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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율(礎律) 제 77화

피바다 |2005.11.08 23:24
조회 293 |추천 1

  제 2황자 복주는 채의 제 1황비 책봉을 반대하다 천제의 계략으로 누명을 쓰고 쫓겨난 예전 제 2황비의 아들이었다. 채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던 천제의 아이를 독살하려했다는 누명을 쓰고 그녀는 피눈물을 흘리며 폐위되었고 성 밖으로 끌려나갔다. 그녀가 제 1황비 자리를 얻기 위해 발버둥을 친 것은 바로 아들 복주에게 황위를 물려주려던 계획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지나친 욕심과 질투로 인해 처참한 폐위를 맞이하고 만 것이다. 

  울부짖으며 성 밖으로 끌려나가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복주는 멀어져가는 어머니에게 달려가고자 발버둥을 쳤지만 천제의 엄명으로 그는 신하들에게 붙들려 비통하게 울어댈 뿐이었다. 그렇게 두 모자(母子)는 생이별을 하고 말았다.

  수 십년의 가슴 뜯는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둘은 만날 수 없었다. 복주는 천제가 두려워 어머니에 대한 내색조차 할 수 없었고 폐위된 제 2 황비는 가문에서도 버림 받아 그 행적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상봉하였을때는 제 2 황비가 병마에 시름하다 싸늘한 주검이 된 후였다. 어머니의 창백한 시신 앞에서 복주 황자는 그리움을 참아낸 대가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복주는 황가에서 모두 고개를 내젓는 망나니가 되어버렸다.

  그는 자신의 손에 잡히는 모든 힘과 권력을 이용하여 천지가 경악할 만한 악행을 저질러댔다. 대신들과 귀족들의 탄원이 빗발치고 백성들이 성 문 앞에 엎드려 그의 만행을 고발하며 곡을 하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천제는 눈 한 번 꿈쩍하지 않고 그의 행동거지를 모른 척 할 뿐이었다. 그러니 그의 망나니짓은 점점 그 정도가 심해져갔다.

  후강은 자신보다 한참 어렸던 아우 복주를 수줍음 많고 어머니의 등살에 늘 눈치만 보던 가엾고 심약한 아이로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우울하고 자신감없던 그 아이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놀랄 정도로 딴 사람이 된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후강은 복주 황자가 천제의 이기심이 빚어낸 가여운 희생물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천제는 자신의 만족과 욕구를 위해서라면 누구든 희생시키는 남자였다. 그가 비록 자신의 핏줄이라 하여도. 그래서 후강은 오히려 그런 복주가 늘 가여웠다.

  물론 단 한 번, 복주 황자가 아내인 만(滿)에게 모욕을 주었을 때는 예외였다. 온화하고 점잖으며 천제의 총애를 받고 있고 한때 황태자의 지위에 있었던 후강이었기에 그의 분노는 복주조차도 두려워할 만한 것이었다. 그 뒤로 복주는 절대 후강에게만은 마수를 뻗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후강의 측은함도 더욱 커져만 갔다.

  하지만 관지에게 복주 황자는 기억하기도 싫은 끔찍한 존재일 뿐이었다. 제 2황자의 괴롭힘은 그 대상이 정해진 것이 아니어서 관지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죽은 어머니의 지위인 제 2황비 자리에 관지의 어머니가 책봉된 것에 더욱 악의를 품고 악랄하게 관지를 괴롭혔다. 철이 빨리 들어 나이에 비해 의젓하던 관지는 복주의 어떤 심한 장난거리도 묵묵히 참아냈지만 그럴 수록 오기가 생긴 복주는 갈수록 심하게 관지의 숨통을 조여왔다. 관지는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복주를 상종하기도 싫은 질나쁜 부류로 치를 떨고 있었다. 잠시 관지가 거처를 비워둘 때면 어찌 알았는지 복주는 남몰래 숨어들어와 관지의 소중한 물건들을 망가뜨리거나 훔쳐가기 일수였고 관지를 모시는 신하나 시녀들의 몸과 마음에 잔인한 짓을 해댔다. 관지가 키우던 개가 난도질 당해 만신창이가 된 채 죽었고 그의 천마는 독초를 먹고 거품을 물면서 쓰러졌다. 하지만 관지는 참았다. 참아낼 수 밖에 없었다. 복주의 어머니를 내쫓는데 가문이 앞장섰던 관지의 어머니는 그녀가 물러나고 대신 제 2 황비의 자리에 오른 뒤로 항상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이를 알던 관지는 더더욱 입을 다물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소년기에 접어들며 복주의 만행은 불특정 다수를 향하게 되었고 관지는 그제서야 해방이 되었다. 하지만 복주에 대해서는 이미 넌더리가 나 있었다. 그는 황가에 그런 저질스런 인물이 있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 전하께서 천민 반란군을 응징하고자 성을 떠나 계셨을 때이옵니다."

