 350일여.
알차게 보내보렵니다.
========================= 2006년은 안온다니까 ============================
그녀의 핸드폰 번호를 알아낸 지 3일.
연극이 내일 모레로 다가온 시점에서
난 아직도 그녀에게 문자 한 통 보내질 못하고 있다.
40여 글자밖에 안 들어가는 문자메시지는
나의 애달픈 마음을 전하기에 너무 짧았던 것이다.
......사실 너무 긴지도.
어제 최종점검을 마치고
결전의 날을 대비해 연습을 쉬는 오늘.
간만에 제 시간에 집에 가려 버스 정거장으로 나오니
전철역까지 가는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학생들이
길 막힌 드라군처럼 늘어서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민아한테 문자나 보내볼까.
=지금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혹시 근처에 있다면 같이 가는 게...=
아냐. 이러면 은근히 이쪽으로 오라고
압력을 가하는 것 같잖아.
우선 근처에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
그렇다고 하면 내친김에 같이 가자는 쪽으로....
오케이. 그쪽이 낫겠다.
=지금 어디야?=
.....
=실례지만 지금 어디 있는지 물어봐도...=
......
=혹시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어?=
.......아아아아악!!!!!!
대체 어떻게 써야 한단 말인가...
창작의 고통이란 이런 것이구나...
그렇게 익숙하지도 않은 번호판을 또각 거리며
문자를 썼다 지우기를 십수 번.
길었던 줄은 어느새 줄어들어
다음 버스 정도면 탈 수 있을 정도였다.
..... 이대론 글렀다.
=내일 모레가 공연이네- 집에서도 열심히 준비 해야겠어=
왜....어쩌다 이런 내용이 되어버린 거지?
하아.... 전송.
=빠바바밤빠밤빠바~ 빠바바밤빠밤빠바~=
이, 이놈에게 왜 문자를 보내는데 지가 울려?
전화번호를 찾아 확인버튼을 누르는 순간
갑자기 울린 전화벨 소리에
화들짝 놀라 휴대폰을 떨어트릴 뻔한 난
가까스로 자세를 바로잡고 액정을 확인했다.
=전화 왔습니다.=
누구얏!! 문자 날려먹었잖아~ !!
수백 번의 망설임 끝에 힘들게 보낸 건데~!!!
(당시 휴대폰은 전화가 오면 쓰던 문자가 날아갔다)
나의 힘겨운 첫 도전을
이런 식으로 망처 버린 상대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기에
난 적의가 가득한 낮은 톤으로 전화를 받았다.
기억 - ....예.
?? - ...여, 여보세요?
.... 웬 여자 목소리야?
또 무슨 축하할 만한 일이 터진 건가?
세금으로 39800원만 내면
시가 70만원 상당의 슈퍼 건강식품을 준다거나...
뭐 아무튼, 목소리는 예쁘네.
민아 - 저기......여보세요?
기억 - .......예.
?? - 기억이 휴대폰 아닌가요?
기억 - 맞습니다만.
?? - 뭐야~잘못건 줄 알았잖아. 나 민아.
........ 오우 쒯.
이게 이게 이게 무슨 일이야 이게.
기억 - 아, 예. 어쩐 일로 전화를 다....
민아
- 아니... 그냥 집에 가는 길인데
혹시 시간 맞으면 같이 가려고...
기억 - 그래? 나 지금 셔틀 줄 서있는데...
민아 - 응? 어디쯤이야? 우리 지금 줄 맨 끝에 섰는데.
기억 - 여기가 앞에서 5, 10, 15.... 32번째.
=우리= 라는 말이 못내 신경 쓰이긴 했지만
난 그녀가 오기 전에 버스가 도착할까봐
서둘러 내 위치를 말해주었다.
민아 - 어머나, 잘 됐다. 그리로 갈게~.
=삐리릭.=
그렇게 끝난 그녀와의 첫 통화.
-통화시간 00:56-
1분 가까이 맡은바 기능을 발휘한 핸드폰은
간만에 너무 무리를 했는지
애처롭게 액정을 깜빡거렸다.
휴대폰 = 하얗게 불태웠어...
장하다....자식.
지금 그녀가 이리로 오고 있다.
나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가기 위해...
몇 초 안 되는 기다림이었지만
내 가슴은 설렘으로 가득차왔다.
그리고 그 설렘은
한 순간에 묵직한 쇳덩이가 되어
내 가슴 한 구석에 쿵...하고 떨어졌다.
안군 - 여!
민아와 함께 있는 건 다름아닌 안군.
왜 안군이 민아와 함께 있는 거지?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안군
- 이야.... 나 보자마자 표정이 삭 바뀌는데?
민아 혼자 올 줄 알고 있다가 실망한 거야?
안군의 말에 난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입가와 미간을 어루만졌다.
안군과 둘이 있었다면 별 신경을 안 썼겠지만
그녀에게 내 싫은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민아 - 전화하길 잘 했네. 앉아서 가겠다.
내 반응이 그리 티가 나진 않았는지
생글생글 웃으며 내 옆에 서는 그녀.
기분 같아선 당장
그녀에게 안군과 같이 온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말을 꺼내기가 몹시 껄끄러웠다.
안군이 뒤에 있는 것도 그렇고
=어디야?= =뭐해?= =왜?= 같은 질문들이
내겐 너무나 어색했다.
난 지금껏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삶엔
아무 관심도 없었고
참견 따윈 더더욱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녀에겐 묻고 싶다.
어디서 뭘 했는지, 누구와 함께 있는지...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군 - 그런데 혼자 줄서있던 거야? 친구들은?
지극히 일상적인 안군의 질문이
시비조로 들리는 건 내가 지나친 걸까.
기억 - 보통 혼자 다니는 편이라.....
안군 - 오~ 아웃사이더? 외인구단 뭐 그런 거야?
.... 시비 걸려는 게 맞는 것 같다.
기억 - ..... 그런 거 같네요.
민아와 함께 있는 장소에서
서로 신경전을 벌일 생각은 없었기에
난 적당히 흘리듯 말을 마무리 지었다.
안군
- 흠.... 이거 아무래도 우리가 자리를 잘못 온 거 같은데?
혼자 싹 분위기 잡으면서 가야하는데
방해한 건 아닌지 몰라?
민아 - 오빠도 참....
하지만 순식간에 민아를 끌어들여
대화를 계속 이어가버리는 안군.
사소하다면 사소한 그의 이런 행동 하나 하나가
내겐 몹시 큰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냥 확 받아버릴까.... 라는 생각까지 들 무렵
뒤에서 =끼익-=하는 반가운 마찰음이 들려왔다.
민아 - 아, 버스 왔다.
꾸물꾸물 움직이는 줄을 따라
셔틀버스 안으로 들어갔을 때
빈 자리는 이곳저곳 제법 남아있었지만
문제는 세 명이라는 애매한 머릿수.
기분 같아선 두 명이 앉는 자리에 그녀와 앉고
안군을 다른 곳으로 격리시켜버리고 싶었지만
작전이 잘못될만한 변수가 너무 많았다.
안군이 물귀신 식으로 내 옆에 앉아버린다거나....
민아 - 아, 뒷자리 비었다.
레이디 퍼스트의 율법에 따라
제일 먼저 버스에 올랐던 민아가
뒤에 있는 긴 의자가 아직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쪼르르 안으로 들어가 창가 쪽에 붙어 앉았다.
바로 그녀의 뒤에 따라가고 있던 난
얼씨구나하고 그녀의 옆자리에 붙어 앉았고
맨 끝에 따라오던 안군이 다시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이스 블로킹! 핫핫.
난 생각 밖의 행운에 쾌재를 부르며
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자리를 확보했다.
내가 차지하고 있는 그녀와 안군 사이 거리가
1파섹은 되는 것처럼 든든하기만 했다.
=푸르르둥~부우우웅~.=
어느새 학생들로 꾸역꾸역 들어찬 버스가
조금 힘에 겨운 엔진음을 내며 가속운동을 시작했다.
안군 - 아, 민아야, 연극 준비는 잘 되가?
버스의 출발을 신호삼아 민아에게 말을 거는 안군.
중간에 버티고 있는 나를 피해
몸을 앞으로 내민 그를 보며
버스가 급정차해버렸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아 - 그럼요~. 기대해도 될 걸요?
안군
- 흐음.... 이대론 망칠 것 같다고 징징거린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또 자신만만하네? 믿어도 되는 거야?
민아
- 아하하. 이런저런 일이 많았으니까요.
지금까지 연극부가 연극 준비하면서
액션 감독까지 스카우트한 건 이번이 처음일걸요?
안군
- 아~ 그 김씨....하고 허씨던가?
어디서 데리고 온 거야?
민아 - 어머나, 아시네요?
안군
- 간만에 연습실 나갔다가 깜짝 놀랬잖아..
왠 험상궂게 생긴 사람들이 머리에 붕대까지 감고...
민아
- 아아, 경찰서 갔던 다음날 오셨었구나.
기억이랑 저랑 수업 같이 들으면서
조별 발표준비 했던 사람들이에요.
둘 다 운동 얼마나 잘 하는데요. 얍얍얍 하고~.
사이에 앉아있는 내가 무안할 정도로
멈출 줄 모르는 두 사람의 대화.
갖은 표정을 지어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민아와
슬슬 농을 섞어가며 유창하게 그녀의 말을 받는 안군.
1파섹만 같던 내 공간은 어느새 점점 줄어들어
두 사람사이에 앉아있는 게 버거울 지경이었다.
결국 난 버스가 전철역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도서관 구분벽 마냥 사이에 끼어
중간 중간 =아.= =응. 맞아.= =뭐....그럭저럭.= 따위의
아무 의미 없는 말장구만 쳐댔다.
잠시후, 지하철 역 안.
2호선 특유의 쌍방 승강장에서
민아가 안군에게 물었다.
민아 - 오빠는 어느 쪽으로 가세요?
안군
- 민아 넌 이쪽 편이었지?
유감스럽게도 반대쪽이네.
그냥 삥~ 돌아서 갈까?
어차피 이리가도 저리가도 가긴 가니까...
민아 - 에이.... 또 농담. 전철 왔네요. 저 먼저 들어갈게요~.
안군 - 그래. 연극 기대할거야~.
기억 - 아.... 잘 가.
민아 - 응~ 바바이~.
그렇게 민아가 먼저 전철을 타고 들어간 뒤
나와 안군만이 남은 결코 반갑지 않은 시간이 찾아왔다.
이대로 전철을 타고 계속 갈 걸 생각하면 암담하기만 하지만.....
안군이 민아와 함께 가버린 쪽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인가.
기억 - ....어디까지 가십니까?
안군
- 나? 난 다시 학교로 갈 거야.
차 세워 놓고 왔거든.
기억 - .......
안군 - 뭐, 그렇게 알고. 잘 들어가게나. 파이팅, 응?
내가 뜨아해서 서있는 사이
안군은 특유의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내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고는
개찰구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럼 그렇지.=
그의 생각이 뒷모습을 통해 전해져왔다.
철저히 무시당한 것 같은 참담한 기분.
나도 모르게 꾸욱 쥐어진 오른쪽 주먹을 왼손으로 주무르며
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 빚은 내일 모레 연극에서 꼭 갚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