  후강의 설명에 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그 시기였다. 오랜 시간 천민 반란세력의 뿌리를 뽑고자 긴 여정을 떠나있던 관지가 궁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어이없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것은 복주 황자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무척이나 싫어했었고 점차 커가며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태자의 자리에 오른 후에는 아예 까맣게 잊고 있던 형이었지만 그가 죽어버렸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복주라면 결코 그렇게 비명에 갈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관지는 다시 생각하여 평소 그가 샀던 원한을 생각하면 사필귀정이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치가 떨릴만큼 싫어했던 복주의 죽음따위에는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았다. 한 편으로는 그런 존재따위 없어진 것이 다행이라고도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차차 잊어갔던 제 2황자의 죽음이 다시금 이런 자리에서 화두로 떠 오르게 될 것이라고는 그 때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후강은 계속 말을 이었다.

  "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제 2황자가 여자를 끌고 성 안으로 들어오더군요. 우연히 그 옆을 지나다 본 광경이었습니다. 서로간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황자와 나 사이의 암묵적인 계약이었기에 그냥 지켜만 보았지요. 그 여자...저항하다 지쳤는지 몸에서 힘이 빠져 늘어진 채 군졸들에게 끌려가다시피하였습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소박하면서도 수수한 아름다움이 있는 천민의 여자였습니다. 하지만....그녀가 힘없이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쳤을 때, 저는 전에 없던 불길함 예감에 소름이 돋더군요."

  후강의 얼굴이 안타까운 듯 일그러졌다. 마치 그 때 자신이 무엇인가를 했어야한다는 후회의 얼굴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 쉬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 그 예감을 지나쳐서는 안되었는데....그 때, 제가 나섰더라면 그런 비극은 없었을테지요. 죽음의 예감이 생생하게 저를 지나쳤습니다. 그 여인의 힘없는 눈동자에도, 제 2황자의 등 뒤에서도 죽음의 불길한 색깔이 묻어나 있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냥 두었던거지요."

  후강은 이미 결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여인의 복주황자의 죽음의 시발점이었다.

  " 황자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사건의 전조를 읽어내지요. 하지만 그 누구도 불확실한 예감만으로 미래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운명인 것입니다. "

  제공이 후강의 죄책감을 어루어 만지 듯 따스한 목소리로 그를 위로하고 나섰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추측을 조심스럽게 꺼내어보았다.

  " 그 여자가 제 4황자의 여자였습니까?"

  관지는 놀라지 않았다. 그 여자가 복주 황자를 졸라맨 죽음의 끈이었다면 왠지 그 끈의 반대편에는 반드시 제 4황자가 있을 것만 같았다. 후강은 역시나 고개를 끄덕였다.

  " 생생한 불김함에 저는 안절부절하였습니다. 그런 불안함을 떨치기 위해 저녁 무렵에는 일부러 만을 데리고 성 안을 산책하였지요. 그 때...그가 나타났습니다. "

  관지와 제공이 초조한 눈빛으로 후강을 쳐다보았다. 후강은 그런 그들의 예상에 확신을 주려는 듯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 무시무시한 살기를 주체 못하며 제 4황자가 제 옆을 달려 스쳐지나갔지요. 저는 그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 줄 알았습니다.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되었지요. 서둘러 만에게 이 사실을 아버님께 알리라 당부하고........"

  후강의 생각은 잠시 만에게 미치는 모양이었다. 천한 족속인 인간 여자였던 만. 천제가 사랑하던 큰 아들 후강을 뺏어갔다는 이유로 천제는 그녀를 몹시도 싫어했다. 하지만, 그 때의 다급함은 그런 부분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 저는 힘을 다하여 제 2황자의 궁으로 달렸습니다. 하지만..이미...막아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요."

 

  후강은 그렇게 빨리 달려본 적이 없었다.  눈에 뻔히 보이는 위기 앞에서 자신도 깨닫지 못했던 잠재적인 힘이 솟아나 그의 다리는 놀랄만치 빠르게 자신을 이끌어갔다. 마침내, 제 2황자의 침실 입구에 다다랐다. 하지만 반쯤 열려있는 문을 보면서 그는 자신이 염려하던 일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후강이 지체없이 몸을 날려 들어선 순간이었다. 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의 눈에 바로 들어온 것은 눈부신 조명등과 복주의 팔에서 떨어져내리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지면서 슬프고도 더 없이 아름다운 얼굴로 후강을 쳐다보았다. 아니, 곧 그는 그녀가 자신의 옆에 돌처럼 서 있는 제 4황자를 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후강은 다시 그녀가 입은 흰 옷에 번져가는 피를 발견했다. 그녀의 가슴에 단도가 박히어 그 곳에서 시작되는 피가 그녀의 가슴팍을 적시고 있었다. 새하얀 옷이 빠르게 붉게 변해갔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후강은 피를 흘리는 여인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제 4황자 초율의 슬픈 옛 이야기입니다. 이 부분은 이미 다 써놓은 부분인데 올리는 중 길다싶어 중간에서 자릅니다. 조만간 뒷부분을 올릴게요. ^^ 날씨가 많이도 추워졌지요?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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